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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삼하 14:25-33)

지난 시간에 압살롬이 저 그술 땅에서부터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예루살렘에 왔지만, 다윗 왕을 만날 수도 없는 그런 상태였다고 하는 것까지 살펴보았습니다. 죄를 지어서 도망갔던 그 압살롬이 다윗왕이 다시 부름으로 말미암아 그술 땅에서 예루살렘까지 오기는 했지만 다윗왕이 만나주지 않아서 그 복귀라고 하는 것이 완전한 복귀가 아니라 불완전한 복귀였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살펴보았는데요. 이렇게 불완전하게 복귀한 것은, 이게 괜찮은 게 아닌 것이었습니다. 물론 저 그술 땅에서, 정말 아무도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 나그네로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것보다야,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와서, 친척들과 함께, 그리고 동료들과 함께 아는 곳에서 지내는 것이 훨씬 더 나은, 좀 더 나은 상태에 오기는 했지만, 그러나 다윗 왕을 만날 수 없다고 하는 것, 아버지인데 아버지에게 갈 수 없다고 하는 것, 그것은 괜찮은 게 아닌 것이죠.

그래서 오늘 읽은 말씀 32절의 말씀에 보면, 압살롬이 요압에게 뭐라고 얘기합니까? 이런 식으로 내가 이곳에 있느니, 차라리 내가 그술에 있는 게 더 낫겠다. 내가 이런 식으로 예루살렘에서 살고 있느니, 그술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 훨씬 더 나았겠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객관적으로 따지자고 한다면, 엄밀하게 따진다고 한다면, 그술에 있는 게 좋겠습니까? 예루살렘에 있는 게 좋겠습니까? 예루살렘에 있는 게 훨씬 좋은 거죠. 그술에 있는 것보다야, 예루살렘에 있는 게 그나마 나은 것이지만, 다윗 왕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 그 한, 자신의 갈망, 그것을 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내가 뭐 하려고 이곳에 왔는지 자괴감이 든다. “차라리 그술에 있었더라면, 더 나을 뻔했다.”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이 압살롬의 마음이 괴롭고 정말 너무나도 힘들었다고 하는, 그 마음을 32절 말씀 가운데서 표현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따지면, 그술에 있는 것보다는 예루살렘에 있는 것이 훨씬 더 나은 것이지만, 그렇게 불완전한 복귀를 하는 것이 괜찮은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이렇게 압살롬이 강조해서 과장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압살롬은 2년 동안 예루살렘에서 살았지만, 2년 동안 다윗왕을 못 만난 거예요. 그 2년이라고 하는 세월이 지나는 가운데, 무슨 날들이 지나갔겠습니까? 유월절이 지나가는 거죠. 유월절을 몇 번 지나갔어요? 두 번 지나가는 거예요. 우리 한국식으로 말하면, 뭐가 지나갔어요? 추석을 두 번 쇤 거예요. 추석을, 설날을 두 번 쇤 거예요. 그런데 설날에, 추석 때, 아버지를 못 만나는 거예요. 유월절이 되면, 초막절이 되고, 장막절이 되고, 이런 명절이 되면, 만나야 되는 그 사람을 못 만나고 있는, 그 안타까운 마음에, 이 압살롬이 2년 동안 참고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다윗 왕으로부터 완전한 복권을 꿈꾸면서, 작전을 세우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우리가 오늘 사무엘하 14장의 말씀을 통해서 읽었는데요. 압살롬이 그 작전을 세워서, 다윗을 만나려고 하는 그 이야기를 기록하기 전에, 25절부터 27절의 말씀을 보면, 압살롬이 어떠한 사람이었는가에 대해서 간략하게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묘사를 하고 있습니까? 첫 번째로 압살롬은 외모가 준수했다 그랬습니다. 압살롬이 얼마나 늘씬하게 잘생겼는지,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그러니까 이 맨 밑바닥에서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하나도 없었다. 정말 아쉽고 부족한 그 신체 부분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완벽한 그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이 말이에요. 뿐만 아니라, 이 압살롬의 머리털이 얼마나 많았다고요? 엄청나게 머리숱이 많아가지고, 이것을 한 번 깎을 때마다, 그 머리의 그 무게가 200세겔이 나갈 정도로, 그 머리숱이 엄청나게 많았다는 거예요. 부러우신 분 계시죠? 부러우신 분 계실 겁니다.

어쩌면 오늘날로 치자고 한다면, 멋진 탤런트와 같다고 할 수가 있겠죠. 뿐만 아니라 이 압살롬의 가족은 어떻게 됐는가? 자녀들도 많이 있었다는 거예요. 아들이 셋에, 딸 하나까지, 그런데 그 딸 하나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미모를 갖추고 있는 그 딸을 낳아서, 어쩌면 이 압살롬의 가정을 본다고 하면, 모두가 다 부러워할 만한 가정이었다고, 이 압살롬이야말로 모든 사람들이 참 부러워할 만한 모든 것을 다 갖춘 것이라고, 오늘 25절부터 27절의 말씀 가운데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압살롬과 같은 것을 갖고 싶습니까? 별로 관심이 없습니까? 정말 이렇게 압살롬 정도만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는 분 많잖아요? 그렇죠? 우리 아이들이 이렇게 압살롬처럼 좀 키가 좀 컸으면 좋겠고, 건강했으면 좋겠고, 정말 떡대도 벌어지고, 정말 건장하고 정말 멋있고 이런 사람이었으면 좋겠고, 그리고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아들 딸 행복하게 잘 낳고 사는 그런 가정이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렇게 멋있는 압살롬에 대해서 설명을 했는데, 압살롬이 이 정도로 멋있으니까, 괜찮은 것인가요? 부러울 만한 것을 다 갖추었지만, 그런데 그것으로 나는 더 이상 아무런 아쉬움도 없고, 만족하고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압살롬은 이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음에도 마음이 허전한 거예요.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모든 것들을 다 가지고 있어도, 너무나도 마음이 괴로운 거예요. 왜냐하면 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커서, 우리의 마음에 조그마한 것들을 채워 넣으면, 그러면 이내 만족해 버리고, 더 이상 부족함이 없이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생각에 지금 당장 부족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좀 채웠으면 좋겠다고 생각이 들고, 그것을 채우면 기분이 좋지만, 그런데 그 기분 좋은 것이 하루 지나가면 효용이 다 끝나버려요. 좀 어떤 좋은 집 하나 사면, 너무나도 기쁘고 행복하고, 너무나도 좋은데, 한 달 정도 지나면, 그 효용이 다 끝나버려요. 우리 인간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어느 정도 채우면 채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할지라도, 아무리 얼굴이 예쁘고 키가 크고, 아무리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고, 아무리 건강하고 대단한 권력을 소지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다 채우면, 지금 내게 없는 그것을 내가 채우면, 그러면 괜찮아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품 안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늘 부족할 수밖에 없고, 늘 갈망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해 주셨습니까? 요한복음 4장 13절 14절 말씀에 수가성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마시는 그 물이라고 하는 것은 잠시 갈증을 해소해 주는 것 같아도, 조금만 지나면 또 갈증이 생길 수밖에 없고, 압살롬처럼 모든 것을 다 갖춘다고 할지라도,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아버지의 집으로 가지 못했다고 하는 그 갈망 그 아픔 그것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압살롬 같은 경우에는 다윗과의 화해를 갈망하면서, 다윗왕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고 돌아가고자 하는 그런 마음이 오늘 본문에 표현되어 있는데, 사실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과 화해해야 된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그림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아무튼 이 압살롬은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고 싶은데, 아버지에게 돌아가는 그 방법으로 무엇을 선택하냐면, 요압 장군을 선택하는 거예요. 그래서 요압 장군을 부릅니다. “요압 장군님, 좀 와서 내 얘기 좀 들어보세요. 내 억울한 사정 좀 들어보세요.” 하면서, 요압 장군에게 사람을 보내서 오라고 했는데, 안 와요. 그래서 또다시 사람을 보내가지고, 요압 장군을 또 초대했는데, 또 요압 장군이 또 안 와요. 왜 안 올까요? 모르죠. 왜 그러는지.

그런데 이 압살롬이 하도 요압이 안 오니까, 압살롬이 무슨 계획을 세웠냐면, 이 요압을 우리 집으로 불러야 되겠다고 하는 생각이 들어서, 요압 장군의 보리밭에 불을 질러서, 그 모습을 본 요압 장군이 오게 만들었고, 그래서 이제 자신의 이야기를 요압 장군에게 하는 이야기가 기록돼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번 질문을 던져볼 수가 있는데요. 왜 압살롬은 요압 장군을 불러야만 했었을까요? 아버지 다윗에게 가고 싶으면, 그냥 가버리면 되는 거 아닌가요? 너무 힘들고 어려우면, 그 예루살렘의 궁전으로 찾아가서 문을 두드리고, 내가 아들이 왔습니다. 아버지 나 좀 만나주세요. 다윗 왕 앞에 나아가서, “아버지, 나 좀 만나주세요.” 하고 직접 나가면 되지, 왜 요압 장군을 통해서 그렇게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압살롬이 자신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자신이 없습니까? 자기가 지은 죄가 있거든요. 다윗 왕 앞에 가서 서려고 하면, 암논을 죽인 그 죄가 생각이 나서, 그 죄 때문에 다윗 왕 앞에 설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직접 나아가지 못하고, 나아가려고 하다가도, 그것이 자신의 발을 가로막아서 다윗 왕 앞에 나갈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누구를 불렀느냐? 요압을 부르게 되는 것이죠.

이것이 역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과 똑같은 방법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도, 하나님 앞에 직접 나가는 것이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제도가 무엇이냐면, 구약시대에는 제사장이라고 하는 제도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사람이 죄를 짓고 하나님을 만날 수 없을 때,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해 주셨는가? 제사장을 통해서 만나게 해주는 거죠. 소를 끌고 가서 제사를 드리고, 그 제사장 앞에 나아가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그래서 하나님과 그 제사장이라고 하는 그 매개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셨는데, 지금 이 압살롬에게는 그 역할을 누가 하느냐면, 다윗과 압살롬을 화해시키는 역할을 누가 하게 만드냐면, 바로 그 요압에게 요청한 거예요.

그런데 그 요압이 말을 듣냐면, 안 듣는 거예요. 오라고 하면 안 오고, 또 오라고 하면 안 오고, 그래도 막 오라고 해도 콧방귀도 안 뀌니까, 결국 나중에 어떻게 했느냐? 보리밭에다가 불을 질러서, 거기에 열받은 우리 요압 장군이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압살롬을 만나게 되는, 그런 작전을 세우게 된 것이죠.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이런 요압 장군처럼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응답해 주시지 않는 것을 생각하면서, 하나님도 마치 요압 장군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이죠. 하나님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응답을 안 해 주시면, 사람들이 생각을 하는 거죠. 왜 하나님께서 응답을 안 해 주시는가? 마치 압살롬이 요압을 불러도, 요압이 오지 않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하나님, 내 소리를 좀 들어주세요. 내 기도를 좀 들어주세요.” 하는데, 하나님께서 들어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들의 생각이 어떤 생각이 드냐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듣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좋은 말로 했으니까, 하나님께서 안 듣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때가 많아요. 그래서 하나님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우리가 극단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금 압살롬이 보리밭에 불을 지른 것과 같이, 구약에 있는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들을 보면, 엘리야 선지자와 함께 대결을 했던 발을 선지자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제단을 쌓아놓고, 자신들의 신을 향해서 울부짖기 시작합니다. “신이시여, 제발 하늘에서부터 불을 내려서,” 제단에 이 제물을 살라달라고 울부짖는데, 전혀 안 들으니까, 결국에는 어떤 일까지 합니까? 자신의 몸을 상해가면서, 피를 흘려가면서, 그러면 하나님께서 좀 우리들의 기도에 들어주실 거라고 생각하면서, 극단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응답해달라고 요구하는 거죠. 그게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관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그런 하나님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요압과 같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부모님이 자녀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민감하게 주시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우리의 신음소리조차 귀 기울이고 계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때때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전혀 안 듣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께서는 전혀 응답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종종 어떤 생각이 드냐면, “하나님도 요압 장군 같은가? 하나님도 나에게는 관심이 없는가?”라고 그렇게 오해하기가 쉽지만, 성경에서 가르쳐주는 하나님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가르쳐준 하나님은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 요압의 중재에 의해서 할 수 없이 움직이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먼저 중재자를 보내주시는, 하나님 편에서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만드시고, 그래서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에게로 불러들이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고, 그리고 저와 여러분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아무튼 요압은 처음에는 압살롬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결국 압살롬이 보리밭에 불을 저지른 이후에는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그리고 다윗에게 찾아가서 다윗에게 이야기함으로 말미암아, 결국 다윗과 압살롬이 재회하게 되고, 그동안 응어리지고 마음속에 장벽이 있었던 것들이 다 무너지게 되고, 결국 마지막에 압살롬이 복권되게 되는, 그런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합니까? 원하기는 이 압살롬과 다윗 사이에 화해를 이끌어내고, 평화를 이끌어 냈던 요압처럼, 비록 이 요압은 끌려가면서 그렇게 했지만,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보내주신 것은 우리를 평화의 사도로 화해의 중재자로 저와 여러분을 부르셨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화해를 추구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태복음 5장 9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누구의 아들이라?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화평케 만들어야 돼요. 평화를 만들어야 되는 거예요. 샬롬을 만들어야 되는 거죠. 화평케 하는 자가, 평화를 만드는 자, 화해를 만드는 자가 누구라? 하나님의 자녀다! 그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다. 그러면 그 반대말은 무엇인가요? 그 반대말, 싸움을 부추기는 자, 이간질을 시키는 자, 그 사람은 누구의 자녀일까요? 사탄의 자녀가 되는 것이죠. 안타깝게도 우리 성도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화평하게 하는 그런 일을 하기보다는, 사람과 사람을 화해하고, 중재시키는 역할을 하기보다는, 사탄의 자녀들처럼, 이 사람에게 가서, 저 사람 욕을 하고, 저 사람에게 가서 저 사람 욕을 하고, 그래서 서로 이간질시키고, 싸움을 부추기는 그런 사탄의 자녀들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항상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과연 내가 하는 이 말이 이 행동이 내가 하나님의 자녀들처럼 하나님의 아들처럼 평화를 만드는 자인가 화해를 만드는 자인가 아니면 싸움을 부추기고 이간질하는 자인가 이것을 항상 질문하면서 우리의 삶을 돌아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8절 19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주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고 한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을 화목하게 하고, 화해하게 만들고, 평화를 만드는 일에 우리 모두가 다 쓰임을 받는, 그런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의 제목이 무엇이 돼야 됩니까? 어떻게 기도해야 되겠죠?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그런 기도를 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라고 하는 사람이 쓴 기도문에,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라고 하는 기도문이 있습니다. 성프란치스코는 이렇게 노래를 했습니다.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며,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쫓아다니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분노하게 만들고, 이간질시키고, 그리고 훼방을 놓고, 그런데 우리들의 재능과 그 모든 것들이 사용되기보다는, 절망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면, 희망을 갖게 만들고, 울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면 기쁨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낙망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면,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면, 화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그런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우리가 받았으니,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수많은 많은 사람들이 갈라져 있고, 상처받고, 그리고 싸우고 다 그렇게 해서 갈라져 있는 그런 모습을 보는 이 세상 가운데서 우리 크리스천들이 들어가는 곳곳마다 다시 상처가 봉합되고, 새 살이 도달하는 그런 귀한 역사가 나타나는데, 우리 모두가 사용될 수 있도록, 날마다 날마다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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