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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 (마 5:1-12) – 팔복강해 8

드디어 팔복의 마지막 시간이 됐습니다. 기쁘십니까? 책거리라도 해야 될 것 같습니다. 팔복의 마지막 시간이 되었는데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가 복이 있다”라고 하는 이 말씀을 살펴보려고 하는데, 이 말씀은 한편으로는 좀 불편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의를 위해 우리가 산다고 하면, 그렇게 우리가 의를 위해서 산다고 할 때에, 박해를 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전제하고서 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의를 위해 산다고 하는 것은 박해를 받는다는 것과 어울리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무엇과 어울려야 되는 것이죠? 의를 위해 사는 것은 박해가 아니라, 박수와 잘 어울려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정말 거룩하게 의롭게 선하게 살아간다고 하면 칭찬을 받고, 박수를 받고, 많은 사람들이 환호해 줘야 정상일 텐데, 오늘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무슨 말씀을 하시냐 하면, 의를 위해 사는 자가 박해를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해 주시기 때문에, 약간 불편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우리가 늘 경험하는 것이고, 성경에서 늘 우리를 향해서 경고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의를 위해 살면, 많은 사람들이 박수 쳐주고 환호해 주고 좋아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난을 당하고 오히려 박해를 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우리가 늘 경험하는 것이고, 늘 성경에서 이야기해 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디모데 후서 3장 12절 말씀에 보면,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무엇을 받으리라? “박해를 받으리라.” 박수를 받아도 시원치 않은데, 박해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시니까, 참 답답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기독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 말씀이 진실이었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 2천 년의 역사 가운데, 수많은 성도들이 참된 믿음을 가지려고 가지고 살아가려고 할 때, 오히려 핍박을 당하고, 오히려 고난을 당하고, 때로는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유 하나로 비난을 당하고, 욕을 당하고, 박해를 당하고, 핍박을 당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주님께서 오늘 우리를 향해서 해 주시는 말씀이 그렇게 박해를 받는 자들, 의롭게 살려고 하다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다가, 박해를 받는 자들이 있을 것인데, 그렇게 박해를 받는 자들이 “참 안 됐다.” “그거 참 불쌍하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박해를 받은 자들이 사실은 복이 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박해를 받았는데, 왜 복이 있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 이유를 오늘 말씀해 주고 계시는데요. 그렇게 의를 위해 살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주어질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이것이 바로 팔복의 여덟 번째 말씀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요. 우리가 박해를 받는다고 해서 다 복된 것은 아니라고 하는 점입니다. 종종 크리스천들 가운데서는 의도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고, 그리고 그 결과로 인해서 어려움을 겪게 되면, 내가 의를 위해서 살다가 박해를 받는 것이라고 떠벌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극단적인 예의지만, 예를 하나 들면 이런 예를 들을 수가 있겠습니다. 어떤 성도님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아주 열정적인데, 그분이 복음을 전하는 일을 이곳저곳에서 하다가, 결국 어디까지 들어가게 됐냐면, 절간에까지 들어갔습니다. 지금 그 절간에서는 수많은 불자들이 모여 앉아서 예불을 드리고 있는 그 상황 가운데, 이 크리스천이 들어가서 외치는 겁니다. “여러분 그렇게 우상 숭배하면 망합니다. 어리석은 짓을 중단하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어야 되지, 저 부처를 믿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삽니다.”라고 외쳤다고 하십시다.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아마 그 자리에 있는 불자들이 너무나도 화가 나서, 그 사람을 붙잡고 두들겨 팰 수도 있을 겁니다. 아니면 경찰에 신고해서, 체포되고, 법정에 고발을 해서, 결국 처벌을 받게 되는데, 종교 행사를 하는 것을 방해할 경우에 방해죄가 성립이 되어서 처벌을 받는 것이 우리나라 법이니까, 아마 그렇게 됐다고 한다면 법정에서 처벌을 받게 될 겁니다. 그럴 때 그런 사람은 이렇게 주장을 할 수 있을 겁니다. 나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어디든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했기 때문에, 복음을 전한 것인데, 복음을 전하다가 내가 두드려 맞았고, 복음을 전하다가 이렇게 법정에서 처벌을 받았는데, 나는 의를 위해서 박해를 받은 사람이고, 나 같은 사람은 해를 받았지만 이것이 복된 것이라고 그렇게 주장할 수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극단적인 예를 들었는데, 결코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겁니다.

이 사람은 복음을 전하다가 박해를 받은 것이 아니라, 법을 어겨서 박해를 받은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종종 착각하는 것은 목적이 좋으면 수단과 방법은 어떤 것을 써도 괜찮을 거라고 하는 그런 착각에 빠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만 하면, 무슨 짓을 해도 다 허용이 된다라고 그렇게 착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마치 부모님이 자녀를 훈육한다고 해서, 부모가 자녀를 훈육하는 것은 다 용납되는 것이 아니라, 만일 부모가 훈육하는 과정 가운데 아이를 학대한다고 하면, 처벌을 받게 되고 용납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훈육하다가 이렇게 처벌을 받게 된다고 하면, 왜 이 나라가 부모의 훈육권을 무시하고 있는 거냐고 따질 일도 아니고, 나는 부모로서 이렇게 아이를 잘 교육시키려고 했는데, “왜 이 나라는 부모를 공경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느냐?”라고 그렇게 따질 것이 아닙니다. 나라가 처벌하는 것은 훈육을 했기 때문에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훈육의 방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처벌하는 겁니다. 학대를 하는 것은 그 어떠한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한다고 한다면 복음을 전하는 것은 정말 좋은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러니까 복음을 전하기만 하면, 다 괜찮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복음을 전할 때 그냥 막무가내로 전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너희가 복음을 전하되 비둘기같이 순전할 뿐만 아니라, 뱀같이 지혜롭게 전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지혜롭게 전하지 아니하고, 무식하게, 무대뽀로 복음을 전하면서, 그것 때문에 고난을 당하면, 내가 의를 위해서 고난을 받는 것이라고 그렇게 둘러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될 것입니다.

더 나가서 성경에서는 무엇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사랑하면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그 사랑을 어떻게, 예의 바르게, 어떻게 정중하게 표현하는가가 아주 중요한 것이죠. 내가 사랑하기 때문에 내 모든 행위가 정당화될 수가 없는 겁니다. 내가 한 여성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여성을 졸졸 따라다니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는 거예요. 그건 스토킹이에요. 내가 아이들을 사랑한다고 그냥 만지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는 거예요. 성추행이 되는 거예요. 내가 사랑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랑이 잘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무례하지 않게, 정당한 방법으로, 예의 바른 방법으로 표현해야만 하는 것이지, 내가 사랑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내 행동의 모든 것을 정당화시켜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경은 우리가 국가의 법을 잘 지켜야 한다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로마서 13장 1절 2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돼 있습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누구의 명을 거스름이니?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이 말씀은 2천 년 전 로마 시대 때, 로마 황제가 다스리고 있던 시대 때 주어졌던 말씀인데요. 그 말씀을 오늘날의 형편에 맞추어서 해석한다고 하면, 법을 지키라고 하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나라가 우리나라에 살면서 우리나라에 있는 여러 가지 법들이 있을 것인데, 그러한 법들에 대해서 순종하고 잘 지키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로 로마서 13장의 말씀을 이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그런 명분 하에, 지혜롭지 못하게 행동하면서, 무례하게 행동하면서, 그리고 법을 어기면서, 복음을 전하다가 그러다가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면, 내가 의를 위해, 의를 위해서 박해를 당하는 것이고, 내가 의를 위해서 박해를 받는 것이기에, 복된 자라고 주장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냥 어리석은 자일뿐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19절 20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하므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오?” 잘못하면 아무런 칭찬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움이니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크리스천들 가운데는 극단적인 그런 성도님들이 종종 있는데요. 그런 극단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내가 복음을 위해 의를 위해 고난을 당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떠벌리기 위해서 일부러 위법한 일을 저지르면서, 그래서 고난을 당하고, 그래서 핍박을 받으니까 나는 의를 위해서 핍박을 당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선전하고, 그래서 사람들을 자극하고, 사람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려고 하는 그런 극단적인 신앙인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는데요. 그러한 선동에 우리가 넘어가지 않는 영적인 지혜와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것이 복이 있다고 해서, 우리들은 그렇게 박해를 받는 상황 속으로 일부러 들어가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화평하게 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분쟁을 일으키고, 싸움을 일으키고, 다툼을 일으켜서, 그래서 박해를 받는 그 상황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정말 좋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대할 때 가능하면 어진 마음으로 가능하면 화평을 추구하는 마음으로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 가면서, 그들의 마음을 얻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지혜로운 방법이지, 자꾸만 다툼을 일으키고, 싸움을 일으키고, 분쟁을 일으키면서, 그래서 고난을 당하면서 내가 의를 위해 박해를 받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은 정당하지 못한 잘못된 행동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울 사도의 경우는 어떻게 했습니까? 바울 사도는 복음을 전하러 자신의 인생을 헌신했는데요. 소아시아 지역을 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러 가는 그 길이 쉬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러 가면 모두가 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복음을 전하는 바울 사도를 박해하기도 했고, 때로는 돌을 던지기도 했고 죽이려고 달려드는 그런 적대적인 사람들이 깔려 있는 그 상황 가운데서 복음을 전해야 했던 것이 바울 사도의 상황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런 상황 가운데서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고, 적대적으로 대하는 그 상황 가운데서 그것이 무서워서 복음 전하는 것을 중단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일부러 그 사람들과 대결을 하고 일부러 갈등을 일으키면서, 그런 박해를 받는 것을 유발하는 방식으로 사역을 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들이 돌을 던지려고 하면 피해서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에게 부탁하기를 “여러분,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그래서 내게 고난이 없기를 위해서 기도해달라고 그렇게 기도 부탁을 했고, 그런 고난을 피하기 위한 방법들을 쓰면서, 가능하면 참 평화로운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려고 노력한 것이지, 그 박해를 두려워하지도 않았지만, 일부러 그 박해 속으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고 하는 그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고난 가운데 일부러 들어가지 않고, 우리가 화평을 추구하며, 또한 우리가 무례하게 행동하지 아니하고, 또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최대한의 노력을 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 또 의를 위해 산다고 하면 사람들이 박수를 쳐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아냥거리고 손가락질하고 무시하고 오히려 박해하는 경험을 하게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조차 그래요. 만일 우리 가운데 어떤 분이 정말 은혜를 많이 받아서, “정말 주님의 사랑이 너무나도 좋아요.” 그래서 너무나도 감격이 되어서, 그래서 주를 위해서 헌신하겠다고, 그래서 봉사를 더 열심히 하려고 하면, 사람들이 박수를 쳐줍니까? 어떻게 합니까? 박수를 쳐주는 교회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 비아냥거리기 시작합니다. “저 사람이 꽤 열심히 하려고 하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 직분자 선거가 있는데, 표 좀 얻으려고 그러나?” 하면서 비아냥거리는, 그 말 한마디에 상처를 입어서, 그래서 나가떨어지는 경우가 수많은 교회 가운데 많이 일어나고 있는 일인데, 우리 교회에서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아무튼 우리가 의를 위해서 살고, 믿음을 가지고 살고 경건하게 살면, 사람들이 박수를 쳐주고, 잘한다고 하고, 정말 그 길로 가라고 해주는 것이 아니라, “어디 새로운 사람이 설쳐?” “선거 나가려고 그러나?” 하면서 비아냥거리고, 박해를 당하고 어려움을 겪는 경험들을 우리가 많이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의를 위해서 살면 박수를 받아야 되는데, 오히려 박해를 받게 되는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이 세상이 천국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서 있는 세상에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세상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말은 좀 오해하기가 쉬운 말이니까 설명이 좀 필요한 것인데요. 지금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세상일까요? 하나님께서 다스리지 않는 세상, 하나님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세상일까요?

이 질문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Yes and No라고 하는 대답으로 대답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예스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있어야만 발생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것 그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의 통치 아래 없는 것이 없고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있어야만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하늘에서 날던 그 참새가 떨어지는 것도 그냥 우연히 어쩌다 보니까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만 그 참새가 땅에 떨어진다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과 관계없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만 하나님께서 승인해 주셔야만 일어나는 것이라고 하는 점에 있어서, 이 세상은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는 세상이라고 말씀드릴 수가 있고 그런 점에서 예스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은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렇습니까?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런 모든 나쁜 일들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아니라고 하는 의미에서 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겪게 되는 모든 나쁜 일들, 슬픔과 아픔, 질병과 고통 악이 발생하고, 여러 가지 정말 고통스러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들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이루어지는 곳은 오직 저 하늘 저 천국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실 때 뭐라고 기도하라고 하셨냐면,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처럼, 저 천국에서 하나님의 뜻이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것처럼,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그렇게 기도를 가르쳐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는 정반대의 일들이 자꾸만 자꾸만 생겨나고 있다고 하는 의미에서 이 세상은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는 세상이 아니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려지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완벽한 그런 뜻대로 움직이는 세상이라고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가 착한 일을 하고, 선한 일을 하게 되면, 보상을 받고, 우리가 악을 행하고 나쁘게 살면 처벌을 받는 세상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게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이루어지는 세상이 그런 세상인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이냐면, 정반대로 움직이는 세상입니다. 착하게 살고 선하게 살면, 망하는 것 같아요. 정직하게 살면 힘든 것 같아요. 그런데 악을 행하고 폭력을 행하고, 갑질을 하는 사람들은 승승장구하고, 아무런 문제 없이 계속해서 잘 나가는 그런 모습을 우리가 목격하게 되는 겁니다. 폭력을 쓰는 사람들은 승승장구하면서 그렇게 잘 나가고 있는데, 그 피해자들은 그 폭력과 갑질 때문에 트라우마를 겪으면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었던 그런 꿈도 접어야 했고,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그런 현실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에 열풍처럼 불어오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면, “나도 옛날에 당했다.”라고 하는 그런 고발입니다. 스포츠 스타들이 예전에 학창 시절에 가해자가 되어서 그 사람들을 엄청나게 폭행했던 그 일들에 대해서 고발하면서, 그렇게 학교 폭력을 저질렀던 그 가해자들을 영원히 스포츠 세계에서 영구 퇴출해야 한다고 하는 목소리들이 지난 한 주간 내내 들렸는데요. 이런 여론이 들끓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정의가 이루어지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고 하는 그런 갈망 때문이죠. “도대체 세상이 왜 이래?” 뒤죽박죽이어서, 제대로 된 세상에서 살고 싶다고 하는 갈망이 폭발적으로 나오고 있는 현상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힘없는 스포츠 스타들에 대해서는 그런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사실 그 사람들보다 더 나쁘고 더 악한 권력자들은 성추행을 저지르고 그것 때문에 피해를 당한 여성이 있고 목숨을 끊어도, 아무런 처벌받지 않은 채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 그런 세상에서 우리들은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모습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이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가? 하나님의 뜻대로 선하신 뜻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경건하게 살면 오히려 고난을 당하고, 의롭게 살면 오히려 손가락질당하고, 악하게 살고 더럽게 살고 지저분하게 악하게 살면, 그런 사람들이 오히려 잘 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기에,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는 천국에 대한 갈망들이 있는 것이고, 그 천국에 대한 갈망이 어렴풋하게 이 세상의 방식으로 표현되는 것이 때로는 정치로, 때로는 이런저런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인데, 우리가 아직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에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박수가 아니라, 의를 위해서 사는 것이 박수가 아니라 박해를 당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럴 때 우리들은 어떤 결론을 내리기가 쉽습니까? 믿음을 가지고 산다는 게 의미가 없구나! “이 길이 아닌 개벼.” 정의롭게 산다고 하는 것이 밥 먹여주는 게 아닌가? 그러면서 다 그 믿음의 길에서부터 떠나려고 하는 그런 유혹들을 우리가 늘 당하면서 사는 것이죠. 마치 왜정시대 때,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친일파로 변해가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조금만 독립운동을 하면 우리나라가 독립이 될까 했는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독립은 더 이루어질 것 같지 않습니다. 독립 운동가들은 계속 잡혀가고 있고, 그 가족들은 정말 고통을 당하고 있고, 반면에 친일파들은 승승장구하고 있고, 판사가 되고 법관이 되고 경찰이 되고 잘 나가고 있는 그 모습을 보면서, 결국에는 독립운동하다가도, “이 길이 아닌가 봐.” “이제 우리나라는 끝난는가 보다. 일본에 협력하는 것이 살 수 있는 길인가 보다.” 하면서, 시간이 가면 갈수록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변절자가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다가도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면 의를 위해 살다가 박해를 당하는 일들이 많아지게 되면, 결국 우리들은 의를 가지고 의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의에서부터 멀어지게 되고, 경건하게 살기를 포기하게 되고, 신앙을 저버리기가 너무나도 쉬운 유혹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순간에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자가 복이 있다.” 지금 박해를 받고 있는, 어려움을 경험하면서 살고 있는 그 삶이 아무런 의미 없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복이 있다고 봐주신다고 하는 그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고, 그리고 그 박해를 당할 때 절망하고 포기할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겁니다. 마태복음 5장 12절 말씀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으로 살다가 안 풀린다고 해서 거기서 멈추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의 길을 가는데 아무런 응답도 없는 것 같고, 사람들로부터 비아냥거림을 당하는 것 같고, 여러 가지 아픔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거기서 멈출 것이 아니라, 고통을 당하는 자, 나를 위하여 내 이름 때문에 핍박을 받는 너희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그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믿음으로 다시 한번 결단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억하고 계십니까? 사실은 가장 큰 박해를 당하신 분이 계십니다. 아무런 죄도 없이, 우리는 죄가 있어서 박해를 받을 수 있고 우리는 의롭게 산다고 이야기는 하지만, 사실 의가 아니라 죄가 더 많은 우리들인데, 그런데 아무런 죄가 없으시면서도 가장 큰 박해를 받으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누구신가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를 위해 박해를 받을 때마다,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사실은 우리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대신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다시 한번 믿음으로 일어서야 될 줄로 믿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들었던 이야기인데요. 제가 시무하던 교회에서, 그전에 시무하던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께서 시무하실 때, 그 교회 성도님의 아들이 한인 무슨 행사에, 체육대회에 나갔다가 크게 다치는 일이 있었습니다. 야구 경기를 하다가 야구공이 날아와서 눈에 맞았고, 결국 그 아이의 한쪽 눈이 실명되는 그런 큰 사고가 일어나게 됐습니다. 그 목사님의 그 교인의 아이가 그렇게 되었다고 하는 소식을 들은 목사님께서, 그분의 집을 찾아가서 위로하고, 격려해 주기 위해서 찾아갔는데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당장 가지 못하고 하루 이틀 뒤에 그 집에 찾아가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 집에 문을 노크하면서, 아이가 다쳤다고 하면 하는 것을 물어보면서, 위로해 주기 위해서 갔는데, 그 아이의 어머니가 나와서 어떤 반응을 보였냐면, 나무를 하나 가지고 나와서 목사님의 배를 콕콕 찌르면서 말을 하는 거예요. “뭐 하려고 왔어요?” 아니, 목사님이 눈을 실명시킨 것도 아니고, 가서 위로해 주기 위해서 갔는데, 그런 식으로 나오는 성도의 반응을 보면서 목사님이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요. 도대체 내가 이런 수모를 왜 겪어야 하는가? 내가 이 아이에게 가해를 한 것도 아니고, 이 아이를 위해서 불쌍한 마음으로 가서 위로해 주려고 했는데, 왜 나에게 이런 식으로 대응하는가? 너무나도 충격을 받아서, 너무나도 힘들고 어려웠는데, 그런데 그 목사님의 마음 가운데 주님의 십자가가 생각이 나더라고요. 알고 보니까 주님을 향해서 나무를 찔렀던 자, 아니 십자가에 못을 박았던 자가 바로 나였구나! 아무런 죄 없는 우리 주님께서 나를 건지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박해를 당하신 그 주님을 바라보면서, 정말 목회 더 이상 못해 먹겠다고 생각됐던 그 순간에, 주님의 십자가 바라보면서 다시 한번 힘과 위로를 얻고, 다시 목회를 하게 되었다고 하는 그런 고백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고 한다면, 우리에게 늘 박수만 있으면 좋겠죠. 하지만 놀랍게도 의를 위해 살다가 고난을 당하는 일이 있을 것이고 박해를 당하는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괴로워할 것도 아니고 절망할 것도 아니고 나를 위하여 아무런 이유 없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의 박해를 당하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위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들에게 주실 하늘의 상급을 기억하면서, 기쁨으로 승리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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