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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아는 누가 죽였나?(삼하 11:14-27)

다윗이 자신의 죄를 덮으려고 했던 계획은 첫 번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우리아를 불러서 우리아를 밧세바의 집으로 들여보냄으로 말미암아, 밧세바의 임신이 자신과의 불륜에서 나온 것이었다고 하는 것을 은폐하려고 했던 그 시도는 충성스러운 종 우리아의 거부로 말미암아, 그가 집으로 가지 아니하고 성중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자고, 전쟁터로 돌아감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그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다윗이 더 큰 계획을 세웠습니다. 더 무서운 계획을 꾸민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아를 전쟁터 최전방으로 보내서 죽이겠다고 하는 계획이었습니다. 아마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고 한다면, 다윗이 속으로 이런 말을 하면서 우리아를 보냈을 것 같습니다. “그러길래 진작 집으로 가지. 왜 안 간단 말이야? 네가 네 죽음을 자초한 거야.” 하면서, 어쩌면 독백을 하면서 이 다윗이 우리아를 전방으로 보내게 되었을 것입니다. 결국 전쟁터로 돌아간 그 우리아는 최전방에 보내어져서, 암몬 족속 적의 손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오늘 본문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이 일을 진행함에 있어서 다윗은 요압 장군에게 편지를 써서 지시했습니다. 요압 장군이 누굽니까? 요압 장군은 다윗과 함께 평생을 동거동락했던, 정말 믿을 수 있는, 다윗이 신뢰할 수 있는, 그런 장군에게 특별 부탁의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에 쓰인 내용이 아주 노골적인 내용입니다. 그 명령이 이렇게 기록돼 있는데요.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맨 앞에 세워놓아라. 전쟁을 할 때, 정말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는 그 현장 가운데, 우리아를 집어넣어라. 이야기하고 있고, 그리고 그렇게 우리아를 최전방 가운데 집어넣은 다음에, 나머지 사람들은 뒤로 물러서라. 함께 싸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은 뒤로 물러서서, 우리아만 그 자리에 남겨두라고 이야기를 한 겁니다. 그래서 결국 그가 접근해 창과 칼과 칼에 맞아 죽게 하라고 하는 아주 구체적이고 아주 노골적인 살인교사의 편지를 요압 장군에게 보내줬는데, 그 편지를 우리아 본인이 지니고, 요압 장군에게 전해주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다윗의 편지를 받은 요압은 이 다윗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고 순종하는 것이 옳았을까요? 거부하는 것이 옳았을까요? 거부하는 것이 옳았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물론 군인이라고 한다면 왕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군대라고 하는 특성상, 하급자는 상급자의 명령을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것이 군대이고, 절대적인 복종이 무너져 버리면, 그 군대는 군대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사실 상급자의 명령이라고 하면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태도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순종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순종? 순종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이해하고, 내가 납득이 되고, 내가 생각해 볼 때 합당하고 동의가 되어야만 순종하는 것을 가리켜서 순종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순종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순종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이해가 되지 않고, 납득이 되지 않고,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설득이 되지 않는 그런 상황에서조차도 순종할 수 있는 것, 따르는 것이 그것이 바로 순종의 본질이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겠습니다.

성경적인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성경적인 가르침은 위에 있는 권세에게 복종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법칙입니다. 로마서 13장 1절과 2절의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돼 있는데요.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누구의 명을 거스름이니?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적인 관점에서, 우리는 위에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는 자에게 복종하는 것이, 그것이 성경적인 원칙이라고 하는 것을 먼저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은 누구에게 복종해야 됩니까? 부모에게 복종을 해야 해요. 왜냐하면 자녀들에 대한 권세가 부모에게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적인 가르침은 무엇인가? 부모의 말씀에 자녀가 순종하는 것이, 그것이 성경적인 관점에서 옳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고, 우리 자녀들을 양육할 때 부모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가르쳐줄 필요가 있는 것이죠. 그런데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할 때는 언제 순종해야 되는가? 내가 생각해 보고 합당하기 때문에 순종하고, 하나님께 우리 권세를 지니고 있는 자가 결정한 것이 내가 이해가 되니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경우에 있어서는 내가 이해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내 위에 있는 권세가 권세를 가지고 있는 분이 이야기를 한다고 하면, 그 말씀에 따르고 순종하는 것이 그것이 성경적인 관점에서의 순종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졌는데요. 성경 66권의 말씀이 주어져 있는데, 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듣고 순종해 나갈 때, 그 하나님의 말씀은 때때로 우리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라고 하는 그런 말씀들, 그 말씀을 우리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되지 않아요. 이 험악한 세상에서 나를 핍박하고 나를 저주하는 사람을 위해서 축복하고 기도해 주라고 하는 그 말씀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이해가 되지 않아요.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이 세상에서 무시를 당하게 될 것이고, 이 세상에서 그런 식으로 살면 다 빼앗겨버리게 될 것이고, 이 세상에서 그런 식으로 살면 정말 명함도 내밀지 못하고, 정말 핍박만 당하면서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 살 것만 같아요. 우리의 생각으로는 누군가 나에게 해를 끼치면, 몇 배로 갚아줘 버리고, 원수를 갚아버리고 내가 만만하지 않다고 하는 사실을 본때를 보여줘야, 그래야 사람들이 나를 함부로 대하지 않을 거라고 하는 그런 생각이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순종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순종하는 거예요. 예수님도 하나님 앞에 순종했는데, 십자가를 지라고 하는 그 명령을 들을 때, “하나님께서” 죽으러 가라고 말씀하시니까, 순종하는 거예요. 내가 이해가 되고, 내가 다 납득이 돼야,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의 본질이라고 하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돌보시고 주관하시는 그 하나님께서, 권세를 가지신 그 하나님께서 내게 명령해 주시는, 그 명령이 나를 죽이기 위해서 하는 명령이 아니고, 나를 밟아버리기 위해서 하시는 명령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의 영적인 복락을 위하여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주시는 명령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신뢰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고 성경 말씀 가운데 우리가 순종해 나가는 것이 그것이 바른 우리들의 자세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했으면, 먹어야 됩니까? 안 먹어야 됩니까> 안 먹어야 돼요! 그런데 그 선악과를 바라보면서, 왜 하나님께서 이걸 먹지 말라고 하셨을까? 다른 것은 다 먹으라고 하면서, 왜 이것을 먹지 말라고 하셨을까? 먹으면 맛있을 것 같은데, 먹으면 지혜롭게 할 것 같은데, 먹으면 눈이 밝아질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들더라도, 하나님께서 건들지 마라. 그랬으면, 어떻게 해야 돼요?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권세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죠? 순종하지 못하는 경우는, 언제 순종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권세를 인정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순종하지 못하는 거예요. 내 마음의 왕자에 하나님이 앉아 계신 것이 아니라, 내가 앉아서 내가 모든 것을 판단하고, 내가 옳은가 그른가를 내 마음으로 판단하고, 심지어 하나님이 하신 말씀도 하나님도 내 생각으로 판단해서, 내가 판단하고 결정하고, 따를까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 순종하지 않는 거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지 않는, 아주 악한 모습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어렸을 때, 부모님 밑에서 자라면서 자녀들은 부모님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녀들은 게임기를 가지고 놀기 시작하는데, 그 게임기를 가지고 노는 게 얼마나 재밌는지 몰라요. 정말 게임기를 가지고 노는 게 정말 재밌고, 너무나도 즐거워서, 그 게임기 가지고 열심히 하고 있는데, 그 열심히 게임기를 갖고 있는 그 우리 자녀들을 향해서 부모님이 무슨 말을 하죠? “얘야, 이제는 게임 그만하고, 자거라.” 이해가 됩니까? 안 됩니까? 우리 자녀들이 이해를 해요? 못해요? 이해를 못 해요! 왜 지금 자야 되는데? 왜 지금 자야 되냔 말이에요? 게임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게임 더 하고 자면 안 돼? 부모가 지금 게임을 중단하고 자라고 하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겁니다.

3살 4살 꼬마 아이들에게 말을 합니다. “얘야, 잠자려고 하는데, 양치하고 자야지.” “왜 양치해야 되는데요? 왜 어제 양치했는데, 왜 오늘 또 양치해야 되는데요?” 이해가 안 돼요. 하지만 우리 자녀들은 부모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부모님이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이고, 그 부모님은 우리 자녀들을 괴롭히기 위해서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녀들을 못살게 굴기 위해서, 게임을 그만하게 하고, 그 아이를 정말 하기 싫은 것을 하게 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서, 그런 명령을 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 명령을 해주시는 것이죠? 우리 자녀들을 너무나도 사랑해서. 우리 자녀가 건강하게 살았으면 좋겠고, 우리 자녀가 정말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고, 성공하는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런 마음에서, 우리 자녀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주면, 순종하는 게 맞아요? 순종하지 않는 게 맞아요? 순종하는 것이 원칙이고,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되는 것이죠.

군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적인 관점은 모든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는 거예요. 모든 시스템 속에서, 이 사회가 사람들의 인격은 동등하지만, 일을 해 나감에 있어서, 상하관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어느 단체나 어느 조직을 이끌어 나감에 있어서, 그 조직을 이끌어 나가는 책임자가 있고, 권한을 가진 자가 있고, 그 밑에서 같이 따르고 일해야 되는 시스템인데, 이 상황에서 내가 저 사람보다 못하기 때문에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인 원칙은 나보다 위에 있는 권세에게, 어느 한 조직과 어떠한 가정과 어떠한 모든 그 그룹에 그 지도자에게 순종하는 것이 성경적인 관점에서 그게 바른 원칙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까 군인도 왕의 명령을 따라야 됩니까? 따라야 되지 안 따라도 됩니까? 따라야 되는 거예요. 하지만 다윗이 요압에게 우리아를 최전방으로 보내어서, 적군의 창과 칼과 활에 맞아 죽게 만들어라고 하는 이 명령은 순종하는 것이 좋을까요? 순종을 안 하는 것이 좋을까요? 지금까지 제가 순종해야 된다고 한참 얘기를 했는데, 그런데 이 경우는 순종 안 해야 되는 거예요. 원칙은 순종하는 거예요. 원칙은 원칙은 순종하는 게 원칙입니다. 이해되지 않아도 순종해야 되고, 마음에 들지 않아도 순종해야 되고, 내 마음과는 달라도 결정되었으면 따라야 되는 것이고, 그게 원칙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군인이 왕의 명령에 국군 통수권자의 명령을 듣는 것,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다윗의 이 사악한 명령에 대해서는 거부하는 것이 옳습니다. 제가 앞에 말한 거 하고 지금 뒤에 말한 거하고 좀 달라서, 좀 혼란스러울 수가 있겠는데요. 다윗이 내린 이 명령은 엄격하게 말해서 잘못된 명령이고, 사악한 명령이며,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일이기 때문에, 이 순간에 군인이라고 할지라도, 순종하는 것이 당연한 군인이라고 할지라도, 이 순간에는 순종하지 않고 거부하는 것이, 그것이 옳은 행동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사울왕은 부당한 명령을 내린 적이 있습니다. 다윗 일행에게 떡을 주고 먹을 것을 주고 그리고 골리앗이 가지고 있었던 칼을 다윗에게 주었던 그 제사장이 결국 들통이 나서, 사울 왕 앞에 잡혀 오게 됐습니다. 사울은 분노가 일어서, 이 제사장들을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왜 우리나라에서, 지금 이 이스라엘 나라의 주권자가 사울 왕인데, 사울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잘못된 일을 한 그 제사장을 향해서, 다윗을 도와준 그 제사장을 사울은 용납할 수가 없었고, 분노가 차서, 자기 옆에 있던 호위병들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저 제사장의 목을 쳐라.” 그래서 그때 그 옆에 있던 호위병들이 제사장의 목을 쳤었던가요? 안 쳤었던가요? 호위병들이 두려워하여, 죽이지 않았어요.

사울왕의 명령이지만, 그 명령 앞에서 거부하고, 거부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해요? 내가 죽을 수도 있는, 사울왕의 심기를 건드려서, 내가 죽을 수도 있는 그 상황 가운데서, 거부한 거예요. 거부. 왜? 그 일개 병사들이 보았을 때도, 이것은 거부해야 될 거라고 하는 확신이 그들의 마음 가운데 들어 있었기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결국 그래서 제사장이 살아온 것은 아니고, 그 옆에 있던 사람이 신고했던 그 사람이 결국 죽이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문제가 있어요. 여기에 우리의 고민이 있어요. 누군가 우리 위에 있는 권세 있는 사람이 어떤 일을 명령했는데, 예를 들어서 우리 부모님이 명령했는데, 혹은 우리 교회의 목사님이 명령했는데, 혹은 우리의 구역장이 이야기를 했는데, 혹은 우리의 장로님들이 말씀을 해주었고, 혹은 우리 국가 지도자가 이야기를 하고, 아니면 공무원의 부서장이, 혹은 우리가 일하는 곳에 사장님이나, 그 어떤 분들이 명령을 했을 때, 그 명령을 내가 이해할 수 없고, 그 명령에 대해서 내가 납득이 안 되고, 도무지 왜 이런 명령을 해주시는지 이해가 안 될 때, 순종하는 것이 맞습니까? 그 명령을 거부하는 것이 옳습니까?


그냥 쉽게 순종하는 게 옳다. 그냥 쉽게 그럴 땐 거부하는 게 옳다. 둘 중의 하나, 답으로 딱 떨어지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우리의 인생은 그런 게 없어요. 매 순간순간마다 고민해 봐야 되는 거예요. 고민해 봐야. 순종해야 될 것인가? 거부해야 될 것인가? 기본적으로는 순종해야 돼요. 그런데 때대로 거부해야 하는 것이 있을 수 있어요. 그래서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하나하나 그때그때마다, 우리의 악한 본성 때문에 내가 모든 것을 판단하려고 하는 교만함 때문에 거부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엎드리고 기도하는 가운데, 이 명령만큼은 도무지 수행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 그런 믿음의 고백에서 거부하는 것인지, 진지하게 하나님 앞에서 그 문제를 가지고 고민해 나아가야 하는 것이고, 신앙생활이 그래서 쉽지가, 신앙생활이 쉽지가 않아요. 그냥 다 거부해 버리던가 다 순종해 버리던가 해버리면 생각 없이 해버리면, 얼마나 편하고 얼마나 쉽겠어요?

요압 장군의 경우는, 대부분의 명령에 대해서는 순종하는 것이 옳았습니다. 위에 있는 권세가 바로 다윗이었고, 왕이 국군 통수권자이고 자기는 장군이기 때문에, 왕의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 전쟁은 지는 것 같은 전쟁인데, 그래도 왕이 가서 싸우라 말하면, 가서 싸워야 할 필요가 있는 겁니다. 이 작전은 내가 보기에는 성공할 수 없는 작전 같은데, 그래도 왕이 명령하면 순종해야만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때에 따라서는, 하나님 앞에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질문을 던지는 가운데, 질문을 던지는 가운데, 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이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고백할 수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양극단을 피해야 합니다. 무조건 복종하고,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으면서, 맹목적으로 복종하면 된다. 권세는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니까, 위에 있는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오. 그러니까 명령하기만 하면, 이게 옳은지 그른지 판단할 것도 없고, 그냥 무조건 맹목적으로 순종해도 된다고 하는, 그런 맹목적 복종하는 것도 잘못이고, 정반대로 사사건건 내가 이해 못 하면, 나는 못합니다. 설명해 보세요. 나를 좀 납득시켜 보세요. 그냥 명령만 하지 말고, 내가 좀 이해할 수 있게 해주지 않으면, 나 못합니다. 그렇게 사사건건 복종하지 않는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도, 그것도 잘못이고,

정말 우리들의 마음의 태도는 기본적으로 모든 것들을 복종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만,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 앞에서 진지하게 고민해 볼 때, “이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순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라고 하는 말을 해야 되는데요.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되죠? 내가 죽어요. 다윗이 누구를 죽이겠어요? 요압을 죽이는 거죠. 안타깝게도 우리나라는 악한 사람들의 잘못된 명령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지식을 반납한, 생각을 반납한 사람들처럼, 나는 공무원이니까, 위에서 시키는 대로 다 해. 나는 경찰이니까, 위에서 시키는 대로 다 해. 나는 군인이니까, 위에서 시키는 대로, 가라 하면 가고, 우리 국민을 향해서 총 쏘라면 총 쏘고, 그냥 시키는 대로 다 하는, 아무런 생각 없이 살던 그 사람들에 의해서, 정말 비극적인 그 역사를 우리가 지금까지 겪어와야만 했습니다.

그때 우리 성도님들이 그 순간에 믿음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아무리 총과 칼이 내 눈앞에 들어온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맞지 않기 때문에, 나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런 믿음의 고백이 정말 아쉬운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역사입니다.

결국 우리아가 전쟁터에서 죽었습니다. 우리아는 누가 죽인 겁니까? 적군에 칼에 맞아, 화살에 맞아 죽었겠지만, 결국 우리아를 죽인 것은 그 적군이 죽인 것이 아니라, 다윗이 죽인 것이고, 우리아를 죽인 것은 뇌를 반납해 버리고, 아무 생각 없이 왕의 명령을 따랐던, 요압이 죽인 것입니다.

요압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결국 다윗의 계획은 성공한 것 같았습니다. 우리아는 전사 했고, 이제 합법적으로 다윗은 밧세바를 아내로 맞이하게 될 수가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다 성공한 것 같았습니다. 골치 아픈 거 다 제거되었고, 모든 다 다윗을 괴롭게 하는 모든 것들이 다 제거된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결코 성공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무엘하 11장 27절 마지막 부분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성공한 것 같아도, 성공한 것 같아도, 그 일을 냉철하게 바라보고 계시는 하나님이 계신 거예요.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서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악한 것이라고 선언해 주고 계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성공한 게 아니라, 실패한 것이고요. 다윗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될 그 상황 가운데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얼마나 악한 사람입니까? 다윗은 사울만큼 악했습니다. 사실 이렇게 적진에게로 사람을 보내서, 그래서 적군의 칼에 맞아 죽게 만드는 그 방법을 사용한 사람이 다윗 말고 또 있었습니다. 누가 그런 작전을 썼었죠? 사울왕이 썼어요. 사울왕이 누구한테 썼어요. 다윗한테 썼어요. 다윗한테 사울이 다윗을 죽이기 위해서 했던 작전이 뭡니까? 이 다윗을 내가 죽이고 싶은데, 모든 사람들이 다윗에 대해서 열광하고 있으니, 내가 함부로 죽일 수는 없고, 결국 내가 손쉽게, 내가 손 안 대고 코 푸는 방식으로 어떻게 죽여야 되겠다. 다윗을 블레셋의 전쟁터로 보내서, 그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계획을 짰어요. 그래서 어떻게 얘기했습니까? 자기 딸 미가를 내걸고, 다윗을 내가 사위로 맞이해 줄 테니까, 왕의 사위가 되려고 하면, 지참금을, 어지간해서는 용납이 안 될 텐데, 사울은 아주 근사한 사람이니까,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 적군의, 블레셋 사람들의 포피 100개만 잘라가지고 오면, 내가 너를 사위로 맞이해 주겠다고 하는, 뻔뻔한 거짓말로, 계략으로 다윗을 전쟁터로 보낸 겁니다.

그 전쟁터에서 다윗이 죽을 수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사랑해 주셔서 구원해 주시고, 하나님께서 그 다윗에게 기름 부어주시고, “내가 너를 왕으로 삼아주시겠다.” 하셨던 그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다윗이 블레셋과의 전쟁터로 갔을 때, 그를 죽일 수 있는 그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셨는데, 그 다윗이 똑같은 악한 일을 행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아를 죽이기 위해서 전쟁터로 보내는 거예요. 얼마나 사악한 모습을 보이는지 몰라요. 누가 더 사악합니까? 사울이 사악합니까? 다윗이 더 사악합니까? 사울은 미수, 미수로 끝났지만, 다윗은 성공해 버렸어요. 죄질로 따지면, 다윗이 더 악하고, 더 나쁜 인생이 된 것이죠.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사람들이 볼 때는, 그냥 어쩌다 보니까 전쟁터에서 안타깝게도 한 영웅이, 한 군인이 죽었다고 생각했겠지만, 전쟁하다 보면 이 사람도 죽이고 저 사람도 죽이니, 그 죽이는 가운데 우리아도 죽은 것이라고 생각을 했겠지만, 그 모든 것들이 다 감추어진 것이 아니라,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다윗의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했다고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더 이상 악을 행할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자꾸만 은폐하고 숨기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그 죄를 모르고, 오히려 나를 향해서 박수 쳐주고, 인정해 주고, 참 우러러보고, 좋아해 줄 때,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주는 그 모습에 우리가 스스로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심장을 꿰뚫어 보시는 우리 주님이 계십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누군지 아무도 몰라요. 저는 여러분들이 다 좋으신 분들 같아요. 다 믿음도 좋으시고, 다 사랑이 많으시고, 다 인격적이시고, 너무나도 좋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꿰뚫어 보셔요. 은밀한 그 죄까지도 꿰뚫어 보시고, 나의 그 완악한 마음, 나의 그 미워하는 마음 하나하나까지, 다 꿰뚫어 보시는 그 주님 앞에,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엎드리고 회개하며 나아가는 것이 그게 우리가 살 길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다윗도 저렇게 깊은 나락에 떨어졌다고 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더욱 더 큰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입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우리의 선함으로 하나님 앞에 갈 수 없기에, 우리의 죄를 씻어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저 아름답고 깨끗하고 멋진 곳에서, 우리를 씻기시기 위해 죄의 시궁창 속으로 들어와서, 우리를 씻기시고 회복시키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그 놀라운 은혜를 주님께서 베풀어주셨기에, 그 은혜를 바라보며 오늘 또 주님 앞에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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