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닫기

잃은 양(눅 15:4-7)

목자가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 99 마리의 양을 버려두고 결국 찾을 때까지 최선을 다하고, 결국 찾게 되면 너무나도 기뻐서 동네 사람들과 잔치를 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비유를 오해하면 안 된다. 이 비유는 어떤 공동체나 단체를 이끌어갈 때, 100%를 다 끌어안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아무리 절대 다수가 원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소수가 반대하면 일을 진행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렇게 일을 할 수는 없다.

잃은 양의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도 모든 사람을 다 품으신 것은 아니었다. 세리를 받아들이시기는 하셨지만, 바리새인들을 향해서는 독설을 퍼부으셨다. 그들이 표적을 요구할 때에는 거부하셨고, 그들을 향해서 외식하는 자들이라 하면서 저주를 선언하시기도 하셨다. 물론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끌어안는 것은 바람직하겠지만, 소수의 횡포에 휘둘릴 것도 아니다. 잃은 양의 비유는 그런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잃은 양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바리새인들이 세리들을 영접하신 예수님을 비난했기 때문이었다. 바리새인들의 비난은 어쩌면 정당해 보인다. 세리는 오늘날로 치면 파렴치범 조*순과 같은 사람에 비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감옥에서 예수를 믿고 회개했다고 하면서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그것을 환영할 사람은 없다. 그럴 수는 없다고 반발할 게 분명하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인을 아무런 감정이 없이 처단해버리고 마는 심판자로 바라보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으로 보신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모든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저 사람은 반드시 사형을 시켜야 한다고 할지라도, 부모는 그 사람을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그게 부모의 마음이다.

목자는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 99마리의 양을 들판에 두고 간다. 99마리가 덜 중요하기 때문이 아니다. 한 마리를 향해 찾으러 가는 이유는 그 양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많은 자식이 있어도, 아픈 자식이 있으면 나을 때까지 그 아이에게 가장 마음이 가고 그 아이에게 온갖 정성을 다 쏟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 독생자를 버려두고, 우리를 살리셨다. 목자는 몇 번 찾아보고 포기하지 않는다. 끝까지 찾는다. 그 양을 자식처럼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의인에게만 해와 비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악인에게까지 주시기 때문에 악인인 우리가 그런 혜택을 받으면서 산다. 더 나아가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가 그런 사랑을 먼저 받았으니까 말이다.

Loading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