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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주를 의뢰하고 (삼하 22:29-46)

2021년 3월 10일 수요예배 설교 – 사무엘하 강해

내가 주를 의뢰하고

지금 우리는 다윗의 기도이자 찬송이며 시인 내용을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는 가운데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시가 참 길다는 느낌을 받게 되겠는데요. 아주 짧은 시들도 많이 있지만,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이 사무엘하 22장의 말씀, 이것이 시편 18편의 말씀과 똑같은 말씀인데, 이 시는 굉장히 길게 긴 시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시가 긴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다윗이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부르는 노래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윗의 생애 가운데 있었던 그런 파란만장한 이야기들을 회고하다 보면, 단 몇 마디로만 표현하기가 어려운 그런 면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인생도 살펴보면 참 할 말이 많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연세가 드시면 할 말이 그렇게 참 많은 것 같아요. 예전에 경험했던 것들, 예전에 참 의미가 있었던 것들, 가슴 한편 한편에 많이 쌓아두었기 때문에, 어떠한 일들을 볼 때마다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그때 느꼈던 감정과 생각들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일 것 같습니다.

아무튼 다윗의 생애 가운데서 하나님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셔서 여러 가지 위기를 극복하기도 하고 승리로 이끌었던 그 삶들을 생각해 본다고 하면, 이 시가 그냥 단순히 짧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많은 일들을 회상하면서 이 시가 길어질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오늘은 이 시를 살펴보는 그 네 번째 시간으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호해 주셨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힘과 용기를 주셔서, 여러 가지 싸움에서부터 승리할 수 있었다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회상하고 있는 내용이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하게 만들었는데요. 그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셨던 그 사명을 수행해오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를 도와주셨고, 어떻게 방패가 되어 주셨고, 어떻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셨는가를 회상하면서 이 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무엘서를 살펴보면서 계속해서 다윗의 생애를 살펴보았지만, 다윗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그 사명,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이 세상을 떠나서 산속으로 들어가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을 등져버리고 산속으로 들어가서 아무도 만나지 않으면서, 오로지 수양을 하고 도를 닦으면서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그런 모습을 보여준 것이 아닙니다. 사실 이것이 바로 우리 기독교의 영성의 아주 큰 특징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교회는 어디에 세웁니까? 교회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세웁니다. 교회는 어디로 가는가? 도시로 가는 겁니다.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가는 것이죠. 이것은 무엇과 다르죠? 절과는 다른 것이죠. 절은 어디로 갑니까? 산속으로 가는 거죠. 깊은 산속에 절들이 하나씩 둘씩, 저 깊은 산속에 들어가는데요.

운전을 하고 가다 보면, 저런 곳에도 암자를 만들고, 저런 곳에도 절을 세웠나 싶을 정도로, 정말 사람들이 가기 어려운 곳에, 그곳에 절을 세워놓은 그 모습을 볼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저 상관 쪽으로 가다 보면, 큰 바위에, 어떤, 구멍 같은 게 하나 있는데, 거기에 암자를 하나 만드는 거죠. 그곳에 세워놓고 거기서 수련을 하고 참선을 하면서, 정말 영성을 세워나가는 그 일들을 하는 것이 절의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어디로 가는가? 기독교의 영성은 어디로 가는가? 시장으로 가고, 사람들이 몰리는 곳으로 가고, 도시로 가는 것이 교회의 다른 점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사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기독교와 기독교가 아닌 모든 다른 종교와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다른 종교들을 보면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매력이 느껴지는 면이 있는데요. 그것은 무엇이냐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더러운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있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 사람들이 깊은 매력을 느낍니다. 이 바쁜 시장에서 그리고 아웅다웅 거리는 이 삶의 터전에서 살다가, 그래서 너무나도 머리가 터질 것만 같고 속상할 것 같고, 속상하고 정말 괴로운 이 삶의 현장에서 살다가, 어디로 가냐면은 산속으로, 쭉 가다 보면 저 산 깊은 곳에 아무도 사람들이 없는 그곳에 절이 세워져 있고, 아주 조용한 그곳에, 오로지 있는 것은 자연밖에 없고 새소리가 들리고 물이 흐르고 꽃이 피어 있는 그 아름다운 자연 세계 속에 그것이 있는 것을 보면, 사람들의 마음이 위로를 얻고 위안을 얻습니다.

정말 힐링이 되는구나. 그래서 템플 스테이 같은 것도 만들어서 거기서 있으면, 이 세상과 아웅다웅거리면서 사는 그 삶을 벗어버리고, 이곳에서 하룻밤 혹은 이틀 밤 지내면서 있으면, 마음이 다 해결되는 것 같고 힐링이 되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 속세로부터 분리된 성스러움을 추구하는 종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산사에서 울려 퍼지는 그 풍경 소리를 들으면서, 아무 할 일도 없이 그저 조용히 멍 때리면서, 가만히 있는 그때 사람들은 참 힐링을 느끼는 모습을 가지게 될 때가 많이 있고,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지칠 때마다 그러한 한적한 곳 저 산속에 들어가서 읽으려고 하는 그런 경향들이 많이 있습니다.

천주교도 기독교의 그런 전통을 이어받고 있습니다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주교도 비슷한 경향을 많이 보이고 있는데요. 이 천주교회에서 하고 있는 일들이 무엇이냐 하면, 일반 평신도들도 수도사의 길을 가도록 길을 열어놓은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수도사가 되기로 헌신을 하고, 그래서 모든 돈을 다 내어버리고 수도원에 들어가서, 거기서 그저 소식을 하며, 그리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그리고 조그마한 일만 하면서 그렇게 이 세상에 그 욕심에서부터 벗어난 그런 삶을 하게 될 때 수많은 사람들이 매력을 느끼게 되는 것이죠.

또 수녀가 되어서 그 수녀원에 들어가서 오로지 그저 성경 말씀만 있고 기도하는 일에만 열중하고, 이 세상의 것에 전혀 상관하지 않는 것에 대한 그런 굉장한 매력들이 있는 것이고 또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바라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야, 저분들은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구나.” 이 세상에서의 욕심과 그런 모든 것들을 다 내어버리고 저렇게 살아가는 것이 참 존경스럽다고 여겨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속세를 떠나가서 거기에 있는다고 한다고 해서, 거기서 영적으로 더 완벽해진다고 하는 것은 사실은 환상에 불과한 것일 뿐만 아니라, 바람직한 것은 아닙니다. 천주교나 불교에서 일반 사람들에게 참 성스러운 그런 인상을 주는 데에는 성공을 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실제적으로 우리가 수도원에 들어간다고 해서 그리고 수녀원에 들어가고 그리고 절간에 들어간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사람이 거룩해지고 성스러워지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만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그 수도원에 들어가도 거기서도 인간의 죄성이 그대로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이고, 이 세속의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고 성직자의 길로 들어간다고 해서, 수도사의 길로 들어간다고 해서 더 이상 죄와 더러움으로부터 완전히 떠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게 되는 것이죠.

우리가 종종 듣는 뉴스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불교계에서도 저 어떤 절의 주지 자리를 놓고서 서로 패싸움이 벌어진다고 하는 이야기들이라든가, 그런 이야기들을 자주 듣게 되는 것이고요. 천주교에서도 신부들에 의한 성폭력 때문에 수천만 불을 배상해주는 일들이 진행된다고 하는 그런 뉴스들이 자꾸 들리는 것은 새로운 신비한 뉴스가 아니라 늘 우리가 듣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속을 떠나서 산속으로 들어가 버리면, 그러면 더 이상은 죄가 없고 더 이상은 복잡한 것이 없을 거라고 하는 생각은 그것은 너무나도 순진한 생각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탄은 우리를 유혹하지 않는 곳이 단 한 곳도 없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그 세속의 현장에서도 사탄은 우리를 유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우리가 어떤 성스러운 곳에 가 있는다고 할지라도, 이 속세를 떠나서 산 위에 가고 기도원에 가고 수도원에 들어간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사탄의 유혹은 있는 것이고, 심지어 교회 내에서도 이곳에서도 역시 우리들의 마음을 충동질하면서 죄를 짓게 만드는 사탄의 유혹이 그대로 있는 것이 주의 일을 하면 아무런 유혹이 없느냐? 아니요. 그대로 다 있어요.

주의 일을 하면서 내가 주를 위해서 헌신하겠다고 하면 그래서 성직자가 되고 주의 일을 한다고, 여러 가지 직분자가 되고 그래서 그런 일들을 하게 되면 이제는 더 이상 아무런 죄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죄의 유혹이 그대로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즉시 해야 할 것입니다. 심지어 주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탐욕을 챙기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남들이 알아채지 않는 것 같다고 해서 계속해서 그런 일들을 반복하는 경우가 많이 존재하는 것이죠.

이 세상을 떠나기만 하면 그러면 거룩한 곳이 될 거라고 하는 그런 생각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사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산속에 들어가 있는 것보다, 이 세속에서부터 떨어져서 살아가는 것보다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바로 이곳 하나님께서 바로 나에게 일하라고 만들어주신 그 직장이나 가정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의 목표가 있다고 한다면 온실 속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야생에서 멋진 꽃을 피워내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다윗의 삶 가운데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이 바로 이 점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좀 더 깊게 만들기 위해서 다윗이 선택한 것은 이 세상에서의 삶을 포기해버리고, 오로지 영적인 일에만 매어 달리고 오로지 기도하고 오로지 찬양하는 일에만 매달리는 쪽으로 간 것이 결단코 아닙니다. 다윗은 어디로 갔는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어디서 이루어냈는가? 바로 전쟁터에서 이루어낸 것이죠. 다윗은 어디로 갔습니까? 골리앗을 무찌르는 그 전쟁터로 가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죠. 골리앗이 자기들 앞에 나타났을 때, 다윗은 그 골리앗을 피하여 성전으로 숨어 들어가 버리고, 그리고 저 성전 속에 숨어서 찬송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아주 중요시하면서 거기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다윗은 그 골리앗이 나타났을 때 골리앗 앞으로 향해 달려가는 것이죠. 그리고 그 골리앗 앞에서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싸울 용기를 주셔서, 그 골리앗과 싸우는 그 현장으로 들어가면서 거기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무엘하 22장의 말씀 특별히 30절에서부터 41절까지의 말씀을 쭉 살펴보면, 다윗이 골리앗을 향해서 달려가는 그 장면을 우리가 연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참된 영성의 현장이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수도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들어가라고 하신 바로 그 삶의 현장이 우리가 가야 할 영성의 현장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영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어느 한 장소에만 국한되어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어디든지 계신 하나님 교회당에만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직장에도 계시고 가정에도 계시고 우리가 가는 그 모든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하나님과 함께 교제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그런 영적인 훈련장이요. 영적인 훈련을 실현해 나가는 그런 장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의 현장을 버리고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것은 때로는 정말 굉장히 존경스러워 보이게 됩니다. 결혼 생활을 포기하고 신부나 수녀가 된다고 하는 것, 그리고 수도원에 들어가서 그냥 절제의 삶을 산다고 하는 것 그런 모습을 보면 정말 대단한 사람처럼 보이고, 그리고 우리가 이 세상에 직업을 그만두고 목회자의 길로 가겠다고 하면서 신학교로 들어가는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은 정말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정말 위대한 사람인가 그렇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누가 더 신앙이 좋은 사람입니까? 그것은 아무도 자신을 영적으로 괴롭힐 곳이 없는 그 삶의 현장을 떠나서 그곳에 숨어 들어간 사람이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들의 삶의 현장 가운데서 불신자들이 득실득실거리고 기독교인들을 비난하고 욕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거기서도 믿음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그것이 훨씬 더 중요한 것이고 그것이 더 훌륭한 영적인 싸움의 현장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것을 포기한다고 하면 믿음이 커 보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것은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니라 불신앙의 표현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신 하나님인데 지금 이곳에 계신 하나님을 포기해버리고 그냥 숨어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쩌면 우리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 중에 하나는 바로 이런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목회자가 될 때 어떻게 해서 목회자가 되었느냐고 물어보면 사업을 하다가 실패를 했는데, 그 실패를 하는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런 길로 가는 것을 막으시고 이 일도 안 되게 만들고 저 일도 안 되게 만들어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항복하고 주의 길을 가게 되었노라고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강권적으로 목사로 만들기 위해서 이것도 막아버리고 저것도 막아버리고 다 막아버려서 그래서 목회자의 길로 가게 되었다고 하는 그런 간증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그 이야기를 들어보면 마치 사도 바울의 그 길을 막고 사도 바울을 부르시는 그런 하나님께서 지금도 그런 식으로 역사하는 것 같아서 굉장히 감동이 될 때가 많이 있지만, 사실은 그렇게 바람직한 모습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는 경우들이 대부분 목회자가 되는 그런 제대로 된 길을 걷지 않고 잘못된 방식으로 목회자가 될 뿐만 아니라, 그래서 결국은 함량 미달의 잘못된 신학을 제대로 공부하지 못해서 성도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그런 어설픈 목회자가 되는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이 우리 일반 성도들이 사는 그 삶의 현장이 그렇게 나쁜 현장이 아니에요. 우리 성도님들이 기억해야 될 것은 우리 목사님은 거룩한 성직의 길을 하나님의 길을 가는 것이고 우리는 세속적인 길을 간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분야가 다를 뿐이지만 우리가 가는 이 길도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하는 길이고, 내가 직장에서 일하는 것이나 가정에서 일하는 것이나, 그 모든 일들이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다윗의 경우에 있어서 다윗이 맞닥뜨릴 삶의 자리는 어디냐 하면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제사장들처럼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일을 다윗이 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주로 한 일이 무엇이냐면 전쟁터를 향해서 뛰어간 것이죠. 어쩌면 다윗이 활동했던 삶의 터전 대부분이 어디냐 하면 전쟁터였습니다. 전쟁을 하면서 사람을 죽이는 일을 그 다윗이 한 것이죠. 그 자리가 바로 전쟁의 자리가 바로 다윗의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그 전쟁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이 다윗은 더러운 사람이었는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이었는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그곳에서 하나님을 경험하였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했고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모습을 어디서 보여줬냐면, 바로 그 전쟁터에서 보여준 겁니다.

그 전쟁터에서 전쟁을 하러 나갈 때 자기의 뜻대로 전쟁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물었어요. 하나님이 이 전쟁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하지 말아야 합니까? 전쟁을 하러 갈까요? 말까요? 물었고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면 그 말씀에 순종해서 갔고 하나님께서 가지 말라고 하면 안 갔고, 그 전쟁의 현장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그 영적인 훈련을 바로 그 전쟁터에서 했던 것이죠. 그런 점에서 다윗은 전쟁터에서 그의 평생을 보냈지만, 그러나 다른 군인들과의 삶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예를 들어서 요압이라고 하는 사람은 어떻게 했습니까? 요압이라고 하는 사람은 압살롬을 무자비하게 죽여버립니다. 아브넬을 죽여버립니다. 왜 죽였습니까? 개인적인 원수를 갚기 위해서 칼을 사용하는 것이고,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위해서 칼을 사용한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어떻게 했는가? 자기에게 칼이 있었지만, 그 칼놀림을 함부로 하지 않았습니다. 골리앗을 향해서는 다윗이 물맷돌을 던져 쓰러뜨리고, 그리고 그의 칼을 빼서 골리앗을 쓰러뜨렸던 그런 군인이었지만, 사울 왕을 향해서는 칼을 빼어들지 않았던 것이죠. 므비보셋을 향해서는 그를 자신의 양자처럼 받아들인 것이죠. 이것이 다윗의 엄청난 차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들에게도 역시 똑같은 그런 삶의 현장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진공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죄성으로 가득한 이 세상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 것인데요. 그 삶의 현장 가운데서 우리는 여러 가지 사탄의 소리들을 많이 듣습니다. 또한 성령님께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말씀해 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누구의 말을 듣는가? 사탄이 우리를 유혹하는 대로, 내 욕심에 이끌리며 육체의 생각대로 할 것인가? 아니면 성령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성령의 소유에 따라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사는 것인가? 그것이 우리의 삶을 완전히 달라지게 할 것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의 문제점은 정반대로 나타난다고 하는 데 문제점이 있습니다.

현장에 들어가서, 거기서 거룩하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이 우리가 가는 그곳이 전부 하나님과 동행하는 장소가 되게 만들어야 되는 것인데, 그렇게 하지 않고 오히려 교회라고 하는 곳으로 숨어 들어오고, 기도원이라고 하는 곳으로 숨어 들어오는데, 오히려 교회를 더 더럽게 만들어 버리고 더 세속적이 되도록 만들어 버리는 그런 거꾸로 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우리들의 문제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사명의 현장이 우리가 산속에 들어가거나 아니면 신학교로 들어가거나, 우리가 하나님의 일만 하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의 사명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이 다윗이 전쟁터 속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했던 것처럼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도 주님의 뜻을 발견하며 순종해 나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오.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에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이 주어진 것은 오직 성직자들을 향해서만 이 말씀을 해주신 것이 아닙니다. 당시에 살고 있던 모든 성도들을 향해서 하시는 말이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겁니다.

직장에서 일하고 있는 그 사람이, 교사로 일하고 경찰관으로 일하고, 또 회사에서 일하고 자신이 맡은 그 직분을 가지고 일하고 있는 그 사람들이, 너희들은 그런 더러운 일을 하고 있느냐? 어떤 그런 더러운 일을 다 포기해버리고 오로지 주님의 일만을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는 그 우리들을 향해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옛날 다윗을 향해서 전쟁터 속에서 싸울 용기를 주셨던 그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우리를 향해서 우리들의 삶의 현장 가운데서 영적으로 승리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면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오늘 하루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면서 살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과 동행할 수 있는 힘을 허락해 주옵소서. 그렇게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쩌면 우리도 다윗이 처한 상황과 똑같은 상황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속임수와 배반과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난잡함이 난무한 이 시대에서 어 살아가고 있는데, 이 상황에서 도망갈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부르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의 이야기를 읽을 때 다윗이 군인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종종 잊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살아야 했던 시절이 정말 힘든 시절에 다윗이 살았었다고 하는 사실을 잊을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시를 보면 다윗은 영적으로 충만해서 하나님 앞에 노래하고 있고 정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기뻐하면서 노래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다윗의 삶이 그렇게 쉬운 삶이 아니었거든요. 우리들보다도 더 힘든 곳에서 더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때로는 죽을 것 같은 그런 위기 가운데서 살면서도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시겠다고 하는 그 약속 바라보고 믿으면서 살아가는 가운데 이런 놀라운 시를 읽은 줄로 믿습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 말씀에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죽으셨으나 그것으로 완전히 패망한 것이 아니라, 다시 부활하셔서 온 세상을 이기시고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우리에게도 똑같은 승리를 약속해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싸움은 망하는 싸움이 아니라 결국에는 승리하는 싸움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믿음으로 순종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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