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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답지 않은 안식일(막 1:21-28)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있는 한 회당에 들어가셨을 때였다. 그 날은 안식일이었는데, 거기에는 귀신들린 한 사람이 있었다. 안식일에 귀신들린 사람이 있다니, 정말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안식일이 어떤 날인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사역을 완성하고서 그 완성을 축하하고 기념하는 날이 안식일이 아니던가? 그런데 바로 그런 날에 귀신들린 사람이 있다니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귀신들린 사람은 바로 우리들의 실존(實存)을 그대로 드러내준다.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우리들의 삶은 고통과 슬픔으로 점철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이 사람은 모순투성이였다. 완벽하게 창조된 것을 기념하는 안식일 날에 회당이라는 장소에 있었던 것도 모순이지만,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주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거부하는 점에서 그렇다. 마치 우리들처럼 말이다. 우리도 사실 지식적으로는 하나님을 안다. 그리고 무엇이 옳은가도 잘 안다. 하지만 하나님의 풍성함에서부터 단절되어 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모순투성이의 삶인 것이다.

이런 귀신들린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산상수훈의 메시지가 아니다. 누군가 너로 하여금 억지로 5리를 가게 하면 10리를 동행하라는 말씀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이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 귀신들림의 상태에서부터 해방시켜주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도덕적 교훈이 아니다. 사실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안다.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하고, 용서하며 살아야 하고, 참고 인내하며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 자녀들도 마찬가지이다. 게임을 가지고 노는 것에만 몰두해서는 안 되고 공부도 좀 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마치 예수님이 누군지 정확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거부했던 그 귀신들린 사람처럼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사람을 보면서 학원 선생님처럼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하라 하고 지나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유명한 강연가처럼 마음을 비우면 편해질 거라는 무책임한 말만 하고 사라지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바로 그 사람에게 다가가서 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사실 우리들의 문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 막는 죄의 문제였다. 마치 귀신이 그 사람을 사로잡아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든 것처럼, 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의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게 만든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무능해진 우리들을 향해서 마음을 비우라든가 원수를 사랑하라든가 하는 말만 하신 것이 아니라, 마치 어머니처럼 우리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다. 우리는 그 주님께 나아가야 한다. 오직 주님만이 우리의 문제의 해결자이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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