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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같은 선지자(신 18:15-22)

모세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였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민족을 이끌고 나와 홍해 바다를 가르고 광야의 길을 인도한 사람이 모세였고, 유대 민족에게 율법을 준 것도 모세였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유대인들은 모세를 다윗과 더불어 위대한 영웅으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신앙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모세는 그냥 하나님의 도구였을 뿐이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적이었고, 그때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어 사용되었을 뿐이다. 10가지 재앙의 현장에 모세가 있었고, 홍해가 갈라질 때 그 자리에 있었지만, 모세가 있어서 그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모세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있었더라도 충분히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이루실 수 있었다. 그러므로 교만한 마음이 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모세는 시간이 흐르면서 교만한 마음이 들었다. 마치 자기가 모든 이적을 행하는 것처럼 생각했다. 그래서 반석에서 물을 내려고 했을 때,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반석에서 물을 내랴?”라고 외치면서 분노하였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고 자신이 무엇인가 된 것처럼 교만해졌던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처럼 일하라는 것이다(벧전 4:10). 무슨 일을 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처럼 해야 한다(벧전 4:11). 안타깝게도 모세는 그런 점에서 실패했다. 그 결과 결국 모세는 가나안 땅에까지는 들어갈 수 없었다.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냥 방치해두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지도자를 세워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다. 그렇게 해서 모세의 뒤를 이은 사람이 여호수아였다. 여호수아의 영도하에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호수아도 한계가 있었다. 그도 역시 수명이 다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일으키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여호수아에게서 일차적으로 성취되었지만, 여호수아만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그 약속은 예수님에게서 온전히 성취되었다. 그래서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을 모세와 비슷하게 묘사한다. 아기 때 죽을 수밖에 없는 위기 가운데 모세가 태어났던 것처럼, 예수님도 하마터면 헤롯 왕에 의해 죽임을 당할뻔 했었다. 모세가 만나와 메추라기로 이스라엘을 먹인 것처럼 예수님은 오병이어로 이스라엘을 먹이셨다. 모세가 십계명과 율법을 준 것처럼,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말씀을 하셨다. 모세가 홍해를 갈라 바다를 무사히 지난 것처럼, 예수님은 물 위를 걷기도 하셨다. 하지만 예수님이 모세와 닮지 않는 점도 있었다.

모세는 한없이 나약한 지도자였다. 율법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었지만, 본인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교만의 죄를 범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게 율법이 가진 한계이다. 율법은 선한 것이지만, 그 누가 완벽하게 살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다.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율법을 완전히 지킴으로써 완벽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셨다. 요한복음은 율법은 모세로부터 왔지만,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요 1:17).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성탄절은 우리를 다시 회복시켜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난 날이다. 성탄을 앞에 둔 이 시점에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한번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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