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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자와 누룩(마 13:31-33)

작은 것에 주목하기보다는 큰 것에 주목하게 되어 있습니다.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미미한 것보다는, 크고 웅장한 것에 우리들의 눈이 끌리게 되어 있습니다. 허접하게 차려놓은 것보다는, 화려하게 그리고 잘 가꾸어진 것에 우리들의 관심이 가게 되어 있고, 우리들의 눈길이 가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것에 신뢰가 더 많이 가십니까? 별 ,아주 자극 작고, 아주 조그마한, 그 허접해 보이는 것에 신뢰가 가십니까? 아니면 화려하고 깨끗하고 잘 갖추어진 것에 더 신뢰가 가십니까? 후자겠죠. 만일 어떤 치과 병원이 있는데, 그 치과 병원에 가면, 그 문에 들어섰을 때, 의사 선생님이 직접 나와서 환영을 해주면서, 접수도 받고, 모든 사무 처리도 하면서, 이쪽에 앉으시라고 하고, 그 의사 선생님이 모든 걸 다 씌워주면서, 그래서 치료하고 갈 때도 잘 가라고 하는 그런 치과 병원이 있고, 어떤 병원에 갔더니 들어가자마자 아주 번쩍번쩍한 그 시설에, 간호사가 접수를 받고, 또 또 다른 간호사가 있어서, 그 사람을 치과 의자에 앉히고, 기본적인 것들을 다 해놓은 다음에, 나중에 의사 선생님이 나타나서 치료해 주고, 또 갈 때는 또 간호사가 안내를 해서, 접수처에 가서 이야기하고 돌아가게 되는 그 치과 병원이 있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어느 치과병원이 훨씬 신뢰가 가고 좀 마음이 편하십니까? 돈은 더 많이 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잘 갖추어진 곳에 우리들의 마음이 더 가고 신뢰가 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천국이 무엇과 같은가? 마치 겨자씨와 같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천국이 무엇과 같은가? 마치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누룩과 같은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께서는 천국에 대한 설명을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메타포(metaphor)를 사용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사용됐던 그 메타포가 무엇이냐면, 바로 겨자씨이고 그리고 누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겨자씨와 누룩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작다는 데 있습니다. 땅에 심겨질 때, 밀가루 반죽 가운데 포함되게 될 때, 이것은 너무나도 작아서, 사람들의 눈에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너무나도 미미한 것이고, 너무나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는 작아 보이는 것인데, 그런데 결국 한 번 심겨지게 된다고 하면, 밀가루 반죽 속에 들어가게 된다면, 그것이 크게 자라기도 하고, 그리고 밀가루 반죽을 크게 부풀리기도 하는 성질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표현을 보면, 겨자씨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설명하실 때, 이것은 모든 씨보다 작다고 표현을 해주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은 아닙니다. 겨자씨보다 더 작은 씨앗이 있습니다. 겨자씨라고 하는 것이 정말 작은 씨이기는 맞지만, 제일 작은 씨는 아니거든요. 하지만 유대인들 사이에서 “작다”라고 표현할 때, 쉽게 나오는 표현 중에 하나가 무엇이냐면, 바로 겨자씨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나라 말에서도 “작다”라고 하는 것을 표현하려고 할 때, 사용하는 것들이 있는데, 주로 무슨 말을 사용하죠? 좁쌀을 사용합니다. “이 좁쌀만 한 게” 그런데 사실 좁쌀보다 더 작은 게 있지만, 좁쌀이라고 하는 걸 통해서, 작다고 하는 것을 쉽게 관용적으로 써오는 것처럼, 그리고 또 우리나라 사람들이 흔히 작다고 하는 걸 표현할 때 쓰는 말이 무슨 말이죠? “도토리 만하다”는 말을 씁니다. “이 도토리만 한 게” 사실 도토리는 굉장히 크거든요. 하지만 우리가 관용적으로 늘 입에 붙어서 하는 말로, “좁쌀만 한 게, 토토리만 한 게”라고 하는 그런 표현을 통해서, 작다고 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처럼,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씨 가운데 겨자씨보다 작은 게 분명히 있을 겁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늘 작다고 하는 것을 표현할 때, 겨자씨라고 하는 것을 주로 사용해 왔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천국이 무엇과 같은가? 겨자씨처럼 작아 보이는 것, 누룩처럼 작아 보이는 것에, 예수님께서 비유하셨다고 하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겨자씨가 작아 보이지만, 이것이 한 번 땅에 심겨지게 된다고 하면, 싹이 나게 되어 있고, 그리고 그것이 점점점점 자라서, 사람의 키를 약간 넘어서는, 그런 관목이 되는, 그래서 그 안에 수많은 새들이 날아와서 둥지를 틀기도 하고, 그 안에서 여러 가지 씨를 먹기도 하는 그런 큰 나무가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해서 묘사하면서, 천국이 겨자씨와 같고 누룩과 같다고 말씀하시는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들의 눈앞에 당장 보이는 것이 화려하지 않다고 할지라도, 우리 인간들은 습성이 늘 화려한 것에 끌리게 되어 있고, 우리들의 습성이 늘 웅장한 것에 끌리게 되어 있지만, 천국이 우리들에게 다가오고,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들에게 다가올 때는 그렇게 화려한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정말 중요한 것이 이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천국이기 때문에 우리가 주목해야 되는 것이고, 아무리 사람들이 보기에 시시해 보인다고 할지라도, 작아 보인다고 할지라도, 무시하거나 실망할 것이 아니라, 거기에 참된 진리가 있고, 우리의 참된 소망이 거기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말씀해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겨자씨의 이야기 그리고 누룩의 이야기를 해주신 줄로 믿습니다.

정말 중요한 게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말씀을 해주시는 것은 겉으로 보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이 씨가 가지고 있는 생명력이 중요한 것이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겉으로 나타나는 화려함, 겉으로 드러나는 그 웅장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면이 중요한 것이고, 진리가 중요하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만일 진리라고 한다면, 그것은 열매를 맺게 되어 있고, 자라게 되어 있고, 결국에는 온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어마어마한 결과를 나타내게 되는 겁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러나 우리들은 늘 겉모습만 볼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리고 화려한 것에 웅장한 것에 자꾸만 속아 넘어가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해서 해주시는 그 요점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웅장한 것에 화려한 것에 속지 말라는 겁니다. 작아 보이더라도 참된 진리가 중요한 것이고, 정말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해 주시는 것이죠.

당시에 예루살렘 성전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화려한 성전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너무나도 자랑할 만한, 자부심을 가질 만한 어마어마한 크기의 성전을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한 예수님의 제자가 예수님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수님, 보십시오. 이 화려한 성전을 한번 보십시오. 얼마나 자부심이 가는 성전입니까?” 하면서, 그 성전을 자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냐면, 그러나 이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아니하고 다 무너질 거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왜냐? 그 성전이 화려하고 웅장하기는 하지만, 그곳에서 참된 예배가 드려지지 않고 있고, 그곳에서 어마어마한 제사가 드려지기는 하고 있지만, 위선으로 가득 차 있고, 잠든 것이 사라져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무너질 거라고 말씀해 주셨던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정말 내면이 중요하기 때문에, 겉으로 꾸미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하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종종 읽으면서 이런 식으로 오해하기가 쉬운데요. 성경에서는 정말 중요한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중심을 보신다고 말하기도 하고, 겉으로 보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면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시기도 하시지만, 이 말씀을 우리가 종종 오해하면서, 그러니까 “외양은 아무 데에도 쓸모가 없고, 정말 중요한 건 내면만 잘 갖추면 된다.”라고 하는 그런 식으로 오해할 때가 종종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저 산골 속에 숨어 있는 맛집에서 무엇인가를 맛있게 먹고 나올 때면, 우리들이 그런 생각을 많이 하죠. “역시 식당은 다른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뭐가 제일 중요하다? “맛이 제일 중요하다.” 맛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에, 이 식당은 간판도 없고, 화려한 그런 시설을 갖춘 것도 아니고, 산속에 허름하게 들어 있는 그 식당이지만, 사람들이 맛있으니까 알아서 다 찾아오니까, “정말 맛이 중요한 것이다”라고 그렇게 감탄하면서, 나올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는 맞지만, 또 다른 면에 있어서는 다른 판단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산속에 들어 있고, 간판도 없고 허름한 시설에 정말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내는 그런 식당들이 많이 있는데, 99%는 망하고 있습니다. 소수만이 성공하고 있는 거죠. 예전에 LA에 가면 냉면을 맛있게 하는 식당이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제가 까먹었으니까, 나중에 묻지 마십시오. 냉면집이 맛있는 집이 있었는데, 그 냉면집이 얼마나 맛있는지, 늘 문전성시를 이룬, 장사가 잘 되는 집이었어요. 그 냉면집의 주방장의 실력이 아주 뛰어난 사람이죠. 그런데 그 주방장이 그 식당을 다른 사람에게 팔고, 그 주방장은 다른 곳으로 가서, 거기서 냉면집을 열었습니다. 자 그렇게 새로 연 냉면집이 장사가 잘 됐을까요? 잘 안 됐을까요? 잘 됐으면 좋았겠는데, 장사가 잘 안 됐어요.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맛만 있으면 어디든지 성공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거예요. 부동산업자가 본다고 한다면, 말을 한다면, 왜, 성공과 실패가 어디서 갈렸다고 얘기하겠습니까? 로케이션(location) 문제라고 얘기하는 거죠. 아무리 맛있는 음식, 똑같은 재주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장소를 옮기니까 안 되는 것이고요. 이곳에서 성공했던 그 식당이, 성공해서 돈을 벌어가지고 다른 지역에 가서, 더 크고 웅장한 건물을 지어도, 안 되는 경우가 있는 이유가 뭡니까? 사실은 맛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 중요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가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죠.

하지만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겉모습의 화려함에 속아 넘어갈 것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것은 그 내면이 중요한 것이고, 우리가 이 겉모습에 속아 넘어가야 할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비록 화려한 겉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 않더라도, 결국에는 하나님의 나라는 결국 이루어진다고 하는 사실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해 주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는, 화려한 모습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만일 예루살렘의 왕국에서 태어났다고 한다면,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탄생한 것은 저 베들레헴의 말 구유에 누일 수밖에 없는 상황 가운데서 태어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역을 하실 때에는, 수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다니면서 사역을 하신 것이 아니라, 저 갈릴리에서, 이름 없는 곳에서부터, 12명의 제자를 데리고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로마 군대와 싸워서, 로마 군대를 무찌르신 것이 아니라, 그저 가난한 사람, 그리고 아픈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 만나면서, 그 사람들을 치료해 주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본다고 하면, 예수님의 이 사역의 시작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초라해 보이고, 눈에 띄지 않는 그런 방식으로 사역을 해왔습니다. 그게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답답한 모습이었습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던 이스라엘 민족의 답답함이 무엇이었습니까? 메시아가 왔다고 하는데,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바뀐 게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것이 이스라엘 민족이 겪고 있었던 답답함이었습니다. 여전히 로마 군대가 이 이스라엘 민족을 통치하고 있었고, 매국노인 세리는 아직도 떵떵거리면서 세금을 갈취하고 있었고, 어제 당하던 그 고통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지금도 그런 고통을 당하고 있는 그 상황 가운데서, 이스라엘 민족은 답답한 것이, 아니 메시아가 왔으면 좀 모든 문제를 좀 해결했으면 좋겠는데,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겁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해주셨던 대답이 무엇이냐면,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올 때 어떻게 오느냐? 화려하고 웅장하게 오는 것이 아니라, 마치 겨자씨와 같이, 누룩과 같이 오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당시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서 제일 답답하게 느꼈던 사람이 누구였겠습니까? 세례 요한이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이 세례 요한이야말로 예수님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소개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세례 요한이 외쳤습니다. “보라. 저 사람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소개를 하면서,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분이 오시는데, 타작마당을 깨끗게 하실 분”이 오실 거라고, 이 세상을 심판하실 분이 오실 거라고 실컷 소개를 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사역을 하시는데, 자신이 기대하는 바와는 전혀 정반대로 가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로마 군대를 무찌르기도 하시고, 죄악을 저지르는 사람들 보면은 심판도 하시고, 온 세상을 천지 개벽하는 그런 어마어마한 일들을 예수님께서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일이 뭐예요? 지나다가 가다가 아픈 사람 있으면 병 고쳐주고, 지나가다가 불쌍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 안아주고, 그냥 한쪽 구석에서 작은 사역을 하고 있는 예수님을 보면서, 이 세례 요한의 마음이 답답했을 것 같아요.

뿐만 아니라 지금 세례 요한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감옥에 갇혀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헤롯 대왕의 미움을 받아서 감옥에 갇혀 있는 겁니다. 헤롯 대왕은 아직도 떵떵거리면서 잘 살고 있고, 심판을 받지 않은 채, 그렇게 잘 살고 있는데, 자신은 억울하게 감옥 속에 갇혀 있는 그 상황을 보면서, 세례 요한의 마음 가운데 질문이 생기는 거예요. 하나님 내 나라가 온 것이 확실합니까?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하는데, 정말 메시아인 것 맞습니까? 그래서 사람을 보내서 예수님에게 물어봅니다. “예수님, 내 뒤에 오시겠다고 했던, 성경에서 약속해 주셨던 그 메시아가 온다고 했는데, 그 메시아가 예수님, 선생님이 맞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까?” 그때 해주셨던 예수님의 대답이 마태복음 11장 4절과 5절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지금 세례 요한의 눈에는 아무것도 변한 게 없어요. 계속해서 헤롯 대왕이 통치를 하고 있고, 로마 나라가 통치하고 있고, 자신은 감옥에 갇혀 있고, 아무것도 변한 것 같지 않은 그 상황 가운데서, 예수님께서 해주시는 말씀이 무엇이냐면, 그런데 전에 앞을 보지 못하던 사람들이 보게 되었고, 나병을 가지고 있던 사람의 몸이 깨끗하게 되는 일들이 여기저기서 하나씩 하나씩 일어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말씀해 주신 거죠. 세상이 확 바뀌지 않아서 너무나도 답답한 그 세례 요한을 향해서, 세례 요한을 향해서 해주시는 그 말씀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천지개벽을 하면서 오는 것을 기대하고 있었겠지만, 그렇게 오지는 않았을지라도 하나님 나라가 아예 없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저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하나씩 하나씩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2장 28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어쩌면 세례 요한이 바라볼 때는 변한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애게? 이게 뭐야?” 할 정도의 변화밖에 없습니다. 여전히 우리들의 눈앞에는 골리앗이라고 하는 그 대적이 꿈쩍도 하지 않고 서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해주시는 주님의 대답,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어떻게 오느냐? 천지를 진동하면서 완전히 바꾸어 버리는, 어떤 전쟁이 벌어지는 식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겨자씨처럼, 누룩처럼 이 세상에 오는 거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런데 그 겨자씨가 이 세상에 올 때, 겨자씨와 같은 것이 땅에 심겨졌을 때,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싹이 나고 자라고, 결국에는 큰 나무가 되어서, 거기에 수많은 새들이 몰려드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나라도 이와 같을 것이다”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쩌면 세례 요한의 고민이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고민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바는 무엇입니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쫙하고 응답해 주시고, 병 낫기를 위해서 기도하면 병이 사라져 버리고, 결혼을 위해서 기도하면 그냥 결혼하게 되고, 자식을 위해서 기도하면 자식이 생기고, 우리 속 썩인 우리 자녀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기도하면, 어느 날 갑자기 그 아이의 마음이 완전히 바뀌어버리고, 순식간에 변해버리는 그런 사건들이 자꾸만 있을 수만 있다고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아무리 기도해도 변하는 것 같지 않고, 코로나19의 상황은 끝나는 것 같지 않고, 아무리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도 우리 주변의 모습은 하나도 바뀐 것 같지 않고, 우리 가정에는 갈등이 계속 있고, 우리 자녀의 문제는 계속해서 생기고, 질병으로 인해서 고통받는 사람은 여전히 그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 모습을 보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치지고 쓰러지게 되는 겁니다.

정말 하나님의 나라가 있는 것이 맞습니까? 정말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고 하는 것이 맞습니까? 눈에 보이지 않고, 우리가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없을 것 같이 생각되는 그런 낙망스러운 이 시점에, 주님께서 해주시는 말씀이,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오는가? 마치 겨자씨처럼 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는 화려한 모습이 없이, 누추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더군다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까지 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무참히 살해당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수많은 제자들은 마음속에 절망감을 느꼈을 겁니다. 우리가 믿고 따랐던 메시아, 우리가 믿고 따랐던 그 예수님이 맥없이 쓰러져 있는 그 모습을 보면서, 모든 소망을 접었을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아무런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세계를 점령한,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을 우리가 함께 묵상하면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새로운 힘과 소망과 용기를 얻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언젠가 열정을 보였던 사람들도 신앙적으로 무기력해질 때가 있고, 그리고 절망과 그리고 낙망 가운데 빠질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들 눈앞에 아무런 변화가 없을 때면, 낙망하기가 쉽습니다. 예전에 제가 미국에서 조그마한 한 뉴햄프셔에 있는 그곳에서 목회를 할 때였습니다. 공부도 하면서 가서 목회를 하고 그랬는데, 그때 있던 교인들이 몇 명이었냐면은 한 열 명 남짓 되는 아주 작은 교회였습니다. 그 작은 교회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매주 말씀을 준비해가지고 전했는데, 몇 명 안 되는 그 교회니까 가족 같은 분위기고 사랑이 넘치고 그렇게 정말 따뜻한 교회였겠죠? 그렇게 생각을 하시면, 오해인데요. 세상에 그렇게 몇 명 안 되는 교회도 갈등이 있더라고요. 아무개 집사님 하고 아무개 권사님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로 한번 부딪혔어요. 부딪혀가지고 예배를 드리는데, 그 조그마한 예배당에 10명도 채 안 되는 그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데, 한 사람은 이쪽에 앉아서, 한 사람은 저쪽에 앉아서 말도 안 하고 예배를 드리는 냉랭한 기류가 흐르는 겁니다. 예배 후에 점심식사를 해도 한 사람은 안 먹고 가버리고, 제가 그 성도들 앞에서 설교를 하니, 제가 얼마나 마음이 불편하겠어요. 설교를 합니다. 뭐라고 설교를 합니까? 원수를 사랑하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설교하고, 원수 된 우리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셨다고 설교하고, 그렇게 매주 매주 목 놓아 울부짖었는데, 변화가 됐을까요? 안 됐을까요? 일 년이 지나도 똑같아요.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제 마음속에 지치고 낙망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한 번은 목사님한테, 대선배 목사님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목사님, 우리 교인들 가운데 이렇게 싸우고, 도대체 변화가 없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요? 지치고 힘들어서 못해먹겠습니다.” 그랬더니 그 목사님이 저를 위로해 주어서, 다시 한번 새 힘을 얻었던 기억이 납니다마는, 어쩌면 우리들의 모습이 그와 같습니다. 우리가 한때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기도 하고, 내가 열정을 보일 때도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아무런 변화가 없는 모습을 보고 절망하게 되기까지도 합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그랬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어마어마한 일을 이룬 사람이었습니다. 바알 선지자와 대결해서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제물을 불로 살랐던, 그런 어마어마한 기적을 체험했던 사람이 엘리아였습니다. 하지만 그 엘리야가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영적인 무기력감에 빠졌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기적을 보고도 이세벨이라고 하는 왕비가 여전히 살아서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그렇게 결심하고 있는 그 모습을 볼 때, 엘리야 선지자는 하나님 앞에 하소연하는 겁니다. “하나님, 이제는 더 이상 못해 먹겠습니다. 나를 죽여주십시오”

그러나 우리가 낙망하지 말아야 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이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것이지만, 그것이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결국 시간이 되면 하나님의 때가 되면 싹을 피우게 되는 것이고, 결국에는 수많은 새들이 날아들 수 있는 그런 가지로 나무로 성장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확신하면서, 담대하게 믿음으로 승리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것이죠. 우리들의 모습이야말로, 어쩌면 겨자씨보다도 더한 모습이에요.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를 향해서, 수많은 사랑을 베풀어주셨건만, 늘 배반하고 늘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 살고, 죄악을 저지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볼 때,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시겠어요. 그러나 그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고 실망하거나 포기한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인내하시고 참고 기다리시는 가운데, 약한 우리들을 변화시키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으로 치유해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신 것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이 세상의 것들이 변화되어 버리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낙망할 것이 아니라, 담대하게 믿음으로 바라보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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