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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삼하 15:13-37)

오늘 본문의 말씀은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다고 하는 소식을 들은 다윗이 피난길에 오르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피난을 가는 것 그것은 정말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6.25 때 피난 가보신 분 계십니까? 권사님, 못 가보셨어요? 우리 집사님, 가보셨죠? 6.25 때 피난을 경험했던 분은 어쩌면 그때 경험했던 생각을 한번 생각하면서, 다윗의 피난길이 어떠하였을까 상상해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아들의 반란으로 인해서 피난길에 오른 아버지 다윗의 모습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도망가는 길인데, 내가 지금 왜 도망가야 하냐면, 다른 사람 때문에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낳은 자기 아들의 반역 때문에 도망가야만 하는 그 비참함을 여러분 생각해 보실 수가 있겠습니까? 아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그 황당한 상황을 조금이라도 이해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그런 경우를 당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다윗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내가 정말 믿었던 사람, 정말 내가 사랑했던 바로 그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하는 것처럼 마음이 아픈 것은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쓰라린 아픔이 있다고 하면, 무슨 아픔이겠습니까? 그것은 내가 철저하게 믿었던 친구로부터 배신을 당하는 것, 내가 철저하게 믿었던 남편에게서 배신을 당하는 것, 내가 철저하게 믿었던 아내에게서 배신을 당하는 것, 어쩌면 그런 일을 당할 때 가장 고통스러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정말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바로 그 아들이 나를 향해서 칼을 들고 달려들었다고 하는 그 사실은 정말 충격적인 일이고, 다윗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을 것이라고 충분히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사무엘하 15장 30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감람 산 길로 올라갈 때에, 그의 머리를 그가 가리고, 맨발로 울며 가고, 그와 함께 가는 모든 백성들도 각각 자기의 머리를 가리고 울며 올라가니라.” 이스라엘 민족이 자기가 슬프다고 하는 사실을 표현하는 방법이, 재를 뒤집어쓰고, 머리를 풀어헤치고, 그렇게 그 슬픔을 표현하고 있는 모습을 우리가 성경에서 종종 볼 수가 있는데, 바로 그러한 모습인 것이죠. 다윗이 너무나도 슬퍼서, 머리를 가리고 맨발로 울면서 그 피난의 길을 떠나가고 있는 겁니다.

다윗이 울면서 도망가고 있었다고 하는 이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누구였습니까? 골리앗이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장군 앞에서도 담대했었던 사람이 다윗이죠. 사울왕이 죽이려고 달려들 때에도, 흐트러짐이 없이 담대했던 사람이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정말 전혀 두려움이 없이 담대하게 모든 일들을 척척 잘 해내던 사람이 바로 다윗이었는데, 그런데 바로 그 다윗이 아들의 반란, 아들의 배신 앞에서 완전히 무너져서, 펑펑 울면서 힘없이 맥없이 걸어가고 있는 그 모습을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다윗의 인생은 참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지만, 다윗의 인생 가운데서 어쩌면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시기를 꼽으라고 한다면, 다른 때가 아니라, 바로 이 시점이었을 거라고 충분히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만큼 괴로웠고, 그만큼 가슴 아픈 순간, 그만큼 절망적인 순간이 바로 이 순간이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 다윗의 이 고난의 시기를 겪으면서, 놀랍게도 믿음을 재발견하는 시기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위대함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인데요. 다윗이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이 무엇일까? 사람들이 다 거기서 거기고, 사람들이 다 똑같겠지만, 그래도 다윗이 가지고 있었던 위대함, 다윗이 다른 사람에 비해서 훨씬 더 뛰어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그런 장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보여준 사건이 무엇이냐면, 바로 이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을 텐데, 다윗의 장점이 무엇이냐면, 위기의 순간을 만났을 때, 절망하고 좌절해 버리고, 그래서 완전히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 믿음의 길로 돌아갔다고 하는 것이 다윗의 장점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고난을 만나게 된다고 하면, 그 고난의 항상 좋은 결과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고난을 만나면, 고통을 당하게 되면, 그 순간에 믿음을 저버리게 됩니다. 박해를 당하고, 믿음 때문에 어려움이 생기고, 믿음을 가지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면, 그 순간에 믿음을 떠나버리고, 신앙을 저버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부인하는 그런 모습을 보일 때가 정말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어떻게 했는가? 이 고난의 순간에 하나님을 부인하고 믿음에서부터 떠나는 방향으로 틀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다윗은 고난을 만날 때에, 더더욱 믿음 가운데 바로 서는 모습, 지금까지 다윗이 왕으로서 지내오는 가운데, 조금 해이해지고 나태해졌던 바로 그 순간에 찾아왔던 그 고난을 통해서, 다윗은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고, 하나님과 다시 가까워지게 되고, 자신의 신앙을 점검해 보는 그런 놀라운 신앙의 부흥의 기회로 삼았다고 하는 점이 다윗에게 있어서 차이점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다윗의 생애를 통해서 배워야 할 그런 교훈이 있다고 한다면,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제일 먼저 살펴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언약궤와 관련한 다윗의 태도를 보면서, 우리가 다윗의 믿음을 한번 찾아보려고 합니다. 사무엘하 15장 25절부터 26절 말씀을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돼 있습니다. “왕이 사독에게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궤를 성읍으로 도로 메어 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입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 그러나 그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하리라.”

지금 피난길을 떠나고 있는 그 순간에, 사독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한 일이 무엇이냐 하면, 예루살렘에 있는 그 언약궤를 가지고, 다윗과 함께 피난길에 오르기로 결정한 것이죠. 지금 도망가야 되는데, 가장 지금 위급하게 도망가야 되는 그 순간에, 사독 제사장이 다윗과 함께했고, 레위인들이 함께 했는데, 그들이 결정한 것이 무엇이냐면, 우리가 이 언약궤를 가지고 피난을 가자고 결정을 한 겁니다. 이것은 정말 어떤 면에서 보면 정말 중요한 결정이고, 정말 제사장과 레위인이 함께하고, 언약궤가 함께한다고 하는 것은 정말 힘이 되는 그런 결정일 수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다윗은 그 순간에 사독 제사장과 레윈을 향해서 말하기를 “언약궤를 가지고 오지 마라.” 그러는 거예요. 언약궤를 가지고, 우리가 도망갈 필요가 없다. 그냥 예루살렘에 놔두라고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만일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다시 이곳으로 복권시켜 주실 것이고, 만일 하나님께서 나를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한다면,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마저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니, “그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내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하는 믿음의 고백을 다윗이 한 것이죠.

이러한 모습은 언약궤를 이용해서 승리를 쟁취하려고 했었던, 그런 사람들과는 현저하게 다른 태도입니다. 우리가 사무엘상 말씀을 살펴보면서 가장 먼저 다루었던 사건 가운데 하나가 바로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홉니와 비느하스가 언약궤를 가지고 나아간 이야기를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누구였습니까?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람이었어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폄훼했던 사람이었어요. 하나님에 대해서는 평상시에 안중에도 두지 않았던 사람들이 바로 홉니와 비느하스였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터지니까, 그들이 무엇을 찾습니까? 언약궤를 찾는 거예요. 전쟁이 났다. 큰일 났다. 블레셋과의 전쟁이 일어나는데, 어떻게 하면 좋은가?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지고 가자. 왜? 이 하나님의 언약궤가 무슨 언약궤입니까? 이스라엘 민족과 항상 함께 했던 그 언약궤였었고, 그 언약궤를 가지고 요단강을 건널 때, 요단강이 갈라지는 기적이 일어났었고, 여리고성을 언약궤를 가지고 돌았을 때,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그런 기적이 있었던 언약궤였으니, 이번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우리가 이 언약궤를 가지고 나아가자. 그렇게 생각한 것이죠.

하지만 홉니와 비느하스가 원했던 것은 하나님이 아니에요. 하나님과의 생생한 교제, 하나님과의 생생한 사랑의 관계를 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해서 얻을 수 있는, 전쟁에서의 승리를 원하고 있는 것이죠. 전쟁에 나갈 때, 이 언약궤를 가지고 나가는 것을 통해서, 전쟁에 승리하는 것을 갈망했지만, 하나님과 진정한 참된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는 마음이 그들에게 없었다고 하는 것이 홉니와 비느하스의 가장 큰 문제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이 다윗이 그 옛날 홉니와 비느하스가 보여주었던 행동과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다윗이 행동하는 거예요. 아마 이 순간에 홉니와 비느하스가 쓰였다고 한다면, 그들이 도망을 갔다고 했다면, 그들은 언약궤를 가지고 가자.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이 언약궤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아주 중요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언약궤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오늘날로 치면, 오늘날이 아니라 조선시대로 치면, 옥새를 쥐고 있는 것과 같아요. 반란이 일어났을 때, 옥새가 누구에게 있느냐? 이거 정말 중요하지 않습니까? 왕자들 사이에서 누가 옥새를 소유하고 있느냐에 따라 정통성이 갈려지는 것이고, 나라가 둘로 나뉘게 된다고 한다면, 누가 정통성 있는 나라냐? 누가 정통성 있는 그 적법한 왕이냐인가를 따질 때, 누가 유리한 고지에 서게 됩니까? 옥새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유리한 고지에 서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언약궤를 아주 소유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진정한 왕이 누구냐?”라고 하는 것을 결정하게 될 때, 아주 유리한 것이 언약궤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은 신앙 공동체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누구와 함께 하시는가? 언약궤를 가진 쪽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다.” 저쪽은 가짜고, 언약궤를 소유한 우리가 진짜라고 하는 것은 백성들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아주 유용한 도구가, 바로 언약궤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 순간에 언약궤를 소유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내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갖는 게 중요하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하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다윗이 고백하는 겁니다.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입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 그러나 그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엎드리고, 하나님에게 주권을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복 하려고 하는 그 믿음으로, 이 결정적인 순간에 “언약궤를 그냥 돌려보내라.”라고 이야기를 한 것이죠. 다윗은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기를 원했고, 그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행동하기를 원했는데,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믿음이라고 하는 사실을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위급할 때 다윗이 찾은 것은 이 위급한 상황 가운데서 나를 구원해 줄 것 같은 언약궤가 아니라, 다른 것은 다 잃어버려도, 하나님 앞에서 회복되는 것을 원하고자 하는, 그 다윗의 마음을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기억해야 하고, 항상 다윗이 가졌던 그 믿음을 우리가 소유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분쟁 가운데 있지 않지만, 만일 먼 훗날 혹은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에 교회 내에서 분쟁이 일어나게 되고, 그리고 서로 옳고 그름이, 이야기가 나누게 될 때, 아무 가치가 없는 건물을 소유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아니기를 바랍니다. 아무 가치가 없는 그런 땅문서나, 아무 가치가 없는 그 쓰잘데기 없는 것들이, 우리들의 신앙의 정통성을 보장해 준다고 하는, 역사가 우리를 보장해 주거나, 그 어떤 것이 우리를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느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엎드리느냐? 하나님이여,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그런 믿음의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는 우리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한국에 있는 수많은 교회들이 안타깝게도 하나님을 찾기보다는 언약궤를 놓고서 서로 싸우고 있어요. 수많은 분쟁하는 교회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 세상에 헛된 것들이 마치 자신들의 정통성을 부여하는 것인 양, 그것이 자신들의 믿음을 증명해 주는 것인 양 착각하면서, 언약궤를 붙들려고 하는, 그런 잘못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은데, 원하기는 우리의 삶의 모습은 항상 주님 앞에, 하나님께서 은혜 베풀어 주시면, 하나님께서는 언젠가는 회복시켜 주실 것이고,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우리로 하여금 내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그 선하신 하나님의 뜻이 내게 이루어지이다. 믿음으로 고백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로 다윗은 아히도벨이 압살롬과 함께 있다고 하는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나아가는 기도의 회복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31절 말씀에 보면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압살롬과 함께한 사람들 가운데 아히도벨이라고 하는 사람이 압살롬 편에 섰습니다. 지금 다윗의 편에 있느냐? 압살롬의 편에 있느냐? 누가 누구의 편에 서 있느냐가 아주 중요한 이 시점인데요. 이 중요한 시점 가운데 다윗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한 가지 소식이 무엇이냐 하면, 아히도벨이라고 하는 모략가가 압살롬 편에 섰다고 하는 소식을 듣게 된 겁니다. 그런데 이 아히도벨이라고 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냐면, 사무엘하 16장 23절의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때에 아히도벨이 베푸는 계략은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은 것이라. 아히도벨의 모든 계략은 다윗에게나 압살롬에게나 그와 같이 여겨졌더라.” 무슨 말씀인가요? 아히도벨이라고 하는 사람은 아주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이기 때문에, 참 지략가고, 아주 현명해서, 아히도벨이 조언하는 대로만 하면 늘 성공하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었다가는 늘 실패하고 망하는데, 아히도벨이 이야기한 대로만 하면 늘 성공하고 아히도벨이 말한 대로만 하면, 다 모든 것들이 다 풀리는, 아주 그렇게 뛰어난 지략가요 모략가라고 하는 이야기가 바로 이 아히도벨이 어떠한 사람인가를 이야기해주고 있는 겁니다. 아주 복잡한 일이 생기면 아히도벨에게 가서 묻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러면 그 아히도벨이 정말 그 복잡한 문제를 아주 명쾌하게 해결해 줍니다. 그런 모략가가 옆에 있다고 한다면 아주 행운일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신앙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하는 것이 때로는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는 것이죠.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 엎드리기보다는, 그저 아히도벨에게 먼저 찾아가는 겁니다. 마치 돈과 같아요. 돈이라고 하는 것은 유용하고 쓸모 있고 모든 것들을 잘 해결해 주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종종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보다는, 돈의 해결책을 믿기를 원하는 것처럼, 뭔가 유능한 사람이 있거나 뭔가 뛰어난 권력가가 있거나 뭔가 어마어마한 능력이 있는 것들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의지하기보다는, 이 세상의 것들을 의지하기가 너무나도 쉬운 것이죠. 그래서 아히도벨이 어떤 사람이었는가? 마치 아히도벨의 말은 “하나님의 말처럼 여겨질 정도였다.”라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럴 경우에 우리가 종종 실수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은 사라져 버리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아히도벨이 가까울 때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겁니다. 하지만 이제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갔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을 때, 다윗은 거기서 절망한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였습니다. 31절 말씀에서 다윗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원하옵건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자기 주변에 있는 참모들보다 앞살롬 주변에 있는 참모가 훨씬 더 뛰어난 그 상황은 불리할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그 순간에 다윗은 하나님 앞에 엎드린 겁니다. 하나님, 도와달라고 기도하며 나아갔는데, 결국 그것이 다윗을 믿음으로 살리는 것이고, 위기의 순간 가운데 하나님께서 동행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는, 그런 믿음의 길로 나아가게 해주는 그런 방편이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오늘 이 저녁에 우리들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그저 이 세상의 것들을 너무나도 쉽게 의지하며 살아왔다고 한다면,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것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엎드리는, 그런 믿음을 회복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편 3편의 말씀을 보면, 다윗이 쓴 시가 있습니다. 시편 3편 1절부터 8절은 다윗이 쓴 시인데, 언제 쓴 시냐면,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서 도망가면서 불렀던 노래입니다. 그때 썼던 시입니다. 뭐라고 노래하고 있습니까?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셀라)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오. 나의 영광이시오.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도망가는 그 상황 가운데서, 다윗이 하나님만 찾을 것이었어요. 주의 구원은 오직 여호와께 있사오니, 내가 의지할 것은 모략가도 아니고, 군대도 아니고,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내가 의지할 것이 아니라, 나는 지금 빈털터리가 되는 것처럼, 밤중에 아무것도 챙기지 못하고, 모든 것들을 그냥 다 뒤에 내버려 둔 채, 단신으로 그렇게 도망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상황 가운데 있지만,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비웃기를, “저 도망가는 다윗을 봐라. 저는 이제는 끝났다. 이제는 완전히 망했다.”라고 생각되면서, 비웃는 그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좌절하고 넘어질 수밖에 없는 그 상황이었지만, 다윗은 그 앞에서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겁니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다윗이 이런 고난을 당한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바세바와의 범죄함 때문이었다고 하는 것을 다시 한번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간단한 것이 아니고 아주 심각한 것입니다. 죄를 지을 때는 이것이 별거 아닌 것처럼 짓지만, 죄의 대가는 사망이고. 죄의 삯은 반드시 사망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윗이 지금 이렇게 도망가야만 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가 지었던 죄 때문이었던 것을 기억하면서, 범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편 3편의 말씀은 신약에서도 우리가 종종 듣는 말씀입니다. 신약에서 보았던 한 장면에서 등장하는 그런 말씀입니다. 어느 장면에서 나오는 이야기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나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사람들이 비웃었던 그 조롱이 무엇입니까?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신은 구원할 수 없도다.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니, 그를 구원하실 것이다.”라고 비아냥거리면서 조롱했던 그 내용이 바로 시편 3편의 내용과 일치하는 내용입니다.

다윗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왜 고난을 당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다윗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신 이유는 바로 저와 여러분들의 죄로 인하여, 대신 죄 짐을 주시고 고난을 당하십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게 아니에요. 우리가 평안함을 누리고,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 코로나로 인해서 좀 힘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이렇게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이유는 그것은 우리가 이러한 대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사실은 우리는 다윗과 똑같은 신세가 돼야 마땅한 사람이에요. 죄를 지었다고 한다면 마땅한 처벌을 받는 것이 마땅한 것처럼, 우리는 다윗처럼 쫓겨나야 마땅한 사람이고, 우리는 다윗처럼 비난을 당해야 마땅한 사람들인데, 그렇게 살지 않고 우리가 이렇게 잘 살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우리 대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주님을 바라보면서, 감사하며 살아야 할 것이고, 매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바라보며,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가운데, 주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면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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