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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이유, 기도의 제목(엡 1:15-23)

바울 사도가 감옥에 있으면서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쓴 편지가 에베소서라고 알려 드렸습니다. 이 에베소서를 쓰면서 바울 사도는 무엇보다도 제일 먼저 표현한 것이 있는데, 하나님을 찬양하자, 하나님을 찬양하자라고 하는 내용을 썼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 감옥에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좋은 상황이 아니에요. 힘들고 어려운 상황인데 그 상황 가운데서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했던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바울 사도는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 찬양한 이유가 무엇이죠? 지금 바로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보면서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만세 전부터, 창세 전에 우리를 선택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찬송이 가능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도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무리 깊은 나락에 떨어져도,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앞에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본다고 한다면 힘이 솟아오르고 감사가 솟아오르고 찬양이 솟아 나오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은 바로 그다음에 있는 15절에서부터 23절까지의 말씀을 살펴보게 되었는데요. 오늘 15절에서 23절의 말씀도 굉장히 복잡하고 내용을 이해하기가 어렵고 여러 가지로 참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구절이긴 하지만, 이 가운데서 전해 주고 있는 메시지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무엇이냐 하면 감사한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회를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15절에서부터 16절까지의 말씀 가운데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내가 기도할 때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한다.” 그렇게 표현한 것이죠.

바울 사도는 감옥에 있으면서 저 에베소에 있는 교회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저 에베소에 있는 교회들을 생각하면서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에베소에 있는 교회들을 생각하면서, 그 교회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늘 감사합니다”라고 하는 그런 고백을 하게 되었는데, 바울 사도가 이렇게 에베소 교회를 생각하면서 감사했다고 하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에베소 교회가 지금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 중에서 가장 거대하고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하는 그런 대단한 규모의 교회가 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에베소 교회에 있는 사람들의 구성원들이 고위 관료들이 많이 나오고 판검사가 많이 나오고 엄청난 비즈니스를 통해서 많은 돈을 벌고 있는 부자들이 많은 그런 교회이기 때문에 감사한 것이 아닙니다. 그 교회에 있는 성도들의 자녀들이 좋은 대학에 가고 일들이 잘 풀리고 이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그런 조건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감사한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교회가 에베소 교회였을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당시 에베소 교회는 어떤 상황에 있었는가?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굉장히 힘들고 어려운 상태 가운데 있었습니다. 안으로는 신앙적인 갈등이 많이 있었고, 교회 안에 여러 가지 잡음들이 있었고 힘들고 어려운 모습들이 많이 보이고 있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외적으로는 사람들이 핍박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기에 좋은 여건 가운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로마 황제를 숭배하지 않는다고 해서 온갖 비난과 조롱이 신앙생활 하기 어려운 조건 가운데 겨우겨우 믿음을 유지하면서 그렇게 신앙생활을 해 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에베소 교회의 상황이 좋은 교회의 상황이었는가 하면 우리 교회가 훨씬 더 형편이 좋은 것 같아요. 하지만 그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바라보면서 바울 사도는 괴로워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감사했습니다. 감사한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보면 에베소 성도들의 믿음을 보면서 감사하고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사랑을 보면서 감사했다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보실까요? 하나님께서는 외모를 보는 것이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시죠. 그 옛날 사무엘 선지자를 이새의 집안에 보내면서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두 번째 왕을 위해 기름을 부으라고 명령하실 때 그 앞에 제일 먼저 나타난 사람은 이새의 첫째 아들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얼굴을 보니까 너무나도 멋있어 보이고 건장하고 너무나도 화려해 보이기 때문에 사무엘은 그 이새의 아들 엘리압을 보고서 마음이 끌렸어요. 이 사람이야말로 이스라엘을 인도할 만한 그런 사람이 맞구나. 이 사람을 세우면 되겠구나. 그 겉모습을 보고 너무나도 좋아했던 것이죠. 하지만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사무엘 선지자에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니다. 이 사람이 아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그 화려한 모습을 가지고 있던 그 엘리압과 다른 아들들을 하나님께서는 다 물리치시고 누구를 선택하셨는가? 저 들판에서 양을 치던 소년 목동. 겉으로 보기에는 볼품이 없고 아버지가 볼 때에도 “그 아이는 양이나 치는 아이입니다. 목자입니다. 지금 양이나 돌보고 있는 아이입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그 다윗을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셔서 이스라엘 민족의 두 번째 왕으로 세우셨던 것처럼, 바울 사도는 무엇을 바라보았는가? 에베소 교회의 화려함이 없다고 하는 것을 본 것이 아니라 그들이 믿음을 가지고 있고 사랑으로 성도를 서로 대하고 있는 그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했다고 하는 이 말씀을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회를 위해서 수고를 많이 했고, 거기서 복음을 전해서 교회가 탄생할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었는데요.

계속해서 그 교회를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이 에베소 교회는 어떤 모습을 보여주었는가? 여러 가지 힘들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키고 그 믿음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성도들의 모습을 볼 때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기 때문에 감사하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믿음을 지킨다고 하는 것이 쉬운 일일까요? 어려운 일일까요? 굉장히 쉽지 않은 일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산다고 하는 것, 믿음이 있지만 그 믿음은 언제든지 흔들릴 수 있는 게 믿음이에요. 한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았지만 그러나 조그마한 자극이 있으면 그 믿음을 다 잃어버리기가 쉬운 것이죠. 보면 “저 사람은 정말 대단한 믿음을 가지고 있구나” 생각되는 사람인데 누가 지나가면서 한마디 툭 던지고 지나가면 그 믿음이 싹 꺼져 버려요.

누가 나한테 한마디 말하고 누가 나한테 눈 한번 흘리고 누가 나한테 손 한번 내밀지 않으면 그 믿음이 완전히 무너져 버릴 수밖에 없는 게 우리들의 연약한 모습이기 때문에 참 믿음을 간직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어려운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서 모든 사람들이 다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는 믿음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 것을 경고해 주셨습니다.

씨를 뿌렸을 때 그 씨가 길가에 떨어져 새들이 바로 먹어 버리는 그런 경우도 있고, 또 어떤 경우는 뿌리가 자라는 것 같고 싹이 나는 것 같았는데 햇볕이 내리쬐는 그 순간에 다 말라 비틀어져 버려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그런 아무런 열매가 없는 그런 믿음이 있고, 또 어떤 씨앗은 자라는 것 같았지만 가시나무의 그 기운이 막혀서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되는 등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항상 좋은 열매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 사람들의 말 한마디에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믿음을 잃어버리기가 쉬운 게 그게 우리의 믿음의 상태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잘 압니다. 믿음을 갖기 어려운 것, 유지하기 어려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탄이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어떻게 하면 빼앗아 갈까, 어떻게 하면 없애 버릴까 사탄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데요. 이런 사탄의 밥이 되기 쉬운 사람이 누구일까요? 어떤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믿음을 잃어버리기가 쉬울까요?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이 믿음을 잃어버리기가 더 쉬운가요? 편안하고 행복할 때 일이 잘 풀리고 있는 사람이 믿음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더 많은가요? 이쪽이 많습니까? 이쪽이 많습니까? 둘 다 많습니다. 이 세상에 안전지대가 없어요. 면역이 돼서 더 이상 아무런 위험이 없이 믿음을 그대로 잘 간직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누가 더 쉽게 믿음을 잃어버릴 수 있겠습니까? 평신도 상태에 있는 사람이 믿음을 잃어버리기가 쉽겠습니까? 성직자로 간 사람들이 믿음을 잃어버리기가 더 쉽겠습니까? 둘 다 쉬워요. 어렸을 때 믿음을 잃어버리기가 쉽습니까? 어른이 되었을 때 믿음을 잃어버리기가 쉽습니까? 둘 다 쉬워요.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는다고 한다면 우리는 어느 순간에 믿음을 잃어버리기가 쉬운 상태에 있다고 하는 것을 기억하면서 이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믿음을 지키고 있었던 이것을 보고 감사했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원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우리도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2025년 작년에도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 해 오는 가운데 얼마나 많은 유혹들이 있었습니까? 시험들이 있었습니까? 우리를 무너뜨려서 신앙생활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한 사탄의 시도들이, 그런 시도들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경험이 전혀 없었나요? 아마 있었을 거예요. “야 나 다 때려치우고 싶다.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그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 열정적으로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그런 마음들이 드는 일들이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2026년 우리가 시작되었는데 2026년은 평탄하고 믿음을 잘 지킬 수 있는 그런 세월이 계속 지속될 것인가? 아니에요.

지금 순간순간마다 우리의 믿음을 무너뜨리기 위한 사탄의 유혹들이 있는 것인데, 심지어 예수님을 향해서 달려와서 세 가지 시험으로 예수님을 무너뜨리게 하려고 시도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들의 삶 가운데도 우리의 믿음을 무너뜨리기 위한 사탄의 시도들이 많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매 순간순간 우리의 믿음이 없어지지 아니하도록 늘 기도하고 깨어 있으며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될 줄로 믿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어떤 상태였는가? 아주 힘들고 어려운 상태였습니다. 그 상황 가운데서 믿음을 잃어버리기가 쉬웠고, 그 시험 때문에 에베소 교회 상황들은 더 이상 주님을 믿지 못하겠다고 포기할 수도 있는 상황 가운데 있었지만 놀랍게도 그 고난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키고 신앙생활 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 앞에 감사했던 것이죠.

뿐만 아니라 감사한 내용이 또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 에베소 교인들의 믿음이 사랑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감사한 것입니다. 15절 말씀 한번 다시 보겠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믿음과 사랑은 뗄 수가 없어요. 믿음이 있다고 한다면 무엇이 나와야 돼요? 사랑이 나와야 돼요. 내가 믿음이 있노라 하고 사랑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가운데 미움이 있고 증오가 있고 혐오가 있고 다른 사람들을 향한 어떤 악한 마음을 내가 품고 있다고 한다면 그 믿음이 제대로 된 믿음이 아닐 가능성이 많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떻게 나타나야 되는가?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믿음이 있다고 한다면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믿음이 표현되어야 그 믿음이 제대로 된 믿음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이 세상에 사람들이 보고 감탄할 것을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말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모습으로 우리의 마음들이 바뀌어 나가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십니까? 우리가 믿음이 있고 그 믿음에 따라 사랑하는 것, 주님을 닮아가는 것을 주님께서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목표가 무엇이 되어야 되는가? 하나님께서 내가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가? 지금 이 순간에 내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지금 이 순간에 내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사랑의 능력이 나타나는, 사랑의 수고가 나타나는 그런 모습들이 우리들의 삶 가운데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지금 창세기의 말씀을 통독하고 있는 가운데 있는데요. 창세기 말씀 가운데 요셉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많은 도전을 받습니다. 요셉이라고 하는 인물의 모습을 본다고 한다면 그는 어느 위치에까지 떨어졌습니까?

이런 위치까지 떨어진 거예요. 나락으로 떨어진 거예요. 나락으로 감옥에 갇혀 버립니다. 노예가 돼 버립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볼 때 그 요셉을 보고 누가 부러워하겠어요? 노예가 된 사람을 누가 부러워하겠습니까? 감옥에 처박힌 사람을 누가 부러워하겠습니까? 하지만 놀랍게도 요셉은 어떠했는가? 그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을 신뢰했어요. 하나님을 믿었어요. “하나님이 나를 이곳에 보내셨구나,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이곳에서 일하게 하시는구나” 믿었고, 하나님과 함께 동행함으로 말미암아 그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며 은혜를 베풀며 그가 있는 곳마다 사랑이 넘쳐나고, 그가 있는 곳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그런 놀라운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가 나타난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되는가 어디에 집중해야 되는가 매 순간순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믿음을 내가 가져야 되겠구나.

흔들리는 믿음이 아니라 사람들이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내 믿음이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떠한 풍랑이 일어도 그 어떠한 시험이 닥쳐도 내 믿음을 빼앗아가 버리기 위한 사탄이, 이런 사람을 사용하여 저런 사람을 사용하여 우리의 믿음을 빼앗아가 버리기 위한 시도들이 있을 때, 그때 우리의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를 사랑하사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바라보며 믿음을 끝까지 유지해야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 에베소 교회가 끝까지 믿음과 사랑을 잘 지켰을까요? 안타깝게도 그렇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4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책망하시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바울 사도가 에베소서를 쓸 때가 언제냐 하면 주후 50년 전후 그 어간에 에베소서를 썼을 것이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그때는 그들이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들이 에베소 교회였는데 그로부터 대략 한 30년 뒤에 요한계시록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냐면 “너희가 처음 사랑을 버렸다”라고 진단하고 있는 겁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의 이 믿음은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 번 마음이 뜨겁고 한 번 내가 주님의 은혜를 받으면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돼요? 계속 그 믿음을 유지해야 돼요. 그 믿음 그 사랑을 계속 간직해야 돼요. 한때 은혜받고 한때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나도 기뻐했고 감사했고 그러면 다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돼요? 계속 그 믿음이 유지될 수 있도록 그 믿음을 계속 우리가 유지하지 아니하면 결국 사라질 수밖에 없다고 하는 걸 기억해야 되는 것이죠. 불태우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저희 집에서 이렇게 드럼통에다가 나뭇잎 같은 걸 놓고 태우려고 한다면 불을 한 번 붙이면 불이 어느 정도 붙는 것 같다가 그냥 내버려 두면 그냥 꺼져 버려요. 어떻게 해야 돼요? 선풍기를 돌려서 바람도 불어넣어 줘야 되고 계속해서 종이도 집어넣고 나무도 집어넣고 계속해서 집어넣지 아니하면 금세 불이 꺼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 뜨거우면, 지난주에 사경회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한다면 그 뜨거운 것을 그냥 내버려 두면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을 유지하고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는가 매 순간순간마다 우리의 믿음이 식어지지 않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널뛰기를 잘하는가. 엘리야 선지자는 바알 선지자들과의 대결 속에서 승리하는 그런 엄청난 승리를 맛보고도 불과 얼마 되지 아니하여서 영적인 침체에 빠져 버려서 “하나님 이제는 더 이상 못하겠습니다” 그런 고백이 나오는 정도로 급격하게 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늘 말씀을 묵상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늘 기도의 자리로 나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늘 주님을 찬양하는 자리로 나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왜 우리가 매일 예배를 드려야 됩니까? 매주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 앞에 나와 엎드려야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만두면 하나님 앞에 늘 나오지 아니하면 우리의 믿음이 없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매 순간순간 주님 앞에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묵상하시면서 예배하는 가운데 기도하는 가운데 믿음을 지켜 나가야 합니다.

두 번째로 바울 사도는 기도하는 기도의 제목이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에베소 교회를 생각하면서 기도한 기도의 제목이 있는데, 그 기도의 제목이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은 에베소 교회가 정말 어마어마한 규모로 불어나고 정말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그런 대단한 모습의 교회가 되는 것을 위해서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무슨 기도를 했는가? 에베소서 1장 17절에서 19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을 좀 더 알았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알아서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 하나님을 더 많이 알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하는 게 바울 사도의 기도의 제목이었습니다.

좋은 대학 잘 가게 해달라, 그게 기도의 제목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모습을 가져라, 그게 기도의 제목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더 하나님을 더 알아갈 수 있는가 더 많이 하나님을 알아가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고 있다고 하는 점에 주목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도 바로 이것이에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에요.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죠. 그래서 호세아서 6장 6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이스라엘 민족이 번제를 들고 왔어요. 희생 제사를 드리고 왔어요. 더 멋진 제물로 더 멋진 제물들을 하나님 앞에 바치면서 “이거면 되지 않았겠는가” 생각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이냐면 너희가 나를 더 잘 알았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내가 번제보다도 인애와 자비와 긍휼을 원한다고 하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고, 하나님의 성품이 어떠한 성품을 가지고 있는지 하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하나님에 대해서 더 많이 알았으면 좋겠다, 그게 하나님께서 가장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에서도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영생이 무엇인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아는 게 영생이에요.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아는 것이 그게 목표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우리가 간절히 소망해야 될 것이 무엇인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다 없애버리라는 얘기는 아니고 그러나 무엇보다도 더 중요하게 여겨야 될 것이 무엇인가 내가 하나님을 더 알아갈 수 있게 되는 것, 그게 우리의 소망이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더 많이 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신학교에 가면 좋을까요? 헬라어 공부하고 히브리어 공부하고 더 많이 배우면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일까요? 종종 어떤 분들은 주님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싶다고 해서 신학교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물론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알 수 있게는 되겠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더 잘 아는 것은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에 실패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제사장들, 레위인들 하나님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해야 되는지,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방식으로 섬겨야 되는지 전문가가 되어 버렸던 제사장이나 그런 레위인들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면서도 그냥 지나쳐 버렸어요.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지나쳐 버린 거죠. 하나님을 아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지식적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아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필요 없다고 하는 말이 아니에요.

필요하긴 해요.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연구해야 되고 성경을 더 많이 알아야 되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더 많이 연구해야 될 필요가 있겠지만 그것을 많이 안다고 해서 하나님을 더 많이 아는 게 아닌 것이죠. 마치 무엇과 같으냐 하면 사람들이 저를 아는 것과 비슷해요. 요즘에는 제가 어딜 가면 처음 보는 사람인데 저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깜짝깜짝 놀랍니다. 제가 병원 갔다 오면 “병원 잘 다녀오셨냐”고 물어봐요. 깜짝 놀랍니다. 어디 어떤 음식 먹었다고 먹었는데 그 음식점, 그 식당 맛있냐고 물어봅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있을까요? SNS에 다 올리니까 다 압니다. 그래서 처음 만난 사람인데 마치 오랫동안 만난 사람인 것처럼 저에 대해서 빠삭하게 꿰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깜짝깜짝 놀라고 있는데 그렇게 저에 대해서 많이 안다고 하는 것이 저를 아는 것일까요? 그게 아니죠. 반면 우리 아이들은 어렸을 때 저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었습니다.

그 당시 제가 미국에서 신학교에서 박사 과정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제가 어느 학교를 다니고 있는지 우리 아이들은 잘 몰랐어요. 아빠가 맨날 어디 학교를 가긴 가는데 어느 학교를 가는지도 모르고 무슨 과정을 공부하는지도 모르고 아빠가 어느 학교 나왔는지 잘 몰라요. 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자신들이 힘들 때 저에게 얘기를 해요. “아빠 이거 필요해요. 아빠 이 문제 해결해 줘요.” 근데 그게, 그게 아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피상적으로 정보를 아는 게 아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어떠한 하나님이신가, 하나님이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우리 위해서 내어주시고 우리를 사랑하신 그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고 하는 것을 맛보아 알아야 되는 거예요. “아 정말 내 하나님이시구나.”

하나님께 기도하는 걸 통해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는지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과 교제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그 마음을 더 깊이 알아가는 그런 믿음의 진보가 우리 모두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신데 마치 하나님이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인 양 그냥 외면해 버리고 외롭고 쓸쓸하게 살아갈 것이 아니라 힘들 때 하나님께 손 내밀면 됩니다. 괴로울 때 하나님 앞에 엎드리면 됩니다. 문제가 있을 때 하나님 앞에 눈물 흘리면 됩니다. 하나님이 정말 나의 아버지시구나,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줄 수 없는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나의 소망이고 나의 기쁨이고 나의 의지할 분이라고 하는 사실을 매 순간순간마다 더 체험해 가고 더 체험해 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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