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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있을진저 (눅 6:24-26) – 팔복강해 9

2021년 2월 28일 주일2부예배 설교 – 팔복 강해 시리즈 9

지난 주로 팔복 강의가 마친 것이라고 생각했을 텐데요. 하나가 더 남았습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팔복이 아니라, 사복이 등장합니다. 마태복음에 나와 있는 8가지 복을 전부 다 기록하지 않고, 그 가운데서 4개의 복만 기록하고 있는데요.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그리고 굶주린 자가 복이 있다. 그리고 우는 자가 복이 있다. 그리고 욕을 먹고 비난을 당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는 팔복 가운데서 네 개의 복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을 팔복 가운데 사복을 기록한 다음에, 네 가지 화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는데요. 오늘 읽은 말씀이 바로 그 네 가지 화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팔복 시리즈 마지막 덧붙이는 시리즈가 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화가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있는데요. 어떤 사람에게 화가 있을 것인가? 부유한 자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지금 배부른 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지금 웃고 있는 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칭찬하고 손뼉 치는 그런 대우를 받는 사람이 화가 있을 것이라고 오늘 본문의 말씀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상당히 불편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간절히 소망하고 있는 내용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 부자가 되고 싶습니까? 가난한 자가 되고 싶습니까? 부자가 되고, 싶지 부자까지는 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재정적으로 쪼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당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이 솔직한 우리들의 소망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부요한 자들은 화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시기 때문에, 약간 당혹스러운 겁니다. 부자들을 향해서 주님께서 해 주시는 말씀이 “너희들은 이미 땅에서 위로를 다 받아버렸고, 너희들이 이 세상에서 좋은 것을 다 누렸기 때문에, 더 이상 하늘나라에서는 받을 게 없다.” 하늘에서 위로를 받을 것이 없다고 말씀해 주시기 때문에 당황스럽기도 하고, 혼란스럽습니다고 느껴지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잘 먹고 싶은 그런 소망이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배고프게 살기보다는 좀 마음껏 먹었으면 좋겠고, 포만감 있게 먹고 싶은 것이 우리들의 기본적인 욕구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배부른 자들은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는 겁니다. 잘 먹는 게 죄가 되는 것일까요? 왜 배부른 자들에게 화가 있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걸까요? 지금 배부른 사람들은, 지금 배고프지 않은 사람들은 결국 나중에는 주리게 될 것이라고 하는 이 말씀, 우리가 받아들이기가 상당히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슬프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 울게 됩니까? 삶이 고통스러우면 울게 됩니다. 행복하고 기쁠 때에는 웃게 되는 것이지만, 우리들의 삶이 정말 힘들고 어려우면 울게 되는 것인데, 예수님께서는 지금 웃고 있는 자들, 다시 말하자면 지금 행복하게 느끼는 사람들, 지금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람들, 지금 기쁨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은 결국에는 너희가 애통하게 될 것이다. 슬피 울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정말 이 말씀이 정말 당황스러운 것이죠.

뿐만 아니라 우리는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인정해 주고, 손뼉 치는 것을 우리는 갈망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지금 인정받는 사람들, 모든 사람들이 칭찬하고 박수를 친다면, 그 사람은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데, 도대체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종종 수많은 사람들은 이 말씀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러니까 우리는 가난하게 살아야만 한다고 말하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크리스천들은 누가 진짜 크리스천이냐? 부자는 진짜 크리스천이 아니고, 가난하게 살아야만, 아주 힘들게 살아야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살아야만, 그래야 진짜 크리스천이지, 부자는 진짜 크리스천이 아니라고 말하는 그런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금욕주의자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기독교의 역사상, 그리고 기독교만이 아니라 세계 역사상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금욕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금욕주의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이 세상에서 만나는 것들을 다 더러운 것으로 보는 겁니다. 이 세상을 둘로 나누는 것이죠. 하나는 물질, 또 하나는 영혼, 물질과 영혼으로 이분해버리고, 그런데 이 물질이라고 하는 것 우리가 육체적으로 만질 수 있는 가시적인 것, 물질적인 것, 이런 모든 것들은 다 더러운 것이고 아주 추악한 것이고 우리가 버려야만 하는 것인데, 우리가 오로지 바라봐야 하는 것은 영적이고, 정신적이고, 고상한 것들만을 우리가 추구해야 된다고 하는 그런 이분법적 사고가 우리 역사상 계속해서 있어왔습니다.

헬라 철학자 가운데 플라톤이라고 하는 사람이 대표적인 케이스죠 플라토닉 러브(Platonic love)라고 들어보셨습니까? 무슨 얘기죠? 육체적인 사랑이 아니라, 정신적인 사랑이 고상한 것이지, 육체적인 것은 나쁜 것이다. 헬라 철학자들의 소망이 무엇이냐면, 우리가 빨리 이 육신을 벗어버리고, 이 육신이라고 하는 것은 감옥에 불과한 것이고, 이 물질세계라고 하는 것은 정말 썩어질 것이고, 나쁜 것이니까, 이 세상의 육체적인 것, 물질적인 것들은 다 벗어버리고, 저 정신의 세계, 저 영적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그것이 진짜 우리가 추구해야 될 목표라고 이야기했던 것이 헬라 철학자들이고 금욕주의자들의 관점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금욕주의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성경 전체의 메시지를 살펴본다고 하면, 금욕주의하고는 거리가 먼 것이고, 금욕주의가 성경적인 관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금욕주의적인 관점으로 성경을 읽고 해석하려고 하는 경향이 많이 있어서, 그래서 이런 말씀들을 볼 때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가난하게만 살아야 되고, 물질을 버려야 되는 것이고, 오직 정신적인 것만을 추구해야 된다고 말하는 경향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부자가 되는 것은 나쁜 것이고, 오직 가난해야만 된다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제가 여러 번에 걸쳐서 수차례에 걸쳐서 계속해서 말씀드렸듯이 금욕주의는 성경적인 관점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하여 피를 흘려주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는데, 어디로부터 구원해 주셨는가? 율법의 요구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굴레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예전에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을 했느냐? 내가 종교적으로 내 자신을 학대하고 고통을 받고 고난 가운데 살아가면, 그런 고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게 갈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종교적 굴레가 나를 하나님에게로 가게 만든다고 생각을 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무엇을 우리에게 가져다주었는가? 우리를 구원을 가져다주었는데, 우리로 하여금 그런 종교적인 굴레에서부터 해방되도록, 이 율법의 요구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주시는, 그런 엄청난 기쁨의 좋은 소식으로, 그 구원이 우리에게 왔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그런 금욕주의적인 관점을 가지고 우리의 행실로 우리의 고난과 우리의 고통으로 그래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하는 그런 잘못된 관점들이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한 관점들은 복음의 그 기쁨을 아직 맛보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성경적인 관점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보시기에 아름답다고 선언하시고 좋다고 선언해 주셨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우리가 감사함으로 받는다고 하면, 버릴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한다고 하면, 정말 우리들에게 유익이 되는 방향으로 사용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 물질을 우상숭배의 자리에 놓고, 우상을 숭배하듯이 물질을 섬기고, 우리가 탐욕의 그 구렁텅이로 빠지지만 않는다고 한다면,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되지 않고 탐욕의 자리로 빠져들고, 물질이 우상이 되는 자리로 들어가 버리기 때문에 큰 문제인데요. 그런 단계로 들어가지만 않는다고 한다면, 모든 것들이 우리들에게 선하게 사용될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왜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에 말씀을 하시면서 부여한 자들은 화가 있을 것이다. 너희들이 지금 잘 먹고 잘 사는 배부른 자들은 화가 있을 것이다. 말씀하시고 그리고 지금 행복해서 웃고 있는 사람들은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의 삶에만 소망을 두고 내가 부유하니까, 내가 행복하니까, 나에게 아무런 걱정이 없고 많은 사람들이 내게 박수를 쳐주고 인정해 주니까,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은 부유하게 되면 다른 것들은 다 필요 없고, 이제는 그 물질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나는 이제는 괜찮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이 있는데요. 이것은 엄청나게 위험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한 예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냐면 예수님께서 해주신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어떤 부자가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그 농사를 짓고서 결과를 기다렸는데 엄청난 수확을 얻게 된 겁니다. 오늘날로 치면 대박을 진 것이죠. 장사를 했는데 엄청난 수익을 내게 된 것입니다. 그럴 때 이 부자가 어떻게 했는가? 많은 곡식을 수확한 후에 이 수확한 곡식들을 쟁여놓을 곳간이 부족하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곳간을 많이 지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수확한 그 모든 곡식들을 그 곡관 안에 집어넣고서 정말 행복해했어요. 행복하면서 했던 말이 누가복음 12장 19절의 말씀입니다.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이게 그 부자의 마음입니다.

물질이 가득 차 있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이젠 됐다. 이제는 더 이상 걱정할 게 없다. 이제는 행복하게 살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 부자의 관점인 것이죠. 그런데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이냐면, 누가복음 12장 20절 말씀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내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라고 질문을 던지신 것이죠. 도대체 이 부자가 잘못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잘못한 게 뭐죠? 사실 잘못한 것은 거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니 우리가 만일 이 부자라고 한다면 우리들도 그렇게 했을 겁니다. 만일 우리 여러분들에게 돈이 많이 생긴다고 한다면, 물질이 많이 생긴다고 한다면 흥청망청 써버릴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저축하기도 하고 아니면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서 더 많이 불릴 수 있는 방법을 여러분들은 모색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이제는 돈이 많으니 이제는 그래도 한 시름 놓았다고 생각하게 될 겁니다.

하지만 이 사람을 향해서 예수님께서는 그거 잘못됐다고 말씀해 주고 계시는데요. 이 사람의 잘못이 무엇이냐면, 곳간을 만들었다고 하는 것이 잘못된 것도 아니고, 그 곳간 안에 곡식을 쟁여 두었다고 하는 것이 잘못된 것도 아닙니다. 잠언서의 말씀을 본다고 한다면 우리가 가져야 할 지혜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이 세상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질 뿐, 영원에 대한 관심이 아무것도 없었다고 하는 것이 이 사람의 문제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사는 게 너무나도 좋아요. 그리고 그 좋기 때문에, 죽음 이후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죠.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는 것이죠. 지금 잘 먹고 잘 사니까, 이제는 행복하다고 생각한 것인데, 사실은 하나님께서 오늘 밤에 그 영혼을 부르신다고 한다면 거기에 대한 대비가 무엇이 돼 있는가? 영원에 대한 대비가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것이 이 사람의 문제인 것입니다.

노아 시대 때 사람들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노아 시대 때 수많은 사람들이 홍수로 인해서 다 멸망해 버리고 말았는데요. 예수님께서는 그 노아 시대 때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장 38절에서부터 39절의 말씀에, “홍수 전의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마지막 종말 때에도, “이와 같으리라.”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노아 시대 때 사람들이 잘못한 게 뭡니까? 먹는 것이 잘못된 겁니까? 마시는 것이 잘못된 겁니까?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잘못된 겁니까? 종종 극단적인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는 이단 종파에서는 먹고 마시는 것이 잘못된 것이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면서,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가 가까이 왔으니까, 이제는 식음을 전폐하고 금식해야 하고, 예수님께서 가까이 왔으니까 이제는 가정생활을 내팽개쳐 버리고, 기도원에 와서 수도원에 와서 거기서 주님을 맞아야지, 그렇게 가정생활을 하면 안 된다고 말하면서, 신도들을 불러 모으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먹고 마시고 시집 가고 장가간 것은 노아 시대 사람들만 한 것이 아니라, 노아의 가족도 똑같이 한 일입니다. 노아도 먹고 마셨어요. 노아도 결혼해서 살았어요. 똑같아요. 근데 뭐가 잘못입니까? 문제가 무엇이냐면 노아 시대 때 사람들은 일상을 살면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 하고 일상을 살았는데, 그 성경은 일상이 잘못됐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을 살기는 사는데 그것뿐이에요. 그게 다예요. 지금 홍수가 내릴 바로 직전인데도 불구하고, 영원에 대한 관심, 영혼에 대한 관심, 자신의 죽음 이후에 대한 관심이 아무것도 없어서, 그냥 먹고사는데 일상을 누리는 데만, 그들의 모든 관심이 쏟아져 있었다고 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죠.

노아와 노아의 가족들의 차이점이 있다고 한다면 그들이 일상을 중단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일상을 살면서도 하나 더 준비한 것이죠. 그것은 무엇입니까? 홍수가 날 것을 대비하여 방주를 만든 것입니다. 죽음 이후에 종말에 대하여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아니 그것에 대한 관점을 잃어버리고 그저 이 세상이 전부인 것인 양,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이 세상에서 잘 나가고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박수 쳐주는 그것이 나의 전부고, 내 인생의 전부인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지금 부요한 자, 웃는 자, 배부른 자, 지금 칭찬을 듣는 자들의 문제는 그들이 이 세상의 삶에 대해서 만족해하면서 전혀 영적인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하는 것인데요. 이 세상의 것들이 만족스러울 때 우리는 영혼에 대한, 정말 중요한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것을 관심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고, 이 세상의 것에 취해서 지금 위기가 다가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참된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한다는데 이들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언제 문제가 발생합니까? 결국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한다면 문제가 되는 것이고, 어리석은 부자에게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목숨을 찾으실 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인 관심을 가져야만 하는데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보면 바로 그러한 사실을 아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자가 있었고 거짓 나사로가 있었는데, 그런데 그 부자는 죽어서 지옥에 가버렸습니다. 그리고 거지 나사로는 죽어서 천국에 갔습니다. 왜 거지는 천국에 갔고 왜 부자는 지옥에 갔을까요? 모든 부자는 다 지옥에 간다는 말입니까? 모든 거지는 다 천국에 간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해 주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율을 통해서 말씀하시려고 했던 것이 무엇이냐면, 아무리 이 세상에서 잘 살았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의 마지막 종착역이 지옥이라고 한다면, “그 사람이 과연 복된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느냐?”라고 질문을 던지시는 거예요.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던지시는 질문이 무엇이냐면, 아무리 이 세상에서 힘들고 고통스럽게 살았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의 마지막 종착역이 천국이라고 한다면, “그 사람의 인생을 불쌍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일부러 극단적인 두 사람을 예로 드는 것입니다.

정말 부족함이 없고 정말 행복하고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는 그 사람을 예로 들면서, 그런데 그 사람이 지옥에 갔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 가장 불쌍한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 가장 정말 불쌍한 사람을 또 하나의 예로 내세웁니다. 나사로라고 하는 사람 정말 헌데를 앓고, 정말 고통스러운데, 그것을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을 정도로 그렇게 불쌍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의 마지막이 천국이라고 한다면 “그 인생을 불쌍한 인생이라고 할 수가 있겠느냐?”라고 예수님께서 질문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 한 주간 동안 살아가는 동안에 누가복음 6장 오늘 본문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한 주를 보내셨으면 좋겠습니다. 부요한 자는 화가 있을 것이고, 웃는 자, 배부른 자, 사람들이 인정하고 박수 쳐주는 그 자가 화가 있을 거라고 하는 그 말씀을 우리가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이 세상의 것들이 우리들의 최우선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한 것 같아도, 내 꿈과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고 내 생각과는 달리 장사가 잘 안 되고, 내 생각과는 달리 우리들의 삶이 잘 풀리지 않고 모든 것들이 엉망진창으로 가버려서, 사람들이 보기에 정말 부러울 만한 것이 내게 없다고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절망하고 그것 때문에 괴로워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이 이 세상의 것들을 내가 얼마나 가졌느냐가 제일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실 중요한 것이 하나님과 나 사이에 그 사랑의 관계 가운데 들어가는 것이 가장 소중하다고 하는 사실을 한 주간 동안 깊이 묵상해 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기보다는, 물질 때문에 기뻐하고, 물질 때문에 절망하고 성공 때문에 기뻐하고 성공 때문에 좌절하는 인생을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조그만 어려운 일이 닥치면 괴로워하고, 조금만 좋은 일이 생기면 흥분하고 살아가면서, 마치 우리의 인생이 이 세상의 물질에, 이 세상의 사람들이 박수 쳐주는 데 내 인생이 달려 있는 것인 양, 그렇게 이 세상이 우리들의 우상처럼 되어서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그리고 그러한 함정에 누가 빠지는가? 우리 모두가 다 빠지기 쉬운 것이죠. 목사도 그러한 함정에 빠지기 쉽고, 모두가 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늘 빠져들 수밖에 없는, 너무나도 위험한 그 위험 속에 우리가 빠져들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바라보면서, 그래서 우리가 더더욱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그 연약함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고, 그리고 우리를 그 십자가의 구원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날마다 날마다 십자가 앞에 다시 한번 나가서, 우리들의 마음이 이 세상의 것들로 인해서 웃고, 이 세상의 것들로 인하여 배불러하고 사람들이 박수 쳐주는 그것을 갈망하면서,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늘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우리를 늘 고통스러운 자리로 집어넣을 수밖에 없는 그런 배반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 것인데, 그러한 것들에 우리의 마음이 빼앗겨 버릴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과의 정말 선하고 생생한 사랑의 교제의 관계 가운데 들어가는 그런 간절한 마음을 가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 조그마한 어려움 때문에 절망하거나, 조그마한 부유와 조그마한 행복과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 때문에 그것의 기쁨을 누릴 것이 아니라, 오로지 참된 십자가 앞에 나아가는 가운데 주께서 주시는 그 참된 기쁨 참된 배부름 주님께서 참되게 인정해 주시는 그 축복 안에 우리 모두가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찬양을 부를 건데요.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라고 하는 찬양을 부를 건데, 가사를 바꾸어서 생각하셔도 돼요. 괴로울 때가 아니라, 행복할 때, 부유할 때, 잘 나갈 때, 주님의 얼굴 보라. 이 세상의 것 때문에 기뻐하고 이 세상의 것 때문에 좌절하고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우리의 마음을 다 드리며, 주 안에서 참된 기쁨과 소망을 발견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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