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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을 잃은 다윗(삼하 12:15-23)

하나님은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낳은 아들을 치셨다. 이것은 다윗의 죄에 대한 심판이었다. 죄와 고난 사이에 분명한 연관이 있는 경우였다. 하지만 모든 고난이 죄로부터 오는 것은 아니다. 욥의 경우에서처럼, 또는 태어나면서부터 맹인인 사람처럼, 죄와는 상관없이 오는 고난도 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고난을 겪는다면, 무슨 죄를 지어서 그런 고난을 당할까를 질문해서는 안 된다. 고난 당하는 자를 보면, 위로하고 공감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내가 고난을 당한다면, 혹시라도 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벗어난 것이 없는지 물어야 한다.

다윗은 자신의 죄 때문에 아기가 죽을 지경에 있다는 것을 알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렸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윗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았다. 아기는 죽고 말았다. 그런데 다윗은 놀랍게도 아기가 죽자 평상의 삶으로 태연하게 돌아갔다. 다윗이 이런 태도를 보인 것은 운명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다윗은 하나님의 섭리와 선하심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다윗의 소망은 아기를 살리는 것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른 뜻을 가지고 계셨다.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서 다윗은 머리를 숙인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실 때 나올 수 있는 태도였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시지 않는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지만, 자신들의 욕심이 우상이 되고 하나님은 그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래서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는 것 같으면, 하나님이 아무런 효용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버린다. 하지만 다윗의 태도는 그러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하나님이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결정을 신뢰하고 믿고 그 앞에서 잠잠할 수 있었다.

미국 베들레헴 침례교회 John Piper 목사님은 “당신의 암을 쓰레기 취급하지 마시오”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암에 걸렸던 그 목사님은 수술을 받기 전에 왜 하나님께서 내게 암을 주셨을까를 묵상하면서, 이것은 나를 파멸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은혜로운 선물로 주신 것임을 깨달았다. 쉽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나를 사랑하사 주신 선물이기에 함부로 버리거나 쓰레기 취급할 것이 아니라, 그 뜻을 발견하고 잘 사용해야 한다는 뜻에서 “당신의 암을 쓰레기 취급하지 마시오”라는 글을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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