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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부인 (눅 22:54-62)

2021년 3월 28일 주일예배 설교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이야기를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서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체포해서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어가게 되었을 때, 다른 대부분의 제자들은 도망가고 말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이 재판받는 그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몰래 잠입하는 데 성공하게 되었고, 그리고 그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는 그런 열정을 이 베드로가 보여주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베드로가 그 집 안에 있다고 하는 그 사실이 금세 발각되었습니다. 어떤 여종이 베드로를 알아보게 된 겁니다.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도다.”라고 이야기할 때, 그 이야기를 들은 베드로는 얼마나 당황스러웠겠습니까? 이 사람도 예수의 일당이라고 말할 때, 베드로는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그 말에 당황스러워서 부인하면서, “나는 저 예수를 모른다.”라고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라고 그렇게 둘러댔습니다.

오늘 읽은 우리 누가복음의 말씀 가운데는 그냥 그렇게 부인했다고만 기록하고 있는데, 마태복음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부인한 다음에, 베드로는 다른 쪽으로 앞쪽으로 자리를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거짓말을 해놓고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슬그머니 다른 곳으로 옮겨서,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또 숨기려고 했지만, 위기의 상황을 모면했다고 생각되었던 바로 그 순간에, 또 한 사람이 나타나서 베드로에게 말을 합니다. “당신도 한패 아니냐?”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고 이야기할 때, 또 베드로는 두 번째 부인하게 됩니다.

오늘 읽은 누가복음에서는 그냥 부인한 이야기만 기록하고 있지만, 마태복음에서는 그 부인할 때 그냥 부인한 것이 아니라, 맹세를 하면서 부인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72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냥 모른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시원치 않게 느껴졌는지, 베드로는 맹세하면서까지 예수님과 상관이 없다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베드로가 맹세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서 무엇이 생각이 나십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이 나지 않습니까? 마태복음 5장 33절에서부터 37절의 말씀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또 옛사람에게 말한 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느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 임이오.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이오.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오. 내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의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라고 주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가르쳐 주셨는데, 베드로는 그 위기의 상황을 모멸하기 위해서, 거짓 맹세를 하면서까지 나는 예수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 이야기한 것인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사용하면서까지, 이스라엘 민족이 맹세를 할 때는 늘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서 맹세하게 되어 있는 것인데, 자신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모면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악용하면서까지,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충격적입니다.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베드로는 세 번째 부인하는데요.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라고 말하고 있는데, 역시 이 세 번째 부인을 마태복음에서는 뭐라고 표현하고 있냐 하면, “저주하며 맹세하였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면서 베드로가 저주하면서까지 예수님을 모른다고 이야기했는데, 여기서 저주했다고 하는 말은 예수님을 저주했다고 하는 그런 의미라기보다는, 유대인들이 종종 하는 방식으로 저주하는 방식을 사용했을 겁니다. “내가 만일 예수를 안다면, 하나님이 나에게 저주를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그런 식의 말을 하면서까지, 자기 자신에게 저주를 퍼부으면서까지,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 부인하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베드로가 이렇게 예수님을 부인했다고 하는 사실이 충격적이고 놀랍다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왜냐하면 이 베드로가 누굽니까? 이 베드로는 주님을 향해서 고백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던 사람이 바로 베드로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베드로가 누굽니까? 베드로는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다 들었던 사람이에요. 베드로가 누굽니까? 주님과 함께 사역을 하면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기적들을 다 목격했던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다 받았던 사람이 바로 베드로였는데, 변화산 가운데서 예수님의 모습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을 경험했던 사람이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을 경험했던 사람이 바로 베드로였는데, 그 영광스러운 장면, 현장 가운데 있었던 바로 그 베드로가 이 순간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충격적입니다.

그 정도 예수님과 함께 동행했다고 한다면, 그런 기적의 경험을 했었고, 그런 예수님의 감동적인 메시지를 들었던 사람이라고 한다면, 적어도 이 순간에 믿음을 지키는 것이 당연했을 거라고 생각되는데, 안타깝게도 그렇게 위대한 믿음의 사람도, 그렇게 주님에게 훈련을 엄청난 훈련과 그 연단을 받으면서 경험을, 신앙의 훈련을 받았던 베드로마저도 넘어지고 쓰러졌다고 하는 그 사실이 너무나도 참 충격적인 모습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모습이 바로 우리 인간의 민낯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우리는 훈련을 하고 신앙의 연단을 또 하고 하게 되면, 어느 순간이 되면 더 이상 훈련이 필요 없는 더 이상 영적인 훈련이 필요 없는, 완벽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믿음의 훈련을 많이 했다고 할지라도, 아무리 믿음의 훈련을 많이 하고 신앙의 훈련을 많이 했다고 할지라도, 한순간에 훅 가버릴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가 우리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만일 베드로가 실패했다고 한다면, 오늘 우리들은 얼마나 더더욱 쉽게 실패하고 넘어질 수 있겠는가를 생각하면서 우리 이 순간에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매일매일 우리가 기도해야 될 기도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매일 아침마다 일어나면서 우리가 제일 먼저 기도해야 할 기도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연약한 죄인이오니, 쓰러질 수밖에 없는, 무너질 수밖에 없는 사람이오니, 주님, 하나님의 은혜를 오늘 또 허락하여 주옵소서. 조그마한 말 한마디에, 조그마한 사건 하나에, 이 세상에서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그 사건 하나들 때문에, 마음이 무너져버리고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는 그런 연약한 인생이 되지 않도록, 그 순간에 이 세상의 길로 걸어갈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 저에게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면서 주님의 은혜를 달라고 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우리도 똑같이 넘어질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매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며 주님 앞에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베드로가 언제 실패했는가 하는 것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실패한 것은 언제 실패했습니까? 그것은 다른 제자들은 다 도망가 버리고, 재판정까지, 대제사장의 집 안에 뜰안에까지, 잠입해 들어갔다가 실패한 것입니다. 어쩌면 이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 그래도 다른 제자들보다는 좀 더 나아요. 다른 제자들은 이미 다 도망가버리고 말았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그 재판정까지 갈 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주님을 끝까지 따라간 겁니다. 열정을 내서 그곳까지 가게 된 겁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자리에서 넘어지게 된 것이고 실패하게 된 것이죠. 우리가 신앙생활 가운데서 넘어지게 되는 것은 우리가 나태하게 있을 때 영적인 열심을 내지 않을 때 무너지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열정을 내고 신앙생활에 더 수고하고 더 열정을 내려고 할 때, 그때 더 실패하고 무너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베드로의 경우 예수님을 끝까지 보호하기 위해서 따라갔고, 그 과정에 어떻게 될지 너무나도 조바심 가운데, 그곳까지 따라갔지만 거기서 한 여인의 말 앞에서 무너져버린 것이죠.

인류 최초의 살인은 어디서부터 벌어졌는가? 그냥 자기 자신의 삶을 살던 그 순간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겠다고 했던 바로 그 예배의 자리에서 분노가 솟아오르고 시기와 질투가 솟아오르고, 그 예배를 드렸던 가인이 최초의 살인자가 되는 데까지 연결이 되었던 것을 기억하다.

마르다는 주님을 대접하려고 하는 그 열정이 있었어요. 다른 사람이 아니고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에게 맛있는 것을 대접하고 봉사하려고 하는 그 수고와 헌신을 하는 가운데, 그 마음 가운데 섭섭한 마음이 드는 거예요. 왜? 주님께서는 나를 아는 척하지 않고, 마리아가 나를 돕지 않는 것을 왜 그냥 내버려 두는가 하면서, 시험에 들고 무너져 버린 것이죠.

이게 우리가 늘 경험하는 겁니다. 우리가 그냥 교회를 왔다. 갔다만 하게 된다고 하면 별로 시험될 일이 없습니다. 그냥 일반 성도로서 아무 헌신도 하지 않고 아무런 봉사도 하지 않고 그냥 교회만 왔다. 갔다 할 때는 괜찮은 것 같은데, 오히려 교회의 여러 가지 직분을 맡고 중직을 맡으면서 주를 위해서 더 헌신하겠다고, 하고 더 열심히 노력하겠다고 할 때, 넘어지는 것 같아요.

그런 모습들을 우리가 얼마나 많이 보아왔습니까?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아무 일도 하지 않아야 된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 그냥 대충대충 신앙생활하는 것이 좋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에게는 죄악을 범하는 실패하는 것에서부터 면역되는 단계가 없다고 하는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한 단계 더 높은 신앙의 경지로 들어가고, 이제는 목회자의 길로 들어가고 이제는 내가 장로의 길로 들어가고, 이제는 내가 권사의 길로 들어가면 더 이상 아무런 죄를 짓지 않는 그런 완벽한 보호받는 자리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자리에 있을 때, 더 열정을 내려고 할 때 더 쉽게 무너질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신 그 주님의 말씀을 오늘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베드로는 왜 넘어졌습니까? 수많은 설교자들은 말하기를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넘어졌다고 그렇게 분석하고는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서 말씀하시기를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 그렇게 부탁했지만 안타깝게도 겟세마네 동산 가운데서 쿨쿨 잠만 잤기 때문에 결국 넘어졌다고 그렇게 분석하는데, 어쩌면 맞는 말일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믿음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기도 없이 이겨낼 수 있는 장사는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베드로가 무너져버린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주님보다도 내가 더 소중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우상이 될 것인데, 주님보다도 내 목숨이 더 소중하게 생각되는 그 순간, 우리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14장 26절 27절의 말씀에, “무릇 내게 오는 자마다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베드로의 그 마음 가운데 주님보다도 자기 목숨이 훨씬 더 소중하게 느껴지게 되는 그 순간, 그 위험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죠.

어쩌면 이것이 가룟유다의 죄와 똑같아요. 예수님이 더 소중하냐? 은전 30이 더 소중한가라고 하는 그 상황 가운데, 가룟 유다가 은전을 선택하게 된 것처럼, 이 베드로의 마음 가운데서도 예수님이 더 중요하냐? 내 목숨이 더 중요하냐라고 하는 그 상황 가운데서 자신의 목숨이 훨씬 더 소중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넘어져 버린 것이죠.

우리가 늘 신앙생활하면서 넘어지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신앙생활하면서 늘 시험에 넘어지고 늘 좌절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게 되는데, 그때마다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내가 살아 있기 때문에 넘어지는 거예요. 신앙생활하면서 주님만을 사랑하고, 주님이 가장 최고의 위치에 있다고 한다면, 넘어지지 않을 것인데, 내가 살아있고 내가 있다고 한다면 결국 넘어질 수밖에 없고,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주지 않고 사람들이 나에게 박수 쳐주지 않고 사람들이 내가 한 헌신과 노력에 대해서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 그 사람이 시험에 들어서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어야 되는가? 나는 죽고 주님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 그 사실을 우리 모두가 날마다 날마다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 사도는 어떻게 고백했습니까?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러한 고백이 우리들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실패한 제자 베드로를 예수님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완벽한 사람만 찾으시고 만일 주님께서 모든 것이 흠이 없는 사람들만 찾으신다고 한다면, 우리들 가운데 그 누구도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놀랍게도 자기 자신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이 베드로를 사랑하셨고, 그를 위해서 닭 울음소리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것처럼 닭이 울기 전에 내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고 말씀해 주셨고, 그리고 베드로가 이 세 번 부인하게 되는 바로 그 순간에, 닭 울음소리가 들리게 하셔서, 베드로는 그 순간에 회개하고 눈물을 흘리며 주님 앞에 엎드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이 순간에 예수님께 예수님의 눈과 베드로의 눈이 부닥친 거예요. 나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하는 그 순간에, 주님께서 자신을 바라보는 그것을 바라보게 되었고, 또한 닭 울음소리가 우는 그 모습을 바라보게 될 때 베드로는 통곡하면서 밖에 나가 심히 울었다고 오늘 성경 말씀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 닭 울음소리를 들을 때, 그 닭 울음소리가 자기 자신을 향해서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으로 듣게 되었고, 그 순간에 주님 앞에 엎드려 회개하게 된 것이죠. 닭 울음소리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닭 울음소리라고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매일매일 들리는 울음소리가 닭 울음소리입니다. 어렸을 때 시골에 살았던 적이 있었는데요. 그 시골에 있을 때 보면 새벽녘마다 늘 닭이 우는 것을 들었어요.

아마 베드로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어제도 닭 울음소리가 울었을 것이고, 그제도 닭 울음소리가 울었을 것이고, 매일 새벽마다 우는 그 닭 울음소리 그 똑같은 소리인데 놀랍게도 그 닭 울음소리를 들을 때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이 났고, 그 말씀이 생각이 날 때 자기 자신을 돌아보면서 회개하며 통곡하며 울게 되었다. 닭 울음소리라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 소리일 것입니다. 농부들에게 닭 울음소리라고 하는 것은 새로운 한날이 시작되었으니, 이제 일어나 밭에 나가서 일해야 된다고 하는 그런 소리로만 들릴 것입니다. 파수꾼들에게 닭 울음소리라고 하는 것은 이제 시간이 다 되었으니 교대 시간이 되었으니 이제 내 시간은 끝났고 쉬는 시간이 되었다고 하는 그런 의미로 들리게 될 겁니다. 시인에게 닭 울음소리라고 하는 것은 그저 시상을 떠올리게 하는 소리가 될 것이고, 화가에게 닭 울음소리라고 하는 것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하나의 영감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베드로에게 이 닭 울음소리라고 하는 것은 주님의 사랑의 음성으로 들리게 된 것이죠.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을 향해서 베드로에게 닭 울음소리를 준비해 주셨던 것처럼, 우리 모두들에게도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은 깨달을 수 없는 나만이 깨달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음성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런 소리들이 우리 주변에 널려 있게 될 텐데요.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기도 하지만,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나 우리 주변에서 만나는 사람이나, 내가 경험하는 그런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깨닫게 만들어 주셨는데, 그런 순간에 그냥 애써 외면하면서, 아무것도 아니냐. 그냥 외면하면서 지나칠 것이 아니라, 그 닭 울음소리를 들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그 앞에 회개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는 종종 설교를 하면서 설교가 끝난 뒤에 어떤 분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소리를 종종 듣습니다. 목사님 오늘 하신 설교는 목사님이 꼭 저 들으라고, 설교를 저를 타깃으로 정해 놓고 설교하신 것 같아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건 제가 일부러 타깃을 해서 설교를 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주님께서 그 성도님의 마음 가운데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들을 수 있게 만들어주셨기 때문에 그렇게 느낀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 닭 울음소리도, 베드로는 그 닭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해냈고,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게 만들어 주었던 것처럼, 그래서 회개하는 심령으로 통곡하며 나아갈 수 있는 것처럼, 똑같은 설교를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신다고 한다면 그 설교가 자기 자신을 향해서 들려주시는 그런 은혜의 메시지로 들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게 은혜고 그게 하나님께서 사랑해주시는 표시일 거라고 생각이 드는 것이고,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것이 복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어떤 때는 제가 설교를 망쳤다고 생각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준비를 했는데 제대로 논리도 안 맞는 것 같고, 진행도 제대로 잘 짜지도 못했고, 그래서 완벽하게 준비하지 못한 설교를 가지고 설 때부터 뭔가 자신감이 없어서 설교를 잘하지 못할 때가 있고, 어떤 때는 마이크 시스템이 협조를 안 해서 하는 내내 힘들어서 땀만 뻘뻘 흘리다가 내려올 때도 있고, 어떤 때는 온풍기에 막 따뜻한 바람이 막 저한테 막 와서 너무나도 힘들어서, 그날은 내가 설교를 완전히 망쳤구나 생각하면서 고개가 푹 숙여져서 어떻게 성도님들하고 인사하나 하면서 그렇게 불안한 마음으로 나가서 성도님들을 맞이할 때도 있는데,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날 따라 어떤 분이 저에게 목사님 오늘 은혜 많이 받았어요. 말해주는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제가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성도의 마음을 만져주셔서 닭 울음소리, 아무 의미가 없는 닭 울음소리고 그 사람의 마음을 충격을 주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만들고 주님 앞에 엎드리게 만들어 주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마음을 만져주셨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강단에 설 때마다 기도하는 기도의 제목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 완성되지 못한 설교고 부족한 설교고 말주변이 없어서 늘 말이 헛 나오는 그런 설교인데, 하나님 우리 성도들의 필요한 말씀으로 들리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낙망한 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힘을 얻게 해 주옵소서. 죄를 지었던 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필요한 음성으로 들려주셔서 주님을 더욱더 신뢰하는 결단이 있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하면서 이 자리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놀라운 것은 주님께서는 그 어느 한 사람도 예외 하지 아니하고 그 사람에게 맞는 울음소리를 들려주시는 것이죠.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모양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저런 모양으로 들려주시는데, 그때 주님의 음성을 듣고 회개할 수 있다고 한다면 복이에요. 가룟 유다에게는

주님께서 그런 기회를 주시지 않으셨는가? 가룟 유다에게도 들려주셨어요. 요한복음 13장 26절 말씀에 보면, 성만찬의 자리에 오늘 우리가 성찬식을 거행할 텐데, 그 최초의 성만찬의 자리에서 가룟 유다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셨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 것이다.” 말씀하시고 그 팔 사람이 누구냐? 내가 한 떡 한 조각을 적셔서 주는 그 자가 나를 팔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면, 다 말한 거 아니에요? 그 양심을 두드린 거 아니에요? 그런데 그 순간에 가룟 유다는 닭 울음소리를 듣고 회개한 것이 아니라, 애써 외면하는 거예요. “나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겠지? 주님이 나에 대해서 알고 그런 얘기하는 것이 아니겠지? 설마 나한테 하는 말일까?” 하면서 애써 외면하면서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그냥 귀를 닫아버린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그냥 갖다 내버린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향해서 들려주시는 그 사랑의 음성을 애써 외면하지 마시고, 주님 앞에 그 음성을 듣고 반응하며 주님 앞에 나오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제목이 있다고 한다면, 주님 깨달을 수 있는 귀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설교를 들을 때 그냥 외면하지 말게 하시고, 그 말씀이 내게 해주시는 말씀으로 듣게 하여 주옵소서. 성경 말씀을 읽을 때 그냥 글씨가 아니라 나를 향해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게 하여 주옵소서. 어떤 한 사람을 만나고 어떤 한 사건을 만나고 어떤 일들을 만날 때마다, 그냥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사랑해 주시는 사랑의 손길을 발견하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를 그냥 외면하지 않으셨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베드로를 향해서 닭 울음소리를 들려주셨던 그 주님. 그런데 우리들이 외치는 그 신음 소리, 죄악으로 인해서 죽어가는 그 소리를 주님께서는 애써 외면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소리를 들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저 높고 높은 곳에서부터 낮고 천한 이 땅에까지 오셨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려주시고,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시면서까지 사랑해 주셨기 때문에, 저와 여러분들이 오늘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되는 놀라운 은총을 입게 된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성찬 예식을 거행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사랑하셨고 우리는 늘 죄악으로 인해서 각기 제 길로 갔고 우리들의 더러운 죄 가운데 살아갔지만

하나님께서는 버리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성찬 예식을 참여하게 될 텐데 이 예식에 참여하는 가운데 주님의 사랑을 다시 한번 먹고 마시며 느끼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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