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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도움은(시 121:1-8)

하나님은 우리를 돕는 분이시다. 시편 기자는 자신을 돕는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로부터 온다고 고백하였다. 그런데 그런 도움이 오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그는 눈을 들었다고 표현한다. 눈을 들어보니,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이 오는 것을 보고 찬양한 것이다.

문제는 우리에게 도움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를 항상 도우시고 계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도움이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할 때가 많다. 최악의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진정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은 부모님인 것처럼,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도우시기 원하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부인하면서 도움이 없다고 생각한다.

성도들도 종종 하나님의 도우심을 망각할 때가 많다. 엘리야가 그랬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기도 했지만, 이세벨 왕비가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엄포를 놓았을 때 절망하고 말았다. 마치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는 사람인 양 그는 괴로워하면서 죽기를 원했다. 우리는 눈을 들어야 한다. 하나닙의 도우심이 있다는 사실을 보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의 제목은 영적인 눈을 뜨게 해달라는 기도이어야 한다.

시편 기자는 산을 향하여 눈을 들었더니 하나님께서 도우신다는 사실을 보았다고 고백하고 있는데, 왜 산을 보았을까? 그러니까 우리도 자연을 찾아가고 산을 찾아가야 하나님의 도우심을 볼 수 있다는 말일까? 그렇지 않다. 사실 여기서 말하는 산은 커다란 장애물일 수 있다. 그런데 시편기자는 그러한 장애물만 보고 좌절하지 않았다, 그때 눈을 들어서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계심을 보았다. 우리는 그렇게 묵상해야 한다.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즉 아무런 허점이 없으시다. 하나님은 모든 환난에서 우리를 보호하신다. 일부만이 아니라 모든 환난에서. 더 나아가 하나님의 도우심은 아무런 한계가 없으시다. 인간의 도움은 일시적이지만, 그의 도우심은 영원하시다. 물론 우리들이 완벽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의 삶은 고난의 연속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고난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멸망시키시는 분이 아니시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으로 이끄시는 분이시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고 힘을 얻어야 한다. 또한 어차피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이니까, 우리의 인생을 마음대로 살아서도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왜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고 도우시는가? 왜 우리는 그 사실을 잘 믿지 못하는가? 그 이유는 우리의 모습이 너무 더럽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사람도 하나님께서 도우실까?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 아들의 절규를 외면하셨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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