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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사 49:14-17)

2021년 5월 9일 어버이 주일예배 설교

사람에게는 모성애라고 하는 것이 있고 부성애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누가 가르쳐주어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태어날 때부터 내재되어 있는 그런 품성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기 때문에, 누가 가르쳐주어서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자녀들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되고 있는데요. 바로 이러한 점이 기계와는 좀 다른 점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자동차를 만들어낸 기계가 자기가 만들어낸 자동차를 사랑한다거나, 휴대폰을 만들어낸 기계가 자기가 만든 휴대폰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가 낳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 사랑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가 없는 것이죠.

사람에게뿐만 아니라, 이러한 모성애, 부성애라고 하는 것은 동물들에게도 새겨져 있습니다. 얼마 전에 제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하나 보게 되었는데요. 우리나라 동물원에 와 있는 판다가 새끼를 낳는 그런 과정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중국에서부터 데리고 온 그 판다가 우리나라 동물원에서 혼자 지내는 겁니다. 하지만 중간에 교미를 시켜주었고, 그래서 새끼를 잉태하게 되었고, 그리고 때가 되어서 새끼를 낳게 되었는데요. 출산 직후에 그 어미 판다가 보여주었던 그 행동이 참 신기하고 놀라웠습니다. 그 어미 판다가 한 일이 무엇이냐 하면, 새끼가 낳게 되자 새끼가 바닥에 떨어졌는데요. 그 새끼를 입으로 물어서 자기의 배에다가 올려놓는 겁니다. 무는데 자꾸 떨어지니까, 그냥 포기한 것이 아니라, 자꾸만 물어가지고, 그 새끼 판다를 자신의 가슴에 올려놓고, 그리고 감싸고, 그리고 그 새끼 판다에게 자기의 젖을 물리는 그런 장면을 보게 됐습니다. 이 판다가 도대체 누구에게서 배워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일까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주변의 판다들이 어떻게 하면 아기를 낳고 잘 기를 수 있는지에 대해서 주변의 판다들이 알려준 것도 아니고, 그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본능적으로 새끼가 태어나자마자, 그 새끼 판다를 위해서 정말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보호하려고 하고 젖을 물리는 그 모습을 보면서, 참 신기하다고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사실 이러한 현상은 진화론으로서는 설명하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진화론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생물이 있었는데, 광물이 있었는데, 시간이 오랜 세월이 지나다 보니까, 그 무생물들이 이리 조합하고 저리 조합해서 아미노산이 만들어지고, 단백질이 만들어지고, 그래서 생명체가 탄생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진화하고 또 진화해서,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것인데, 그렇게 우연히 만들어진 생명체가 모성애를 가지고 부성애를 가진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아무리 받아들이려고 해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휴대폰 휴대폰의 부품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그것을 슬슬 흔들면서 수억 년을 기다리면, 그것이 우리가 쓸 수 있는 휴대폰으로 조립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수억 년이 지난다고 한들, 그리고 거기에 모든 요소들이 다 그 자리에 있다고 한들, 그것이 어떻게 자연적으로 우연히 조립이 되어서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휴대폰이 된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휴대폰보다도 수억 배 복잡하고, 그리고 모성애와 부성애를 가진 우리 사람들이 우연히 만들어질 수 있고 진화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아무리 믿으라고 해도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미신 중의 미신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 인간에게 모성애가 있고 부성애가 있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은 아주 간단하게 설명해 주는데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실 때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서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창세기 1장 27절의 말씀에 보면,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품성을 닮은 모습이 새겨져 있는 것이죠.

하나님을 닮은 그 품성들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태어날 때부터 이미 새겨져서 태어나게 되는 것인데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도록 창조되었지만, 그중에서도 하나님의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내도록 창조된 것이 바로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 사람들이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주셨는데, 우리가 드러낼 수 있는 그런 모습 가운데서 하나님의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그런 품성이 무엇인가 하고 생각해 보면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드러내 주는 그런 일이 되는 것인데요.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 인간들에게 모성애와 부성애를 주셔서, 우리 자녀들을 사랑하게 만들어주셨을까요? 그 이유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내면서 자녀들을 잘 돌아보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들에게 그런 모성애와 부성애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우리로 하여금 자녀들을 사랑하도록 그렇게 만들어주신 것은, 그 자녀들을 돌보는 책임이 우리들에게 주어져 있다고 하는 것이고, 그리고 부모님이 자녀를 잘 돌보는 것은, 그것은 그냥 본능적인 것을 넘어서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거룩한 사명이라고 하는 것을 믿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들을 잘 길러야 하는 그런 사명을 받았는데, 그러한 사명이 우리들에게서 나타날 때 종종 잘못된 방식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죄로 인해서 오염이 된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그 사랑을 온전하게 나타나지 못하는, 그런 죄성을 가진 인생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사랑하는 면에 있어서, 하나님의 품성을 그대로 잘 드러내지 못하고, 타락한 모습으로 우리 자녀들을 대하게 되는 경우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타락한 방식으로 자녀들을 대하는 방식 두 가지가 있는데요. 첫 번째는 부모로서 마땅히 자녀들을 사랑하고 돌봐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부모가 귀찮게 여기거나 자녀를 기르는 것을 무거운 짐처럼 생각하거나, 심지어는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고 학대하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을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고 느끼게 만들어야 되는데, 부모님들이 그러한 사명을 망각해 버리고 자녀를 향해서 학대하거나 폭언하거나 분노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사명을 망각해 버리는 경향들이 많이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요즘 뉴스에서 너무나도 자주 들리는 뉴스가 무엇이죠? 그것은 어떤 가정의 어떤 엄마가 어떤 아빠가 자녀들을 학대했다고 하는 뉴스입니다. 조그마한 어린아이들을 학대하고, 그들을 돌보지 않고 방치해서 그래서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하는 그런 뉴스들이 너무나도 자주자주 우리 귀에 들리고 있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들의 이야기는 뉴스에 안 나오니까, 우리들은 잘하고 있는 것일까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6장 4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 부모님들은 자녀들을 양육함에 있어서, 주의 교훈과 훈계로 잘 양육해야 되는데, 그 방식이 어떻게 해야 되냐면, 아이들을 노엽게 만들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 부모님들이 종종 어떻게 하냐면, 우리 자녀들에게 화를 내기도 하고, 폭력을 쓰기도 하면서, 우리 자녀들을 노엽게 하는 일들을 많이 자행해 왔어요.

그런데 그런 일들을 자행해 오면서도, 하나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면서 그런 일들을 해왔는데요. 왜냐하면 성경을 읽어보니까 성경에 자녀를 향해서 채찍질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그런 말씀을 읽고, 우리 자녀들을 마음대로 때려도 되는구나라고 오해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녀들을 함부로 때리거나 자녀들을 향해서 함부로 화를 내도 괜찮은 것이 아니라, 아비들은 우리 부모님들은 우리 자녀들이 노여움을 타지 않도록, 우리 자녀들이 화를 내지 아니하도록, 사랑으로 애정으로 다루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우리 부모님들이 부모라고 하는 그런 권위를 가지고 우리 자녀들에게 학대하기도 하고 폭력을 쓰기도 하고, 분노하면서 우리 자녀들을 노엽게 해왔다고 한다면, 오늘 우리가 오늘 이 시간을 회개하고 반성하면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심지어는 우리가 신앙 교육을 한다고 하는 그런 명목으로 우리 자녀들을 노엽게 할 때가 많습니다. 목적이 정당하면 그다음부터는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이 정당할 것이라고 하는 잘못된 착각 가운데, 신앙 교육을 한다고 하는 핑계로 우리 자녀들을 때리고 화를 내고, 우리들의 마음을 자녀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 적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그런데 그것은 신앙 교육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당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들에게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어야 돼요. 우리 부모님을 보면서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느끼게 해 줘야 되는데, 우리 부모님들이 신앙 교육을 한다고 하는 그런 명목으로 아이들을 학대하고 때리고, 화를 냄으로 말미암아 우리 자녀들의 마음을 닫아버린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는 모세의 경우를 잘 기억해야 되는데요. 광야 40년 생활을 하는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망을 많이 했습니다. 먹을 것이 없으면 먹을 것이 없다고 원망했고 마실 물이 없으면 마실 물이 없다고 원망했습니다. 마치 우리 아이들 같은 것이죠. 그런데 그 부모와 같은 역할을 하던 그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습니다. 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물을 공급해 주어라. 하나님의 방법은 무엇이냐면 그렇게 원망하고 불평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하나님은 그들보다 훨씬 더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기를 원했어요. 그런데 그 순간에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분노하면서 바위를 치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 하나님이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라고 하는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우리 자녀들은 부모님의 사랑을 너무나도 충분히 받아서, 부모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은 정말 사랑이 많으신 우리 부모님과 같은 분이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도록 우리 자녀들을 충분히 사랑해 주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우리 한국의 모든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은 아버지시다고 말하면, “아 그래요? 정말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신가요?” 하면서 감격하고 은혜받고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기보다는, 하나님의 아버지시라고 하면 “아이고 하나님, 무서운 하나님인가 보다.” 하나님에 대해서 두려워하게만 만드는 그런 잘못된 교육을 우리 부모님들이 해왔다고 한다면, 그것이 우리의 죄성으로 인한 잘못된 방식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가 회개하며 주님 앞에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사랑하라고 하신 이 거룩한 사명이 왜곡되어서 나타나는 두 번째 방식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번에는 정반대로 자녀들을 우상처럼 대하는 경우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한편으로는 자녀들을 향해서 학대하고 폭력을 쓰고 화를 내는 그런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고 한다면, 또 하나의 잘못된 방식은 무엇이냐면 자녀를 사랑하기는 하는데, 자녀가 마치 우상이 되어 버리는 방식으로 자녀를 사랑한다고 하면, 그것 역시 잘못된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사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다 우상이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늘 강조하는 말인데요.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은 그것이 도가 지나치면 우상으로 바뀌어 버릴 가능성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이죠. 예를 들자면 먹는 것 먹는 것도 좋은 것이지만 지나치면 우상이 되는 것이고요. 운동 취미 대학교에 입학하는 것 취업 사랑 꿈 재물 성공 아름다움 인기 자녀 정치 자동차 주택 심지어 신앙생활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보기에 너무나도 좋은 것이 그것이 잘못되면 우상으로 바뀌어 버릴 가능성들이 언제나 있는 것들입니다.

재물을 예로 들면 이렇게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재물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좋은 것입니까? 아주 나쁘기 때문에 버려야 하는 것입니까? 성경은 이 재물이 아주 나쁘기 때문에 우리가 반드시 버려야만 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지 않고, 성경은 우리들에게 금욕주의적인 신앙생활을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의 모든 세속적인 종교와 다른 것인데요. 이 세속적인 종교에서는 말하기를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 버려야 하고, 다 내버리고 오로지 가난하게 돼야 된다. 오로지 모든 걸 다 포기해야 된다라고 이 세상의 종교는 가르치고 있지만, 성경은 정반대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창조하신 그 세상을 보시면서 하나님께서는 좋다고 선언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무엇이든지 감사함으로 받는다고 한다면 그것이 우리들에게 유익한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재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그리고 그것을 누릴 수만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우리들에게 큰 축복이 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좋은 재물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들에게 우상이 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요. 그런 우상이 되는 경우를 성경에서는 경고하고 있는데, 마치 우리 재물이 우리를 먹여 살리는 것처럼, 이 재물이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처럼 하나님보다도 더 소중한 것처럼 착각하기 시작하는 경우, 그래서 그 재물이 우리들의 우상이 되어 버린다고 한다면, 그러면 그 재물이 우리에게 악한 것이 될 수가 있습니다.

정치도 마찬가지죠. 정치나 정치인이라고 하는 것, 이데올로기라고 하는 것도 우리들에게 유익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성경은 권세에게 복종하라고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 그러한 사랑이 도가 지나쳐서 어느 순간에 정치나 이데올로기나 정치인이 나의 우상이 되어 버린다고 한다면, 그리고 마치 우리의 소망이 그런 정치나 정치인에 달려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착각해 버린다고 한다면, 그런 정치나 정치인이 혹은 이데올로기가 우리의 우상이 되어 버릴 수가 있는 것이죠.

자녀들도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죄가 없습니다. 아니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자녀들을 충분히 사랑해야 합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그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도가 지나쳐서, 우리 자녀가 나의 우상으로 바뀌어 버리는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고 한다면 더 이상 그 자녀가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 아니라, 그 자녀가 우상이 되어 버린다고 한다면 낭패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경고하냐면 하나님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7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않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우리 한국교회 성도님들이 종종 오해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자녀를 어느 정도 사랑해야 되는가? 하나님보다는 좀 덜 사랑해야 되겠다고 하는 마음들이 우리 성도님들에게는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녀들을 사랑할 때, 너무 많이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싫어하실까 봐, 정말 내가 우리 자녀들을 정말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미워하시고, 그리고 우리 자녀들에게 벌을 주실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들을 종종 가지신 분들을 만날 때가 있는데요.

사실은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것은 성경적인 개념이라기보다는 우리 한국의 전통적인 미신적인 생각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미신적인 생각이 많이 있었는데요. 만일 우리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귀신들이 그것을 빼어서 갈까 봐, 굉장히 두려워하는 것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있습니다. 그렇죠? 그런 게 있어요. 그래 가지고 좋아도 좋은 것을 다 표현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좋다고 얘기했다가, 귀신이 뺏어갈까 봐, 정말 좋은 일이 있어도 우리 자녀가 사랑스러워도, 그 자녀에게 사랑을 다 표현하려고 하는 것을 억제하려고 하는 것이 우리 한국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에 있어요.

그래서 어떤 식으로 나타나냐면 천명 귀복이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요. 이름을 지을 때 아주 천한 이름, 개똥이 돼지 뭐 이런 천한 이름을 지어 놓으면, 귀신이 그 아이를 안 잡아가니까, 일부러 이름을 못 된 이름을 짓는 거죠. 그런데 우리 예쁜이, 우리 똑똑이 하면서 정말 사랑스러운 일은 좋은 이름을 지어 놓으면, 귀신이 와서 그 아이를 잡아갈까 봐 두려워서, 일부러 나쁘게 대하고 일부러 사랑을 표현하지 않고, 그래서 사랑을 억제하려고 하는 그런 경향들이 우리 한국 전통적인 미신적인 의식 속에 많이 들어 있는데, 그런 의식을 가지고 있는 우리 한국 교회 성도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만일 우리가 하나님보다 우리 자녀들을 더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자녀들에게 못 되게 할지 모르니까 사랑을 좀 절제해야 되겠다. 사랑을 많이 표현하지 않아야 되겠다. 일부러 90%만 80%만 사랑해야 되겠다고 생각하시는 성도님들이 의외로 정말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요. 우리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 아니에요. 우리가 사랑하는 그 아들을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식이 나고 질투 나서 우리 아들을 빼앗아가 버리고 우리가 정말 사랑하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꼴 보기 싫어서 데려가시는 그런 하나님이 결코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이 말씀해 주시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을 많이 충분히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해 주시는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어쩌면 우리의 사랑은 부족해요. 지금도 더 많이 사랑하셔도 돼요. 더 충분히 사랑하셔도 돼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시는 이 말씀 너희가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면 안 된다고 하시는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자녀를 사랑하기는 사랑하는데, 우리 자녀들이 우상이 되어 버려서,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도 지키지 않고, 내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도 않은 방식으로 우리 자녀를 사랑하게 되는 것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렇게 예를 들 수가 있겠는데요. 우리 자녀를 사랑하는 것을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우리 아이가 아닌 다른 모든 아이들을 미워하기 시작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이 아닌 것이고 우리 자녀들이 우상이 되어 버린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우리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이 너무나도 우상이 되어 버려서, 그리고 다른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 다른 사람들에게 더 잘해주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그것을 끊어버린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들 딸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자녀를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정의와 공의를 쳐버리고 공평함을 무시해 버리는 행동을 한다면 그것은 아들 딸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결과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예를 들자면, 내가 어떤 책임을 맡고 있어서 모든 것을 공평하게 처리해야 되는 사람인데, 그 위치에 있을 때 우리 아이들을 너무나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에게 편법으로 더 좋게 대해주고, 공평하지 못하게 우리 아이들에게 더 밀어주고, 그리고 다른 아이들보다 더 잘 나가도록 그렇게 만들어준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그의 마음 가운데는 자기 자식이 우상이 되어 버린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아들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한다고 하는 이야기는 우리의 사랑을 절제해야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녀를 사랑한다고 하는 명목 하에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그리고 정의와 공의와 공평함을 무시해버리고, 심지어는 도둑질하고, 심지어는 다른 악한 일을 하면서, 그렇게 자녀를 사랑한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보다 우리 자녀를 더 사랑하는 우상에 빠지는 죄가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왔다고 한다면 아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대부분의 모습들이 양쪽의 극단의 모습으로 다 빠져봤을 겁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을 드러내지 못했을 때도 많고, 때로는 우리 자녀를 사랑한다는 것이 다른 자녀들은 미워해 버리고 기회를 빼앗아버리고, 악한 일을 해가면서 불합리하게 불공평하게 정의롭지 못하게 우리 자녀들을 사랑한 적이 많이 있다고 한다면, 오늘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서 주님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자녀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부모님을 보면서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을 느낄 수 있도록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만일 우리들에게 자녀들이 우상이 되어 버렸다고 한다면, 하나님 자녀 때문에 눈이 멀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했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며 주님 앞에 엎드릴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을 보면 14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거니와.” 이스라엘 민족들이 지금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이 나를 잊어버리신 것 같아요.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 같아요. 그 옛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지 않는 것 같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내용이 14절의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향해서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잊으셨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셨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지금 엄청난 고난 가운데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방 민족들이 쳐들어와서 압제를 당하고 있고 엄청난 고난의 길을 계속 걸어가는데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지도 않고, 하나님께서 문제를 해결해 주지도 않고 계속해서 고난의 길을 걸어가게 되는 그 순간에 이스라엘 민족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예전에는 우리의 하나님이었을는지는 몰라도, 하나님이 더 이상 우리를 들지 아니하시고, 하나님께서 더 이상 우리를 눈여겨보지 아니하시고, 하나님께서는 이제 우리에 대해서는 관심을 끊으신 것 같다고 하는 그런 하소연을 지금 이스라엘 민족들이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소연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대답이 15절의 말씀입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낳은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성도 여러분, 여인이 자기가 낳은 자식을 잊을 수 있습니까? 잊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까? 불가능한 거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인은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겠다고 말씀해 주고 계시는 거예요

지난주에 우리 예배 다 마친 다음에 김점순 권사님께서 모처럼 교회를 오셨습니다. 요즘에는 몸이 많이 불편하셔서, 그리고 정신도 좀 혼미하시고 하셔서 예배 시간에 오지 못하고 있는데 교회를 너무 오고 싶다고, 그래서 교회 한번 가봤으면 좋겠다고 해서 예배가 끝났는데 아드님이 모시고 교회를 왔습니다. 그래서 교회당에 앉아서 너무 좋아하고 너무 감사하다고 하고, 그리고 이제 돌아가시기 전에 제가 앉아서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 김점순 권사님을 위해서 제가 기도를 해 드렸습니다. 우리 권사님의 건강을 위해서도 기도했고, 여러 가지 기도의 제목들을 가지고 기도를 하는데, 제가 기도하면서 무슨 기도를 더 했냐면 우리 권사님이 늘 기도하는 우리 아들 딸을 위해서도 우리 권사님의 자녀들 그리고 자손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위해서 기도를 했는데, 그때 그 권사님이 그 기도를 들을 때 “아멘”하고 반응을 하죠. 아 정신이 혼미해져서 이제는 판단도 힘들고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으신 그 어르신께서, 그의 마음 가운데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가? 자녀에 대한 사랑만큼은 하나도 줄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어서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한다고 하니까, 그것이 너무나도 감사해서 아멘 하면서, 정말 마음으로 기도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참 사람이 모든 기력이 다 떨어지고 정신이 혼미해져도, 자기가 낳은 자식에 대한 사랑만큼은 결코 없어지지가 않는구나!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들이 혹시 있는다고 해도, 나는 너를 잊지 않겠다. 나는 너를 기억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이고, 우리를 십자가의 보혈의 피로 구원해 주셔서 우리가 믿음으로 살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가운데 이스라엘 민족과 똑같은 경험을 하게 될 겁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스라엘 민족과 같은 똑같은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일들이 꼬여가고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지 않고 정말 하나님께서 이렇게 응답해 주시고 이렇게 해결해 주신다고 한다면 정말 좋겠는데, 그리고 기도에 응답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내 문제는 하나님께서 외면하시는 것 같아요.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잊고 계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우리를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기억하고 계시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고 하는 그 사실을 마음속에 기억하면서 주님을 믿고 신뢰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너를 잊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다 잊어도 심지어 너를 낳은 부모님이 너를 잊는다고 할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고 말씀해 주시는 그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인생의 길 가운데 사망의 길 골짜기로 걸어가는 순간에도 믿음으로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담대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둘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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