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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를 따라 주시는 상 (삼하 22:21-28)

2021년 3월 3일 수요예배 설교 – 사무엘하 강해

공의를 따라 주시는 상

할렐루야! 지금 우리는 다윗의 기도이자 찬송인 이 시를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는데요. 그 세 번째 단락을 우리가 살펴보게 됐습니다. 21절부터 28절의 말씀까지 읽었는데, 이 말씀들을 한마디로 요약하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나의 의로움에 따라서, 나의 공의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내게 상을 베풀어 주셨다.”라고 하는 그런 고백으로 요약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다윗은 지금 이 시를 써 내려가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해 주시고 모든 어려움에서부터 건져주셨을 때에 다윗이 고백하는 그 고백의 내용 중에 하나가 무엇이냐면, 내가 정말 의롭게 살았는데, 공의롭게 행했는데, 하나님께서 그 공의를 외면치 아니하시고, 나의 그 공의에 따라서, 내게 상을 베풀어 주셨다고 그렇게 고백하고 있는 내용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우리가 가만히 묵상하다 보면, 이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오해하기도 쉬운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만 본다고 한다면, 다윗이 어떻게 살았는가? 정말 완전하게 살았고, 아무런 흠도 없고 허물도 없고 정말 깨끗하게, 그 누구가 이 다윗을 비난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인생을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다윗에게 이런 놀라운 축복을 주셨다고 하는 그런 의미로 들릴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러한 묘사는 다윗의 실제의 모습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습니다. 다윗은 완벽한 삶을 살고,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도 어긴 적이 없으며,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완벽한 삶을 그런 사는 사람입니까? 넘어지고 죄를 짓고 악을 행한 너무나도 연약한 사람이었습니까?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물론 다윗은 의로운 면이 많이 있었습니다. 다윗에게는 여러 가지 뛰어난 모습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다윗에게도 허물이 있었죠.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밧세바와의 그 사건, 그리고 뿐만 아니라 다윗에게 완벽한 인생이 아니라 여러 가지 허물들 잘못들이, 그의 마음으로 지은 죄, 그리고 행동으로 지은 죄들을 우리가 꼽으라고 한다고 한다면, 여러 개를 꼽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다윗이 정말 하나님 앞에 완벽하고 의롭고 정말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단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이 완벽하게 그 인생을 살았느냐라고 질문을 던진다고 한다면, 그렇지 않다고 대답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쩌면 다윗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이 다윗이 살아왔다고 하는 그런 고백을 하는 것이 옳을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은혜라고 하는 것은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입니다. 자격이 없는 자에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가리켜서 은혜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다윗의 삶을 평가한다고 한다면, 다윗이 공로를 세운 게 50%, 그리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신 게 50%, 그렇게 해서 다윗의 삶이 이루어졌다고 이야기할 수 있냐면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의 삶 가운데 다윗의 공로가 50% 하나님의 은혜가 50%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100%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해야 옳습니다. 홍안의 소년이었던 다윗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윗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뛰어나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좋은 능력을 보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100% 무조건적으로 이 다윗을 수많은 형제들 가운데서 선택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다윗을 처음. 선택한 것도 100%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을 사울의 손에서부터 건지신 것도 100% 하나님의 은혜였을 뿐만 아니라, 밧세바와의 죄악으로 인해서 멸망을 받아야 하고 심판을 받아야 했던 그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용서해 주시고 그런 처참한 꼴 가운데 있던 그 다윗을 회복시켜 주셔서 그 다윗의 왕 위를 보전케 하신 것도 역시 하나님의 100% 은혜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겁니다. 블레셋의 그 외적으로부터 승리하게 된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고, 다윗의 인생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고, 그런 수많은 허물과 죄악 연약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사랑을 베풀어주시고, 전적으로 은혜를 베풀어주셨기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인데, 이제 와서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는 정직하게 살았고,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켰고 내가 의롭게 행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게 그에 상응하는 복을 주셨다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왜 다윗은 여기서 하나님께서 그 다윗을 건져내신 이후에 그가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고백하는 이 시 가운데서 왜 다윗은 이런 식으로 말하고 있는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다윗은 21절 말씀에 보면 여호와께서 내 공의를 따라 상을 주시며 내 손에 깨끗함을 따라 갚으셨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21절에 22절 말씀에서도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을 행함으로 내가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고, 23절에서도 그의 모든 법들을 내 앞에 두고 그의 규례를 버리지 아니하였다고 이야기하고 있고, 24절 말씀에서는 내가 또 그의 앞에 완전하여 스스로 지켜 죄악을 피하였다라고 이야기하고 있고, 25절 말씀에서는 내 의대로 그의 눈앞에서 내 깨끗한 대로 내가 깨끗하기 때문에 나에게 이렇게 갚으셨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26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베푸시는 하나님, 완전하게는 자에게는 완전함을 보이시는 하나님, 그러니까 다윗은 자비로웠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것이고, 다윗이 완전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완전함을 베풀어주시는 것처럼 고백을 하고 있고요. 27절 말씀에서는 깨끗한 자에게는 주께서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악한 자들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여주신다고 말해서, 내가 깨끗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깨끗함을 보이셨다고 그렇게 고백하고 있고, 28절 말씀에서도 하나님은 권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자는 살피고 낮추신다고 했는데, 내가 교만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낮추신 것이 아니라, 내가 겸손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높이셨다고 하는 그런 의미로 고백하고 있는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다윗은 이런 고백을 하면서 내가 그만큼 의롭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나는 하나님의 뜻을 잘 순종했다. 그러니까 나는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하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표현을 통해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에 대해서 다윗이 노래하고 있다고 하는 점을 살펴보아야 되는데요. 다윗이 지금 노래하고 있는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냐면,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가? 공평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악을 행한 자에게는 악을 갚으시고, 또 선을 행한 자에게는 보상을 하시고, 공평하게 법을 어긴 자에게는 악을 심판을 하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는 상을 주시는, 그런 공의로운 하나님, 정의로운 하나님, 전혀 편파적이지 아니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노래하고 있다고 하는 점에 주목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참 살아가면서 정말 힘든 것이 무엇인가요? 우리나라에 살면서 정말 힘든 것이 무엇입니까? 힘든 것이 무엇이냐면, 공의가 정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하는 것이 정말 힘든 것이죠. 힘없는 사람들은 조금만 잘못해도 벌금을 물고 감옥에 가기도 하고, 여러 가지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당하고, 그래서 법 집행이 아주 엄한 것처럼 보이는데, 힘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다 빠져나가고, 그리고 그들에게는 전혀 법이 적용되지 않는 것 같아서, 똑같은 죄를, 아니 더 큰 죄를 지어도 이 사람들은 전혀 처벌을 받지 않고 떵떵거리며 살아가고 있는 그 불합리한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입니까? 그래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좀 정의로운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런 갈망이 우리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있는 것이죠.

그런데 지금 다윗이 노래하고 있는 이야기가 무엇이냐면, 나는 정말 완벽한 인생을 살았다. 나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나는 그런대로 괜찮은 사람이었다고 하는 것을 이야기하려고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가? 하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이시고, 정의로우신 하나님이시고 편파적이지 아니하시고 공의로우신 그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 이 표현을 하고 있다고 하는 점을 우리가 살펴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 노래의 초점은 다윗 자신이 얼마나 완벽하게 행했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죠. 다윗은 죄를 저질렀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일방적인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래서 다윗은 회복될 수 있었고 보존될 수 있었고, 그래서 지금까지 살아올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다윗의 인생 가운데 다윗이 고백할 수 있는 가장 큰 하나님의 속성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하나님 자비하신 하나님, 내 죄를 용서해 주신 그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이 부분에서 노래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면, 그런데 그 하나님이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공의로우신 하나님 정의로우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삶 가운데서 21절에서부터 28절을 통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다윗의 생애를 우리가 생각해 본다고 한다면, 다윗이 사울의 손아귀에서 도망 다니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을 죽이지 않으려고 했던 그 부분을 생각나게 하는 구절입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서 도망 다닐 때, 다윗의 마음은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왜냐하면 다윗이 나쁜 짓을 했나요? 한 일이 없습니까? 다윗은 나쁜 짓을 한 사람이 아니에요. 오히려 다윗은 골리앗을 무찔렀기 때문에, 영웅 대접을 받아야 마땅한 것이고, 박수를 받아야 마땅한 것이고, 칭찬을 받아야 마땅한 것이죠. 그러니까 다윗이라고 하는 사람을 냉정하게 완전히 샅샅이 분석하면서,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냐 아니냐를 따진다고 한다면 결론이 무슨 결론이 나겠습니까?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하는 결론이 날 겁니다.

하지만 적어도 사울과 다윗과의 관계 가운데서 누가 잘못했고 누가 잘한 사람입니까? 사울이 잘못했고 다윗은 잘못한 게 없는 사람인 것이죠. 다윗은 지금 골리앗을 무찌르고 사울의 충신이었고 그래서 도무지 사형을 당해야 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사울 왕이 다윗을 현상 수배범으로 걸어놓고 다윗을 죽이겠다고 달려들기 시작한 겁니다. 아무 죄가 없는 다윗을 죄인이라고 이야기하고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그 일이 벌어졌을 때 다윗은 할 수 없이 도망을 가야 했습니다.

도망가야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다윗으로 하여금 그 도망가는 것을 끝장 내고, 그 모든 것을 역전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두 번씩이나 주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다윗을 향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장군님,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신 겁니다.” 저 사울 왕을 죽여서 도망자의 생활을 끝내버리시고, 이제는 이스라엘 민족의 왕이 되어 주시고 기름 부음을 받으신 왕께서 이제는 이스라엘 민족의 왕이 되어 달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 순간에 사울 왕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내가 옳고 사울이 잘못됐지만, 내 손으로 원수를 갚아서 이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려고 수 있는 바로 그 순간에, 다윗은 사울 왕을 죽이지 않고 그냥 죽일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맙니다.

사무엘상 26장 18절 말씀에 보면 다윗은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내 주는 어찌하여 주의 종을 쫓으시나이까?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손에 무슨 악이 있나이까?” 이 말은 다윗이 죄를 하나도 안 지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윗이 죄 진 게 있죠. 하루에도 수십 번씩 머릿속으로 짓는 죄, 또 우리들의 행동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허물과 잘못들이 왜 없겠습니까? 다윗에게? 있죠. 하지만 사울이 다윗을 죽여야만 하는 정도의 그런 죄악을 저지르지 않았던 것이죠. 오히려 영웅이었던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내가 무슨 일을 했으면 내가 무슨 악을 행했냐고 당당하게 물어볼 수 있는 거예요.

그때 사울이 뭐라고 대답을 했습니까? 사무엘상 26장 21절 말씀에,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 하였도다.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라. 네가 오늘 내 생명을 귀하게 여겼은 즉, 내가 다시는 너를 해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되었도다 하는지라.” 그 순간에 사울 왕은 깨닫고 자신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동굴에 들어갔을 때에도 역시, 역시 마찬가지로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다윗은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무엘상 24장 9절서부터 12절 말씀에 보면,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왕은 어찌하여 들으시나이까? 오늘 여호와께서 궐에서 왕을 내 손에 넘기신 것을 왕이 아셨을 것이라. 어떤 사람이 나를 권하여 왕을 죽이라 하였으나, 내가 왕을 아껴 말하기를 나는 내 손을 들어 내 주를 해하지 아니하리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라 하였나이다. 내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 자락만 베었은 즉, 내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오늘 아실지어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 한 일이 없나이다.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지금 다윗이 믿었던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 사울 왕은 잘못된 동기로 다윗을 죽이려고 하고 있지만, 다윗은 그 사울을 죽이지 않겠다고 하는 거예요. 내 손으로 원수를 갚지 않겠다고 하는 거예요. 왜 하나님이 살아계시니까.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입니까? 공의의 하나님께서 지켜보고 계시고, 누가 잘했고 누가 잘못했는지를 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께서 결국은 심판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안다고 한다면, 그 공의의 하나님에게 내 모든 것을 맡겨버리겠다고 하는 그 믿음의 고백이 오늘 다윗의 고백인 줄로 믿습니다.

다윗은 또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사무엘상 24장 15절의 말씀, “그런즉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심판하사, 나의 사정을 살펴 억울함을 풀어주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께서 사울과 다윗 사이에 누가 잘못했고 누가 잘했는가를 판단하셔서, 하나님께서 공의의 재판관으로 판결해달라고 그렇게 간청하고 있는 모습이 여기에 기록이 돼 있는 것이죠.

사울 왕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사무엘상 24장 16에서 21절 말씀, “다윗이 사울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마치매, 사울이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내 목소리냐 하고, 소리를 높여 울며,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네가 나 선대한 것을 오늘 나타냈나니, 여호와께서 나를 네 손에 넘기셨으나, 네가 나를 죽이지 아니하였도다. 사람이 그의 원수를 만나면 그를 평안히 가게 하겠느냐? 네가 오늘날 내게 행한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내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로라. 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건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 그런즉 너는 내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 내 아버지의 집에서 내 이름을 멸하지 아니할 것을 이제 여호와의 이름으로 내게 맹세하라.”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씩이나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 공의의 하나님께서 누가 옳고 누가 잘못했는가를 아시고, 그대로 심판하실 때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믿지 못한다면, 공의의 하나님 심판관 되시는 하나님 정의의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믿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때 다윗이 내 손으로 죽여야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없으면. 그런데 왜 안 죽였어요? 하나님을 믿으니까, 공의의 하나님이 살아계시니까, 안 죽여도 되는 거예요. 내가 옳으면 하나님께서 내게 상을 베풀어 주실 것이다. 내가 잘못했으면 하나님께서 벌을 내려주실 것인데, 지금 사울과 나 사이에 누가 옳아요? 사울이 잘못됐고, 내가 옳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옳기 때문에 내 손으로 원수를 갚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공의를 따라 심판하시고 나의 의로움을 따라 억울함을 풀어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믿는다고 한다면, 그 순간에 원수를 갚지 않을 수가 있는 것이죠.

안타깝게도 우리 크리스천들이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믿지 않아요. 공의의 하나님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절대로 믿지 않고, 내 손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억울한 일이 있으면 내가 그 억울함을 갚아버려야 그래야 된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왜? 하나님이 없다고 믿으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말을 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안 믿으니까, 내 손으로 원수를 갚으려고 달려든다 이 말이에요.

하지만 그 순간에 다윗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요. 지금 돌아가는 현상만 보면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아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악인이 판을 치고 세상에 악한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승승장구하고 있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고, 전혀 아무것도 해결이 되지 않고 모든 것들이 다 선을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더 나쁘게 돌아가는 그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없구나”라고 하는 그런 생각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들면서, 하나님이 없으니까 내 손으로 해결해야 되겠다고 하는 그런 생각으로 너무나도 쌓여 있어서 내 손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죠.

하지만 다윗은 이 순간에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안 보여요. 지금 돌아가는 현상을 보면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돌아가고 있어요. 죄인이 승승장구하고 있고, 나쁜 일이 점점점점 퍼져나가고 있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사람들은 다 망하고 있고, 제대로 기도 펴지 못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고 억울한 일 가운데 억울함만 당하고 있는 그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이 전혀 움직여주지 않고,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그렇게 마음이 흔들릴 때 그때 다윗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공의의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리고 그 공의의 하나님께서 나의 억울함을 풀어주실 것이다. 언제 풀어주시나요? 내 생각에는 지금 당장 풀어줬으면 좋겠고 내 생각에는 지금 이걸 통해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는 것 같고, 바로 이 순간에 이걸 통해서 이것이 해결돼야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질 것 같아서, 바로 지금 이때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져야 될 것 같은데, 그런데 그게 아니라 계속해서 하나님의 공의가 지연되는 것만 같아요. 계속 지연되고 또 지연되고 계속 손해 보고 계속 망하고 억울한 일 당하고 계속 억울하고 원통한 일만 자꾸만 생기는 거예요. 그때 우리들의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는데, 놀라운 것은 다윗은 그 순간에도 하나님을 믿었어요.

그 옛날 나를 사자의 입에서부터 건져주셨던 하나님, 나를 골리앗의 손에서부터 건져내셨던 그 하나님, 지금은 사울이 나를 잡으려고 하고 있지만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그리고 결국에는 내가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 악이 승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그것을 확실하게 믿었기 때문에, 원수를 갚지 않고, 그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순종하며 나갔던 것입니다.

사무엘하 22장의 시는 1절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다윗의 모든 원수로부터 사울의 손에서부터 다윗을 구원해 주셨을 때에, 그때 다윗이 노래했던 시가 바로 오늘의 시입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까, 그 옛날 어려웠을 때 공의의 하나님이 계셨다고 하는 사실을 믿은 것이 잘 믿은 거예요. 잘 믿어 하나님께서 다윗의 억울함을 풀어주셨구나. 내가 사울을 죽이지 않고, 사울이 나를 죽이려고 달려들 때에 내가 원수 갚지 않고,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내 손으로 처치하지 않고, 그냥 원수를 용서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내가 판단하지 않겠나이다. 내가 재판하지 않겠나이다. 하나님 공의로 우신 하나님께 맡겼던 그것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신 것을 보면서, 지금까지 수많은 삶 가운데서 다윗의 삶은 억울함의 연속이었습니다. 억울하게 사울의 손에서 도망 다녀야만 했고, 광야에서 산적 두목과 같은 생활을 해야만 했었고, 적진에 들어가 미치광이 행세를 해야만 했었고, 고난과 역경의 세월들을 지나가야만 했었는데, 그 순간에도 다윗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시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하나님, 정의로우신 하나님으로 공의에 따라 갚으셔서 악한 자를 심판하시고 원수를 심판하시고, 나를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풀어 주시고 내 힘들고 어려운 사정을 풀어주시고 자비로운 자에게는 자비로 갚으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완전함으로 갚으시고, 깨끗한 자에게는 깨끗함으로 갚으시고 사악한 자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고, 교만한 자를 낮추시는 바로 그 하나님을 보면서 다윗은 그 앞에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쩌면 우리 크리스천들은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억울한 일을 당할 때가 정말 많습니다. 내가 행하지 아니한 것에 대한 비난을 받게 될 수도 있고, 우리가 행하지 않은 일들로 인해서 억울한 취급을 당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죄성이 너무나도 가득 차서, 그것을 내가 해결해야 된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에게 다윗과 같은 상황이 펼쳐진다고 한다면, 그리고 우리에게 기회가 주어진다고 한다면 사울을 죽이면서, 그래서 내 억울함을 풀고 싶은 것이 우리들의 마음일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시는 하나님이에요. 모르고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의 중심까지도 꿰뚫어 보시고, 요한계시록에 일곱 교회들을 향해서 해 주시는 말처럼, 주님께서는 그 교회의 사정을 속속들이 아셨던 그 주님, 너희들의 고통을 안다고 말씀하시고 내 수고를 안다고 말씀하시고, 우리가 어떤 어려움에 처했는지 어떤 억울함에 처해 있는지를 다 아시는 그 하나님께서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공의로 갚으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들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편 73편의 시는 어쩌면 우리가 늘 당하는 현실을 그대로 묘사한 시가 아닐까 싶습니다. 시편 73편 아삽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그러므로 그의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존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는도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그들처럼 말하리라 하였더라면 나는 주의 아들들의 세대에 대하여 악행을 행하였으리이다.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양심이 찔렸나이다.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오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 하리이다.”

시편 73편의 아삽의 시를 보면, 맨 처음에는 악인의 형통함을 보면서 황당해하고, 세상에 왜 이래? 왜 이렇습니까? 정말 왜 이렇게 돌아가는 겁니까? 하지만 결국 마지막에 깨닫게 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억울함을 당한 자들의 마음을 풀어주시는 하나님, 우리들의 사정을 알아주시는 그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그의 노래에 그 톤이 바뀌게 되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원하기는 우리 모두가 다윗과 함께, 그리고 아삽과 함께, 공의의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고백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이 세상만 바라보면, 안 계신 것처럼 보이는데, 그런데 안 계신 것이 아니라, 뒤돌아보면 하나님께서 다 하나님께서 공의로 판단하시는 거예요. 그러므로 억울해도 괴로워할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대신 지신 그 하나님 주님을 바라보면서 믿음으로 고백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어떠한 일을 만나든지 어떠한 상황에 처하든지,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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