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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또 다른 용사들 (삼하 23:18-39)

2021년 5월 12일 수요예배 설교

지난 시간에 우리는 다윗의 세 용사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세 명의 용사들이 다윗을 위해서라고 한다면,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목숨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목숨을 내어놓고 충성하는 그 모습이 참 너무나도 감동적인 모습이었음을 우리가 살펴볼 수가 있었습니다. 다윗의 용사들 뿐만이 아니라, 오늘 본문에는 그 외에 다른 다윗의 또 다른 용사들의 이름이 수없이 많이 열거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요.

그 가운데서도 오늘 두 사람의 이름이 특별하게 먼저 언급되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18절 말씀에 보면 아비새라고 하는 사람에 대해서 먼저 특별하게 언급해 주고 있는데요. 이 아비새라고 하는 사람은 300명을 한꺼번에 죽일 정도의 용사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난 시간에 살펴본 세 용사의 두목 역할도 했었다고 할 수가 있겠고요. 하지만 그 능력으로 따지자고 한다면 그 세 용사에게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해 주고 있습니다.

세 용사들의 전과는 너무나도 대단한 것이기 때문에, 정말 뛰어난 용맹을 보여주었고, 전과를 보여주어서,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 그 본문에 아주 특별하게 기록이 되어 있었습니다. 요셉밧세벳이라고도 하고 아디노라고 하던 사람은 800명이라고 하는 사람을 죽이기도 했고, 엘르아살이라고 하는 사람은 이 모든 이스라엘 민족들이 군사들이 다 물러갔을 때, 혼자 나가서 블레셋과 싸워서 전쟁을 해서 이길 정도의 어마어마한 능력을 가졌고, 삼마라고 하는 사람도, 삼마라고 하는 사람도 모든 이스라엘 민족들이 다 도망갔으나, 혼자 나가서 싸울 수 있는, 그런 어마어마한 세 용사들이 있었는데, 그 용사들에 비해서는 조금 약간 공적이나 그 전과가 조금 낮은 사람들의 이름이 오늘 기록되어 있는데요.

물론 이 용사들도 세 용사들과 비교해 본다면, 조금 급이 떨어질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 용사들도 아주 대단한 용맹을 보여준 사람들이고, 다윗을 위해서 아주 충성을 다한 그런 용사들이었다고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두 사람의 이름을 한 사람의 이름이 더 나오고 있는데요. 브나야라고 하는 사람의 이름이 2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모압 아리엘의 아들 둘을 죽였을 뿐만 아니라, 장대하게 키가 큰 애굽 사람을 죽였다고 21절에 기록하고 있는데, 아마도 골리앗처럼 그렇게 어마어마한 큰 장수를 쓰러뜨린, 그 엄청난 일을 이 브나야가 했을 것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역시 23절의 말씀에 보면 이 브나야도 세 용사에는 미치지 못했다고 평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두 용사의 이름을 먼저 기록한 다음에, 그 이후에 24절서부터는 30 용사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24절 말씀에 보면 요압의 아우 아사엘은 30명 중에 하나요 하면서, 30 용사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데, 그런데 24절부터 39절까지 숫자를 하나씩 하나씩 세보니까 총 30명이 아니라 31명입니다.

그런데 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30 용사라” 이렇게 표현하고 있어서, 도대체 31명인데 왜 30명이라고 이야기를 하나 궁금증을 자아내는 그런 본문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39절에 보면 도합 37명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렇게 세 보고 저렇게 세 보아도 37명이 나오지는 않아서 도대체 37명이 누구누구를 포함하는 것이 37명인지 구체적으로 확인하기가 어렵다고 하는 문제가 오늘 본문에 조금 있습니다.

아마도 설명을 하자고 한다면, 세 용사라고 하는 그 표현은 굳어진 표현이 아닐까 싶습니다. 용사가 30명이든 31명이든 32명이든, 30명의 용사 30 용사라고 하는 말이 하나의 그 숙어처럼 굳어진 표현처럼 되어 있어서, 다윗의 아주 뛰어난 아주 30명의 용사들이라고 하는 그 표현이 다윗의 아주 충신들이고 뛰어난 용사들을 가리키는 그런 명사처럼 사용되었기 때문에, 31명을 30명이라고 표현했을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표현할 때 뭐라고 표현하죠. 팔도강산이라고 하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런 말을 들어보셨나요? 예 들어봤을 겁니다. 우리나라를 팔도강산이라고 표현하는데, 팔도강산이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8개의 도가 있기 때문에 팔도강산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도가 8개입니까? 더 많습니까? 남쪽만 해도 벌써 9개의 도가 되는 것이고, 특별시와 광역시 등등 이런 것들을 다 포함하게 된다고 하면, 이제는 더 이상 팔도강산이라고 하는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전 사람들은 그 표현이 아주 익숙해져 버려서, 우리나라를 표현할 때, 도가 몇 개인가는 상관없이, 우리나라는 팔도강산 아름다운 팔도강산이라고 하는 말을 표현하는 것처럼, 하나의 익숙해져 버리고 굳어져버린 표현을 우리가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30 용사 30 용사라고 하는 것은 다윗과 함께 했던 아주 뛰어나고 아주 용맹스러운 용사들을 맨 처음 구성한 그 용사들을 의미하는 단어일 수 있겠는데, 그 30 용사 속에 또 다른 사도들이 포함되어 있는, 다른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는 그런 경우가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열두 제자 열두 제자라고 하는 말을 쓰는데, 가룟 유다가 빠져나가도 열두 제자 12이라고 하는 말이 하나의 숙어처럼 사용되는 것처럼, 이 30 용사라고 하는 것은 아마도 다윗이 데리고 있었던 아주 용맹스러운 그런 신하들을 가리키는 용어였을 것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37명이라고 39절 말씀에 기록해 놓고 있는데, 그 37명이 누구까지 포함해서 37명인가는 정확하지가 않습니다. 아마도 31명의 용사들과 그리고 아비새와 브나야와 다윗과 그리고 아마 요압까지 포함하면 그렇게 되지 않을까? 아니면 다른 장수들을 더 포함하면 37명일까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다윗에게 어떤 용사들이 있었는가? 다윗에게는 한 사람의 용맹스러운 그 용사들 용사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늘 사무엘라 23장의 말씀을 쭉 살펴보면, 다윗의 에게는 세 용사가 있었고, 또 두 용사가 있었고, 30명 30 용사가 있었고, 세어보면 37명의 용사가 되는, 그런 어마어마한 다윗을 돕는 그 군사들이 다윗과 함께 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본문의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은총이 어떻게 다윗에게 임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옛날 다윗을 선택하시고, 그리고 기름을 부어주시고, 그리고 고난과 역경의 시간을 많이 흐른 다음에, 그래서 결국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으로 세워주시기까지 인도해 주셨는데, 그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 어떤 방식으로 다윗에게 임했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먼저 묵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임했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니까, 다윗의 용사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던 것이 다윗이 혼자 싸운 것이 아니라, 다윗의 용사들이 있어서, 때로는 세 용사가, 때로는 30명의 용사가, 도합 37명의 용사가, 수많은 용사들이 다윗을 돕고, 다윗과 함께 동고동락을 하면서, 다윗을 위해서 충성하는 이런 사람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을 통해서 다윗에게 흘러갔다고 하는 사실을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어떻게 우리에게 오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기적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초자연적인 것을 통해서만 우리들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온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종종 생각하기를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의 기적 하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냐면, 초자연적인 기적만을 생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옛날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 있을 때,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만날을 내려주셨던 것처럼, 그렇게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먹을 것을 내려주셨던 그런 기적이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그런 은혜가 있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런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엘리아가 숨어 다닐 때 하나님께서는 까마귀를 통해서, 떡을 공급해 주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혜를 그에게 베풀어 주시기를 기대하고 고대하는 그런 마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얹으신즉, 병이 낫게 되는, 그런 엄청난 기적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하나님의 기적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소망하는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그런 기적들이 우리 역사상 있어 왔고, 그리고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원하신다고 한다면, 그런 초자연적인 역사들이 우리 가운데 충분히 있을 수 있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항상 초자연적인 방법으로만 우리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방법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임하신다고 하는 그 점을 우리가 분명하게 묵상해 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땀을 흘리고 수고하고 애쓴 만큼 먹을 수 있는 것은 내가 지금 열심히 농사를 지어서, 농사를 지은 그 대가를 먹는 것은, 내가 직장을 다니면서 그래서 돈을 벌고, 직장을 다니고 또 장사를 해서 수고한 만큼 우리가 소득을 얻는 것을 생각할 때에는,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그저 내가 수고한 것이고, 내가 땀을 흘려서 얻은 것이고, 나의 고생과 내 수고로 이 모든 것을 얻은 것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해야만 합니다. 시편 127편의 말씀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아무리 사람이 깨어 경성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지키시지 않는다고 한다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깨어 있음이 허사가 되는 것이고, 아무리 내가 수고하면서 집을 쌓아 올린다고 하더라도, 아무리 노력을 많이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지 않는다고 한다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시편 128편의 말씀에 기록하기를,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우리의 생각에는 수고하지 않아도 먹고,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축복을 베풀어주실 것만을 기대하고 있을 때가 많이 있는데, 시편 128편에서 복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소개하기를 뭐라고 소개하냐면, 수고한 만큼 먹는 것이 뭐라고요? “하나님의 복 받은 자다.”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는데요.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살았다고 하는 그 이야기는 다윗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많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양치기 목동에서 왕으로 세우셨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다윗에게 있었다고 하는 이야기는 다윗은 손 놓고 가만히 있는데, 하나님께서 천둥과 번개를 내리셔서 블레의 민족을 쫓아내셨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윗은 어떻게 삶을 살았는가? 치열한 삶을 살았어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치열한 삶을 살았는데, 그 치열한 삶을 사는 과정 가운데 누가 있었어요? 다윗의 용사들이 있었던 거예요. 함께 싸우고, 함께 피를 흘리고, 고생하는 그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있었는데,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은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었다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윗이 목말랐을 때 베들레헴 우물물을 떠다 바쳤던 그런 세 용사들이 있었고, 또 오늘 본문에서 쭉 열거하고 있는 것처럼, 수많은 용사들이 다윗과 함께 있으면서 싸워주었기에 다윗이 지금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었는데,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안 도우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누구를 통해서 나타났는가? 다윗의 용사들의 돕는 손길을 통해서 나타났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3명의 용사들이 있었고, 30명의 용사들이 있었고, 37인의 용사들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도와주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으로 나타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죠. 종종 잘못된 잘못된 사람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해야 하기 때문에, 어떤 병에서부터 치료함을 받는다고 한다면, 정말 하나님만 믿기 원한다고 한다면, 약을 갖다 내버려야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신다고 한다면, 병원에 가는 걸 중단해야 된다고 이야기하는 그런 가짜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는데 왜 우리가 밥을 먹습니까? 밥을 안 먹어도 살아야죠. 그러면 성경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은혜가 있으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중단해도 된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실 때는 돕는 손길들과 또 여러 가지 방법들을 통해서 손길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면 하나님만을 의지한다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의 것을 버려야만 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그런 구절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오해하기가 쉬운데요. 예를 들자면 홍해 바다 앞에 서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모세는 무슨 이야기를 했냐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봐라.”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해라.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거니까, 너희는 가만히 있어라라고 하는 그 메시지를 읽으면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어떤 생각이 드냐면,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니까, 내가 수고할 필요 없지. 내가 애쓸 필요 없지. 내가 노력할 필요 없지. 내가 왜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고,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을까? 그냥 손 놔야 되는 거 아닌가라고 하는 그런 결론을 내리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을 향해서 말씀하시기를, 아직도 너와 함께한 용사들의 숫자가 너무나도 많으니, 내가 미디안을 너의 손에 넘겨주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면서, 용사들이 너무 많으면 하나님이 구원한 게 아니라, 우리의 손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 착각할지 모르니까, 용사들의 수를 줄이고 줄이고, 또 줄여서 300명의 용사만 남겨 놓으라고 하신 그 말씀을 보면서, 성경 속에 있는 그런 예들 말씀들을 생각하면서, 그러니까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다 버려야만 하고, 돈을 버려야만 하고, 혹은 약을 버려야 되고, 우리가 하는 그 모든 것들을 다 버리고, 그냥 하나님만 온전히 바라고 기도만 하면 된다고 하는 그런 결론을 내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들을 우리가 오해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요. 모세가 말하기를 너희는 가만히 서서 하나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하는 이야기는 아무것도, 그러니까 모든 경우에 있어서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 말씀은 지금 그렇게 두려워 떨고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이 지금 홍해 바다 앞에서 그리고 뒤에서 쫓아오는 군인들을 보면서, 두려워 떨면서 벌벌벌벌 떨고 큰일 났다고 그렇게 두려워하고 있을 때, 모세가 했던 말이 무엇이냐면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 “두려워하지 말라.” “겁 먹지 말라.” 겁쟁이처럼 그렇게 있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해라라고 하는 말씀이지,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의지해야 되기 때문에, 일하는 것도 하지 말고, 그리고 어떤 손 쓰는 것도 하지 말고,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저 하나님이 알아서 저 사과나무에서 사가 떨어질 때까지 입만 벌리고 있어라. 그렇게 의미하는 말씀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사울 왕과 다윗의 차이를 찾아본다고 한다면, 사울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지 못했고,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의지했습니다. 두 사람이 행한 모든 일들은 다 똑같습니다. 똑같이 군인들을 데리고 나갔고, 똑같이 싸웠고, 똑같이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그러나 사울 왕은 그 전쟁에서 승리한 다음에 그 전쟁의 승리가 내가 이룬 승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전쟁에서 나온 전리품들을 자신이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의 경우에는 정반대였습니다. 다윗은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그래서 그 전쟁 가운데서 전리품을 얻게 되었지만, 그 전리품을 내가 싸워서 이겨서 얻은 전리품이니까, 우리가 독점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이것은 우리가 싸워 이긴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신 전쟁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전리품이니, 전쟁에 나가지 아니한 사람들과도 함께 나누어야 할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왜냐하면 그 전쟁에서 우리가 싸운 것처럼 보였지만, 그러나 실제로 그 전쟁 가운데서 이기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었기 때문에,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그런데 사울은 그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 내가 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그 전리품을 내 마음대로 처분해야 되고, 내 뜻대로 처분해야 되겠다고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던 반면에, 다윗은 전쟁에서 승리해 놓고도, 이것은 우리가 승리한 것이 아니기에, 전리품을 우리가 독차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쭉 읽으면서, 다윗의 용사들의 이름들이 기록이 되고 있는데, 그 용사들의 이름을 보면서, 다윗은 참 운이 좋은 사람이구나. 다윗에게는 정말 수많은 용사들이 많이 있었구나. 인재들이 많이 있었구나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사랑해 주셔서, 정말 다윗에게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붙여주셨구나. 그것을 보고 감사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걸 봐야 되는 거예요.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주목해 봐야 될 것들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참 많이 있는데요. 우리에게 물질이 있거나, 건강이 있거나 혹은 행복한 가정이 있거나 자녀들이 있다고 한다면,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초자연적으로만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통해서 상황과 그 여건과 친구와 동료와 신앙의 공동체와 우리 자녀들과 우리 가정을 통해서 여러 가지 방법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베푸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 모두도 주님 앞에 감사하며 나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이 용사들의 이름을 쭉 열거하는 가운데 여러분들이 용사의 이름들 가운데 아주 친숙하게, 잘 알려진 이름이 있습니까? 전부 생소한 이름들만 나왔습니다. 대부분의 이름들이 다 생소한 장군들의 이름이죠. 생소한 군인들의 이름입니다. 사무엘서에서 별로 등장하지 않았던 장수들의 이름이 여기에 다 기록돼 있는데요. 그런데 한 다른 사람들은 알 수도 있겠지만, 확실히 아는 한 사람의 용사가 이 리스트에 있습니다. 그게 누굽니까 맨 마지막에 기록되어 있는 우리야입니다. 39절 말씀에 헷사람 우리야라. 이상 총수가 37명이었다.

다윗의 용사들의 이름을 쫙 열거하는데, 사무엘서를 누가 썼는지 모르겠지만, 이 이름들을 쭉 열거하는 가운데 다윗의 용사들의 이름 가운데 맨 마지막에 누구를 적어놨냐면, 우리야를 적어놨어요. 우리야를! 우리야가 누구죠?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이름, 다윗의 생애 가운데 다시 한번 들려주지 않았으면 생각하는 이름입니다. 왜냐하면 그 이름은 다윗의 수치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고 있기 때문에, 정말 충성스러운 용사였고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당시에는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는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아야 된다고 하는 그런 모종의 그런 게 있습니다. 그래서 휴가를 받았는데도 집에 못 가는 거예요.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위해서, 다윗에게 충성하기 위해서 집에 가지도 않고, 그 길거리에서 잠을 자면서 용사들과 잠을 자면서 충성했던 한 용사가 누구였느냐? 우리야라고 하는 용사가 있었던 거예요. 정말 충성스러운 용사였는데,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다윗은 그 우리 아를 배신하고 우리 야의 아내를 취하는 그런 파렴치한 죄를 범했을 뿐만 아니라, 그리고 자신의 충신을 전쟁터 최전방으로 보내어 교살시켜버리는 그런 파렴치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만일 그의 우리 아이 이름이 중간에 기록됐으면 그나마 얼마나 다행스럽겠어요. 이름을 쭉 나열하면서 중간에 들어가 있으면, 우리 학생들이 시험 보면서 답안지 제출하라고 하면 답안지 제출할 때 나가면서, 답안지를 어디다 넣습니까? 차례차례 위에다 놓고 가면 되는데, 꼭 어디다 넣어요? 중간에! 중간에 집어넣어요. 학생들이. 왜? 시험 못 본 것 같거든요. 자신이 없거든요. 그러니까 내 시험 답안지 제일 먼저 보이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중간에 집어넣고, 다윗의 마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다윗의 용사들의 이름을 열거할 때, 우리야의 이름은 좀 뺐으면 좋겠고, 아니면 그 중간에 어딘가 살짝 숨겨만 놨으면 좋겠다고 생각이 되는데, 사무엘서는 아주 적나라하게 다윗이 파렴치범이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하게 하고, 그리고 이 사무엘하 이제 거의 마무리 짓는 이 시점에, 우리야의 이름을 기록함으로써, 이 다윗의 모습을 다시 한번 적나라하게 까발려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우리들에게 영웅이 될 수가 없어요.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다 모든 장점들이 있고, 이 사람에게는 이런 장점이 있고 저런 장점들이 있고 많은 장점들이 있는데, 우리가 들추어 보지 않아서 그렇지 썩어 문들어져 있는 모습들을 가지고 있는 그런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우리야의 이름을 적어 놓았으니까, 들켰으니까, 이 모양인데, 우리도 우리가 남들이 보이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가 어떻게 죄악을 저지르는가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했는가를, 거룩함으로 우리 자신을 숨기고, 괜찮은 것처럼 번지르한 말로 행동으로 우리를 숨겨 놓았기 때문에, 우리가 그냥 살아가는 것이지, 근데 우리가 만일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고 한다면, 벌거벗은 것처럼, 창피해서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100점짜리 답안지가 없기에, 빵점짜리 답안지만 가지고 있기에,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며, 우리가 지은 그 모든 죄를 다 말갛게 씻기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주셨기 때문에, 저와 여러분들이 살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늘 감사하면서 살아야 할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겸손하게 엎드려야 할 것이고, 주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다시 한번 우리들의 삶을 되돌아보며 살아가고, 하나님의 은총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살 수 없다고 하는 그런 믿음의 고백들이 우리의 삶 가운데서 날마다 날마다 나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원하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은혜가 크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은혜 아니면 살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날마다 기억하면서, 주님을 찬양하는 가운데 주님께 감사하는 가운데 다시 한번 일어서고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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