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북쪽 이스라엘 나라의 첫 번째 왕이었던 여로보암 왕이 하나님에 의해서 탄핵을 당하고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가 병이 들게 되었는데요. 이 당시로서는 의술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병에 걸렸을 때 오로지 하나님의 은총만을 기대해야 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때 여로보암은 자신의 아내를 보내서 이스라엘의 선지자, 아히야 선지자를 생각하고 아히야 선지자에게 자신의 아내를 보내서 이 아이에 대해서 물어보라고 그렇게 부탁하게 된 것을 오늘 본문 말씀에서 읽었습니다. 이 아히야 선지자가 누구인가요? 그 옛날 아히야 선지자가 나타나서 여로보암에게 “하나님께서 네게 열 지파를 맡겨 주신다. 네가 이 열 지파를 다스리게 될 것”이라고 예언해 주었던 하나님의 선지자가 바로 아히야 선지자입니다.
자신에게 어려운 일이 닥치게 되자 그 아히야 선지자를 생각하게 된 것이고, 그래서 자기 아내를 아히야 선지자에게 보내어 이 아이에 대해서 물어보게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우리는 ‘아, 참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겠는데요. 왜냐하면 지금까지 여로보암은 무엇을 섬겼습니까? 자기가 만든 우상을 섬겨왔던 것이죠. 벧엘에 송아지를 세워놓고 그 우상을 섬기면서 그 앞에 제사를 드리고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그렇게 해왔는데, 정작 자신의 문제가 생겼을 때 그 우상들에게서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겁니다. 왜 우상을 섬겼습니까?
그 우상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줄 알고, 그 우상이 우리를 좋게 해 줄 줄 알고 그 우상 앞에 머리를 조아렸지만, 정작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그 우상에게 이 급박한 상황 가운데서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살아계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여호와의 선지자 앞에 자신의 아내를 보냈다고 하는 것은 참 아이러니라고 할 수도 있겠고, 정말 이 세상의 우상이 아무런 힘도 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결국 여로보암의 아내가 아히야 선지자에게 가게 되었는데, 이렇게 정말 긴박한 상황 가운데서 여호와 하나님을 찾고 아히야 선지자에게 찾아간 것은 하나님에게로 돌아간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고 한다면 지금 형식적으로는 하나님에게 나아간 것처럼 보입니다.
자기 부인을 보내어 하나님의 선지자에게로 갔고, 하나님의 선지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려고 했기에 형식적으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간 것처럼 보였지만, 그러나 정말 여로보암이 하나님 앞에 나아갔는가, 여로보암의 아내가 정말 하나님 앞에 나아갔는가 하면 하나님 앞에 나아간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고 한다면 어떻게 나아가야 됩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은 지금까지의 모든 잘못과 단절해야 나아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상을 섬겼다고 한다면 그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돌아가야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잘못된 것과 단절해 버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그게 진짜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인데, 여로보암에게 그런 단절의 의지가 있는가? 과거의 잘못된 일들과의 단절이 전혀 없이 그렇게 여호와 앞에 나갔다고 하는 것은, 사실 몸은 여호와 앞에 나간 것 같고 여호와의 선지자 앞에 나간 것 같지만 사실은 제대로 나간 것이라고 할 수가 없겠습니다. 창세기 35장 2절에서 3절 말씀에 보면 야곱이 가족들을 향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야곱은 세겜이라고 하는 동네에 가서 거기서 위협을 당하게 되었을 때,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 가운데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고민했습니다. 알고 보니 그 세겜에 사는 동안에 자기 집안의 식구들이 우상을 섬기고 있었고, 우상을 섬기는 복식에 따라서 의복을 입고 있었으며, 이 세상에 다 물들어 살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 것이죠. 그때 “우리가 이제 벧엘로 돌아가자. 이 세상의 모든 우상과의 관계를 다 끊어버리고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자”라고 이야기한 것이 진짜로 하나님 앞에 돌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렇게 야곱과 그의 가족들이 모두가 하나님에게로, 벧엘로 돌아가게 될 때 하나님께서 세겜에서부터 구원해 주셨고, 그 어느 민족도 야곱의 가정을 뒤쫓아와서 몰살시키려고 하는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을 맛보게 된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돌아갈 때는 어떻게 돌아가야 되는가? 모든 죄악을 벗어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던 것들, 마음속에 가지고 있던 우상을 내버리는 마음의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사무엘상 7장 3절 말씀 가운데서 사무엘 선지자는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길지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블레셋의 위험 앞에 있을 때 이스라엘 민족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가기를 원했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여전히 우상을 섬기면서 하나님 도와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상을 다 제거해 버리고 아스다롯 신상을 다 제거해 버리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될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도우셨도다”, 에벤에셀의 하나님 찬양의 결과가 나오게 된 것이죠.
역대하 7장 14절의 말씀에서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서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찾을 때 어떻게 찾아야 되는가? 악한 길에서 떠나야 된다고 하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있는 악한 우상이 여전히 내 마음 가운데 있는 것은 아닌가? 명예와 자존심과 또한 성공이라는 우상, 재물, 온갖 잘못된 우상들이 내 마음을 장악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엎드릴 때 하나님께서 우리들 가운데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원칙에 비추어 볼 때 여로보암은 하나님 앞에 제대로 나간 것이 아니라, 그저 하나님의 효용성만을 기대하며 하나님을 이용해 먹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간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먼저 여로보암은 자기 자신이 직접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나아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요? 체면 때문입니다. 자신이 이스라엘 열 개 지파의 왕으로서 아히야 선지자에게 나갈 수 없었던 겁니다. 예전에는 그 아히야 선지자 앞에서 엎드리고 그 아히야 선지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자가, 왕의 위치로 올라간 다음에는 그 하나님의 선지자 앞에 나가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아내를 보냈는데, 아내를 보낸 것도 회개하며 보낸 것이 아니라 그저 하나님을 이용해서 ‘어떻게 아이를 낫게 만들 수 있겠는가’ 하는 하나님의 효용성만을 받아 누리려고 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상을 제거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렇게 한 것은 참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간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찾습니까?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받아주실까요?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까? 요한복음 4장 23절 말씀에서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을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합니다. ‘영과 진리로’라고 하는 말은 ‘진실한 심령으로’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참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마음이 나뉘어서 한편으로는 돈을 우상으로 섬기고, 한편으로는 내 자존심을 우상으로 섬기고, 한편으로는 자식을 우상으로 섬기면서 하나님을 반절만 찾는 그런 마음이 아닙니다. 온 마음과 온전한 마음으로,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하러 나오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찾으시고 그에게 은혜 베풀어 주신다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우리는 실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살다 보면 잘못된 욕심에 따라서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고, 죄악을 저지를 수 있으며, 또한 여러 가지 실수들을 할 수 있고 분노할 수 있고, 때로는 우리가 악한 짓을 서슴지 않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마음속에 우상이 자리 잡게 되는 순간 우리는 파멸의 길을 선택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 가운데서도 우리의 기회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어느 때에든지, 아무리 늦어도 하나님 앞에 돌아갈 기회는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이고 우리에게 살 수 있는 가망성이 있는 것이죠. 그래서 누가 살았습니까? 다윗이 살아난 것입니다. 파렴치범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살아난 거예요. 그래서 누가 살아났습니까? 삭개오가 살아난 거예요. 평생을 잘못된 일을 했던 삭개오가 주님에게 은혜를 받고 주님께서 살려주신 거예요. 누가 살아났습니까? 예수님의 옆에 달렸던 강도가 살아난 것입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회개하며 엎드리는 자는 살아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며, 오늘 우리가 주님 앞에 진실로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의 결단들을 내려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여로보암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나아가는 척했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하려고만 했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생각도 없고 돌이킬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저 지금 이 시간의 문제만을 해결하려고 하는 그런 잘못된 동기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어떤 선언을 해 주셨습니까? “이 아이가 죽을 것이다.” 12절 말씀에 그렇게 선언해 주셨습니다. 14절 말씀 가운데서는 “여로보암의 집이 끊어질 것이다” 선언해 주셨습니다. 한때 높은 위치로 올라갔습니다. 여로보암은 솔로몬의 신하였지만 하나님께서 그 평범했던 여로보암을 높이셔서 열 개의 지파를 다스릴 수 있는 영광스러운 자리로 올라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허망한 무속을 쫓고 우상을 쫓다가 망하게 된 것이죠. 예언대로 아이는 죽어버렸고, 여로보암 왕은 악을 행한 왕의 대명사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열왕기서를 우리가 읽다 보면 두 가지 표현이 나오는데요. 한 가지 표현은 “다윗과 같이 정직하게 행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왕은 다윗처럼 정직하게 행했다라고 하는 표현이 나오는 반면에, 악한 왕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을 합니까? “그가 여로보암의 길로 갔다.” 악한 왕의 대명사가 되고 마는 그런 불명예를 가진 것이 여로보암 왕인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여로보암 한 사람 때문에 온 민족이 문제가 되었을까요? 지도자 한 사람의 잘못으로 인해서 민족 전체가 재앙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열왕기상 14장 15절, 16절 말씀에 보니까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쳐서 물에서 흔들리는 갈대같이 되게 하시고, 이스라엘을 그의 조상들에게 주신 이 좋은 땅에서 뽑아 그들을 강 너머로 흩으시리니 그들이 아세라 상을 만들어 여호와를 진노하게 하였음이니라. 여호와께서 여로보암의 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을 버리시리니 이는 그도 범죄하고 이스라엘도 범죄하게 하였음이니라 하니라.”
잘못된 왕 한 사람 때문에 결국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버림을 받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지도자 한 사람을 잘못 세웠더니 결국 그 나라가 패망의 길로 가게 되고, 결국 온 나라가 흩어지고 이방 민족 가운데 고난을 당하게 되는 잘못된 길로 가게 되었는데, 왜 이런 어려움을 이스라엘 민족이 당하게 되었는가? 잘못된 지도자를 뽑게 된 것이죠. 어떻게 여로보암과 같은 사람이 왕으로 뽑히게 됐을까요? 여로보암이 왜 이스라엘 민족의 열 개 지파의 왕이 되는 그 자리에 올라갔습니까? 우리가 열왕기서를 읽다 보면 여로보암이 왕이 된 이유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히야 선지자가 여로보암에게 예언을 해주었고, 그 예언대로 여로보암이 왕이 된 것이라고 성경에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모든 일들을 살펴볼 때, 영적인 차원과 그리고 실제 우리 현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들이 상반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들의 선택의 잘못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과 상관없이 벌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과 그 오묘한 뜻 가운데서 이 세상의 모든 역사가 하나씩 진행되는 것이 맞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여로보암을 세웠다”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로보암을 그냥 세운 것이 아니고, 우리 사람들 사이에서는 어떻게 세웠습니까? 사람들이 여로보암이 좋다고 한 거예요. 사람들이 여로보암을 우리들의 왕으로 모신 겁니다. 우리가 왕을 세울 때 좋은 왕을 선택해야 되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에 좋은 왕이 아니라 여로보암을 왕으로 선택한 거예요. 다윗과 같은 왕, 하나님께서 마음에 기뻐하실 그런 좋은 왕들을 찾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세워진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우리가 구해야 될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어디에 있는가”입니다.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고민하면서 정말 좋은 지도자를 세워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좋은 지도자가 아니라 망할 지도자, 온 민족을 파탄에 빠뜨리는 잘못된 지도자를 세우게 될 때 그 결과를 온 백성들이 고스란히 받게 되는 안타까운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여로보암을 선택했는가? 여로보암의 장점을 보고 선택한 것이 아니라 르호보암의 단점을 보고 여로보암을 선택한 것이죠. 르호보암 왕이라고 하는 사람이 올라서서 “나는 백성들을 위한 왕이 아니라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왕이 되겠다”고 자신의 속내를 가감 없이 드러내게 될 때, 이스라엘 민족의 마음이 돌아서면서 그들이 생각한 기준은 무엇입니까? “르호보암만 아니면 되는 것”입니다. 저 나쁜 왕보다 더 나쁜 왕만 아니면, 저 나쁜 왕이 아니면 괜찮다는 기준으로 뽑았기 때문에 여로보암 왕이 그들의 왕이 되어 버린 것이죠.
결국 여로보암의 장점이 아니라 르호보암의 단점 때문에 얻은 반사 이익으로 여로보암이 왕이 된 것이고,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면서도 가장 어리석은 방법이며 우리가 피해를 보게 되는 가장 심각한 방법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선택해야 되는가, 어떤 사람을 뽑아야 되는가 고민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묵상하며 살펴보면서 “하나님, 과연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을 찾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교회 내에서 흔히 벌어지고 있는 현상 중에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다른 것은 잘 모르겠고 어떤 교회에서 새로운 담임 목사님을 선발한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서 내세운 조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혹시 그게 무슨 조건인 줄 아십니까?
서울대 출신은 안 된다는 거예요. 왜 그랬을까요? 그전 담임 목사님이 서울대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뭔가 불편했던 것이 그들의 마음 가운데 있었던 것이죠. 사실 그분이 서울대 출신이어서 불편한 게 아니었을 텐데, 서울대 출신은 안 된다고 그 반작용으로 카테고리를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서울대 출신 중에도 좋은 사람 많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어떤 교회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목사님이 물러나고 새로운 목사님을 모시게 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분들이 결정했습니다. “장로교 목사는 안 된다.” 그 교회가 장로교였는데도 장로교 출신은 안 된다고 한 것이죠. 그래서 성결교 목사님을 모셨습니다. 그 뒤로 잘됐겠습니까? 그런 기준으로 판단하는데 잘될 리가 있나요. 어리석은 판단이죠.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처럼 어리석은 판단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판단은 종합적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 나갈 우리의 지도자가 누가 되었으면 좋겠는가 고민해야 합니다. 단순히 어떤 사람들에 대한 반작용에 의해서가 아니라, 충동적인 판단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대부분의 충동적인 판단은 사탄의 유혹과 잘못일 가능성이 있는 것이죠. 잘못하면 제가 결혼하지 못할 뻔했습니다. 저희 형이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해서 좀 힘들어하는 것 같으니까, 부모님이 “너는 결혼을 좀 늦게 해라” 하셨거든요. 그래서 제가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하고 따져서 결혼했지, 안 그랬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구해야 될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 무엇인가 찾아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의 구원자처럼 생각되었던 여로보암은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파탄에 처하게 만들었고, 결국 그 자신도 구원받지 못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세상의 모든 지도자가 다 똑같습니다.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이 세상의 모든 지도자는 조금 더 낫고 조금 더 나쁜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우리들의 진정한 구원자는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너무 놀라운 소망이 있는 것이죠.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참된 구원자가 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몸을 내어주시고, 피 흘려주시며 우리를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의지할 것은 사람이 아닙니다. 한때 여로보암을 옹립하고자 했을 때 이스라엘 민족들은 아마 르호보암을 물리치고 새로운 왕을 모신다고 환호하며 지지율이 90%, 100%까지 치솟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인간 지도자는 그 누구도 만족시킬 수 없는 것이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이죠.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시편 146편 3절에서부터 5절 말씀에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서로 의지하고 사랑하고 함께 살아가야 하지만, 그 사람들이 우리를 배신한다고 해서 낙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진정한 친구는 우리 주님밖에 없고, 우리가 영원히 의지할 분은 우리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시험받는 이유, 우리의 마음이 상하는 이유는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과도한 소망을 두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함께 교우로서 교제하고 함께 믿음의 길을 갈 때에도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이 하나님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며 믿음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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