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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가라(출 3:1-12)

사람들은 이상하고 신기한 것에 주목한다. 그냥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것에는 주목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문학, 예술, 광고는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를 사용한다. 문학은 낯설게 하는 것을 통해서 본질을 보게 만드는 것이다.

광야에서 40년을 살았던 모세는 광야의 삶에 익숙해져 있었을 것이다. 40년간 양치기 노릇을 했으니, 광야에 나가면 무슨 일들이 있을지 뻔히 잘 알았을 것이다. 어쩌면 눈을 감고 모든 일을 하라고 해도 할 수 있는 생활의 달인이 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날 모세는 아주 신비한 일을 목격하면서 그의 발이 끌렸다. 불이 난 것만 해도 구경거리일 텐데, 나무가 전혀 타지 않는 신비한 현상을 보면서 모세는 그 이유를 알고자 하여 다가가게 되었고,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

어쩌면 여기에서 복음전도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가? 이상하게 느껴져야 도대체 왜 그럴까 하면서 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다가올 수 있다. 그런데 이 세상 사람들이 크리스천들을 보면서 하나도 다름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래서 불신자들이 크리스천들을 보면서 전혀 관심을 가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이다.

사실 우리 주변에 있는 무신론자들과 불신자들에 대한 책임은 우리들에게 있다. 그들이 하나님이 존재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 우리들의 모습을 보니까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없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처럼 똑같이 살아가는 크리스천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교회에 아무런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나아가야 한다. 주여, 우리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세상 사람들처럼 살아왔던 것을 회개하고, 이제부터라도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을 보이면서 살아가기 위해 기도하면서 노력해야 할 것이다.

모세는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났는데, 하나님은 모세에게 사명을 주셨다.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라고 하는 위대한 사명이었다. 하지만 모세는 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왜냐하면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모세는 40년 전에 동료 이스라엘 민족을 도우려다가 본전도 찾지 못하고 도망을 쳐야 했었던 그런 씁쓸한 과거가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세를 설득하셨다. 무슨 말씀으로 모세를 설득하셨을까? 그것은 “너 밖에 없다”가 아니었다. 사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 중에서 가장 뛰어난 학식과 무예와 경험을 가진 뛰어난 사람이었다. 모세를 능가할 만한 사람은 이스라엘 민족 중에서 찾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모세가 가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이라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모세는 두려워할 것이 없다. 아무리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라고 고백하지 않았던가?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 있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이 사회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다. 그리고 그 옛날 모세와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던 바로 그 하나님께서 우리와도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명을 감당하며 나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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