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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용사들 (삼하 23:8-12)

2021년 4월 28일 수요예배 설교

오늘 본문의 말씀은 다윗을 도와서 싸운 다윗의 용사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군 지휘관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군 지휘관의 두목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다그몬 출신 지금 온 사람 요셉 밧세벳. 요셉 밧세벳이라고 하는 말은 세뱃의 아들, 요셉이라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요셉 밧세벳, 또는 에센 사람 아디노라고 불리는 그 사람이 다윗의 군대를 맡은 군 지휘관 중에서 최고 사령관의 역할을 한 사람이 소개가 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뛰어난 장수였는가 하면 단번에 800명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혼자서 800명을 당할 수 있을 정도로 일당 100이 아니라, 일당 800을 하는 그런 어마어마한 장수였다고 하는 것이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세 용사 중에 한 사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다윗에게 세 명의 용사들이라고 하는 아주 뛰어난 장수들이 있었는데, 그 세 용사들 중에서 한 사람이 누구냐면, 아호아 사람, 도대의 아들 엘르아살이라고 하는 사람의 그 공적도 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엘르아살이라고 하는 사람은 어떻게 싸웠는가? 손에 칼이 들러붙을 정도로 우리가 일을 많이 하다 보면 그런 표현을 종종 하지 않습니까?

장갑을 꼈는데 “장갑이 손에 달라붙을 정도로 일을 많이 했다”라고 하는 그런 표현을 쓰곤 하는데, 이 칼로 적군을 무찌르는데, 그 적군을 무찌르는데, 마치 칼이 손에 달라붙을 정도까지 그렇게 정말 최선을 다해서 블레셋 사람들을 쳤던 사람이고, 그래서 이 사람이 가서 다 무찔렀기 때문에, 다른 백성들, 다른 군사들은 전쟁을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저 이 엘르아살의 뒤를 쫓아가면서 노략 물품만 전리품만 거두면 되는 정도로, 마치 혼자 전쟁을 다 한 것 같은 그런 어마어마한 장수가 엘르아살이라고 하는 장수라고 오늘 본문의 말씀에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 한 사람이 소개가 되어 있는데요. 하랄 사람 아게의 아들 삼마라고 하는 장수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사기가 충천에 있을 때,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들은 다 도망갔지만, 이 삼마라고 하는 사람은 혼자서 밭을 막고 블레셋 사람들이 공격해 온 것을 혼자서 막아서 물리쳤던, 그런 엄청난 뛰어난 용사가 바로 삼마라고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사무엘서의 말씀을 쭉 살펴보는 가운데, 이 세 장수의 이름들이 한 번이라도 언급된 적이 있었습니까? 이번에 처음 등장하는 겁니까? 처음 등장하는 거죠. 그전에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사람들인데, 이번에 처음 등장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이 세 사람들뿐만 아니라, 오늘은 12절까지만 읽었으니까, 이 세 사람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만, 23장 마지막 절까지 읽어보면, 이 외에도 다윗을 도와서 함께 전쟁에 나갔던 위대한 용사들의 이름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펴보게 될 이 세 장수들의 활약상은 아주 대단한 활약상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800명을 한꺼번에 물리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정말 어마어마한 일인 것이죠. 뿐만 아니라 손에 칼이 들러붙을 정도로 싸웠다고 하는 것도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혼자서 블레셋의 공격을 다 막아서 물리쳤다고 하는 것도 엄청난 일인데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정말 신기한 것은, 이상한 것은 성경에서는 이 사람들의 활약상을 기록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하 23장에 이렇게 마지막에 다윗의 일생을 정리하면서, 다윗에게는 어떤 위대한 용사들이 다윗을 도와주었는가 정리할 때, 이 사람들의 이름이 나오기는 하는데, 그 이전에는 전혀 한 번도 등장해 보지 않았던 이름들이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이 성경에서 사무엘서를 기록하면서, 이 장수들의 정말 대단한 활약상이 앞에서는 전혀 기록되지 않았던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어쩌면 다윗과 맞먹을 정도의 그런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다윗도 골리앗을 물리치고, 다윗도 블레셋 사람 200명을 쳐서 죽이기도 하고, 그런 엄청난 전과를 올렸던 것과 비슷하게, 이 사람들 또 한꺼번에 800명을 무찌르고, 혼자서 그 블렛의 적군을 다 물리치고 할 정도로, 정말 대단한 그런 전술가들이고 정말 대단한 장수들이었는데, 그 장수들의 엄청난 전쟁의 이야기는 사무엘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고, 마지막에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고, 주로 다윗의 이야기만 길게 기록하고 있는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이들의 활약보다 다윗의 활약이 훨씬 더 뛰어난 것이었기 때문은 아닐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사실 이들의 활약은 다윗의 활약과 비교해 볼 때 하나도 뒤처지는 것이 없을 만큼 이들의 활력도 아주 대단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이야기가 앞에 전혀 등장하지 않고 마지막에 가서야 겨우 이름만 언급되고 있는 그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다윗을 선택해 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윗이라고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원래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었어요. 이새의 가문 가운데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사람, 그냥 그 집안에서 별로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고, 그냥 무시당하고 있던 그런 한 아들, 너무나도 평범한 그 한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선택해 주셨고, 또한 그를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내시는 그 역사를 이루실 뿐만 아니라, 또한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이야기를 누구를 통해서 펼쳐나가시냐면, 바로 이 다윗이라고 하는 사람을 통해서 펼쳐나가고 계시기 때문에, 특별하게 하나님께서는 이 다윗의 이야기에 집중해서 기록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다윗이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잘 알죠. 다윗도 실패했고 넘어졌던 사람이고, 흠이 많았던 사람인데, 하나님께서는 만일 완벽한 사람만 찾는다고 했다고 하면 그 누구도 사용할 수가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완벽한 사람을 찾으시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다윗처럼 평범한 한 사람을 찾아서, 그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게 하시고, 또 구원의 역사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다윗을 사용해 주셨다고 하는 점에 우리가 주목해 볼 수가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특별하게 선택하시고, 하나님께서는 그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셨고, 그리고 그 다윗의 후손을 통해서 온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아를 보내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의 말씀이 보여주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러니까 다윗이 모든 것을 혼자 다 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다윗이 이렇게 여기까지 올 때에는 다윗 혼자서 모든 것을 행한 것이 아니라, 다윗을 옆에서 도와주었던 아주 충실한 조력자들이 다윗에게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조력자들이 그냥 허접한 조력자들이 아니라, 정말 대단한 조력자였다고 하는 것이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상 이치가 다 그런 것이죠. 독불장군이 없다고 하는 말처럼, 혼자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혼자 있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무엇인가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돕는 조력자들이 있어야, 그래야 업적을 남길 수가 있는 것이고, 아무리 위대한 다윗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가 아무런 돕는 사람이 없이 동역자들이 없이 조력하는 사람들이 없이 혼자 다윗만 있었다고 했다고 하면, 다윗은 이렇게 왕으로서 세워지고 또 이런 큰 결과를 나타내는 그 일들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해서 도망갈 때 하나님께서는 그 다윗에게 수많은 사람들을 붙여주셨습니다. 600명의 용사를 다윗에게 붙여주셨습니다. 아둘라 쿨 속에서 생활할 때에도 도망 다닐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그냥 혼자 내버려 두신 것이 아니라, 다윗과 함께 있게 하고 다윗과 함께 동거 동락하면서, 그래서 미래를 꿈꾸면서 준비할 수 있는 다윗의 용사들을 붙여주셨는데, 그 다윗의 용사들로 인해서 다윗은 그 순간에 다시 힘을 얻기도 하고, 그리고 다시 일어서기도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나갈 수 있는 그런 어마어마한 사람으로 성장하게 되었다고 하는 점을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번에 우리나라 여자 배우 가운데 윤여정 씨라고 하는, 74세던가요? 그 여자 배우가 이번에 영화계에서는 아주 유명한 상이라고 할 수 있는 아카데미상의 여우 조연상을 받아서, 이번 주간 한 며칠 동안 아주 뉴스가 윤여정 씨의 뉴스로 도배가 되는 것을 봤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엄청난 상을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최초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게 되었는데, 그렇게 뛰어난 연기를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간단하죠. 그것은 바로 그 옆에 훌륭한 출연진들이 다 함께 수고하고, 다 함께 고생을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트로피를 받은 다음에 함께 일했던 그런 같은 동료들을 향해서 고마움을 표하는 것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내가 뛰어나다고 할지라도, 함께 조력하는 사람들이 훌륭하지 못하다고 한다면, 영화 자체가 별로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지 못했다고 한다면, 나 혼자 잘 연기를 해서, 나 혼자만 두각을 드러냈기 때문에 그런 상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도 잘하고 다른 사람도 잘하고, 알렌도 잘하고, 혜리도 잘하고, 다 잘해야 한꺼번에 다 잘하는 가운데서, 그곳에서 한 여자 조연상을 받을 수 있는 한 대단한 배우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죠.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같이 연기의 파트너들이 별로 연기를 잘 못한다거나, 작품이 결코 뛰어난 작품이 되지 못해 버린다고 한다면, 심사위원들로부터 선택을 받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번에 유럽에서 했던 축구에서도 마찬가지인데요. 손흥민 선수가 소속되어 있는 토트넘 팀이 카라바오 컵에서 1대 0으로 맨체스터 시티라고 하는 팀에 패하고 말았습니다. 토트넘이라고 하는 이 팀에는 손흥민이라고 하는 그런 월드 클래스 선수가 들어가 있고, 해리 케인이라고 하는 엄청난 월드 클래스 선수가 그 팀에 들어가 있지만, 왜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릴 수가 없었는가? 함께 팀으로서 같이 좋은 성적을 낼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런 거죠. 그 뛰어난 손흥민 선수도 국가대표로 차출이 돼서 우리나라 팀에서 뛰게 되면 별로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같이 뛰는 우리나라 선수들이 토트넘 선수들만큼 그만큼 도와주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리 뛰어난 선수가 있다고 할지라도 국가대표로 와서는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좋은 결과 얻지 못하게 되는 그런 결과를 우리가 종종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져야 될 두 가지의 관점이 있는데요. 첫 번째 관점이 있다고 한다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관점을 먼저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관점은 우리 크리스천들이 다 가지고 있는 관점입니다. 우리들이 땀을 흘리고 수고해서 무엇인가를 얻었어도 내가 정말 열심히 노력해서 무엇인가를 획득했다고 할지라도, 우리 성도들의 마음 가운데는 늘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고 하는 그런 믿음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얻고 난 다음에는, “이것이 다 나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었다.”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이죠.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오늘 12절의 말씀을 보면 그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는 그 밭 가운데 서서 막아 블레셋 사람들을 친지라 여호와께서 큰 구원을 이루시니라.” 삼마의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사무엘하 23장 12절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삼마가 밭 가운데 서서 막아서 블레셋 사람들을 물리쳤다고 설명하면서 이럴 정도로 삼마가 정말 위대한 인물이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삼마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성경은 한마디를 더 붙입니다. 뭐라고 더 붙이는 건가요? “여호와께서 큰 구원을 이루셨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아무리 사람들이 싸우고 최선을 다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하는 사실을 바라보는 것이 믿음이고, 파수꾼이 깨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지키시지 않는다고 하면, 파수꾼에 깨어 있음이 헛되다고 하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신앙의 관점인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이 가져야 될 첫 번째 관점이 무엇이냐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그런 관점을 가져야 되는 것이고, 그러한 관점은 아마도 모든 성도님들이 다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여기를 넘어서서 하나 더 가져야 될 관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우리 동료들의 고마움을 바라볼 수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여기까지 올 때 내가 이것을 이루고, 내가 무엇인가 업적을 남기고, 무엇인가 대단한 일을 하게 되었을 때, 이것이 내 힘으로만 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죠.

물론 하나님도 바라봐야 되지만, 또 하나 바라봐야 될 관점, 그것은 우리 주변에 나를 사랑하고 나를 돕고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고 나를 위해서 힘을 붙들어주고 손을 내밀었던 우리 믿음의 동료들, 혹은 우리 가족들, 나를 돕는 그 수많은 이웃들의 고마움에 대해서도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종종 이 점에 대해서는 우리 크리스천들이 놓치고 있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선 우리를 공동체로 불러 주셨습니다. 혼자 살게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공동체로 우리를 불러주셨는데요. 가장 간단한 공동체라고 하면 가정이라고 하는 공동체로 우리를 불러주신 것이고, 좀 더 큰 공동체라고 한다면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로 불러주신 것이고, 더 크게 말하자고 한다면 이 사회라고 하는 공동체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을 이룬다고 한다면 나 혼자 이루는 것이 아니라, 다 그 공동체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이런 방식으로 혹은 저런 방식으로 함께 협력해주고 도와주고 그리고 사랑해 주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이룬다면 이룰 수 있다고 하는 그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지금 사무엘하 23장에서는 그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거예요. 다윗이 여기까지 왔는데, 다윗이 혼자 온 것이 아니라 다윗을 돕는 용사들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 용사들이 어떤 용사들이냐? 다윗과 똑같은, 다윗보다 오히려 더 위대한 용사들도 다윗과 함께 일했다고 하는 사실을 낱낱이 기록하고 있다고 하는 점을 보아야 합니다.

바울 사도도 역시 마찬가지였는데요. 위대한 바울 사도는 복음을 이방 나라에 전파하는 뛰어난 최초의 선교사였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투자해 가면서 복음을 전해서, 그래서 온 유럽을 복음화시키는 그런 엄청난 공을 세운 사람이 바로 바울 사도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바울 사도가 쓴 편지글에 보면, 바울 사도는 사람들의 이름들을 하나씩 하나씩 부르면서, 고마움을 표하고 인사하고 있는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마서의 말씀을 보면 로마서 전반부에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구원을 받은 백성이 되었는가에 대해서 설명하고, 그리고 로마서 후반부에서는 그러므로 구원받은 우리가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설명한 후에, 그리고 로마서 16장에 가면 그동안 나에게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씩 하나씩 적어가면서, 그 사람들에게 무난하라고 그 사람들에게 감사를 전하라고 하면서, 다 바울을 도와주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로마서 16장에 일일이 일일이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인데요. 우리는 혼자 독불장군으로 여기에 그냥 툭하고 떨어진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냥 어느 순간에 내가 이 모습 이대로 툭 하고 여기에 나온 것이 아니라, 가정이라고 하는 공동체를 통해서 그리고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를 통해서 그 안에서 자라나게 되었고, 그 안에서 연단받게 되었고 그 안에서 신앙의 훈련을 하게 되었고 그 안에서 낙망이 되었을 때 다시 위로함을 얻게 되었고, 그 안에서 힘을 공급받고 위로함을 받고 용기를 얻게 되는 어마어마한 사랑의 공급들을 우리가 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이루고 있는 그런 식구들, 우리가 교제하는 그 사람들 신앙의 공동체 가운데서 같이 있는 그 사람들, 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완성시켰는가?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를 어떻게 완성시켜 나가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런 공동체 속에 넣으심으로 말미암아, 연단시키고 빚으시고 문한 것은 깎게 만드시고 교만한 것은 낮추게 하시고, 낙망될 때는 다시 힘을 얻게 하는 그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가 점점점점 커갈 수 있게 만들어 주시는 것을, 그런 하나님의 원리를 우리가 보아야 될 줄로 압니다.

이번에 윤여정 씨가 수상을 하면서 했던 소감 중에 한 대목이 있습니다. 여러 사람들에게 감사를 했는데, 그중에 한 대상이 누구냐 하면 자기 아들들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는 것을 봤습니다. 아이들 때문에 아이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밖에 나가서 일을 해야만 했던 그 과거의 시절이 있었던 거예요. 밖에 나가서 일을 하지 아니하면 돈을 벌 수가 없고, 돈을 벌지 못하면 아이들을 먹여 살릴 수 없기 때문에 아이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그래서 밖에 나가서 연기를 하면서, 이런 연기 저런 연기를 하면서 돈을 벌어야만 했던 그 시절을 떠올리면서, 그 아이들 때문에 내가 이런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런데 그때는 힘들었을는지 몰라도 그때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내가 왜 이렇게 고생하면서 살아야만 하는지, 정말 힘들게 힘들게 그 과정을 겪어왔을는지 모르지만, 그런데 한참의 시간이 지난 이후에 그리고 그 아카데미상을 받는 그 자리에서 생각해 보니 그때 나로 하여금 일 하게 만드는 동기가 되었던 우리 아이들이 사실은 오늘 내가 여기 서 있는 그런 근본적인 그런 동기가 될 수 있었고 힘이 될 수가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고마움을 표한 거죠.

그게 힘들었던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게 복된 것이었고 내가 우리 자녀들을 위해서 사랑을 베푼다고 했지만, 그래서 나는 일방적으로 우리 아이들에게 사랑을 베풀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 일방적으로 베푼 사랑이 아니라 그 아이들 때문에 내가 더 성숙해지고 내가 더 잘하게 되고, 인내심을 훈련을 하게 되는 영적인 성숙이 있게 만든 그런 스승이 되어 버렸던 것이죠.

저도 제가 우리 아이들을 기르면서 그런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 아이들을 기를 때 이 아이들이 정말 힘들었어요. 정말 초보 아빠 초보 엄마로서 어떻게 이 아이들을 제대로 잘 기를 수 있을지 난감했고, 정말 내 마음과는 달리 화를 내기도 하고 내 마음과는 달리 오히려 엉뚱하게 우리 아이들을 대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 가운데서 갈등도 생기고 여러 가지 힘들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그 아이들을 길렀는데, 그때는 기르면서 생각할 때는 내가 이 아이들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하고 이 아이들 때문에 내가 이런 엄청난 어려움을 겪으면서 살아야만 한다고 하는 그런 피해의식도 없지 않아 있었는데, 알고 보니까 모든 세월이 지난 다음에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우리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그 아이들을 기르면서 인격적으로 성숙하게 되어버렸고, 그래서 그 아이를 기르면서 기쁨도 느끼게 되었고, 영적인 성숙이 사실은 이 아이들을 기르면서 우리가 아이들을 기른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과정 가운데서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하게 되었다고 하는 그런 믿음의 고백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훈련시키시고, 어떻게 영적으로 성숙하게 만드냐 하면, 우리를 공동체 안에 집어넣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영적으로 성장하게 만듭니다. 가장 기초적인 단위가 가정이죠.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안 맞으니까, 자꾸만 부딪히는, 자꾸만 부딪히는데, 그런 부딪히는 것을 통해서 모난 것들이 점점점점 달아져 가고, 이제는 좀 더 귀를 기울이는 훈련을 받게 되고, 좀 더 사랑할 수 있는 능력들도 생기고, 그 과정을 통해서 서로 영적으로 성숙해져 나가는 훈련을 하게 되는, 자녀들을 기르면서 인내심을 훈련하게 되고 자녀들을 기르면서, 사랑을 배우게 되고 여러 가지 훈련들이 영적인 훈련들이 이런 공동체 속에 들어가 있으면서, 우리가 영적인 훈련들이 되는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면서 여기서도 영적인 훈련들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우리가 혼자 있으면 늘 넘어지고, 잘못된 길로 가고 믿음에서 떨어지기 쉬운데, 하나님께 영적인 공동체를 이루어서, 함께 예배하면서 힘도 얻고, 그리고 함께 기도하면서 서로 도와주기도 하고, 그리고 또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바라보면서 잡는 훈련도 하고, 여러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우리가 이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가 완벽한 사람들이 모여 있어서가 아니라, 정말 독특한 사람들이 다 모여 있어요. 정말 똑같은 사람이 한 명도 없고, 모든 사람들이 성격이 다 다르고 생각하는 것이 다 다르고, 그래서 서로 부딪히면서 서로 이상하게 막 꼬이면서, 그러면서 때로는 상처를 주기도 하고 그러면서, 그 안에서 점점점점 성숙해져 가게 만드는 그 훈련을 하나님께서 시켜주시기 때문에, 이 공동체 안에서 우리의 믿음이 커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혼자 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만남 교제, 공동체 속에서 영적으로 성숙한다고 하는 사실을 아시고, 우리가 조그만 부딪침 때문에 아픔이 있거들랑, 그 아픔 때문에 숨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아픔이 나를 더 영적으로 성숙하게 만들고, 하나님께서는 이 과정을 통해서 나를 빚어가신다고 하는 것을 발견하면서, 그래서 공동체 속에서 더욱더 영적인 성숙을 꿈꾸는 성숙을 이루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누가 제일 상처를 많이 주냐면, 사람이 상처를 주게 돼 있어요. 그런데 이런 상처를 만나게 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무엇이냐면 떠나버리는 겁니다. 숨어버리는 겁니다.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겁니다. 사람을 만나면 부딪히고, 사람을 만나면 상처가 생기고, 말하면 고통스러우니까 말을 끊어버리고, 만남을 중단시켜 버리고 눈꼴 사 나온 거 더 이상 보지 않으니까, 마음 편하고 하니까 모든 사람들의 열망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사람들하고 좀 안 부딪히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이 사람들 마음속에 들어있는 열망이에요.

그래서 교회에 와도 가능하면 숨어서 그래서 기둥 있는 교회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기둥 뒤에 숨어서 그냥 사람들하고 안 부딪히고 조용히 가는 것을 제일 선호해요. 그러면 안 부딪히니까, 마음이 편하기도 해요.

그런데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공동체로 불러주신 그 목적을 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아파도, 아파도 만나야 됩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아도, 마음 문 닫아버리고 가능하면 안 만나고, 가능하면 그냥 피하고, 만나는 거 최소한으로만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그러면 편할 것 같죠? 그것은 가정을 주신 목적을 망각하는 거예요. 자꾸 만나서 말 때문에 상처받고 행동 때문에 상처받고 하지만, 그 만남을 통해서 빚어가도록 하는 하나님의 계획이기 때문에 자꾸 피해버릴 것이 아니라, 만남을 가져야 되는 것이고, 우리 자녀들과도 그래야 되는 것이고, 우리 성도들의 교제도 역시 마찬가지예요. 자꾸 부딪혀가면서 영적으로 성숙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C. S. 루이스라고 하는 영국의 문필가가 <네 가지 사랑>이라고 하는 책에서 했던 아주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것은 상처받을 수 있게 자신을 내어 놓는 것이다. 무엇이든 사랑해보라. 그러면 그대의 마음은 반드시 쥐어짜는 아픔을 겪을 것이며, 어쩌면 바스러질 것이다. 그대의 마음이 전혀 손상당하지 않게 하려면, 아무에게도 마음을 주지 마라. 심지어 애완동물에게조차도 마음을 주지 마라. 조심스럽게 취미 생활이나 약간의 사치를 즐기는 것으로 꼭꼭 싸매어 두고, 그 어느 것과도 얽매이지 않게 하라. 상자 안에, 즉 그대의 이기심이라고 하는 관 속에 안전하게 가두어 두어라. 그러면 그 관속에서, 그곳은 안전하고 어둡고 아무런 움직임도 없고 공기조차도 없는 곳인데, 그 관 속 거기에서 마음은 서서히 변해갈 것이다. 아무도 부서뜨릴 수도 없고, 깨뜨릴 수도 없고, 그 무엇으로도 뚫을 수 없는 상태로 전혀 상처받지 않는 상태로 변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구원조차 받을 수 없는 상태로 피어나게 될 것이다. 사랑이란 상처받을 수 있도록 자신을 내어 놓는 것이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성경적인 가르침을 잘 요약했다고 생각되는 표현입니다. 우리는 사랑해야 하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은 상처를 받는 것이고, 만나니까 아프고, 부딪히니까 쓰라리고 고통스러운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을 당할 때 우리가 너무나도 아프기 때문에,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어떤 갈망이 있냐면, 피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도 많아요. 아프니까. 부딪혀서 아프면 안 부딪히려고 하고, 만나서 아프면 안 만나려고 하고 피해버리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어서, 우리가 안 만나면, 부딪히지 않으면, 보지 않으면, 눈 감고 살면, 그러면 전혀 아프지 않을 거라고 생각할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런데 그게 무슨 해법이냐면 불교식 해법이에요. 불교식 해법. 불교식 해법이 뭡니까? 여러분들의 마음을 아무에게도 주지 마십시오. 가족들과의 인연도 끊어버리고, 이 세상의 모든 인연 다 끊어버리고, “산속에 들어가서 조용히 혼자 도를 닦으며 있으라”라고 하는 것이 불교식 해법이에요. 모든 인연들이 끊어지기 때문에 마음이 편한 것 같아요. 이제는 해결된 것 같아요.

하지만 그건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마음은 점점 차가워지는 것이고, 결국은 구원받지 못할 그런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인데요. 안타깝게도 우리 성도들도 조그만 어려움을 당할 때면 성경에서 우리들에게 가르쳐주는 방식이 아니라, 불교에서 주는 그런 방식을 얼마나 많이 따라가는지 모릅니다. 유행가 가사처럼 “정 주지 않으리라.” “정 주지 않으리라.” 한 번 상처당하면 더 이상 마음의 문 닫아버리고 , 다시는 사랑하지 않고 다시는 관계하지 않고 다시는 안 만나고 다시는 보지 않고, 그래서 마음이 편한 것을 추구하려고 하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기쁨은 어디서 오는가? 성숙은 어디서 오는가? 좋은 결과는 어디에서 오는가? 마음을 닫아버리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눈물을 흘리며 땀을 흘리는 자들에게는 기쁨으로 단을 가지고 돌아오는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윤여정 씨가 고백한 것처럼 그때는 내가 아이들 때문에 억지로 나가서 일을 해야 했던 것 같은데, 근데 그 삶이 내게 이런 영화로운 트로피로 보상해주는 것을 볼 때 그 아이들에게 고맙다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내가 너희들 때문에 나가서 일해야 했었는데, 너희들이 그때는 나에게 짐처럼 느껴졌고, 그때는 정말 이 아이들 때문에 너무나도 힘들었는데, 너희들 때문에 내가 여기까지 왔다고 하는 그런 감사의 고백이 나오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아픔 가운데서도 주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수고하며 애쓰는 그런 결단이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나 혼자 숨어버리고 다른 사람들과 관계하지 않고 꼭꼭 숨어버려서 평안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다윗에게는 어떤 사람들이 있었는가? 다윗은 혼자 도망가기도 바쁜 그 상황에 600명이나 되는 거지들, 혹은 피난을 당해서 도망 오는 사람들, 여러 가지 피난자들이 불량배들 이런 사람들이 다윗의 주변으로 몰려든 거예요. 나 혼자 도망 다니기도 힘든데 그런데 다윗에게는 일이 생겼어요. 누구? 어떤 일이 생겼습니까? 자신을 바라보고 도망 온 그 사람들을 먹여 살려야 되는 일이 다윗에게 생긴 거예요.

도망가기도 바쁜 그 다윗에게, 그래서 그 다윗은 그들을 위해서 땀을 흘리고 그들을 위해서 노력을 하고, 그들의 가족들이 블레셋 군인들에 의해서 노략질당해서, 그래서 모든 걸 다 빼앗겨버리면, 목숨을 걸고 달려가서 그 사람들을 찾아오고, 재물 찾아와야 되는 그런 엄청난 노력을 그 사람들 때문에 했어야만 했었는데, 그런데 결국은 그게 다윗에게 지어진 커다란 무거운 짐이 아니라, 오히려 이 용사들이 되어서 다윗을 돕고 다윗이 왕이 되게 하고 하나님의 사명을 이루어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엄청난 조력자들이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우리들의 삶 가운데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자꾸만 피하고 도망가려고 하는 마음이 있다고 한다면, 그 마음을 바꿔버리시고 아픈 내 사랑하는 것은 상처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는 것을 기억하면서, 믿음의 길을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그냥 명령 한마디로 말씀 한마디로 간단하게 우리를 사랑할 수 있는 방식으로는 사랑할 수가 없었고,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십자가를 져야만 하는 그 상황 가운데서 주님께서는 그것을 피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구원해 그 구원 때문에 우리가 살아간다고 한다면, 이제는 우리도 주님의 사랑을 가지고 사랑의 공동체들을 섬기고 아끼고 돌보며 돌보는 가운데 사실은 그것이 내 것을 다 주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들로부터 내가 많은 것을 받았다고 하는 고마움의 고백이 결국에는 나오게 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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