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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사랑하신 하나님(삼하 12:24-31)

지난주에 우리는, 다윗이 범죄 한 그 범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심판하신 이야기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다윗은 우리아라고 하는 자신의 신복을 배신하고,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는, 그 충신의 아내를 취하는 죄를 저질렀을 뿐만 아니라, 우리아를 최전방으로 보내서 죽게 만드는, 교살하는 그런 파렴치한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러한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정말 악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심판하셨는데요. 그 심판이 무엇으로 나타났냐 하면,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낳은 정말 그 사랑스러운 아기를 죽이는 것으로 심판이 나타났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지은 죄가 결코 가볍지 않다고 하는 것을 생생하게 느끼게 만드는 사건이었고, 우리가 짓는 죄들이 사실은 정말 어마어마한 죄요. 정말 무거운 죄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깨달아야만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건이 있고 난 다음에,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좀 그 내용이 뭔가 다르게 전개가 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전개되는 이야기는 무엇이냐 하면, 아기가 하나 죽었지만, 이제는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또 다른 아기가 탄생하게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 아들을 낳게 되었는데, 그 두 번째 아들의 이름이 무엇이죠? 솔로몬입니다. 우리가 잘하는 다윗의 뒤를 이어서, 이스라엘의 제3대 왕이 된 그 솔로몬이 바로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솔로몬을 통해서 어마어마한 일을 이루어 나가신다고 하는, 그 나중의 이야기는 둘째로 치더라도, 이렇게 아기가 태어나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보내어서, 그 아기의 이름을 여디디아라라고 그렇게 부르게 하셨습니다. 이 여디디아라고 하는 말의 의미가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여호와의 사랑을 받은 자”라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첫 번째 아들은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죽이셨는데, 두 번째 아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고 사랑의 고백을 하고 계시는 것이죠. 이러한 모습을 볼 때, 어쩌면 마음이 불편할 분들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다윗이 누구인가? 바로 파렴치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은 사람이고, 그리고 이 솔로몬이라고 하는 사람은 바로 그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것은 축복받은 탄생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저주받은 탄생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은데, 정말 혐오스럽고 증오스러운 그런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이 솔로몬에 대해서 여디디아라 이름하시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라고 하는 그런 이름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세례 요한이 헤롯 대왕에 대해서 비난하고 책망한 이야기를 신약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헤롯이라고 하는 사람이 잘못한 것이 무엇이죠? 자기 동생 빌립의 아내를 취하여, 자신의 아내를 삼은 것이 바로 헤롯 대왕이고, 그 일에 대해서 세례 요한은 아주 잘못된 것이라고 강하게 비난하고 책망했던 이야기를 우리가 신약에서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헤롯 대왕에 대해서 정말 비난하고, 정죄하고 아주 책망해야 될 일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다윗을 향해서도 밧세바를 취한 것은 그것은 아주 악한 일이라고 책망해야 될 것이고, 그 맺어짐, 다윗과 박세바와의 그런 관계는 영원히 저주받을 그런 관계라고, 그 모습만 보면 치가 떨리고, 저럴 수가 있느냐라고 그렇게 해야 될 것 같은데, 놀랍게도 첫 번째 번째 아들이 죽고 난 다음에, 두 번째 아들에 와서는, 그런 것은 언제 있었냐는 듯이, “다윗이 언제 죄를 짓고 범죄 했느냐?” 하듯이, 다 까먹은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그 솔로몬을 향해서 여호와께서 사랑하는 자라고 하는 이름을 주셨다고 하는 것이 아주 놀라운 사실입니다.

두 번째로 오늘 본문에서 나오고 있는 이야기는 다윗의 왕궁이 점점점점 왕성해지고 아주 강대해졌다고 하는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충실한 장군인 요압 장군이 암몬 족속을 공격했는데요. 암몬 족속의 아주 강대한 성이었던 랍바라고 하는 성을 공격했습니다. 이 랍바라고 하는 것은 “아주 많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인데, 그러니까 아주 큰 성이고, 정말 대단한, 아주 큰 진지요, 성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 요압 장군이 그 성을 공격해서, 이제 완전히 다 무찌르게 되는 그 순간에, 자기가 그 공을 차지하지 않고, 참 착한 신하죠? 자기의 이름으로 그 성을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 왕이 친히 와서, 마지막 공격을 함으로 말미암아, 이 전쟁에서의 공로를 왕께서 차지하시라고 이야기하는 그 말을 듣고, 결국 다윗이 가서 전쟁에서 승리하였고, 면류관을 그 나라에서 왕에게서 빼앗아서 썼는데, 한 달란트나 되는, 정말 어마어마하게 무거운 왕관을 쓰게 되었고, 뿐만 아니라 수많은 물건을 노략하고, 그리고 백성들을 데려다가, 이스라엘 민족의 노예로 삼았다고 하는, 그러니까 이스라엘 민족이 당시에 강대국이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의, 다윗이 다스렸던 그 시대를 지금도 회상하고 갈망하면서, 그때 그 시대가 다시 돌아오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민족의 국기에 보면, 파란색으로 뭐가 하나 그려져 있는데, 뭐가 그려져 있죠? 별이 그려져 있는데, 그 별이 무슨 별이죠? 다윗의 별이라고 하는 별이 그려져 있어요. 이스라엘 민족들의 꿈이 뭐냐면, 우리가 다시 한번 다윗이 다스리던 그 시대의 영광을 회복했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이 이스라엘 민족들의 꿈인 것이죠. 그래서 그런 나라를 다시 회복하고, 그런 다윗과 같은 왕이 다시 오는 것이야말로 메시아가 오는 것이라고 생각, 생각하는 것이 이스라엘 민족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민족들이 다윗의 시대에 대해서 아주 좋게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오늘 본문의 말씀에 기록된 것처럼, 다윗이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기간 동안에 이방 민족들을 다 점령하고, 그리고 약탈하고 노략질했을 뿐만 아니라,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노예로 데려다가 다 부려먹었으니까, 당시 근동 지방에서 고대 근동 지방에서 이스라엘이 최고의 강대국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으니까, 이 이야기야말로 다윗의 시대에 아주 승승장구했다고 하는 그런 보고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 두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서 질문이 떠오르게 되는 겁니다. 다윗의 왕국이 강성해지는 거야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그 시점이 애매하다는 겁니다. 시점이 어느 시점이냐면, 다윗이 밧세바와 더불어서 죄악을 저지르고, 우리아를 교살했던 그런 파렴치한 범죄를 저지르고, 이런 일들이 다윗이 악한 일을 한 뒤에 이런 어마어마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말씀을 읽는 사람들이 혼란스러운 거예요. 하나님, 이럴 수 있습니까? 우리가 기대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우리가 기대하는 하나님은 악한 자에게는 심판하시고,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상을 주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기대하는 겁니다. 솔로몬의 경우를 보십시오. 솔로몬의 경우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까? 하나님 앞에 간구하기를 하나님 이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구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솔로몬의 마음을 보시고 기뻐하시면서, 부귀와 영화까지 주셨다고 했으니까, 그것은 우리가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럴 만하다 생각을 해요. 솔로몬이라고 하는 사람의 마음을 보았을 때, 그런 축복까지 주는 것 당연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어떤 순간이냐면, 다윗이 죄악을 저질렀어요. 나쁜 짓을 했어요. 그래서 심판이 있기는 있었지만, 그 간단한 심판이 끝나자마자, 또 다른 아들이 생기고, 또 그 아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사랑한다 말하시고, 또 이스라엘 민족이 강성해지는 그런 어마어마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되면서, 왜 이때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대우하시는지 우리가 질문을 던져보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악을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좋은 일들이 점점점 강성해지는 일들이 있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이럴 수는 없다고 하나님께서는 죄를 저지른 사람에게는 심판해야 마땅한데, 왜 이런 식으로 더 잘 대해주시는지, 사울왕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심판해 버리고 끝내 버렸는데, 왜 다윗의 경우는 왜 이런 일을 해 주시는지, 이 모습을 보면서 이것은 모순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가리켜서 불공평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반드시 기억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불공평하십니까? 하나님이 공평하게 행하십니까? 공평하지 않게 대우하고 계십니까? 오늘 다윗의 경우는 지금 공평하게 대우하고 계셔요? 불공평하게 대우하고 계시 불공평하게 대우하고 계시는 거예요? 원칙대로 하면 어떻게 하는 것이 정답이에요? 원칙대로 하면, 솔로몬도 죽여야 정상이에요. 원칙대로 하면 이스라엘 민족이 망해야 정상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망하게 만드시지도 않고, 솔로몬을 죽이시지도 않고, 오히려 사랑해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이것은 불공평한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향하여 불공평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공평한 대로 행하시지 않고, 불공평하게 행동하셨기 때문에, 저와 여러분들이 심판을 당하지 않고, 구원을 받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공의롭게 판단하시기 시작한다면, 하나님께서 공평하게 악을 행한 자에게는 심판하시고 선을 행한 자에게는 상을 주시기로 철저하게 완벽하게 공의롭게 공평한 하나님께서 행하시기로 결정하셨다고 한다면, 안타깝게도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모든 분들은 살아남을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하나님께서 우리가 행한 대로 갚으시고, 행한 대로 삼주시기로 결정하셨다고 한다면,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살아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이사야서 1장 9절의 고백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존자를 조금 남겨두지 아니하셨다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 악을 행하고 죄악을 범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 악을 행한 대로 갚으시기로 결정하셨다고 한다면, 소돔과 고모라처럼 유황불에 다 사라져 버리고, 단 한 사람도 남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공의롭게 판단하시고, 우리가 행한 대로 공평하게 판단하시는 것이 아니라, 과분한 사랑을 불공평하게 저와 여러분들을 향해서 주시기로 결정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지금도 살아있고, 이 세상이 지금도 움직이는 이유는 자연의 법칙이 있기 때문에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고, 또 참으시고, 천년이 하루같이 참으시면서, 한 사람이라도 모두가 다 회개하며 돌아오기를 기다리시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그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우리가 살아있는 것이지, 우리가 잘 나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아주 모범적으로 해서, 우리는 완벽하게 거룩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편 145편 8절 말씀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좋은 일이 있을 때, 그리고 일일이 술술 잘 풀리고 건강하고, 모든 것들이 다 만족스럽게 돌아가는 것처럼 생각되는 그런 상황을 맞이할 때가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힘들고 어렵고 고난을 당할 때뿐만이 아니라, 사실은 잘 나갈 때에도,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고난을 당할 때에, 이 고난은 물론 천편일률적으로 그 모든 고난이 죄로부터 유래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말씀드렸지만, 파이퍼 목사님의 그런 당신의 암을 쓰레기 취급하지 말라고 하는 그 글에서 말해주는 것처럼,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 그것을 가지고서 하나님께서 내 죄를 생각나게 하시고, 이제부터는 죄에 대해서 예전처럼 그렇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심각하게 생각해야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암이라고 하는 그런 선물을 주신 것을 그냥 헛되이 버리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한다고 한다면, 다른 사람이 고난을 당하는 경우에는 함께 울어주고, 함께 아파하고 해야 되겠지만, 내가 고난을 당한다고 하면, 내가 회개할 것이 없는지, 내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 것이 없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죄가, 고난이 다가와서 정말 힘들고 어려울 때만 우리들의 죄를 생각하면서 회개할 것이 있는가 없는가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언제 또 회개해야 되는가? 잘 나갈 때도 회개해야 된다는 거예요. 힘들고 어려울 때만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복을 내려주시고, 건강하고 장사도 잘 되고 자녀들도 잘 되는 그 상황 가운데서, 우리들의 마음이 교만해져서, 내가 이만큼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있어서, 내가 이런 것을 누린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지은 죄가 너무나도 큰데, 하나님께서 이런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내게 베풀어 주셨으니,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하는 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마땅한 자세인 줄로 믿습니다.

다윗이 지금 좋은 시대를 구가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태어나면서 하나님께서 그 아이를 여호와께서 사랑하신 자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전쟁에서 이겨서 그 큰 성읍 랍바를 물리쳤습니다. 그때 다윗이 가지고 있는 가지고 있어야 될 마음이 무엇일까요? “이제는 내가 하나님 앞에서, 내가 명함을 내놓을 수 있을 만큼 자격이 있으니까, 내가 이만큼 훌륭하니까, 내가 괜찮은 사람이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축복해 주시는 거겠지! 내가 하나님 앞에 이만큼 헌금도 드리고, 내가 하나님 앞에 이만큼 헌신도 하고, 내가 이만큼 잘하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만큼 어마어마한 축복을 주셨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가당치 않은 말이고, 그 축복 앞에서 자신의 죄를 돌아봐야 되는 거예요. 내가 지은 죄가 너무나도 큰데, 나에게 주시는 이 은혜가 왜 은혜며, 웬 축복입니까? 내가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숨 쉬며 살아있다고 하는 것 자체가, 내가 오늘 이 시간에 앉아서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하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사랑하는 자녀들이 있어서, 함께 자녀들과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하는 것 자체가, 내가 땀을 흘리고 수고한 대로 먹을 수 있는 그 힘과 능력을 주신 것이, 내가 잘나서 나는 저 사람보다는 깨끗하기 때문에, 내가 저 사람보다는 악을 행한 것이 없어서, 다른 사람들은 죄를 짓고 있어서, 저런 악을 저런 고통을 당하지만, 나는 아무런 죄가 없어서 이만큼 잘 먹고 잘 산다라고 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할 것이 아니라, 과분한 축복 앞에서 하나님 앞에, 밧세바와의 그런 끔찍한 죄와 살인 교살의 그런 끔찍한 죄에도 불구하고,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그 앞에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누가복음 13장 1절에서부터 5절의 말씀에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이르니,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모든 갈릴리 사람들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느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또 실로암에서 막대가 무너져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가정에는 정말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요. 그런데 우리 가정은 그런 일이 없어요. 어떤 가정은 정말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데,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우리들에게는 놀라운 축복을 주셨어요.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살게 만들어주셨어요. 다른 사람들은 질병 때문에 고통스럽게 살고 있는데, 건강한 몸을 가졌어요. 어떤 사람은 어제 죽었는데, 나는 아직도 오늘도 살아있어요. 그렇다고 한다면 내가 그만큼 하나님 앞에 충성했고, 그만큼 내가 거룩하게 살았고, 성경도 잘 읽고 기도도 잘하고, 내가 열심히 잘 살아서, 그래서 내가 이런 것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불공평하게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이런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누리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신 하나님이 마치 우리들의 부모님과 같아요. 자녀들이 잘 나서 사랑해 준 것이 아니라, 못나고 실수하고 잘못해도 끝까지 사랑해 주신 그 하나님. 놀라운 것은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외아들에 대하여서는 참지 않으셨어요. 십자가 위에서 울부짖는 예수 그리스도의 절교를 외면하시며, 저와 여러분들에게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신 줄로 믿습니다. 이사야서 53장 5절의 말씀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오.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도다.” 이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마음속에 새기면서, 우리가 잠자리에 들 때에도, 아침에 일어날 때에도, 사업을 하거나 그 어떤 일을 하거나, 내가 숨을 쉴 수 있다고 하는 것만 가지고도, 하나님께 감사할 뿐만 아니라, 교만할 것이 아니라, 그 잘 나가면 잘 나갈수록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회개하며 엎드릴 수 있는, 그런 믿음의 모습들이 나타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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