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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반응 (행 4:1-4)

2021년 4월 18일 주일예배 설교

언젠가 소개를 해드렸을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영국의 문필가이며 <나니아 연대기>라고 하는 판타지 소설로 유명한 C. S. 루이스가 했던 아주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진실로 겸손하고 도량이 넓고 균형이 있는 사람일수록 칭찬을 많이 하고, 괴짜이고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이고 불평만 늘어놓는 사람일수록 칭찬에 인색하다. 훌륭한 비평가는 불완전한 작품들에서도 칭찬할 점을 찾아내지만, 시원찮은 비평가는 끊임없이 금서의 목록만 늘려간다. 건강하고 꾸밈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화려한 환경에서 근사한 요리를 두루 경험하며 자랐을지라도 소박한 음식에서도 칭찬거리를 찾아낸다. 그러나 소화불량 환자나 늘 까다롭게 구는 속물들은 모든 음식에 대해 트집을 잡는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거슬리는 대상과 마주한 것이 아닌 한, 언제나 칭찬은 우리의 내적 건강이 밖으로 표출되는 소리다.

늘 생각하게 만드는 정말 귀한 글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예전에 제가 어떤 책을 하나 내 가지고 그 책을 우리 선배 목사님에게 하나 보내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그 목사님이 제 책을 받아보시고서는 당장 전화를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그 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저에게 책을 받았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그 책이 얼마나 좋은지, 그 책에 있는 내용들을 이야기하면서, 실제로 읽었던 것 같아요. 그 책의 내용에서 어떤 것이 좋았고, 어떤 것이 공감이 된다고 말하면서 칭찬을 많이 해 주고, 그리고 참 이 책이 많이 소개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이야기를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전화가 끊어지고 난 다음에 제 마음에 드는 생각이 무슨 생각이었겠습니까? “아, 내가 책을 정말 잘 썼나 보다.”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참 그 목사님에게 배울 게 너무 많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제가 책을 잘 썼다기보다는, 정말 허접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찮게 보지 않고, 그것의 장점을 발견하고 칭찬하고 그리고 또 격려해 주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참 내가 배울 게 너무나도 많은 그런 선배 목사님이시구나. 나도 저렇게 많은 사람들을 칭찬하고 인정할 수 있고 그리고 진심으로 축하해 줄 수 있는 그런 인격을 갖추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런 간절한 마음이 제 마음 가운데 솟아오르게 되었습니다.

사실 어떠한 것에 대한 반응이 있다고 한다면, 그 반응은 그 대상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보다는, 사실은 그 대상을 경험한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가를 더 많이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늘 불평만 하는 사람은 무엇을 만나든지 무엇을 경험하든지 무엇을 먹든지 무엇은 경험을 하든지, 늘 입에서 불평과 불만이 터져 나오는 것은 그가 경험한 것이 나빠서라기보다는, 어쩌면 그 사람이 소화 불량 환자일 가능성이 많은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누군가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면, 늘 감사가 넘쳐야 하고, 그리고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보는 그런 믿음의 그런 건강한 모습들이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넘쳐나야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시골 쥐와 서울 쥐의 이야기가 있는데요. 어느 날 서울 쥐가 시골에 와서 시골 쥐의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서울 쥐는 시골에 와서 그 친구를 무시하면서 말을 했습니다. 너는 어떻게 이런 동네에서 살 수가 있는가? 내가 사는 이 서울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멋있는 곳인 줄 아는가? 하면서, 서울 자랑을 잔뜩 해놓고 돌아갔습니다. 돌아가면서 시골 쥐에게 하는 얘기가, “한 번 놀러 와라.” 서울에 한 번 놀러 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시골 쥐는 그래서 서울에 놀러 가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서울 쥐가 산다는 그곳에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배가 고프니까 먹을 것을 얻기 위해서 여기저기 살피는 가운데. 쓰레기통을 뒤졌습니다. 그 쓰레기통에서 무엇을 발견했을까요? 쓰레기를 발견한 겁니다. 남들이 먹다 남은 찌꺼기를 발견하는 겁니다. 냄새나는 음식들 썩어가는 음식들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면서 시골 쥐가 말을 했습니다 시골이나 서울이나 다 똑같다. 다 썩는 것이고 다 쓰레기뿐이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시골 쥐는 서울에 가서도 왜 서울이나 시골이나 다를 게 없다고 이야기를 했겠습니까? 그것은 서울에 가서도 쓰레기통을 뒤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쓰레기통을 뒤진다면, 쓰레기만 발견하게 될 겁니다. 하지만 쓰레기통이 아니라, 백화점에 들어간다고 하면 거기에는 화려하고 멋있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고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보통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에 빠지면 눈에 콩깍지가 끼어서 그래서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요.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면 콩깍지가 끼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제가 볼 때는 콩깍지가 낀 것이 아니라, 남들이 보지 못하는 장점들을 보는 능력이 생긴 거죠.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가능성을 보는 것이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무시해도 정말 소중한 것들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쥐는 왜 쥡니까? 쓰레기통만 뒤지기 때문에 쥐인 것이죠. 불가능한 것만 바라본다고 한다면 절망스러운 것일 겁니다. 하지만 가능성을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회복해야 될 그런 긍정적인 관점이 될 것입니다.

누가 요리사입니까? 요리사라고 하는 것은 재료만 보고서도 그 재료가 만들어낼 맛있는 음식 상상해낼 수 있는 사람들이 요리사입니다. 누가 건축가입니까? 허허벌판을 바라보면서도 그 위에 도시가 꾸려지고, 건물들이 들어서고 화려한 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는 상상력의 소유자가 건축가입니다. 누가 교육자입니까? 코흘리개 어린아이들 속에서 모습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이 아이들의 속에서 가능성을 바라보고 이 아이가 앞으로 어떻게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는가? 가능성을 바라보는 자가 교육자입니다. 누가 부모입니까? 우리 아이들에게서 미래의 위대함을 바라보는 것이고, 가능성을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부모인 것인데,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보느냐가 바로 내가 누구인가를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행전 4장의 말씀을 읽었는데요. 사도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회개하고 돌이키라고 설교를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설교를 했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하는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똑같은 메시지에 대해서, 두 가지 색다른 반응이 나왔다고 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반응은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들과 사두개인들의 반응이었는데요. 이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전한 메시지를 듣고 싫어했다고 기록하고 있어요. 예수 안에서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가르치고 있는 그 베드로의 말을 듣고 싫어했고, 싫어했기 때문에 사도들을 감옥 속에 가두어 버렸다고 기록하고 있는 겁니다. 왜 이런 반응이 나옵니까? 그것은 베드로와 요한이 전하는 메시지가 잘못된 메시지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메시지가 잘못이 아니라, 그 메시지를 대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들이 문제이기 때문에 이런 반응이 나왔습니다. 이들이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마음의 문을 꼭 닫아버리고, 그걸 통해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불편함과 싫어함이 가득 쌓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영적인 소화불량 환자였던 것이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자의 모습이 바로 이들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야말로 정말 안타까운 모습일 수밖에 없겠는데요. 왜냐하면 만일 베드로와 유안의 메시지를 듣고 정말 긍정적으로 반응했다고 한다 한다면 이들에게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주어질 수도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메시지를 듣고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돌아오기만 하면, 누구든지 예수님을 영접한다고만 하면, 구원을 받는 엄청난 기회가 그들 앞에 주어져 있는데, 안타깝게도 그들의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그들을 향해서 불편함을 가지고 그리고 미워하고, 그 말씀을 전하는 자들을 감옥에 가두어버렸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 될 것입니다.

아무리 큰 죄를 저질렀다고 할지라도, 아무리 악한 일을 행했다고 할지라도, 회개하고 나오는 자들에게는 새롭게 되는 일들이 있을 것이며, 주님의 자녀가 놀라운 특권이 주어지는 것인데,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다고 하는 것이 불쌍한 일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어떤 환자가 있는데 그 환자를 치유할 수 있는 정말 놀라운 기회가 있습니다. 이 약을 먹기만 하면 나을 수 있고, 아니 좋은 의사를 만나서 치료만 받기만 하면, 그 질병에서부터 해결될 수 있는데, 의사를 신뢰하지 못하고 약을 신뢰하지 못해서 치료를 거부하고 그래서 결국 죽게 된다고 한다면, 이것처럼 어처구니없는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이러한 일들이 종종 발생하고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한 10여 년 전에 있었던 일이라고 하는데요. 신문에 어떤 한 뉴스가 난 것을 보게 됐습니다. 이 아무개 씨 30세인데요. 그 부부가 데리고 있는 2개월짜리 딸아이가 있었습니다. 2개월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정말 갓난아기가 있었던 가정이었는데요. 그 딸아이가 감염에 의해서 패혈성 패혈성 쇼크로 사망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신문 기사에 나게 된 겁니다. 유명한 일도 아니고, 뭔가 대단한 연예인도 아닌데 아주 평범한 시민의 자녀가 죽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신문 기사에 났던 이유는 아주 특이한 상황 때문에 그랬습니다.

왜냐하면 병원에서는 이 아이를 수술하자고 이야기했지만, 부모가 수술을 거절한 겁니다. 치료하기만 하면 수술하기만 하면 살 수 있습니다라고 하는데, 그 부모가 스스로 거부하는 겁니다. 왜 거부했냐 하면 그들은 소위 왕국회관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로서,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있는 이단 종파인 여호와의 증인 왕국회관의 성도로서, 구약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남의 피를 수혈받는 것은 죄라고 생각하고, 수술하는 과정 가운데 수혈을 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 병원이었던 아산병원은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부모지만 이 아이의 진료를 거부하는 방해하는 것을 막아달라고, 진료 업무 방해 금지 가처분 신청을 해서 결국 법원이 병원의 손을 들어줬고, 부모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수술해도 좋다고 하는 결정이 났지만, 무수혈 시술을 할 수 있다고 하는 서울대병원으로 옮기는 도중에 안타깝게도 사망한 사건입니다.

그 자세한 사정이야 제가 잘 모르고, 신문 정보로만 아는 것이기 때문에 함부로 누구를 정죄할 것도 아니고 비난할 것도 아니지만,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가장 슬픈 것이 부모님들이기 때문에 뭐라 할 수 없지만, 그저 잘못된 신념 때문에 수술할 수만 있다고 한다면, 살 수 있었는데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아서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한다면 그것처럼 안타까운 일이 없을 겁니다.

영적인 면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은 무엇입니까? 복음은 우리들에게 기쁜 소식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우리를 살리는 소식이에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고, 그 보혈의 비를 의지하면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놀라운 기쁨의 소식이 복음의 소식인데, 그리고 그 복음의 소식을 베드로와 요한이 전했을 때 안타깝게도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들과 사두개인들은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그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말씀을 전하는 자들을 감옥 속에 가두어 버리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두 번째 반응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4절 말씀에 보니까, 그날 베드로의 메시지를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작정한 사람이 5천 명이나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여성들을 숫자로 세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어린아이들도 세지 않았으니까, 아마 모든 사람들을 다 헤아린다고 한다면. 훨씬 더 많은 수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의 메시지를 듣고 회개하며 주님 앞에 나왔고, 그 사람들이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어마어마한 결과가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놀라운 결과가 나타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베드로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베드로가 대단한 설교자여서가 아닙니다. 예수님도 예수님은 베드로보다 더 뛰어난 말씀을 전하는 자였지만, 예수님에게 예수님이 그렇게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의 반응이 없었던 것이죠. 하지만 이 베드로가 능력이 뛰어나서 이런 반응이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점에 관해서는 베드로의 말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3장 12절의 말씀을 보니까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5천 명이 믿게 된 것도 역시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베드로가 뛰어난 달변가요 정말 설교를 잘하는 어마어마한 웅변가이기 때문에, 그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 아니라, 똑같은 메시지를 들었어도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있었고, 그래서 그들이 마음을 열고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하는 점을 주목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선한 사람이 아니어서, 우리가 선한 결정을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천성적으로 악한 품성을 지니고 태어나기 때문에, 사실은 좋은 반응을 보이기보다는 부정적인 반응이 더 쉽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기보다는 거부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너무나도 편한 모습이고, 우리는 영적인 소화 불량에 걸린 사람들이라서, 복음이라고 하는 진수성찬 앞에서도 우리는 늘 트집을 잡고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 그래서 날마다 날마다 기도해야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예배에 나올 때, 그냥 나올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간구하며 나와야 돼요. 주님 오늘 예배를 드리는데 그냥 있다가 가지 말게 해 주옵소서.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보배로운 그 메시지를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그냥 외면해 버리고 모른 척해버리고 그냥 흘려버리는 메시지가 아니라, 그 메시지가 나에게 은혜가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열매가 맺히게 되고 그래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도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성경을 읽을 때에도 하나님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영적인 눈을 깨닫게 하게 해 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살아가는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서 여러 가지 일들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려고 하는 그 음성들을 깨달을 수 있도록 저희들의 눈을 뜨게 해 주시고, 영적인 소화 불량해서 해결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는 자들이 되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제사장과 성전 맡은 자들과 서기관들은 그들의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싫증을 내면서, 그리고 이 사람들을 감옥 속에 집어넣어 버렸는데, 우리가 그러한 반응이 나오지 아니하도록, 하나님, 우리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기도해야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진단해 보아야 할 텐데요. 영적으로 나는 건강한 사람인가? 아니면 영적인 소화 불량에 걸려서, 성경을 읽어도 무미건조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들어도, 묵상에도 아무런 감동이 없고, 예배가 기쁘지 않고, 찬송이 지겹게 느껴진다고 한다면, 이것은 영적으로 아주 심각한 상태일 거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 은혜를 주옵소서 날마다 날마다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만일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그만 불평의 마음들이 생긴다고 한다면, 여러 가지 악한 것들만 우리들의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내가 보는 그것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사실은 내가 악해서 그런 모습이 나올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빨리 깨닫고, 그때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하나님, 내 마음을 바꾸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너무나도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보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보셨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보시고, 쓰레기와 같은 인간들이다. 쓸모없는 인간들이다. 그렇게 그냥 포기하지 않으셨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거 정말 쓸모없는 구제불능의 인간이구나 하면서, 지옥의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려도 아무 할 말이 없는 우리들을 하나님께서는 소중하게 보시고, 귀하게 보시고 보배롭게 보시고,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가장 소중한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믿음이 주님 앞에 감사함으로 나가야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너무나도 감사한 것은 하나님은 영적인 소화 불량에 걸리신 분이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 자체로 온전하신 분이어서, 우리를 보실 때 나쁜 것을 본 것이 아니라, 가능성을 보시고 생명을 보시고 살리기 위해서,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놀라운 선택을 해 주신 것이죠.

아마 여러분들이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mbn의 황금알이라고 하는 프로그램에 황수관 박사님이 나와서 어머니에 대한 강연을 해서, 전 국민을 눈물바다에 빠뜨린 아주 명강연이 하나 있는데요. 황수관 박사님이 어렸을 때 홍역을 앓아 거의 죽게 되었을 때였습니다. 황수관 박사의 아버지는 이미 다 죽어버린 그 자기 아들을 보고, 그 아이를 안고 우는 어머니 어머니 앞에서 지게를 메고, 두루마리를 그 지게에 싣고 삽을 가지고 와서 가마니를 두루 말아, 그 황수관 박사를 땅에 묻으려고 하면서, 죽은 자식 품에 안고 있으면, “뭐 하느냐? 빨리 내놔라. 부모보다 앞서 죽은 자식은 자식도 아니다.” 하면서 땅에 묻으려고 했을 때, 그 어머니는 다 죽은 그 아이를 포기하지 않았어요. 그 아이를 안고 우는 겁니다.

“하나님, 살아계시면 좀 살려달라”라고 눈물로 기도하면서 혀로 그 아이의 얼굴을 핥고, 그 아이를 도무지 포기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할 때 놀랍게도 기적이 일어났는데 생기가 돌고 손가락이 움직이면서 황수관 박사가 살아났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하신 일이 바로 그것이에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고 저 죄만 짓는 놈, 저 악한 일만 하는 놈 아무런 가망성이 없다. 빨리 지옥불에나 던져버리자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장 소중한 것을 보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주님 앞에 기도하며 나아가기는 주님 영적인 소화 불량에 걸린 것 같은 우리를 고쳐 주옵소서. 하나님의 은혜를 날마다 기억하며 감사로 살아가게 해 주옵소서. 믿음의 눈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날마다 날마다 발견하며 감사함으로 살아가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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