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닫기

하나님은 나의 반석 (삼하 22:1-7)

2021년 2월 17일 수요예배 설교

사무엘하 22장의 말씀은 시편 18편의 말씀과 똑같은 내용의 말씀입니다. 시편 18편에 다윗이 쓴 시로서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 오늘 사무엘하 22장의 말씀 가운데 그대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사무엘하의 말씀을 살펴볼 때, 사무엘하의 그 내용 전체가 다윗이 어떻게 지내왔는지, 다윗에게 어떠한 사건들이 있었는지, 다윗의 삶에 대해서, 다윗의 경험과 여러 가지 모습들에 대해서 서술해 준 것이 지금까지 사무엘하의 내용이었다고 한다면, 오늘 22장에서는 직접 그 다윗이 노래했던 그 노래가, 다윗의 노래가 여기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여러 시편을 만들었는데요. 여러 시를 많이 썼는데, 시(詩)라고 하는 것은 참 그 마음속에 있는 것들을 드러내는 아주 좋은 도구가 됩니다. 우리가 멋진 경치를 바라보았을 때, 혹은 어떤 즐거운 일을 만나게 되었을 때, 그 즐거움이 어떻게 완성될 수 있는가? 그냥 보고 좋다. 어떤 음식을 맛보고, “맛있었다.” 그리고 어떤 기쁜 일을 맛보고, 경험하고 “기뻤다.” 하는 것으로 완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시로 표현하고, 노래로 표현하고, 또는 여러 가지 사람들에게 말을 함으로써, 그 기쁨이 배가 되고 완성되는 것입니다.

저 천상에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가게 되었을 때, 천국에서 있을 일들을 성경에서는 묘사하기를 어떻게 묘사하냐면, 천성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영원히 계속될 거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찬송가를 지겹게 계속 끊임없이 무한 반복해서 부른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니라, 천국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들이 너무나도 좋고, 너무나도 흥분이 되고 너무나도 기뻐서, 매일매일 경험하는 것을 찬양하고, 노래하고, 또 노래해도 영원히 그 기쁨이 완전히 다 표현될 수 없는, 그래서 날마다 기쁨을 표현해야만, 하는 그 상태가 최고로 완벽한 상태가 영원히 계속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저 천성에서는 찬양이 끊이지 않고 계속될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삶을 살아오는 가운데, 그 삶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났어요.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터널도 지나고, 정말 고통스러운 상황도 만났고 그랬지만, 그런 과정을 통과하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었을 때, 그 다윗의 마음속에 있는 기쁨의 내용들이 그냥 가만히 잠잠히 있을 수가 없고, 그 마음 가운데 기쁨이 솟구쳐 올라서, 그래서 찬양으로, 노래로 시로 표현이 되는 것이고, 이 시편 가운데 다윗의 시가 많이 있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그 다윗이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한 그 기쁨과 감격들이 참 많았다고 하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은 그렇게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만나는 가운데, 그 기쁨을, 그리고 그 감격들을 시로 게 쓰게 되었는데요. 오늘 기록된 이 말씀은 다윗이 언제 정확하게 썼는지는 알 수는 없지만, 1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구원해 주셨을 때, 모든 원수의 손에서부터, 그리고 사울의 손에서부터 이제 다윗을 구해내신 바로 그날에, 다윗이 기쁨 가운데서 이 시를 썼다고 기록하고 있으니까, 아마도 이 시편은 비교적 다윗의 말년 즈음에 기록한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이 됩니다.

우리가 다윗의 삶을 살펴본다고 한다면, 다윗의 삶 가운데는 수많은 위기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저 편하고 아름다운 꽃길만 걸어간 사람이 아니죠. 다윗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바로 저와 여러분들의 삶과 똑같아요. 우리가 당하던 그 고통, 그리고 우리가 아픈 그 아픔, 그리고 우리가 겪어야만 했던 그 배신의 아픔들, 여러 가지 고통들을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이고, 때로는 수많은 사람들이 돌을 던지는 가운데 무서워 떨기도 했었고, 또는 많은 사람들이 배신하는 가운데 외로움을 느낄 수도 있었고, 그런 수많은 고통과 아픔들이 다윗에게 전혀 없고 그냥 꽃길만 걸어간 것이 아니라, 다윗도 우리처럼 힘들고 어려운 삶을 걸어갔던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압니다.

그런 위기의 순간들을 걸어갈 때, 그때에는 참 감사의 표현이 나오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오. 나의 반석”이라고 하는 그런 고백들이 나오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특별히 아무런 이유 없이 고난을 당해야만 하는 그런 상황 가운데서, 그리고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잘 되는 그 모습들을 옆에서 지켜봐야만 하는 그런 상황 가운데서는 찬송이 흘러나오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다윗의 인생의 마지막에, 이제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원수들을 하나씩 둘씩 다 정리해 주었을 때, 그래서 이제는 자신을 죽이려던 그 사울도 사라지게 됐고, 그리고 블레셋의 위험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건져주셨고, 그리고 압살롬의 칼에서부터 다윗을 건져주시고, 세바의 반란으로부터 다윗을 건져준, 그 인생의 마지막 즈음에, 자신의 그 옛날 과거를 한번 돌아보게 될 때 자기가 정말 위험한 그 길을 인생의 길을 걸어왔는데, 그 인생의 힘들고 어려운 길, 사망의 음침한 길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힘들었던 길들을 걸어왔지만, 그것이 외롭고 쓸쓸하게 그냥 나 혼자 분투한 삶이 아니라, 사실은 그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셨고, 그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보호해 주셨고,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해 주셔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에, 다윗의 고백 가운데 오늘 이 고백이 등장하게 된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다윗의 고백을 살펴볼 수가 있는데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가에 대한 믿음의 고백이 오늘 본문에 기록돼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하나님에 대해서 설명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라. 여호와는 나의 요새시라. 나를 건지시는 자이시고, 내가 피할 반석이시고, 나의 방패가 되시며, 구원의 뿔이 되시고, 높은 망대가 되시고, 또한 피난처가 되시고, 나의 구원자가 되신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모든 비유들, 메타포(metaphor)들은 다윗이 어려운 그런 상황 가운데 처해 있을 때, 다윗을 안전하게 보호해 주는 그런 메타포들을, 그 비유들을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반석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반석, 커다란 돌, 그 커다란 돌이라고 하는 것은 적군으로부터 화살이 날아올 때에 그 반석 밑으로 그 뒤로 숨어버리면, 아무리 센 화살이 날아온다고 할지라도, 그 화살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는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 반석일 텐데, 하나님이 내게 어떤 하나님이었는가? 나를 보호해 주시는 반석과 같고, 하나님은 나를 지켜주시는 방패와 같은 하나님, 그 힘든 고난의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나를 지켜 보호해 주셔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고 하는 그런 믿음의 고백이 오늘 성경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동안 다윗에게는 수많은 적들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다윗은 적을 만들기를 원했던 사람이 아니라, 가능하면 적을 만들기를 원치 아니하였고, 자신을 적으로 삼는 사람들도 용서하면서, 그리고 그 적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고 함께 일하기를 원하고, 함께 동료가 되기를 원했던 사람이 바로 다윗이었지만, 아무리 다윗이 그렇게 마음을 먹는다고 할지라도, 다윗을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그 사람들을 어찌할 수가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원수들 앞에서 다윗의 목숨은 이제 풍전등화와 같이, 이제 까딱하면 이제 그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는 그런 아주 위험한 가운데 있었는데, 지금까지 수많은 인생을 살아오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매 순간순간마다 지켜주시고, 사울이 군대를 이끌고 와서 다윗을 죽이려고 했지만, 블레셋이 쳐들어오는 바람에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던 그 공격을 멈추고, 할 수 없이 블레셋과 싸우러 가야만 하는 그런 상황을 통해서 구해주셨던 그 하나님, 사울이 다윗을 죽이기 위해서 쫓아왔지만,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 사울을 동굴로 집어넣으셔서, 오히려 전세를 역전시켜주신 그 하나님, 저 블레셋 사람들을, 그냥 그 다윗의 군사들과 더불어서 물리칠 수 있도록 해 주셨던 그 하나님, 그 하나하나 생각해 본다고 한다면 지금까지 내가 이렇게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이 내가 능력이 있고, 내가 힘이 있고,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셨고 하나님께서 나의 구원자이셨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감사하면서 이런 노래를 부르게 된 줄로 믿습니다.

아마 다윗은 그 고난의 길을 걸어가는 동안에는 이렇게 고백하기가 정말 어려웠을 겁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쓴 시편을 보면 늘 감사와 찬송의 시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하나님 앞에 항의하는 시도 있었습니다. 그 항의하는 시가 뭡니까? “하나님, 도대체 언제까지입니까?”라고 하는 시가 있어요. “하나님, 언제까지 그냥 내버려 두십니까? 왜 저 악인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이 엉망진창으로 돌아가게 만드시고, 그것을 해결하지 않고 계십니까?” 그렇게 하나님 앞에 울부짖는 시들도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정말 그 고난을 직접 경험하고 있는 그 상황 가운데서는, 정말 하나님이 나의 보호자이시라고, 하나님께서 나의 구원자라고 고백하기가 정말 어려웠을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하지만 결국은 다 그 모든 과정을 다 지난 다음에 되돌아보면, “하나님께서 다 보호해 주셨구나.” “정말 위기 가운데서도” 위기가 없었으면 좋았을 뻔했지만, 위기가 있었어도, 그 위기가 나를 완전히 멸망시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보호해 주셨다”라고 하는 사실을 고백할 수가 있었는데, 이 모습을 보면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기억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고난의 터널을 지날 때 절망할 것이 아니라, 이 고난의 터널을 지나고 나면, “우리도 다윗처럼 고백할 수 있겠구나.”라고 하는 그 사실을 미리 바라볼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지금 당장 어려움을 겪을 때, 지금 당장 힘든 일을 만나게 될 때는, 이런 고백이 나오기가 힘들지만, 그러나 결국은 이 고백이 나오게 돼 있어요. 결국은 마지막이 우리가 망하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고 우리의 생사와 복을 주관하시는 그 하나님께서 결국은 모든 것들을 하나씩 둘씩 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것을 통해서, 그래서 결국은 우리로 하여금 마지막에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끔 만들어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고난의 길을 간다고 할지라도, 그 순간에 그 하나님을 향해서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라. 여호와는 나의 요새시라. 구원자이시라. 피난처시라.”라고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의 결단들이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0장 28절부터 31절의 말씀 가운데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이 말씀은 복음을 전하러 가는 제자들을 향해서 주신 말씀인데,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러 가는 그 길이 평탄하고 정말 순조롭게 모든 일들이 진행되지 않을 거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주신 말씀입니다. 복음을 전하러 가는 길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우리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마치 우리가 양이 이리들 사이에 들어가는 것처럼, 그렇게 위험한 일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주님께서 설명하신 후에 하신 말씀,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그런데 그런데 너희들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저 무리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너희를 지켜 보호해 주실 것이라고,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만 떨어지는 것이고, 그 어떤 일이 발생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손 놓고 계셔서 어쩔 수 없이 우리에게 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섭리하시는 가운데 결국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그 과정 가운데 우리에게 해 주시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몸은 죽일 수 있어도 목숨을 죽일 수 없는 그런 이 세상의 것들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오로지 몸과 영혼을 한꺼번에 면하실 수 있는 그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서는 것이 우리들이 가져야 될 마땅한 자세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말씀이 있다고 한다면 로마서 8장 35절의 말씀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오? 환란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부터 끊을 수가 없다.”라고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로마서 8장 38절 39절의 말씀에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무슨 일을 만나든지 늘 감사하며,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오. 반석이시고, 또한 나의 피난처”시라고 하는 사실을 날마다 고백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윗은 사무엘하 22장 7절 말씀 가운데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환란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아뢰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며,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다윗은 과거를 회상하면서 노래하기를 뭐라고 회고하고 있습니까? 내가 옛날에 어려운 일을 당했었는데, 환란을 당했었는데, 그 환란 가운데 내가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 내 소리를 들으셨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죠.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환란을 만난다고 한다면 가만히 있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부르짖으며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고통 가운데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하는데요. 부르짖는 것이 곧 하나님을 찾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겁니다. 이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기회가 되는 것인데, 그 힘들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 하나님 앞에 나아가 또 하나님을 향해서 부르짖는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특별히 예레미야서 33장 2절 3절 말씀에,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되,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크고 놀라운 일을 베풀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왜 부르짖어야 합니까? 부르짖지 않으면 그냥 우연이 된 줄 알아요. 그런데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야 되는데요. 사실 문제가 해결되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이 나아가는 거예요. 하나님과의 생생한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우리들은 지금 제일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하냐면, 그 문제가 해결되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게 되거든요. 하나님 이 문제만 좀 해결해 주세요. 이것 좀 어떻게 좀 해주세요라고 그 문제 해결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지만, 사실 우리들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면, 문제 해결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걸 통하여서 하나님과의 생생한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시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에게 나가서 하나님의 자녀 됨을 보여주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엄청난 큰 축복의 기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고통의 기간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더욱더 잘 만날 수 있는 기간이고, 그리고 그 하나님과 만나기 위해서는 우리가 부르짖으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다윗이 부르짖었을 때 어떤 일이 있었는가? 하나님께서 성전에서 다윗의 소리를 들으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7절 말씀. 이 표현이 아주 좀 특이한데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다윗의 부르짖음을 들으실 때, 그냥 들으셨다고 표현한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 들으셨다고요? 성전에서 듣으셨다고 하는 겁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성전에서 들으셨다고 하는 그 말씀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성전에서 들으시니까, 우리가 성전에 가서 기도해야, 우리가 다른 곳에서 기도하는 것보다, 성전에 나와서 기도해야 더 잘 하나님께서 들으신다고 하는 그런 의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가 기도할 때 기도의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 예배당에 나와서 기도하는 것은 아주 현명한 선택입니다. 우리가 다른 곳에서는 참 하나님 앞에 집중해서 온전히 기도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일상의 삶 가운데서 기도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그래도 장소를 옮겨서 퇴근하는 길에 혹은 출근하는 길에, 혹은 따로 시간을 내서 교회에 들러서 기도하는 시간을 조용히 갖는다고 한다면, 다른 것에 방해받지 않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그런 유익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분들이 몇 분 계시고, 또 여러분들 가운데 앞으로 또 그렇게 하실 분이 계시다고 한다면 충분히 안내해 드려서 그렇게 하는 것을 도와드리려고 합니다. 기도를 함에 있어서 예배당에 나와서 기도하는 것은 어쩌면 현명한 선택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는 것은 꼭 예배당에 와야만 하나님께서 기도를 받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이 기도할 때 성전에서 하나님께서 들으셨다고 하는 그런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영이신 하나님이시잖아요? 영이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야기는 장소에 구애를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디에서 기도하든지, 하나님은 귀를 기울이시고, 우리가 정말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면 항상 들으신다고 하는 사실을 믿고 기도해야 할 겁니다.

요한복음 4장 23절 24절의 말씀에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하나님은 육신을 가지고 있어서, 한 곳에 계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어디든지 계시므로, 영으로 어디서든지 하나님 앞에 예배하기만 하면, 하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만나주시겠다고 하는 그런 말씀이거든요.

그런데 왜 오늘 다윗은 하나님 내가 하나님 앞에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성전에서 들으셨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는 장소가 성전이라고들 생각하고 있었는데, 자기가 기도를 했는데 어디서 기도했어요? 성전에서 기도했겠습니까? 성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기도했겠습니까? 다윗이 성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다윗이 기도한 거예요. 그 성전에 나와서 하나님 앞에 예배할 수 있는, 기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에요. 다윗은 지금 도망자 신세이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어디서 기도해야 되느냐? 저 전쟁터에서 기도해야 되는 거예요. 다윗은 어디서 기도해야 되는가? 저 블레셋 사람들 사이에서 기도를 해야 되는 거예요. 다윗이 성전에서 기도하지 못하고 어디서 기도해야 됩니까? 아둘람 굴 속에서 기도해야 되는 그런 상황을 맞이하게 되고, 성전에 갈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 성전에서 만나주시겠다고 구약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나는 성전에 갈 수 없지만, 성전에서부터 멀리 떨어져서 지금 내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성전에서부터 멀리 떨어진 내 기도를 들으셨다. 성전에만 계신 줄 알았는데, 성전에 계신 하나님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는 성전 멀리 떨어져 있는 내 기도를 들으셨다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성전에만 계신 줄 알았던 그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셨다고 고백하는 표현이 하나님께서 내게 성전에서 들으셨다고 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영이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부르면 부르는 그 순간에 만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거죠. 아주 긴박한 그 순간에 결국은 하나님 앞에 울부짖으며, 내가 교회에 와야만 성전에 와야만 그래야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바로 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거예요.

119 응급대원들이 이렇게 반응을 하는데요. 이렇게 심근경색으로 쓰러지고 심장마비로 쓰러진 사람들이 있으면 심폐소생술을 해야 된다고 하잖아요? 심폐소생술을 해야 되는데, 소방서에서 근무한 우리 윤석진 선생님의 얘기를 들어보니까, 무슨 얘기를 하냐면 이렇게 심장마비로 쓰러지게 되면 대부분의 경우는 그냥 사망으로 연결이 된다는 거예요. 정말 예외적인 케이스 몇몇 케이스만 살아나는데, 그 경우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아나는가? 바로 쓰러졌을 때 그 옆에서 심폐소생술을 하기 시작해가지고, 심폐소생술을 제대로 하면 그나마 생명을 건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거예요. 심폐소생술을 하면 5cm씩 이상 들어가게 심폐소생술을 해야 되는데, 119 구급대원들이 아무리 빨리 도착해도, 5분 넘어가고 6분 넘어가는데 그렇게 오랫동안 심장이 멈춰져 있으면 구급대원들이 와서 데리고 가도 소용이 없다는 거예요.

근데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저 성전에만 계셔서 우리가 힘드는데, 여기서 “하나님, 좀 도와주세요.” 했을 때 하나님께서 5분 10분 걸려서 우리에게 오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에 계시든지 응답해 주실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놀라운 은혜라는 것이에요. 영적인 소생술을 하나님께서 지금 당장 해 주시기 때문인 것이죠.

이 세상의 종교는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이 세상의 종교는 어떤 어떤 특정 장소에 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대구의 팔공산에 갓바위에 올라가서 거기서 빌어야 대학 합격을 한다고 하니까, 그 학부모들이 집에서부터 버스를 타고 산에 올라가서 저 산 꼭대기에서 추운 날씨에 빌고 있는 그걸 통해서 그렇게 빌어야 된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거기까지 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있는 그 자리에서 기도하면 내가 들으시겠다고 말씀해 주시는 것이 은혜의 하나님인 줄로 믿습니다.

많은 분들이 질문을 던집니다. 그런데 왜 내 기도는 하나님께서 안 들으십니까? 사실 그 질문은 우리만 던지는 질문이 아니라, 다윗도 던졌던 질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울부짖었습니다. 하나님 왜 기도를 안 들으십니까? 어느 때까지 그냥 내버려 두십니까? 악인이 판치고 있는 것을 어느 때까지입니까? 그렇게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이 없는 것 같아서, 그렇게 울부짖었던 다윗인데, 그런데 나중에 자신의 인생을 돌이켜 보니까, 하나님께서 안 계셨던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듣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나의 신실한 반석 이시오. 피난처이시고 망대시고 구원자이셨다고 하는 사실을 고백하는 이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그 끝이 안 보인다고 해서 불안해할 것이 아니라, 항상 귀 기울이며 들어주시는 그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사실 우리가 던져야 될 질문은 그런 질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왜 나 같은 사람의 기도도 들어주실까?”를 질문해야 돼요. 아무도 그 질문은 잘 안 던져요. 하나님이 왜 우리의 기도를 들어줘야 되는 거죠? 우리에게 뭐가 아쉬워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줘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 우리가 맡겨놓은 게 있나요? 늘 하나님을 배반하고 살았던 우리들의 모습, 늘 죄악의 길로 가던 우리들의 모습, 하나님께서 지금 당장 내치고 지옥불로 떨어뜨려도 아무런 항거할 수 없이 쓰러질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는 이유는 그것은 우리에게 무엇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우리를 사랑해 주셔서, 우리를 자녀 삼아 주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절규를 외면하신 것이죠. 우리의 요청을 듣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울부짖음을 외면하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신 그 주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믿음으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Loading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