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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한 자 (마 5:1-12) – 팔복강해 3

2021년 1월 17일 주일예배 설교 – 팔복 강해 시리즈3

참된 축복을 찾아서 팔복 강의 세 번째 시간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오.”라고 하는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도대체 온유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아마도 그 온유하다고 하는 것은 사람들을 대할 때에 온화한 마음으로, 따뜻한 마음으로, 부드러운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그런 태도를 의미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들에게 참 따뜻하게 대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들에게 잘 대해주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온화하게 이렇게 대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들을 공격하려고 하거나, 무례하게 행동하거나, 우리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방식으로 우리를 대하거나, 불합리한 것을 바라보게 된다고 한다면, 그때는 우리가 온화한 마음으로 대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죄성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언제든지 분노하기 쉽고, 그리고 악한 방법으로 대응하기가 너무나도 쉽습니다.

여러분은 제가 좀 온유한 사람처럼 보입니까? 성질이 더러운 사람처럼 보입니까? 찔러서 대답을 들었는데요. 많은 성도님들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좀 온유하신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해 주시고, 그렇게 좋게 봐주셔서 정말 감사한데요. 제가 온화하게 보이고, 온유하게 보이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성도님들께서 저에게 아주 잘 대해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목사라고 하는 그 이름 하나 때문에, 우리 성도님들께서 저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시고, 아주 온화하게 대우해 주시고, 저에게 잘 대우해 주시기 때문에, 그런 여러분들에게 제가 화낼 이유가 아무것도 없는 것이죠.

하지만 저도 화가 날 만한 상황을 만나게 되면, 분노가 폭발하게 되어 있고, 때로는 너무나도 추한 모습을 쉽게 드러낼 수밖에 없는 그런 연약한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런 경우가 많이 있었고, 지금도 생각해 보면, 그때 분노했던 것 화를 냈던 것이 너무나도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사실 제가 얼마나 나쁜 사람인가를 아는 것은 제 아내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고요. 우리 아이들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속이 너무 좁고, 쉽게 화를 내는 그 적나라한 모습을 우리 아내가 견뎌야만 했었고, 우리 아이들이 견뎌야만 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정말 나이스(nice)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사람들이 나에게 나이스하게 대해줄 때만 가능한 것이고, 그렇지 않을 때는 이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분노가 솟아오르고, 우리들에게서 여러 가지 화가 솟아올라서, 그것이 쉽게 폭발해 버릴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겉으로 볼 때는 아주 근사하고 멋있어 보이지만, 속에는 썩어 문들어져 있는, 구제불능의 상태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야만 했고, 우리를 위하여 피를 흘려 주셔야만 했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온전하게 온유할 수는 없어요.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서 우리의 몸이 완전히 변화되고, 우리의 옛 사람이 완전히 다 바뀌어 버려서, 새로운 몸으로 바뀌기 전까지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한 완벽한 사람이 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문제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포기할 것이 아니라, 온유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그런 과제를 우리들이 받았기 때문에,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가능하면 온유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할 것이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온화하게 부드럽게 대우하고 대응해야 되는, 그런 훈련들을 그런 연습들을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이 거룩한 것처럼, 하나님이 온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온전하라.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아서, 온유한 삶을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과연 온유하라고 하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온유한 마음으로 산다고 하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어떤 손해를 당해도, 그런 손해를 받는 상황 가운데서 그냥 손해 보면서 살아야 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일까요? 사실 이 세상은 너무나도 참 각박해서, 우리가 조금만 나약해 보이거나, 조금만 물러 보이게 된다고 하면, 우리는 금세 피해를 당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내가 강한 것을 보여줘야 하고, 내가 강하게 나가지 아니하면 손해를 보면서 살 수밖에 없는, 그런 세상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데, 그렇게 사람들이 우리들의 권리를 빼앗아 버리고, 우리들의 가족이 위해를 당하는 상황이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상황에서도 그냥 다 당하면서 손해를 보면서 그렇게 살려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이런 말씀을 해 주시는 것일까요?

성경 말씀을 읽다 보면 그래야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5장 40절에서부터 42절의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5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10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주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한마디로 그냥 다 포기하면서, 무저항주의로 살아가라고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그냥 온유한 마음으로 다 포기하고, 다 손해 보고, 다 주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겠습니까?

우리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정말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것은 정말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이해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종교 개혁을 할 당시에 여러 종교개혁의 분파들이 있었는데요. 그 가운데 재세례파라고 하는 분파가 있었습니다. 이 재세례파, 후터파(Hutterites)라고도 하는데 이 사람들은 우리가 산상수훈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지켜야만 한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이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을 해서, 누군가 자신들을 공격하고, 그리고 여러 가지 체포하고 악한 일을 해도, 절대로 저항하지 않으면서, 그 산상수훈의 말씀을 그대로 지키고자 노력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주 유명한 일화인데요. 종교개혁 당시에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카톨릭 정권이 종교개혁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쫓아가서 체포하고 잡아서 사형을 시키고 했었는데, 그 카톨릭 군인들의 칼을 피해서 도망다니고 이렇게 도망다니다가, 그 군인들이 와서 체포하게 되면 그냥 순순히 다 체포를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 체포하러 온 사람이 다치면, 도망가다가 다시 돌아와서 그 사람을 치료해 주고, 그리고 그 사람이 결국 잡아서 그 사람을 죽였지만, 그런데도 그냥 당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온유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는 이 말씀은, 그러니까 우리도 이 세상에 살면서 그렇게 다 당하면서, 다 손해 보면서, 다 포기하면서, 절대로 악을 갚지 말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겠습니까? 나에게 대해서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또는 악의적인 말로 내 명예를 훼손하고 있는데도, 그냥 모른 척하고 지나가야 한다고 하는 말일까요? 어떤 사람이 내게 와서 내 것을 빼앗아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냥 빼앗아가도록 그냥 내버려 두어야만 하는 것일까요? 내 돈을 빌려간 사람이 갚지 않고, 그리고 또 갚을 생각이 없는데도 그냥 내버려 둬야 하는 것일까요? 내가 월세나 전세로 들어가기 위해서 보증금을 냈는데, 그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고 계속해서 돈이 줄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지 않는 그런 사람이 있어도, 그냥 기다리기만 할 뿐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것일까요? 어떤 도둑이 들어와서 내 것을 훔쳐가거나, 그렇게 해도, 마치 장발장이 장발장에게 은촛대를 주었던 마리엘 신부처럼, 그냥 여유롭게 다 주면서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요?

먼저 답을 드린다고 한다면, 결코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강도가 와서 빼앗고 나쁜 사람이 와서 내게 손해를 입히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그냥 다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한 채, 다 모든 손해를 다 받아야만 한다고 말씀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냥 우리가 크리스천이라고 해서, 모든 것 다 빼앗겨 버리고, 손해를 그냥 다 감수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릴 씀은 없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살아가는 가운데 때때로 손해 보는 선택을 할 수가 있습니다. 자비와 긍휼을 베푸는 선택을 할 수가 있는 것이고, 그럴 때에는 정말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복음을 전하는 데 아주 효과적일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손양원 목사님과 같은 경우가 그렇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자신의 두 아들 동인이와 동신이를 죽였던 그 범인에게 뛰어가 달려들어서, “이 나쁜 놈. 아, 이 죽일놈아, 내 아들 살려내라.”고 하면서 그렇게 그 사람에게 달려든 것이 아니라, 온유한 마음으로 용서하고, 오히려 그 사람을 자신의 양아들로 삼아서, 그 사람의 마음에게 엄청난 영적인 충격을 주었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하는 이름을 들을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가 있었습니다.

이런 일들이 손양원 목사님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실은 제가 미국에 살 때 들었던 어떤 한국 사람의 이야기도 참 아주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1958년도에 있었던 일인데요.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6.25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그때에, 오인호라고 하는 26살짜리 청년이 필라델피아로 유학을 오게 됐습니다. 그 낯선 땅에 유학을 온 오인호라고 하는 학생이 어느 날 밤 고국에 있는 부모님에게 편지를 써서, 그 편지를 붙이기 위해서 우체국으로 가는 길 도중에, 11명의 흑인 청소년들을 만나게 됐습니다. 그리고 흑인 청소년들은 그 오인호를 때리기 시작했고, 돈을 빼앗아 버렸는데 결국 그것으로 인해서 그 학생이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댄스 파티에 들어갈 수 있는 입장료 35센트, 우리 돈으로 약 350원에서 400원 정도 하는 그 돈을 빼앗기 위해서, 물론 지금의 돈이 아니라 1958년도의 돈이니까 꽤 값어치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그렇게 해서 사람을 강도질해서 사람을 죽였고, 결국 그 사람들이 잡혀서 결국 그 가운데서 3명은 살인죄로 기소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얼마 뒤에 그 오인호라고 하는 학생의 아버지가 한국에서 필라델피아 시장 앞으로 편지를 보냈습니다. 당시 부산 영도교회의 장로님으로 시무하던 오기병 장로님이라고 하시는 분이 필라델피아 시장에게 편지를 써 보낸 겁니다. 그러면서 그 편지 안에 기록하기를 뭐라고 썼냐면, 저는 이 피해를 당한 아들 죽임을 당한 아들의 아버지인데, 가해자에게 법이 허용하는 한 최대한의 관용을 베풀어 주실 것을 청원한다고 그 편지에 썼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안에는 500불을 동봉했는데, 가족들이 모금한 돈이라고 하면서, 지금으로 치면 60만 원 정도 되겠지만 그 당시에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라고 생각이 되는데, 이 500불을 저들의 가해자들의 장학금으로 사용해 달라고, 교육적 빈곤이 저들로 하여금 저런 일들을 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하면서, 그 편지를 보내주게 되었을 때에, 필라델피아의 그 모든 사람들이 그 소식을 듣고 엄청난 충격에 빠지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악으로 악을 갚지 않고, 온유한 마음으로 사랑을 베풀며 사람들을 대하게 될 때, 그 영적인 파워는 어마어마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정말 우리도 이런 식으로만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정말 모든 일들을 만났을 때, 우리가 모든 손해를 다 지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성경은 꼭 그렇게만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정의를 회복하는 것도 아주 중요한 한 측면이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누구의 것을 손해를 입혔다고 한다면, 그냥 유야무야한 것으로 끝낼 것이 아니라, 적절하게 보상을 해줄 것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고, 구약의 경우에는 장로님들 앞에 가서 이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한 시시비비를 가려서 그것을 바르게 공의를 회복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가르쳐주고 있는데, 구약 시대에 장로들 앞에 갔다고 하는 것은 오늘날 판사들 앞에 가서 시시비비를 가려서 모든 것들을 바로잡으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으로 이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자동차 사고가 나는데요. 그러면 그냥 끝내버리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보험 처리를 통해서 손해를 원상 회복시켜주는 것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여러 가지 손해가 있다고 한다면, 적절한 방법을 통해서 그 손해를 회복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만일 명예훼손에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는 명예훼손에 대한 적절한 보상과 회복이 이루어져야 되는 것이는 것이지, 크리스찬이라고 해서 다 마냥 손해만 보고, 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아무 무기력하게 그렇게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 보증금 혹은 채무를 갚지 않는다고 한다면, 법의 힘을 빌어서라도 그것을 해결할 필요가 있겠고, 도둑이 들어온다고 하면 경찰의 힘을 빌어서 그 문제들을 해결할 필요도 있을 것입니다. 온유한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는 그 말씀은 제세래파가 이해한 것처럼, 그냥 무저항주의로 살면서 적군이 쳐들어와도 그냥 죽임을 당해도 괜찮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닙니다. 칼빈이나 루터 같은 경우에는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고, 그러한 경우에는 우리가 적당하게 전쟁을 할 수도 있고, 또한 우리들의 문제들을 해결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정의를 추구할 때, 보통 정의를 추구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분노하게 되고 화를 내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죄성이 너무나도 많이 있어서,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여러 가지 불합리한 일을 보게 된다고 한다면, 분노하고 화를 내기가 너무나도 쉽습니다. 하지만 정의를 추구하는 것, 그리고 모든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는 것은 가능한 일이고 바람직한 것이겠지만, 그것을 이루는 과정 가운데서 분노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고 온유한 방법으로 추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양극단으로 흐르게 되는가? 우리는 정의를 추구한다고 하면서, 분노해버리거나, 아니면 우리는 온유함을 추구한다고 하면서 무기력한 삶을 사는 등, 양극단으로 흐를 가능성이 많이 있어요. 그게 아니라 삐뚤어진 것은 바로잡고, 망가져버린 것은, 일그러진 것은 바로 회복시키는 것이 필요하지만, 그 방법에 있어서는 우리가 온유한 방법을 사용해야 되는 것이고, 적어도 우리들의 감정을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온화한 태도를 유지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그게 온유한 마음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1부 때 설교를 했더니 반응이 금방 왔어요. 예수님도 성전을 뒤엎으면서 화를 내셨지 않았나요? 우리가 예수님처럼 죄 분노가 죄로 바뀌지 않으면서, 우리의 그 심령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모습으로 드러나지 않으면서, 화를 낼 수 있다고 한다면, 분노할 수 있겠지만, 사실은 우리들은 그것을 조정할 능력이 없습니다. 오로지 화를 내면서도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는 것이고, 우리는 정의를 추구한다고 하는 그 미명 하에서, 우리는 분노하면서 죄를 지을 가능성이 훨씬 더 많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 한국의 크리스찬들은 온유함을 잃어버리고 모두가 다 싸움닭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불신자들이 우리 성도님들을 바라보면 크리스찬들을 바라보면 “참 온화한 사람들이구나. 온유한 사람들이구나.”라고 보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싸울려 들고, 화를 내기 좋아하는 그런 싸움 닭으로 변해버린 크리스찬의 모습이 어쩌면 오늘날 우리 한국 성도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는 왜 싸움 닭으로 바뀌어 버립니까? 왜 우리는 온유하지 못하고 분노하고 화를 내는 사람들로 바뀌어 버렸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정당하다고 생각되는 그 순간 우리는 악마로 변해버리기가 쉽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최근에 우리 사회를 아주 힘들게 만든 충격으로 말하는 정인이의 사건만 해도 그렇습니다. 제가 모든 정보를 다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정확하게 아는 것도 아니고, 정보가 아무것도 없습니다마는, 그러나 그 부모가 정인이를 처음부터 죽이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그것은 아닐 거라고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아이의 울음을 고쳐야 되겠다고 하는 그 마음, 이것을 바로잡아야 되겠다고 하는 그런 것들이, 결국은 포악한 모습으로 점점점점 발전해 나갈 가능성이 있는 겁니다.

조X순이라고 하는 사람이 출소해서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그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탄 차량을 향해서 계란을 던지고, 그가 찬 차를 부수기도 하고,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했는데, 그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생각이 무엇이냐 하면, 범죄자에 대해서는 내가 화를 내도 정당하고, 때려도 괜찮고, 무슨 일을 해도 괜찮다고 하는 그런 잘못된 확신 가운데 들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미국에서 트럼프 지지자들이 의회 의사당을 점거하는 일들이 발생했는데, 왜 그런 일들이 발생합니까? 그들의 생각 가운데는 선거를 도둑맞았다고 생각하고, 그러한 불의 앞에서 어떤 폭력을 써도 정당하다고 하는 그런 잘못된 확신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날 방역 당국이 하는 그 모든 일들을 보면 불합리한 것이 참 많아요. 8제곱미터당 한 명씩 일반 업체에는 허용하면서도, 교회에 대해서는 유난히 더 모진 잣대를 들이미는 그런 방역 당국을 보면서 우리 크리스천들이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항의하기 시작하고, 소리를 지르고, 고함을 지는 일들이 왜 일어나는가? 나는 신앙의 자유를 수호하겠다고 하는 정당한 생각이 든다고 한다면, 순교자교적인 각오를 가지고 분노해도 괜찮다고 하는 그런 잘못된 생각들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내가 옳다고 생각되는 그 순간 우리는 예수님처럼 죄 짓지 아니하면서 분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쉽게 악마적이 되어 버리는 것이 그래서 교회를 위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죄를 더 많이 짓고 분노하고 있는 그런 모습들이 우리들 가운데 있는 것인데, 성경은 그렇게 분노하는 삶이 옳은 것이 아니라, 온유한 마음으로 살아가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온유함을 회복해야 하는데요. 우리는 온유함을 가질 수가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날마다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자신의 그 더러운 죄성을 주님 앞에 내어놓고, “주님,” 내가 화를 낼 때마다 온유한 모습을 보이지 못할 때마다,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면서, 그리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 저를 바꾸어 주셔서,” 온유한 심정으로 바꾸어 달라고 기도하며 나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 기도할 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온유해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하셔야 합니다. 저도 화를 참 잘 내는 사람인데요. 그래서 제가 어느 날 아내에게 말을 했습니다. “여보, 내가 또 화를 내게 된다고 하면, 그때 나에게 신호를 좀 주면 좋겠다고, ‘또 화내네요.’ 말 한마디만 해주라고, 그러면 내가 화내다가 나 자신의 모습을 보고, 거기서 멈칫하고, 화내지 않도록, 내가 화내려고 할 때, 같이 나와 싸우려고 하지 말고, ‘여보, 지금 화가 많이 났네요.’라고 얘기해 주면, 그러면 그때 내가 멈춰 서서 내 모습을 돌아보겠다.”고 부탁을 했고, 어느 정도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부부는 어떤 존재입니까? 서로의 연약함을 감싸주고, 또 점점 영적으로 성숙해져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관계입니다. 따라서 만일 분노의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아내에게 부탁하셔야 돼요. 남편에게 부탁하셔야 돼요. 내가 죄성으로 인해서, 나도 모르게 컨트롤하지 못하고, 분노가 치밀어 솟아 오를 때, 그냥 내버려 두지 말고, “여보, 화가 난 모양이네요.” 한마디 해주면, 그러면 그 순간에 “아, 내가 화가 났었구나.” 생각하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설 수 있고, 내 마음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 필요한 것이죠.

그리고 우리 자녀들에게도 이야기해야 되는 건, “내가 만일 너희들의 잘못을 보고 분노하기 시작하게 된다고 하면,” 우리 자녀들에게 부탁해서 “얘야, 나도 죄성이 많은 사람이고, 늘 넘어지기 쉬운 사람이라. 내가 분노하게 될 때, 너희들이 ‘아빠, 아빠가 화가 났는데, 나중에 화가 나지 않았을 때, 얘기해 주면 어떨까요? 나에게 그렇게 말해 달라.”고 부탁함으로써, 우리는 온유한 연습을 해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가장 사랑해야 될 사람을 향해서 온유하지 못해요. 그런데 화내고 분노하기 시작하면, 나도 힘들고 그것을 당하는 사람도 힘들고, 모든 가족이 다 힘들고 괴로워 죽을 수밖에 없는 그 결과가 뻔한 그것을, 우리의 죄성이 너무나도 커서 그런 일들을 하게 될 때, 정말 가정이 깨어져 나가버리고 마는데, 우리 가족들에게 부탁을 해야 되고, 또한 직장에서도 부탁을 해야 할 것입니다. 나를 도와주고 있는 그 직원들을 향해서, 내가 갑질을 하고 싶지 않고, 화내고 싶지 않은데, 때로는 내 마음 가운데 분노가 일어나서 내가 스스로 컨트롤 할 수 없을 때, 내가 그것을 깨닫고 멈출 수 있도록 한 마디만 해주면, 내가 정신을 차리고 뒤로 물러서겠노라고 하면서,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부탁을 해야 할 것이고, 또 날마다 날마다 주님 앞에 엎드리는 가운데, 온유함의 훈련을 해나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정말 온유한 사람은 땅을 받게 되는 것일까요? 정말 온유한 삶을 살게 된다고 하면, 땅 부자가 된다고 하는 말씀일까요? 성경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하시는 분이라고 할지라도 이 말씀은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제가 지난 한 주간 동안에 페이스북에다가 질문을 던졌어요. “도대체 온유한 사람이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요?”라고 질문을 던졌는데, 댓글을 단 사람들 가운데, 그 누구도 진짜로 땅을 받을 게 될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땅을 받는다고 하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하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단어는 “클레로노메오”라고 하는 헬라어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총 18번 사용되었는데, 그 18번 사용된 것에 대부분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유산을 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대체로 무엇을 받는 것인가? 영생을 받는다. 구원을 받는다. 하나님의 나라를 받는다고 할 때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마도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는 말씀은 이 세상에서 땅 부자가 될 거라고 하는 것을 가르키는 말씀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해 주신 그 구원의 축복을 받는 것이고, 영생의 축복에 참여한다고 하는 의미에서 이것을 말씀해 주신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땅을 차지하는 것은 곧 주권을 가진다고 하는 의미인 것이고, 땅에 대한 주권을 가진다고 하는 의미인 것이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주권을 가진 자가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로 이해할 수가 있을 겁니다.

그런데 아마도 이렇게 표현한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사실 팔복에 나오는 모든 복이 같은 복을 다르게 표현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이오.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오.”라고 한 말씀이나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받을 것임이오”라고 한 말씀이든, 아무튼 복으로 나온 그 모든 내용들이 사실은 같은 내용을 이 측면에서 저 측면에서 다 표현한 표현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특별히 온유한 자에게는 다른 표현이 아닌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하는 그런 표현을 썼는가? 왜냐하면 우리의 생각 가운데 온유했다가는 아무것도 못 얻을 것이다. 온유하면 다 빼앗기고 살 것이다. 온유하면 완전 망하게 될 것이다. 온유하면 정말 거지로 살게 될 거라고 하는 그런 심정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을 향해서, 그게 아니라, 온유하면 망하는 게 아니라, 온유하면 거지로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다 뺏기고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온유한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넘칠 것이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이 말씀을 해주시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사실은 우리는 하나님의 엄청난 심판을 받아야만 마땅한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향해서 온유해 주셨어요. 하나님께선 우리들을 향해서 그 마음을 부드럽게 하셨어요.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향해서는 온유함을 내비치지 않으시고,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죽게 만드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런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우리들이 받았다고 한다면,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에 주님의 성품을 본받기 위하여, 날마다 날마다 기도하며 주 앞에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주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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