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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사랑으로 선한 영향을 끼치는 교회 = 교회 모토 02

주님의 사랑으로 선한 영향을 끼치는 교회 2017.3.18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의 가르침을 요약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요약할 수 있다고 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 12:29-31)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똑같이 중요하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사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분리하려야 분리할 수 없다. 요한일서 4:20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그러니까 전심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교회는 이웃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할 때에야 가능하다.

이사야서를 읽어보면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알 수 있다. 이사야서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의 제사를 거부하시는 내용이 등장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이스라엘 민족이 헛된 제물을 가져오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기도할지라도 듣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셨다. 그들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배하였지만, 정작 그들의 손에 피가 묻어 있었다. 이웃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면서 악을 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지 않으실 것이라고 하셨다.

어쩌면 우리 한국교회의 문제는 이스라엘 민족의 문제와 닮았다. 전심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교회가 되지 못하고, 탐욕적으로 돈을 추구하며 우상을 섬기는 것도 문제이다. 또한 하나님께 예배하러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예배받기 위해서 교회를 이용하는 것도 문제이다. 더 나아가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이다. 제대로 하나님께 예배하지도 못하고 제대로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들의 문제이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으로 선한 영향을 끼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가리켜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말씀하셨다(마 5:13-16).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 주변에 보내주신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 예수님은 이 세상 사람들이 우리들의 말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어 있다고 하셨다(마 5:16). 다시 말하면,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사람들에게 착한 행실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방법은 성도들을 통해서이다. 성도가 빛이 되고 소금이 되면, 사람들이 맛을 보게 되고 빛을 보면서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성도들이 그렇게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답답해서 묻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말이다. 하나님이 있다는 증거를 제발 보여 달라고 말이다. 그 말은 이 세상 사람들이 우리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도무지 느낄 수 없다는 말이다. 이 질문에 대한 책임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 자신에게 있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보여주어야 하고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해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등장하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강도 만난 사람을 그냥 지나쳤다. 자신들에게 그를 돌보아야 하는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하지만 사마리아인은 그 사람을 도와주었다. 그는 아무 할 일이 없는 한가한 사람이어서가 아니었다. 그도 제사장이나 레위인과 똑같이 바쁜 삶을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 때문에 멈추어 섰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뜻하지 않은 사명 때문에 자신의 계획을 내려놓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사마리아인은 자신의 여행계획을 수정해야만 했다. 사마리아인은 자신의 재정 운용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그로 인하여 모든 것이 망가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강도만난 사람을 돕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이다. 그 사랑은 일만 달란트처럼 큰 것이다. 그런데 백 데나리온처럼 작은 사랑의 행위를 이웃들에게 할 수 없다면, 그것은 참된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하신 이웃들을 사랑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이 사회에 선한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그것은 오직 따뜻한 사랑으로 그들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일 때에만 가능하다. 팀 켈러(Tim Keller) 목사님은 <센터처치>라는 책에서 어떻게 커다란 바위를 폭파시킬 수 잇는지에 대해서 쓴 적이 있다. 커다란 바위를 폭파시키기 위해서는 바위 근처에서 다이너마이트를 터트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 보았자 바위에 그을음만 입힐 뿐이라는 것이다. 대신 바위 안으로 깊은 구멍을 내어서 그 안에 다이너마이트를 넣고서 터트려야 한다고 한다. 그럴 때에야 바위를 폭파시킬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진리를 주장하고 목소리를 높이기만 하면 우리의 임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때가 많다. 불신자들에게 예수님을 믿으라고 소리치고,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악을 행해서는 안 된다고 소리치기만 하면 우리들의 임무를 다 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듣든지 듣지 않든지 우리는 진리를 외치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다. 물론 그런 방법을 통해서도 사람들이 복음을 들을 수도 있고, 악을 행하던 사람들이 악행을 중단할 수도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속에 역사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그러한 방법은 성경적이지도 않고 효율적이지도 않고, 오히려 역효과를 내게 되어 있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또는 길거리에서 예수님을 믿으라고 외치는 그 소리를 사람들이 귀를 기울여 듣는 것이 아니라, 무례한 사람들이라고 비난하면서 오히려 기독교에 대한 혐오감만 증폭시키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행위들은 마치 커다란 바위 옆에서 다이너마이트를 터트리는 것과 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강하게 부는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햇볕이 사람의 옷을 벗기듯, 우리는 주님의 따뜻한 사랑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어야 한다. 교회는 어떤 건물이나 어떤 조직이 아니라, 사실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모든 성도들이 교회이다. 교회인 우리는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줌으로써 이 세상에 선한 영향을 끼쳐야 한다. 교회는 그냥 우리끼리 잘 행복하게 지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변 사람들에게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함으로써 선한 영향을 끼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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