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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마지막 말 (삼하 23:1-7)

2021년 4월 21일 수요예배 설교

다윗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이야기가 이제 다 끝나가기는 하지만, 완전히 다 끝난 것이 아니고, 아직도 다윗의 이야기가 더 많이 남아 있습니다. 사무엘라 24장의 이야기도 있고, 열왕기상 1장 2장에서도 다윗이 등장하면서, 아직도 다윗의 이야기들이 많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무엘하 23장에서 다윗의 마지막 말을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다윗의 시를 사무엘하 22장에서 기록해 놓았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와 연결해서 다윗이 마지막에 했던 말을 여기에 기록하면서, 다윗이 그의 인생의 마지막에서 어떤 말을 했는가 하는 그 내용을 오늘 여기서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긴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요약하자면, 다윗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이새의 아들 다윗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고, 두 번째로는 지극히 높으신 분에 의해서 높이 올리움을 받은 자라고 그렇게 소개하고 있으면서, 세 번째로는 야곱의 하나님에 의해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고,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의 노래를 잘하는 자라 그렇게 자기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소개할 때 뭐라고 소개하겠습니까? 어떻게 소개하면 자기 자신을 잘 소개하는 것이 되겠습니까? 사람들마다 자기 자신을 소개하는 방식이 각각 다를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다윗은 맨 마지막을 이렇게 회상하면서, 마지막에 인생을 정리하면서, 내가 누구인가라고 하는 것을 정리할 때, 오늘 지금 말씀드린 이 네 가지로 요약을 해서 자기 자기 자신을 정리하고 있다고 하는 점을 볼 수가 있는데요.

이렇게 자기 자신을 이렇게 네 가지로 정리해서 설명하는 이 모습을 보게 되면, 전반적으로는 다윗의 마지막 말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설명하는 이 표현이 굉장히 겸손한 모습으로 자기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만일 이 순간에 우리가 다윗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면, 다윗에 대해서 무엇을 언급하면 제일 사람들에게 아주 뚜렷하게 각인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다윗을 소개할 때 제일 먼저 소개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무엇이겠습니까? 다윗 하면 골리앗이죠.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다윗 하면 골리앗이 늘 생각이 납니다. 어린 소년의 나이로 물맷돌 5개를 들고 나아가서, 블레셋의 거인 어마어마한 난공불락의 거인이라고 할 수 있는 그 골리앗을 단번에 쓰러뜨렸던 그 사건이야말로 어쩌면 다윗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기억에 남을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옛날 얘기 좀 한번 합시다. 그러면 다윗은 무슨 얘기를 하는 것이 가장 먼저 떠올랐을까요? 내가 왕년에, 왕년에라고 하면서 말을 한다고 하면, 다윗은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골리앗 쓰러뜨린 이야기를 하면, 제일 신나고 제일 흥분이 되고, 정말 신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이야기 소재가 바로 골리앗을 쓰러뜨렸던 그 사건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겁니다.

사람들마다 무엇을 기억합니까?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을 기억하든지, 혹은 가장 신이 났던 일, 아주 흥미진진했던 일을 기억한다든지, 자신의 인생에서 정말 강한 인상을 남겼던 일들을 기억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남자들은 무엇을 이야기하나요? 군 생활을 이야기하는 거죠. 내가 군대에 있을 때 말이야 하면서, 군대 시절에 어떻게 고생을 하면서, 어떻게 황당한 그 명령들, 어떻게 그 군대라고 하는 곳에서 내가 서바이벌해왔는가에 대해서, 그 20대 초반에 경험했던 그 일인데, 평생 죽을 때까지 그 군대 이야기는 떠나가지 않습니다.

앉아서 이야기하다가 보면 어느새 군 생활을 어디서 했냐고, 남자분들끼리 앉아서 이야기를 하다 보면 군 생활을 어디서 했느냐고 시작해서, 그래서 군대에서, 그 군대에 있었냐고 하면서, 군대 이야기로 어느덧 빠져들면, 그때 얼마나 정말 힘든 그 군 생활을 견디면서 지내왔었는지에 대해서, 막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이죠.

여성분들은 무슨 얘기를 한다고 그래요? 아기 낳는 얘기 한다고 하잖아요? 아기 낳을 때의 그 아픔과 고통의 이야기들을 하는 겁니다. 자신의 인생 가운데서 가장 큰 인상을 남겼던 그것은 아마도 죽을 때까지 늘 기억하게 되는 것이고, 늘 기억하면서 또 곱씹어 보게 되는 것일 겁니다.

따라서 다윗에게 있어서 마지막까지 그가 이야기할 수 있는 이야기 소재거리를 찾으라고 한다면, 의당 골리앗을 물리친 이야기를 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사무엘하 23장 1절에서 7절 말씀을 살펴보는데요. 이것이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마지막 순간에 다윗이 기억하고 있는 것, 마지막에 다윗의 삶 가운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정리하면서 이야기할 때, 내가 골리앗을 무찔렀다고 하는 이야기는 언급조차가 없습니다. 그 이야기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윗이 이야기한 것이 무엇이냐면, 나는 이새의 아들이었다고 고백을 합니다.

이새가 뭐 대단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냥 어느 한 평범한 한 노인의 아들이었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새가 무슨 특별한 관직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이새가 나라를 구한 그런 장수였던 것도 아니고, 그냥 어느 한 평범한 아저씨요, 평범한 인생을 살고 있었던 그 아버지, 이새의 아들, 그러니까 어디다 내놓아 보았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저 평범한 한 가정에 아들로 태어났다고 하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윗이 하는 말이 무엇이냐 하면, 그런데 내가 이새의 아들이었는데, 지극히 높은 곳에 올리움을 받았다고 두 번째로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나와 같이 평범한 사람을 높이 올려주셨다고, 나를 올려주신 그 하나님을 주목하면서, 내가 저 지극히 높으신 분에 의해서 높임을 받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고요. 더 나아가서 나는 하나님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지금 내가 왕으로서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골리앗을 무찌르고, 내가 이런 싸움에서 승리하고, 수많은 사람들과 쟁투를 해서, 그래서 내가 내 힘과 내 능력으로 이 왕 위의 자리에 올랐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같이 평범한 이새의 아들에게 하나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어주셨고,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이 왕 위의 자리에 오르게 하셨다고 하는 그런 겸손한 믿음의 고백이 나오는 것이죠.

그리고 맨 마지막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면,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노래를 잘하는 사람이라. 노래를 잘한다고 하는 그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들보다 노래 실력이 뛰어나고, 그 노래라고 하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뛰어난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잘하는 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은 시편을 쓰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았던 그 인생으로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노래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시편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리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로 살아왔다고 하는 사실을 이렇게 다윗이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다윗의 마지막 말을 가만히 분석해 보면, 여기에는 다윗의 간증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한순간에 이스라엘의 영웅으로 올라갔지만, 사울의 미움을 받아서 도망 다녀야 했었고, 그리고 왕이 된 후에는 범죄를 저질러서 죄인으로 나락으로 떨어져 버렸으나, 아들에 의해서 왕 위에서 쫓겨나기도 하고, 그리고 자기의 아들이 시체로 돌아오는 그런 쓰라린 경험을 경험했던 그 다윗이 그 모든 인생을 살아오고 난 다음에 고백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나는 평범한 인생이었으나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까지 올리셨고 나는 그래서 주님을 찬양하는 자, 주님을 노래하는 자로 사는 그런 인생이라고 자기 자신을 요약하고 정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이 간증에서 볼 수 있는 요소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여러분 내가 누군 줄 아시오? 내가 이런 일을 했고, 골리앗도 무찌르고, 그리고 왕위를 내가 쟁취했고, 그리고 다른 민족들을 내가 무찌르면서, 내가 이 많은 수많은 업적을 세워서 여기까지 내가 왔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평범한 사람이었으나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어주셔서 여기까지 오르게 되었고, 그리하여 나는 주님을 찬양하는 자로 살고 있다고 하는 그런 고백,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드러내는 고백이 이 다윗의 마지막 말 가운데 들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마지막 말은 보통 사람들의 말들과는 상당히 달랐던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바벨론 왕국의 느브갓네살 왕과 비교해 본다고 한다면 엄청난 차이를 느끼게 해 줍니다. 느브갓네살은 누구였는가? 느브갓네살도 하나님께서 들어 쓰신 하나님의 도구였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가 큰 제국을 이루고, 전 세계를 통일하면서 어마어마한 그런 왕국을 건설하는 큰 정말 위대한 왕이 되었었는데요. 바벨론으로 보자고 한다면, 정말 어마어마한 왕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 느브갓네살 왕이 어떤 말을 했는가? 다니엘서 4장 30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나 왕이 말하여 이르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그 왕궁을 자기가 만들어놓은 업적을 바라보면서, 이게 누가 만든 거나? 내가 만들었다. “전 세계를 내가 제패했다”라고 하면서, 그의 마음에 교만한 마음이 들어서, 전 세계를 바라보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 느브갓네살을 치셔서 마치 소처럼 풀을 뜯게 만들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다니엘서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업적을 드러내고 싶은 것은 사람들에게 모두에게 있는 그런 일반적인 마음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 그런 갈망들이 있습니다. 내가 뛰어나고, 내가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드러내고 싶고, 그래서 내가 이렇게 정말 위대한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그래서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향해서 박수를 쳐주고 인정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우리들에게 있을 뿐만 아니라, 만일 그렇게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한다면 굉장히 불편해지는 것이 우리들의 마음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욕구가 우리들에게, 우상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뉴욕의 팀 켈러 목사님이라고 하는 분이 계신데요. 팀 켈러 목사님이 쓴 책 가운데 아주 유명한 베스트셀러 책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만든 신>이라고 하는 책입니다. <내가 만든 신>이라고 하는 제목으로 번역이 됐는데요. 원래는 <가짜 신; Counterfeit Gods>이라고 하는 그런 제목의 영어 제목의 책인데 한국말로 번역이 되면서, 그것을 <내가 만든 신>이라고 하는 책 제목으로 번역해서 아주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요.

그 책의 내용을 보면, 팀 켈러 목사님이 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냐면, 아주 충격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갈망하는 그 모든 것들이 다 우상이 될 수가 있다. 우리에게 좋은 모든 것들이 다 우상이 될 수가 있다. 우리들에게 유익한 것, 우리들에게 좋은 것 정말 좋은 모든 것들이, 우리가 누리고 있는 그 모든 좋은 것들이 우리들에게 우상이 될 수가 있는데, 심지어 “기독교 사역에서 성공하는 것도 우상이 될 수가 있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주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주님의 일에서, 주님의 일을 하면서 그 주님의 일을 잘해서 성공하는 것도, 그것도 우상이 될 위험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이 무슨 의미냐면, 내가 주님의 일을 하고 있는데, 그래서 명분은 내가 주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명분을 내세우지만, 내가 주님의 일을 아주 잘하게 될 경우에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박수를 받고자 하는 그런 갈망들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서 솟아나게 되면, 그때부터 그것이 기독교 사역에서 성공하는 것도 우상이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교회보다 더 큰 교회를 만드는 것, 전도 왕이 되는 것, 혹은 내가 최고의 헌신을 하는 것, 그 어떤 헌신을 하는 것도 사실은 그것이 나의 우상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팀 켈러 목사님이 그렇게 지적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말은 팀 켈러 목사님이 최초로 한 말이 아니고, 사실은 예수님께서 이미 하셨던 말씀입니다. 누구를 향해서 말씀했냐면, 바로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해 주셨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6장 1절에서부터 4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바리새인들은 주님의 말씀대로 산다고 이야기를 했고, 주님의 일을 한다고 했지만, 그 주님의 일을 하는 그 목적이 무엇이냐면, 사람들에게 박수받는 것이 목적인 것이죠. “아 저 사람 참 경건한 사람이네.” “아 저 사람, 정말 신실한 사람이네.” “아 정말 저 랍비는 훌륭한 랍비야.” “아, 저 목사님은 정말 대단한 목사님이야.” “아 저 장로님은 정말 믿음이 좋은 장로님이야.” “아, 저 장로님은 정말 신실한 장로님이야.” 그런 사람들의 칭찬이 우리의 갈망이 되어 버리면, 그것이 우리들의 우상이 되어 버리면, 결국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명분은 내세우고 있지만,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으려고 하는 욕구의 우상을 섬기는 것일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사용된 사람들이 성경에 많이 나오는데요. 그런데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사용되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언제 무너졌는가? 교만할 때 무너져 버렸습니다. 정말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마음속에 교만이 들어가면서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으려고 하는 욕구가 마음속에 들어가는 그 순간 무너져 버리게 되어 있는 겁니다.

제가 자주 하는 표현이 있는데요. “사탄은 우리의 신앙적인 열정을 방해하지 않는다. 열정 후에 교만을 심을 뿐이다.”라고 하는 말을 제가 자주 합니다. 무슨 전략이냐면, 사탄이 쓰는 전략이 무엇이냐면, “다 된 밥에 코 풀기 전략.” 우리가 밥을 하고 있으면 그 밥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아요. “그래 열심히 한번 해봐라.” 해요. 그런데 열심히 한 후에, 우리들의 마음속에 집어넣어 주는 사탄의 마음이 무엇이냐면, “사람들이 왜 나를 알아주지 않지?” 그 마음이 들어가게 만들어서, 무너뜨려버리는 거예요.

마리아가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사역하는데, 그런데 그의 마음 가운데 사탄이 주는 마음이 생기는 겁니다. “주님, 왜 나는 안 알아주시고, 저 마리아는 나를 도와주지 않게 합니까?” 그런 마음이 들어가는 거예요. 

제자들은 주님을 위해서 따라가 왔지만, 그러나 그들의 마음 가운데 들어가는 생각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이만큼 주를 위해서 섬겼다고 한다면, 하늘나라에서 제일 큰 자가 누군가라고 하는 그것으로 제자들끼리 서로 다투면서 싸우면서 무너지는 거죠. 여기에 무너진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실컷 사역을 했지만, 교만한 마음 때문에, 사람들을 보고 사역을 했기 때문에, 모든 수고가 헛수고가 되어 버리는, 그래서 교만이라고 하는 우상, 자기가 인정받으려고 하는 그 우상에 넘어진 사람들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기에 다 걸려 넘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느브갓네살 왕은 그런 교만의 수렁에 빠져버렸는데, 놀랍게도 다윗은 그의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고백하기를 “내가 왕 중에서 이런 업적을 하고, 저런 업적을 세웠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거예요. “나는 아무것도 아닌 인생인데, 하나님께서 나와 같은 연약한 자에게 기름을 부어주시고,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니, 나는 주님을 찬양하며 산다”는 그런 고백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장사가 잘 되면, 내가 똑똑해서 장사가 잘했나 보다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나에게 이런 은혜를 베풀어주시니, 이게 웬 은혜이며, 웬 축복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봐야 되는 거예요. 우리 아이들이 잘 되고, 우리 아이들이 전교 1등을 하고 좋은 대학에 가고, 엄청난 결과들을 가져오면, 내가 아이들을 이만큼 잘 키웠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 나와 같은 죄인에게 웬 은혜며, 웬 축복입니까?” 나는 주님을 위해서 아무것도 한 것 없는데, 왠 놀라운 은혜를 저에게 베풀어 주십니까? 그런 믿음의 고백이 나와야 되는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범죄 한 것밖에 없는데,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사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해 주시고, 매 순간순간마다 동행해 주시고, 때마다 은혜를 베풀어주고, 그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내가 한 것은 없으나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뿐입니다라고 하는 그런 믿음의 고백이 우리의 삶 가운데서도 나타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윗은 오늘 자기 모습을 고백한 후에, 의인과 악인에 대해서 비교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어떤 사람인가?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3절 말씀에 “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모든 것들이 다 의인은 형통할 것이라고 이야기한 다음에, 6절 말씀에서는 사악한 자는 반대로 가시나무와 같아서, 손에 잡을 수도 없고, 항상 불살라질 것이라고 하는 그런 비교를 합니다.

의인과 악인에 대해서 비교하면서, 의는 형통할 것이지만, 악인은 망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 후에, 그리고 5절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그런데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 같지 아니하냐?”라고 하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 같지 아니하냐?”라고 하는 이 표현은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린 사람이 축복을 받는다고 했는데, 형통할 것이라고 했는데, 우리 집은 하나님을 경외한 집이오. 우리 집은 하나님의 공의로 사람을 다스린, 그런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우리가 그렇게 살았다고 하는 고백으로 이 5절의 표현을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그냥 뒷부분 하고만 연관시켜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집인가? 우리는 우리의 집은 이렇게 형통했다. 돋는 해에 아침 빛같이, 구름 없는 아침 같이, 비 내린 후에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풀 같은 것이 바로 우리 집과 같다고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형통한 이유는 왜 형통했는가? 우리가 잘라서 우리가 공의롭게 살았기 때문에 형통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그것의 이유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은 채, 우리 집이 형통했다고 말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5절 말씀에서 더 자세히 보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 같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나와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하게 하셨으니,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 이 표현을 좀 복잡하기는 하지만 이렇게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다. 다윗은 지금 형통한 삶을 살아오게 됐는데, 결국은 승리하게 됐고, 결국은 왕위를 차지하게 됐고, 결국은 모든 것들이 다 좋은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는데, 내가 어떻게 이런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는가? 원래는 원래 법칙은 의로운 자가 형통한 것이고, 악한 자는 망하게 되는 것이 법칙인데, 다윗의 고백이 무엇이냐면, 그런데 내 집이 의롭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형통하게 된 것이 아니냐? 어떻게 우리 집이 이렇게 형통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우리가 의로와서가 아니라, 5절의 고백이 무엇이냐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영원한 언약을 맺어주셨기 때문에, 그런 형통함을 누리게 되었다고 하는 고백으로 이 다윗의 마지막 말을 해석해 볼 수가 있습니다.

사실 다윗의 인생은 거룩한 인생이 아닙니다. 물론 다윗은 사울보다 나은 점이 있었고, 다윗은 여러 면에서 우리가 본받을 점들이 참 많이 있었지만, 그러나 다윗은 우리보다도 더 파렴치한 사악한 인간이었습니다. 한 여인을 겁탈했고, 그리고 그것을 숨기기 위해서 그 남편을 교살했고, 정말 파렴치한 죄를 저질렀던 사람이 다윗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맞는 정당한 하나님의 반응이 있다고 한다면, 악인이 당하는 그 가시나무와 같은 형벌을 받아야 마땅하고, 완전히 하나님께서 짓밟아 버려야 마땅한데, 놀랍게도 다윗의 고백이 무엇이냐면 그런데 우리 집이 어떻게 누구와 같다?

의인의 형통함과 같은, 그런 형통을 우리가 누리고 있다고 하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고, 그런데 왜 이런 고백을 하게 된, 이렇게 우리가 형통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내가 의로워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언약을 맺어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보내서 다윗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네가 나를 위해서 성전을 건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겠고, 너의 나라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시리라고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셨고, 그 언약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완전히 내 팽개쳐버린 것이 아니라, 넘어진 그 다윗을 다시 한번 회복시키고, 다시 한번 돌이키게 만들어서 결국은 이 마지막까지 오게 되었다고 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다윗의 감사의 고백이 여기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 다윗에게 내렸던 은혜가 바로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주어져 있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행한 대로 하나님께서 갚으신다면 심판하신다면, 다 지옥불에 가도 아무런 할 말이 없는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옛날 아담과 하와가 타락했을 때부터 약속해 주셨어요.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 뱀의 후손을 물리치겠다고 약속해 주신 그 약속, 그로부터 시작해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그 약속에, 내가 너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고 큰 나라가 되게 해 주시겠다고 하는 그 약속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신 그 약속 때문에, 내가 너희를 잊지 아니하겠다고 약속해 주셨던 그 약속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악 가운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해 주셔서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해 주신 그 사랑 때문에 우리가 살아간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매 순간순간 어느 순간에 있든지 우리의 교만함이 나올 것이 아니라, “내가 이래 봬도 왕년에 이런 사람이야”라고 하는 교만이 아니라,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은혜 놀라워 늘 찬송하며 감사하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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