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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들레헴의 우물물 (삼하 23:13-17)

2021년 5월 5일 수요예배 설교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세 용사들이 다윗을 위해서 우물물을 떠 온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사무엘서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 기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 이 일이 발생한 것은 다윗의 마지막 시기에 일어났던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은 그보다 훨씬 이전에 있었던 일을 여기에 마지막 즈음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직 다윗이 왕이 되기 전에 도망 다니던 시절에 있었던 그 일을 이제 다윗의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이 시점, 사무엘하 거의 마지막 부분에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다윗을 도와주었던 용사들이 어떤 일로 다윗을 도와주었는지, 다윗의 용사들의 이름들을 나열하다가 보니까, 그들이 행했던 그 행적을 예전에 했던 행적을 지금 이 사무엘하 23장의 말씀에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하는 대로 다윗은 사울 왕의 눈을 피해서 도망 다니던 그런 정말 고통스러운 시절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였을 때만 해도 온 백성들의 인기를 한 몸에 얻었고,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다윗을 환호했지만 이를 시기했던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결국 하는 수 없이 다윗은 도망을 가야만 했었고, 도망자의 삶, 숨어 지내야만 하는 그런 삶을 살아야만 했었던 것이 다윗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렇게 다윗이 도망가면서 사는 그 과정에는 적국인 블레셋에 들어가서 몸을 피해야 했던 그런 일도 있었고요. 살아남기 위해서는 미치광이 행세를 해야만 했었던 시절도 있었고, 뿐만 아니라 아둘람 굴 속에 들어가서 마치 산적 두목처럼 살아야만 했던, 그런 어두운 시절이 다윗에게 있었는데요. 오늘 기록된 이 이야기는 다윗이 그 아들람 굴 속에서 있었던 그 시기에 일을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힘들게 힘들게 살아가던 다윗이 하루는 한탄하면서 말을 툭 내던졌습니다.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이 있는데, 그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을 누가 나로 마시게 할까?” 베들레헴 우물, 성문 곁에 있는 그 우물물을 언제 내가 다시 마실 수가 있을까? 누가 나로 하여금 그 물을 마시게 해 줄까? 한탄하며 말하는 그 이야기를 했을 때, 그 옆에 마침 3명의 용사들이 있었는데, 다윗의 그 3명의 용사들은 다윗의 하는 그 이야기를 듣고서, 먼 산을 쳐다보면서 멀뚱멀뚱거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다윗의 세 용사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무기를 챙겨 들고, 그리고 바가지를 챙겨 들고 블레셋의 진영을 향해서 뛰어갔습니다.

우리들이 모시는 장수인 다윗이. 다윗, 저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의, 그 물을 마시고 싶다고 하는, 떠오라고 한 이야기가 아니에요. 그냥 마시고 싶다고 하는 소원만 이야기했는데, 그 이야기를 들은 세 명의 용사들은 그 베들레헴 성을 향해서 돌진해 나간 겁니다.

그런데 그 베들레헴은 어떤 곳이었냐면, 당시에 블레셋이라고 하는 그 엄청나게 센 나라가 점령하고 있었고, 그래서 함부로 공격하기 어려운 그런 아주 위험한 곳이 바로 베들레헴이었는데, 이 세 명의 용사들은 베들레헴을 향해서 돌진해 나가는데, 그런 과정 가운데서 블레셋의 군대와 전투를 해야만 했었을 것이고, 그리고 그런 전투의 과정 가운데서 자신의 목숨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그런 위험도 불사하면서, 다윗을 위해서 그 베들레헴까지 진격해 들어갔고, 그 세 사람이 한 사람은 망을 보고, 한 사람은 싸우면서, 또 한 사람은 물을 푸면서 결국 그 물을 푸는 것을 성공해가지고 돌아와서, 다윗 장군에게 그 물을 바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물을 보게 된 다윗은 그 물을 마시지 않고 땅에 붓고 하나님께 바쳤다고 하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게 되면서 우리는 몇 가지 점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21세기를 사는 우리들로서는 이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을 보면서, 쉽게 납득이 되지 않은 면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무엇이냐 하면, 왜 하필이면 베들레헴의 우물물을 이 다윗이 갈망했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다윗이 머무르고 있던 그 진영에 마실 물이 없지는 않았을 거라고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추측해 볼 수가 있습니다. 만일 물이 필요했다고 한다면, 어디에서 물을 떠 오면 될까요? 요단강에 가서 물을 뜨든지, 아니면 근처에 우물에 가서 물을 뜨든지, 아마 다윗이 지금 진을 치고 있는 그 지역에는 물이 하나도 없는 지역에 진을 치지는 않았을 거라고 추측해 볼 수가 있습니다. 그 당시 다윗과 동행했던 사람들이 6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동행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생활을 하고 움직이기 위해서는 광야 같은 곳에 진을 치는 것이 아니라, 아무래도 먹을 것을 구하기 쉽고 마실 것을 구하기 쉬운 곳에 진지 구축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지, 물을 하나도 구할 수 없는 곳에 진지를 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따라서 물이 먹고 싶다고 한다면, 아마도 쉽게 물을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왜 하필이면 다윗은 다른 물이 아니라, 저 베들레헴 지금 블레셋 사람들이 점령하고 있어서 그래서 쉽게 접근도 할 수 없는, 바로 그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그 우물물을 마시고 싶다고 했을까 하는 점을 우리가 쉽게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더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는데요.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세 명의 용사들이 목숨을 걸고 가서 기어이 그 물을 떠오르게 되었을 때, 그 물을 받아 들고서 그 물을 마시면서 고맙다고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라, 그 물을 마시지 못하고 땅에 부어버리면서,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는 제스처를 취한 것이 도무지 우리들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먼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해 보고 싶은데요. 다윗은 왜 다른 물이 아니라, 베들레헴의 우물물을 한번 마셔보았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런 간절한 마음이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다윗의 일행들이 진 치고 있는 그곳에서 전혀 물을 구할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저기에 가면 물이 있으니까, 그 물을 마시고 싶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아무 물도 없는 곳에서 그들이 진을 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무래도 물을 구하기 쉬운 곳에서 진을 치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고, 그래서 물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언제든지 물을 대령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었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다윗이 하필이면 다른 물이 아니라 저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에서 나는 그 물을 마시고 싶다고 한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아마도 이렇게 추측해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사무엘을 보내어서 머리에 기름을 부은 적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던 그 어린 소년을 향해서 사무엘 선지자가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다윗으로 하여금 사울을 이어서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으로 세워주시겠다고 하는 놀라운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난 다음에 다윗은 골리앗을 쓰러뜨리게 됐는데요. 그리고 그렇게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백성들의 인기를 얻는 그 순간만큼은 정말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셔서 이제 곧 나를 왕으로 만드시겠구나라고 하는 그런 확신과 기대감이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기대감과는 정반대로 모든 일이 꼬여가기 시작합니다. 사무엘이 예언한 것과는 정반대로, 사울의 미움을 받기 시작해서 쫓기는 신세가 되었고, 그래서 도망을 다니기 시작했는데, 그래서 그 도망을 다니던 그 기간이 하루 이틀이 아니고, 오랜 세월 동안 도망만 다녀야 돼요. 도망 다니는 그 과정 가운데, 어떠한 소망도 보이지 않는 겁니다. 어느 날 자신의 몰골을 보니까, 꼭 산적 두목같이 생긴 모습을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밖에 없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시기를, “내가 너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왕을 삼아 주시겠다”라고 약속해 주셨는데, 그러한 약속이 이루어질 것 같은 어떠한 기미가 보여야 하는데, 어떠한 소망이라도 있어야 되는데, 자기 주변을 살펴보면, 그러한 소망이 이루어질 것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고, 그저 도망자의 삶을 살아야만 했었던 다윗의 마음 가운데, 그의 마음이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을 것 같습니다.

베들레헴이 저 눈앞에 보이는데,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떠돌이 생활만 하며 그렇게 도망 다니는 처지 가운데서, 그가 절망과 고통 가운데 툭 튀어나왔던 말이 무엇이냐면, “저 베들레헴의 우물물을 누가 나로 마시게 할 것인가?”라고 하는 그런 한탄스러운 말이 다윗의 입에서 나왔던 것입니다.

그 말의 의미는 단순히 물을 마시고 싶다고 하는 말이 아니라, 물이 갈증이 나기 때문에 내가 물 좀 마시고 싶다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이 말속에는 과연 내가 이렇게 산적 두목과 같은 삶을 언제 끝낼 수 있을 것인가? 이 도망자의 삶, 이 피난자의 삶을 언제 끝내고 언제 고향으로 돌아가고, 언제 왕이 될 수 있을 것인가? 도대체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그 약속이 도대체 이루어질 가능성이라도 있는 것이라고 하는가 하는 그런 회의와 질문이 다윗의 마음 가운데 들었기 때문에, 한탄하는 의미에서 과연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라고 하는, 그런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 도대체 저 베들레헴의 우물을 언제 내가 다시 맛볼 수 있겠는가? 누가 나로 하여금 그 물을 마시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는 질문이 터져 나왔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사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 답답한 마음이 들 때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다윗과 같은 심정을 가지게 될 때가 우리들에게도 많이 있는데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기도의 제목들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기도하면 들어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고, 부르짖으라. 그러면 내가 응답하겠다고 약속해 주셨고, 하나님의 약속은 성경 말씀 가운데 분명하게 쓰여 있는데, 그런데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해결이 안 되는 거예요. 기도했는데, 더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상황은 더 힘들고 어려운 상황으로 자꾸만 들어가는 거죠. 사업은 제대로 되지 않고 건강은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기도해도 도무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계속해서 더 힘든 일만 생길 뿐만 아니라, 남편을 위해서 기도해도 남편이 믿음을 가지기는커녕 더 힘들게만 해지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자식들을 위해서 기도하지만 자식들이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더 잘못된 길로 가는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우리들의 마음 한 켠 속에서 솟아오르는 생각이 무엇이냐 하면, 도대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는데, 왜 내 인생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까? 도대체 하나님이 내게 신경이나 쓰고 계시는 겁니까? 하나님이 내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것 맞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것이 맞습니까? 그런 질문들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솟아오를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고난의 현장을 만날 때마다 던지게 되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해 주셨던 그 약속은 너무나도 멋있고 화려한 약속인데, 하나님께서 해주신 약속은 너무나도 큰 약속인데, 그런데 현실적으로 자기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지금, 자신의 모습은 너무나도 그 소망과 약속에 비해서는, 너무나도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도대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고 하는 그런 실마리라도 봤으면 좋겠다고 하는 마음속에서 울부짖는 내용이, 과연 언제 내가 저 베들레의 우물물을 다시 마실 수 있을 것인가? 이 도망자의 삶을 언제 청산하고, 누가 나로 하여금 저 베들레의 우물물을 마시게 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하는 그런 한탄조로 이야기했던 것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윗의 이야기를 들었던 세 용사는 그 다윗의 말을 그냥 흘려듣지 않았습니다. 세 용사는 그 순간에 다윗을 위해서라고 한다면 목숨을 걸고 물을 떠 와야 되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물이 없어서 다윗이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질문이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가에 대한 질문이었기 때문에, 이 용사들은 이 다윗에게 저 베들레헴의 물을 가지고 와서 한번 가져다주는 것이 이것이 다윗에게 너무나도 큰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이 되어서 이 세 용사들은 목숨을 걸고, 베들레헴을 향해서 달려가는 겁니다.

저곳에 지금 블레의 군인들이 진을 치고 있기 때문에, 죽을 수도 있는 그 상황 가운데서, 다윗을 위해서라고 한다면 목숨을 걸고 달려가서, 결국 그 물을 떠가지고 다윗 앞에 가지고 나와서, 다윗 앞에 내놓았을 때 다윗이 그 물을 보고 어떤 마음을 느꼈을까요? 정말 자기가 한탄조로 했던 그 말인데, 얼마 되지 않아서 세 용사들이 베들레헴의 우물물을 떠가지고 와서. 그 우물물을 보여주는 그 순간에 다윗이 보인 반응이 무엇이냐 하면, 부하더러 “고맙다. 내가 목말랐었는데, 너무나도 고맙다.” 하면서, 그 우물물을 벌컥벌컥 마시면서, “그래도 물은 베들레헴 우물물이 최고다.”라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이 맛을 내는 물을 못 만났다.”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다윗은 그 순간에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물을 땅에 부어버렸습니다.

사무엘하 23장 16절을 17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리며,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나를 위하여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목숨을 걸고 갔던 사람들의 피가 아니니이까 하고 마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니라.”

다윗은 울을 보면서 아마도 정신이 바짝 들었을 겁니다. 자신이 한탄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과연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는 것 맞습니까? 과연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는 것 맞습니까라고 하는 그런 투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자신의 눈앞에 떠온 그 베들레의 우물물을 보면서 정말 하나님은 살아계시구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구나! 아직 약속의 성취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는 그런 확신을 가지게 되면서, 다윗은 너무나도 감격하는 가운데, 이 물을 자기가 마셔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물을 하나님 앞에 부어 버리고, 다시 새 힘과 용기를 얻고 믿음으로 일어설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3명의 용사들을 사용하셔서, 블레셋의 군대를 뚫고 무사히 베들레헴의 우물물을 가져오게 하셨는데, 바로 그 세 명의 용사들의 용감한 행위로 말미암아 다윗은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시고, 그때 하셨던 그 약속은 아직도 유효하고,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이 모든 과정들을 통해서 선을 이루실 거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이런 반응이 나온 줄로 믿습니다.

다윗이 맨 처음에 했던 말이 뭡니까? 다윗이 맨 처음에 했던 말이 무엇이냐면, 누가 베들레헴의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을 나로 하여금 마시게 할 것인가라고 질문을 던졌어요. 그 다윗의 그 말 가운데 들어있는 그 표현을 보십시오. “누가”라고 하는 말을 던집니다. 정말 누구 있습니까? 나를 도와줄 사람이 있습니까? 나에게 은혜를 베풀 분이 계십니까? 하나님이 계십니까? 정말 누군가 있느냐라고 하는 그런 질문을 던졌는데, 물을 바라본 그 다윗의 입에서 나온 고백이 무엇이냐면, 무슨 고백을 합니까?

“여호와여.” 처음에는 “누가” 나로 하여금 이 베들레헴의 물물을 마시게 할 것인가라고 질문을 던졌던, 그 다윗의 입에서 우물물을 바라보게 되는 그 순간에 이 다윗의 입에서 나온 말이 무엇이냐 하면, “여호와여”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의심스럽고, 하나님의 약속이 정말 이루어질 것인가 의심스럽고, 정말 하나님께서 나를 돌보고 계시는지 나를 생각하고 계시는 것이 의심스러웠지만, 그러나 베들레헴의 우물물이 얼마 있지 않아서 자기 눈앞에 오는 그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은 살아계시구나”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를 사랑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다윗의 입에서, “여호와여”라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 그리고 그 물을 땅에 부어서 바치고,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하는 자로 바뀌게 된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을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들을 다루시는가 하는 것을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너무나도 연약해서 늘 온전한 것이 아니라, 늘 조그마한 어려움에 무너지고 쓰러지기 쉽고, 고난의 터널을 지나가면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고 하는 사실마저도 잊어버릴 때가 있고, 때로는 믿음이 흔들려 버릴 때가 있고, 고난의 터널을 지날 때는 정말 그 모든 것들이 다 깜깜해져서 그래서 완전히 믿음이 흔들려 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다윗도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다윗의 마음 가운데도 질문이 솟아오르는 것이죠. 하나님과 동행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정말 아무것도 개선되지 않고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정말 계속해서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자신의 눈앞에 반복될 때, 다윗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가 뭐냐 하면, “정말 하나님이 계십니까?” “나를 도와주실 분이 과연 있기는 한 겁니까?”라고 하는 그런 질문을 던지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 다윗에게 믿음을 회복시켜 주시고, 다시 한번 그 다윗으로 하여금 일어설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것은 세 용사를 통해서 다윗을 일깨워주고 다시 일어서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방법이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공동체를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만일 이 순간에 다윗 혼자만 있었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갑자기 우울증이 찾아오고, 절망감이 찾아오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가 의심이 들게 되는 그 순간에 다윗 옆에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면 다윗은 그 의심과 절망 가운데서 완전히 쓰러졌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다윗이 있는 그 자리에 누가 있었냐면, 3명의 용사들이 있었고, 다윗이 쓰러지는 그 모습을 보면서 그냥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다윗을 위해서라면 우물물을 뜨러 가고, 그리고 그 우물물을 떠가지고 와서, 먹여줌으로 말미암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다시 한번 일어설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사람들이 누구냐면, 바로 세 명의 용사들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공동체입니다. 공동체는 무엇이냐면, 서로가 서로를 돕는 공동체입니다. 전도서 4장 9절에서부터 10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정이 있어야 하고, 친구가 있어야 하고, 신앙의 동지들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가족이나 친구나 신앙의 동지들이 완벽하기 때문에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흠이 있는 사람들이지만, 힘들고 어려울 때 손을 잡아주고, 믿음을 더 굳게 가지라고 격려해 주기도 하고, 그리고 함께 그 고민을 들어주면서, 그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그것이 공동체의 힘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겁니다.

모든 위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지만, 그 모든 위로 하나님에게서부터 오는 위로는 우리 이웃들을 통해서 오는 올 수밖에 없는 것인데요. 다윗에게는 누가 있었냐면, 바로 그 세 명의 용사들이 있어서 다윗이 쓰러질 때 일으켜 세워 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다윗은 참 행운아였다고 생각이 듭니다.

다윗이 그렇게 힘들고 어려울 때, 먼 산 바라보면서 그냥 아는 척 안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세 명의 용사가 다윗 한 사람 살리기 위해서 목숨 걸고 블레셋의 적진을 향해서 뛰어 달려가는, 실제로 우리들의 삶에서도 그런 세 용사와 같은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되는데요. 여러분들에게 그런 세 용사와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세 용사 같이 우리들을 도와줄 사람들이 있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소망인데, 그런데 현실에서는 세 용사와 같이 우리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종종 우리를 배신 때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씁쓸한 경험을 할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요즘 한창 뉴스가 지금 되고 있는 사건이 하나 있는데요. 한강에서 실종되었다가 주검으로 발견된 송정민 군의 이야기만 해도 그렇습니다. 앞으로 사건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모르겠지만, 현재까지 알려진 것만으로 본다면 친구가 그 중요한 순간에 그냥 혼자 집에 가 버린 거죠. 같이 있었다고 한다면 죽지 않을 수도 있었던 그 순간에, 사라져 버린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고 하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들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죠. 도와주는 친구였으면 좋겠는데, 정작 중요한 순간에 배신하는 친구들, 가족들이 정말 중요한 순간에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 나에게 손을 내밀어주었으면 했는데, 외면해 버리는 그런 경험들 교회에서 같이 신앙생활을 하고 서로 도와주고 서로 격려하고 위로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오히려 신앙의 동지가 아니라, 외면해 버리는 것을 경험할 때가 우리들에게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가 미국에서 살아갈 때였었는데요. 미국에서 살아갈 때 제일 힘들었던 것 중에 하나가 무엇이냐면 의사소통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특별히 저는 학교에 가버리고 제 아내가 무슨 시장에 간다든지 물건을 사러 간다든지 하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영어를 제대로 잘하지 못하니까 은근히 무시하고, 그리고 억울한 일을 만나고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고 싶어도 영어가 잘 안 되니까 답답하고 억울한데, 그런 상황 가운데서 정말 힘들고 어려우니까 제 아내가 그때 누구에게 손을 벌려야 되겠습니까? 우리 아이들에게 손을 벌리는 거죠. 그래서 초등학생인 우리 아이들한테 부탁을 하는 거예요. “얘야. 지금 엄마가 지금 이렇게 이렇고 상황이 이렇고 저래서 억울해 죽겠는데, 너는 영어 잘하니까, 네가 좀 얘기 좀 해줘라.” 그러면 우리 아이가 “알았어. 내가 우리 엄마 엄마 대신에 내가 해줄 게.” 하면서 그 사람과 싸우면서 얘기를 해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그렇게 얘기 안 하고, “싫어” 그러면서 가버렸어요.

제 아내는 지금 한국에 와서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말이 통하니까, 말하면 다 해요. 서로 소통이 되니까 너무 좋아하고, 나중에 은퇴하면 아이들 있는 미국에 가서 살자고 얘기해도 제 아내는 절대 안 간다고 합니다. 여기가 좋다고,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미국으로 와서 살라고 자꾸 얘기하는데, 그때 그 일을 종종 얘기합니다. 내가 예전에 도와달라고 했는데 싫어하고 가버렸잖아. 그러니까, 요즘 아이들은 철이 들어가지고 엄마 그땐 내가 어려서 그랬는데, 이제는 내가 다 해줄 테니까 오라고 그렇게 얘기를 하고 있는데 어쩔지 모르겠습니다.

근데 그게 우리가 늘 경험하는 거예요. 누구네 집 얘기인지는 얘기를 안 하겠습니다마는 차를 타고 가다가 차가 길 한가운데서 섰어요. 다급한 마음에 남편한테 전화를 거는 거예요. “여보, 차가 섰어. 어떡하면 좋지?” 그때 남편에게서 들려오는 차가운 소리, “왜 나한테 전화해? 보험회사로 전화해야지.” 도와주는 친구, 도와주는 가족, 신앙의 동지가 아니라, 오히려 배신당하는 것 같은 그런 현실을 이 세상에서 만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알고 계십니까? 우리를 돕기 위해서 저 베들레헴으로 가신 또 한 분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그 옛날 다윗을 위해서라고 한다면 목숨을 걸고 베들레헴을 향해서 달려갔던 세 용사들처럼, 우리가 영원히 멸망을 당하게 되었을 바로 그 순간에 우리 주님께서는 저 높고 높은 보좌 위에서 낮고 천안 이 땅에 내려오셨고 목숨을 내어 주셔서, 우리를 위하여 물과 피를 다 흘려주셨기에 저와 여러분들이 구원을 받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가운데 그 어떤 소망이 우리들에게 있을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우리의 친구가 되어 주시고 우리의 소망이 되어 주시고, 우리의 영원한 해답이 되어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로마서 8장 32절의 말씀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그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런 사랑을 받은 우리는 이제는 세 용사와 같이 우리 내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주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그냥 우연히 어쩌다 보니까 만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도와주라고, 세 용사가 다윗을 도와주었던 것처럼, 우리도 그들을 도와주라고 그래서 우리 옆에 앉게 하시고 우리와 만나게 하시고 우리 곁으로 보내주신 것입니다.

강도 만난 자들을 보면 외면하고 지나갈 것이 아니라, 목마른 자들을 보면 외면하여 버릴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를 가져다주셨지! 베들레헴의 우물물 정도가 아니라 그 속에서부터 영원토록 솟아나게 하는 그 우물물을 우리들에게 만들어 주셨지!” 그런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귀하고 복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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