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닫기

마음이 청결한 자 (마 5:1-12) – 팔복강해 6

2021년 2월 7일 주일예배 설교 – 팔복 강해 시리즈 6

요즘에는 안경을 쓰신 분들이 참 많이 있는데요. 여러분들은 안경을 언제부터 쓰셨습니까? 저는 대학 다닐 때부터 안경을 쓰게 됐는데요. 고등학교 시절에는 눈이 아주 좋았습니다. 1.5, 2.0 정도면 좋은 거죠? 괜찮은 거죠? 늘 눈이 좋다고 생각하면서 살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제가 공부를 하면서 칠판에 있는 글씨가 한 번도 안 보인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안경을 쓰게 된 계기가 언제냐 하면, 대학 시절에 <미션>이라고 하는 영화가 나왔는데요. 아주 명작이라고 해서 친구들과 함께 미션이라고 하는 영화를 보러 갔습니다. 그런데 맨 뒤에 앉게 해 주더라고요. 그래서 그 영화를 보는데, 자막에 있는 글씨가 하나도 안 보이는 영화를 보는데,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아무것도 알지 못해서, 그냥 공친 다음에 충격을 먹고 당장 안경을 맞췄던 기억이 있습니다.

눈이 나쁜데도 나쁘지 못했다고 생각한 이유가 있었다고 한다면, 저는 늘 교실에 앉으면, 맨 앞자리에 앉았습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늘 앞자리만 앉았기 때문에, 글씨가 안 보인 적이 없었고, 늘 잘 보여서 눈이 좋은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눈이 나빠져 있었고, 그래서 나중에 안경을 쓰게 됐는데, 너무 선명하게 보이니까 너무 좋더라고요. 그런데 그 안경도 이물질이 끼면, 잘 안 보이게 됩니다. 오늘 또 제가 잘 안 닫고 나왔는지, 좀 약간 뿌여서 선명하지 않게 보이게 되는데, 만일 우리들의 안경 가운데 이 물질이 묻어 있거나 잘 닦여 있지 않는다고 하면 선명하게 볼 수가 없게 되는 겁니다.

더군다나 색안경을 쓰게 된다고 하면, 빨간색 안경을 쓰게 되면, 온 세상이 빨갛게 보이게 돼서, 왜 이 세상이 빨갛느냐고? “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 하면서 혼자 불평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잘 보이려고 한다고 하면, 안경을 잘 닦아야 합니다. 잘 닦고, 거기에 아무런 이물질이 없어야, 이 안경이 깨끗해야, 사물을 제대로 잘 볼 수가 있는 것이죠.

마음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오늘 주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음이라고 하는 것도 청결하게 잘 닦여져 있어야, 그리고 먼지가 끼어 있지 않아야 볼 수 있는 것인데, 만일 마음 가운데 잘 닦여 있지 않다고 한다면, 더러운 것이 끼어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고, 오로지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주 간단한 말씀인데요. 그런데 이 말씀을 이해하는 것은 몇 가지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지점이 있습니다. 첫째가 무엇이냐 하면, 도대체 마음이 청결하다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이죠. 다른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청결한 것에 대해서 우리가 쉽게 이해하지만, 과연 보이지 않는 그 마음이 청결하다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더 나아가서 그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했는데, 하나님은 영이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의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그 하나님을 어떻게 볼 수 있다고 하는 말인지, 그 말을 우리가 좀 고민하면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도대체 마음이 청결하다고 하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마음이 청결하다? 마음이 청결하다고 하는 것은 어떠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반대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가 쉬운데요. 마음이 청결하다고 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청결하지 못한 상태, 마음이 더러운 상태를 우리가 생각해 본다고 하면, 정반대로 마음이 청결한 것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음이 더럽혀진 경우, 도대체 그 경우는 어떤 경우를 가리켜서 마음이 더러워졌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마음이 더러워진 것에 대해서 이해하려면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을 한번 상기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3장 25절과 26절 말씀 가운데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에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당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눈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해 주셨던 예수님의 말씀인데요. 그들의 마음이 마음의 그릇이 더러워졌다는 겁니다. 마음의 그릇이 더러워졌는데, 그들이 더러워진 것이 무엇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더러워졌는가?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되어서 그들의 마음이 더러워졌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이런 말씀을 해주신 것을 기억한다고 한다면, 마음이 청결하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탐욕이 제거된 상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방탕함이 사라진 그 상태를 가리켜서 마음이 청결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 것이죠. 만일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탐욕으로 얼룩져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겁니다.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탐욕이 가득해 있다면, 탐심이 생긴다고 하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것이죠.

흔히 우리가 하는 표현 가운데 돈의 욕심에 눈이 먼다고 하는 그런 표현이 있는데요. 돈에 욕심이 생기게 되면 앞이 보이지 않는 겁니다. 상황 판단을 하지 못하는 겁니다. 욕심이 마음속에 가득 차 있기 때문에, 하나님도 보이지 않고 사람들이 비난하는 것도 귀에 들리지 않고, 뻔뻔한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죠. 탐욕으로 가득 차 있게 된다고 한다면, 진리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되고,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되고, 그 탐욕에 이끌려서 살아가게 되는 진리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탐욕에 의해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고, 방탕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탐욕과 방탕이 가득 차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탐욕과 방탕에 의해서 이끌려 살아가게 되는 결과를 빚게 되는 것입니다.

영화감독 겸 배우 중에 “우디 알렌”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혹시 아십니까? 우디 알렌? 성경만 보시니까 모르시는가 봐요. 우디 알렌이라고 하는 감독이 있는데요. 저는 이분이 만든 영화를 거의 보지를 못했습니다. 이 영화배우가 영화배우 겸 감독이 <007 카지노 로얄>이라고 하는 것에 나왔다는 것 외에는 그렇게 이분의 영화에 대해서 잘 모르는데요. 그런데 이 우디 알렌이라고 하는 영화감독이 유명한 것은 그의 인생이 막장 드라마 그 자체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수없이 결혼하고 이혼한, 몇 번 결혼하고 이혼한 그런 전력이 있는 것인데, 이 우디 알렌이라고 하는 영화배우가 미아 패로(Mia Farrow)라고 하는 그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 미아가 원래부터 데리고 있던 자녀들이 있었는데요. 입양한 자녀들 가운데 “순이”라고 하는 한국계 입양아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디 알렌과 결혼을 하게 되니까, 이 순이라고 하는 여자 입양아와 우디 알렌 사이의 관계는 아빠와 딸의 관계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어느 날 이 순이라고 하는 입양아의 나체 사진을 엄마가 발견하게 된 것이죠. 우디 알렌의 서재에서. 그래서 결국 자초지종을 따지다가 결국 엄마와 입양 수양딸 사이에 서로 논쟁이 벌어졌고, 엄마를 선택할래? 우디 알렌을 선택할래? 하였을 때, 이 아이가 엄마를 버리고 자신과 나이 차이가 35살이나 나는, 자신의 양 아버지와 결혼을 하게 됐습니다. 막장 드라마도 이런 막장 드라마가 없을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아주 유명한 인사였기 때문에 타임지 기자가 그 우디 알렌을 만나서 인터뷰를 했습니다. 이런저런 질문들을 던지면서, 당신이 당신의 딸뻘 되는 이 순이라고 하는 한국계 입양아와 결혼하게 된 것이 “양심에 가책이 되지는 않습니까?”라고 질문을 던졌을 때, 이 우디 알렌이 대답한 말이 있습니다. 뭐라고 대답했냐면 “마음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겁니다. 거기에는 어떤 논리가 있는 게 아닙니다.”라고 하는 대답을 해서 그 말이 아주 유명해졌습니다.

마음은 그 어떤 논리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일을 한다고 하는 것이죠. 한편으로는 맞는 말 같으면서도, 어쩌면 우리들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비논리적이고 어리석게 움직이고 있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말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탐욕으로 방탕으로 더러워지게 되면, 진리를 보지 못하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도 깨닫지 못하고 그냥 멋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마음의 상태를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들의 마음도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우리들의 마음이 만일 탐욕으로 얼룩져 있고 방탕함으로 얼룩져 있게 된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진리를 알 수도 없어서 마치 눈을 가리고 질주하는 자동차처럼 결국 그 길로 막 달려가다가 파국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는 것이고 그 자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계시는데요. 그러니까 우리를 향해서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우리들의 마음을 청결하게 해야 청결하게 만들어야 된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하면 마음을 청결하게 할 수 있을까요?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어떻게 탐욕을 없앨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탐욕을 없애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았으면 좋겠는데요.

첫 번째는 이 탐욕이라고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사실은 너무나도 심각한 죄라고 하는 사실을 먼저 우리가 인식해야 합니다. 골로새서 3장 5절에서부터 6절 말씀에 보면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무엇이라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탐심이 생기는 것, 탐욕이 생기는 것은 인간으로서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만한 심각한 죄라고 하는 사실, 우상숭배와 같은 죄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반드시 인식해야 되는 것이죠.

디모데전서 6장 10절 말씀에서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느니라.”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솟아나고 있는 그런 탐욕스러운 마음들이 이것이 괜찮은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이것이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우상숭배와 같은 것이며, 그 담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 가운데 임하는 아주 무서운 죄라고 하는 사실을 먼저 우리가 심각하게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우리가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완전히 의지 자체도 다 내버리고, 욕심 자체의 모든 열정 같은 것들을 다 없애야만 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를 비롯한 수많은 종교에서는 무엇이 가장 좋은 것인가? 그저 열정도 없이,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아무 의지도 없이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최상의 좋은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탐심을 없애라고 하는 이야기는 그러니까 우리도 그냥 될 대로 돼라. 아무런 의지도 열정도 없이 그냥 세상 굴러가는 대로 그냥 그냥 나 자신을 내버려 두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정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달란트를 주셨는데, 우리에게 주신 그 달란트를 땅 속 깊은 곳에 썩혀 두고 그냥 내버려 둔 채로 그냥 살아가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가르쳐주시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달란트를 최대한으로 활용해서 최선의 결과를 빚어내는 것이 옳다고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세상 만물을 맡겨주시면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을 다스리라고 말씀해 주고 계시고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농사를 짓는다고 한다면 그냥 밭을 그냥 놀리는 것이 아니라, 새벽부터 열심히 나가서 씨를 뿌리고 애를 쓰고 물을 주고 잡초를 제거하면서, 가을에 풍성한 수확을 얻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 나는 그냥 탐욕을 버린다고 하면서 장사를 하는 사람이 혹은 농사를 짓는 사람이 혹은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 그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 그냥 될 대로 돼라. 그냥 “나는 욕심 없이 그냥 바람이 부는 대로 산다.”라고 하면서 그렇게 체념하면서 사는 것이 가장 좋은 삶이라고 성경은 절대로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삶의 방식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정당하게 노력하는 그 노력을 넘어서서, 내가 열심히 수고하고 애쓴 것을 정당하게 바라는 것을 넘어서서, 그 열정이 어느 순간에 탐심과 탐욕으로 변해버리는 그런 지점이 있습니다. 그 지점이 어디일까요? 어느 순간에 내 마음에 하나님이 아니라 물질이 나를 살린다고 생각하는 그런 단계, 내 의지와 우리의 소망이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물질에게 소망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며 사는 그 단계로 넘어간다고 한다면, 이미 우리들의 마음이 탐심으로 물들어버린 것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더 많은 물질을 얻기 위해서 이웃들에 대한 그런 긍휼의 마음을 없애버리고, 오로지 그 물질을 얻기 위해서 사악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물질을 얻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다고 한다면, 탐심의 마음으로 변해버린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물질이 우리들의 우상이 되어 버리게 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만한 그런 큰 죄라고 하는 사실, 탐심이 괜찮은 것이 아니라 아주 악한 죄라고 하는 사실을 먼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물질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탐욕을 부리면 그 탐욕을 부리는 것을 통해서 우리가 더 많은 것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탐욕은 결국 우리를 망가뜨리는다는 사실, 탐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결국은 파멸하게 된다고 하는 그 사실을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됩니다.

모든 죄가 그렇듯이 탐심도 탐욕도 우리를 망가뜨려버립니다. 그 옛날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탐냈다가 결국 에덴동산에서부터 쫓겨나게 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리고 성을 진멸하라고 했는데 여리고성에 그 물건들을 탐낸 아간이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탐냈던 홉니와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버린 것과 마찬가지이고, 나아만 장군의 그 재물들이 너무나도 탐나서 그것을 갈취했던 게하시가 나아만의 문둥병까지 얻게 된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탐욕을 부리면 우리가 좋은 결과를 얻는 것이 아니라, 탐욕은 결국 우리를 파멸로 이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할 때 우리의 마음 가운데서 탐욕을 제거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더 나가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엎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의지로서는 우리의 마음을 컨트롤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마다, “주님 우리의 마음 가운데서 탐심을 제거할 수 있게 해 주옵소서. 자족할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그렇게 매일매일 기도하며 나아가야 할 것이고요. 더 나아가서 우리가 모든 일을 할 때 늘 질문을 던져보아야 할 것이 있는데, 과연 이것이 정당한 노력인가? 정당하게 추구할 수 있는 것인가? 이것은 나의 탐심으로부터 비롯된 것인가를 늘 질문해야 돼요. 우리 자녀들을 대할 때, 우리가 장사를 하거나 어떤 일을 하거나 모든 일을 할 때마다 항상 마지막에 던져야 될 질문이 하나가 있는데, 과연 이것은 나의 탐심으로부터 비롯된 것인가? 아니면 이것이 정당하게 내가 추구해도 괜찮은 그런 “도덕적이고 당연한 것인가?”라고 하는 것을 다시 한번 질문을 던져보아야 하는 것이죠.

심지어 우리가 교회 사역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사역이라고 하는 것도 그것이 아름답게 포장되어 있지만, 그것이 나의 탐심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면, 우상 승배가 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과연 이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인가 탐심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고 나의 욕심으로부터 비롯된 것인가?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양육하는 과정에 있어서 과연 이것이 나의 욕심인가 탐욕인가 정당한 것인가를 우리가 항상 질문을 던져보아야 하는 것이죠.

그리고 하나 더 나아가서 어떻게 우리는 탐심을 제거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늘 잊어버리고 있는 것 중에 하나인데 그것이 무엇이냐면, 나의 믿음의 동지들에게 믿음의 식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라고 하는 신앙 공동체를 이루면서 살아가고 있는데요. 같이 신앙생활하고 있는데 교회 공동체에 가장 큰 유익이 있다고 한다면, 서로가 서로에게 영적인 도움을 주는 그런 기능이 살아 있어야, 그게 제대로 된 교회라고 할 수 있는데요. 우리 믿음의 동역자들에게 제일 먼저는 부부겠죠. 남편과 아내 사이에 그리고 부모님과 자녀 사이에 그리고 신앙의 동지들에게 우리 권사님에게 집사님에게 혹은 장로님에게 목사님에게 전도사님에게 서로서로 부탁을 하면서 이런 부탁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여보, 혹은 권사님 혹은 집사님, 내가 만일 무슨 일을 하는데 내가 그 일을 하는 것이 정당한 일이 아니라, 그 일이 탐욕으로부터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면 침묵하지 말고 내게 다가와서, 혹시 그 일을 하는 것이 “탐욕으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셨나요?”라고 내게 말해달라고 부탁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부탁하고 싶어요. 목회자로서 무엇인가를 해 나갈 때, 그냥 무조건 목사님이 하는 것이니까 무조건 따라오는 것을 원하지 않고, 여러분들 또 여러분들이 저를 도와주는 믿음의 동역자로서, “목사님, 지금 이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이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인지, 목사님의 탐욕으로부터 나온 것인지 한번 기도해 보셨나요? 생각해 보셨나요?”라고 말해 주는 믿음의 동역자가 되어서 제가 넘어지지 않기를, 도와주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부모와 자녀들 사이에 서로 이야기할 수 있어야 되고, 남편과 아내 사이의 이야기가 될 수 있어야 되고, 구역 식구들 사이에 서로 사랑으로서 진리를 이야기해 줄 때 우리가 넘어지는 것을 서로가 서로 방지하면서 영적으로 무너지는 것을 막아줄 수 있도록 믿음의 공동체로서 역할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과연 하나님을 본다고 하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영이신 하나님이시잖아요? 영이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의 육안으로는 볼 수가 없고, 모든 곳에 안 계신 곳이 없이 편재(遍在)하신 그 하나님이신데,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그 하나님을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볼 수 있다고 하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입니까? 어느 날 갑자기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그 옛날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아무개야”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의미일까요? 아니면 기도하는 가운데 불꽃같은 것이 확 비치면서 하나님의 그 초자연적인 현상이 우리들에게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일까요? 어떤 분이 간증하는 것처럼 기도하는 가운데 붉은 십자가가 내 앞에 다가오는 것을 보는 것처럼 마음이 청결한 자는 그것을 볼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의미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이 있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시대에 그렇게 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그렇게 하시려면 하실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본다고 하는 이야기는 그러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우리가 직접 우리가 사람 보듯이 그렇게 볼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을 본다고 하는 그 의미는 하나님을 알게 된다고 하는 의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하나님께서는 내게 무엇을 원하시고 계시고 주님의 마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아가게 된다고 하는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을 본다고 하는 얘기는, 하나님이 정말로 계시다고 하는 그 사실을 우리가 인식하게 되고, 그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을 원하고 계시고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지에 대해서 생생한 관계 가운데서 알아가게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입니다.

지난 금요일날 영화가 하나 개봉이 됐는데요. 넷플릭스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 한국 영화 <승리호>라고 하는 영화가 개봉이 됐습니다. 혹시 보셨습니까? 안 보시죠? 저는 일부러 찾아봤습니다. 넷플릭스 영화인데 아주 참 잘 만든 영화입니다. 명작이라고 하기까지는 아쉬운 것이 좀 많이 있지만, 우리 한국 영화의 가능성을 보여준 아주 많이 앞으로 이 영화계에서도 결국 한국 사람들 한국 영화가 많이 진출할 수 있겠다고 하는 그런 가능성을 보여준 영화여서 재밌게 보았던 영화입니다. 그런데 그 장면 중에 하나가 어떤 장면이 나오냐면, 태호라고 하는 역할을 맡은 송중기가 도박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도박에 빠져서 지금 한참 도박을 하고 있는데, 그 태호라고 하는 그 주인공의 딸 같은 여자아이가 하나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름이 순이입니다. 오늘 순이가 자꾸 나오는데, 그 꼬마 아이가 도박을 하고 있는 아빠 곁에서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면서 아빠에게 다가와서 이야기를 합니다. “아빠, 나 이거 썼어요. 아빠, 나 이거 썼어요.” 하면서 자기가 쓴 글씨를 아빠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그 옆에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거기에 쓴 내용이 무슨 내용이냐면 이런 내용이에요. “아빠, 순이는 아빠가 제일 좋아. 밥 먹을 때, 신발 신을 때, 빨래할 때도 너무 좋아. 순이도 아빠처럼 좋은 사람 될 거야.” 그 글을 써서 아빠가 써주었던 그 말을 그대로 받아 적어서, 반대로 거기다 아빠를 줬다고 하는 말을 적어서 글을 써가지고 그 여자아이 꼬마 이가 아빠에게 보여주고 싶은 거예요. “아빠, 내가 이거 썼어.” 근데 도박에 빠져있던 그 태호가 그 딸아이를 향해서 뭐라고 하는 줄 아세요?

영화 장면을 한번 보여줘 보세요. 도박에 빠지면서 하는 말이 “저리 가” 돈 1달러 쥐어주면서 “나가서 뭐 사 먹고 와.” 나중에 순이가 없어져 버리고, 결국 그 아이가 쓴 그 글을 나중에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나와요.

우리가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이 본다고 하는 말씀은 무슨 의미냐 하면 하나님과의 그 생생한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고 하는 그런 의미, 지금 이 꼬마 아이가 아빠를 향해서 아빠를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데, 지금 도박에 빠져서 그 아이가 있는지 그 사랑을 말하고 있는지 잊어버린 채, 그냥 그 도박에 빠져서 그 아이가 보이지 않고 단지 귀찮은 존재만 되어 버렸던 그 모습처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무엇을 원하고 계시고,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시고 계시고 무엇을 기뻐하시는지를 알게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나중에서야 그 주인공은 그 딸아이가 얼마나 자기를 사랑했는가를 발견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보게 된다고 하는 이야기는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지,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고 계시고 우리와 교제하고 하시기를 원하시고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사랑의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그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서 사랑한다고 말씀하고 계셔요. 그 꼬마 아이가 썼던 글씨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신 나머지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 말씀하고 계십니다. 고통 가운데에 있는 그 우리들이 고통의 눈이 어두웠고, 또한 여러 가지 탐욕으로 눈이 어두워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을 향해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씀해 주시는 그 하나님을 보려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서 탐욕을 제거해 버리고, 방탕함을 제거해 버리고, 더러움을 제거해 버리고, 주님과의 그 생생한 관계 가운데 들어가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발견하고 그 안에서 참된 축복을 누리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절망하며 고통스러워 살아갈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향해서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저와 여러분들이 가장 힘들고 어려운 그 상황 가운데서 여러분들의 손을 붙잡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있는 여러 가지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그 더러운 먼지들을 다 제거해버리고,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과의 생생한 관계 가운데서 믿음으로 승리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Loading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