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닫기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 3:11-16)

호가호위(狐假虎威)라는 말이 있다. 남의 권세를 빌려 위세를 부리는 것을 뜻하는데, 이런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많이 일어난다. 마치 자신이 실세인 것처럼 위장하여 접근해서 사기를 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일들은 신앙의 영역에서도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대통령의 힘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힘을 이용하여 호가호위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무당이라고 한다. 사악한 무당들은 연약한 인간의 심리를 이용하여 마치 하나님이 자신의 뒤에 있는 것처럼 속이고 절박한 사람들을 영적으로 착취하곤 한다.

놀랍게도 이런 무당과 같은 행위들이 교회 안에서도 일어난다. 중세 시대에 천주교에서는 신부들이 무당처럼 행했다. 사람들은 신부에게 죄를 고백해야 했고, 신부가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생각해서 그들 앞에 영적으로 종속되고 착취당해야 했다. 루터와 칼빈은 그렇지 않다고 외쳤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가능하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 것이라고 외쳤다. 이것이 종교개혁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개신교 안에서도 이런 무당과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목회자가 마치 어떤 영적인 파워가 있는 것처럼 하면서 자신이 기도하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으로 떠벌리면서 사람들을 영적으로 착취하곤 하는 것이다. 예전에 어떤 목사가 기도에 관한 책을 냈다. 그래서 작년 한 해 센세이션을 일으킨 바 있다. 이 책은 두 가지 반응을 일으켰는데, 첫째는 나도 기도해야겠다는 반응을 일으켰고, 둘째는 그 목사에게 가서 기도를 받고 싶다는 열풍을 일으켰다. 나는 이 두가지 반응이 모두 문제라고 생각한다.

기도하려는 열풍이 일어나는 것은 현상적으로 좋아 보이지만, 사실은 그 동기가 이기적이고 탐욕적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종교적이기만 하면 좋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사울이 전쟁을 앞두고 제사를 드린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전쟁터에 언약궤를 끌고 간 것처럼, 종교적 행위는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욕구를 채우는 것이 될 때 사악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바람직한 기도의 열풍일 수는 없다. 물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될 가능성이 많기에, 아예 기도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희망해보지만 말이다.

더 나아가 어떤 개인이 영적인 파워가 있는 것으로 오해하게 만든 것은 아주 큰 잘못이다. 그게 바로 무당 짓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인가? 내게 구하라. 그러면 응답하시겠다는 것이 약속이다(요 14:14).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직접 하나님께 나아가면 되는 것이지, 대리인을 찾아갈 필요가 없다. 어떻게 우리와 같이 허접한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나아갈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지시고 대신 죽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들으신다. 우리는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면 되지, 대리인을 찾아갈 필요가 없다.

물론 목회자들과 함께 기도하지 말 것은 아니다. 교회는 함께 기도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마치 인간 그 누군가가 더 특별한 영적인 파워가 있는 것처럼 오해해서는 안 된다. 베드로는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걷게만들었다. 그런데 베드로는 깜짝 놀라서 몰려든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이게 우리의 자세여야 한다. 마치 자신의 경건과 능력으로 무슨 영적인 파워를 발휘한 것처럼 떠벌리는 자들을 조심해야 한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약한 것을 자랑한다고 했다(고후 11:30). 그가 자랑할 것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약점을 떠벌리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래야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패한 인생들에게 구세주가 필요함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Loading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