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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녀에게 하듯 (살전 2:11-12)

2021년 5월 16일 스승의 주일 설교

어떤 사람이 만일 맨손으로 은행 강도를 제압했다고 한다면, 그리고 인질로 잡혀 있는 사람을 구해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일약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될 것입니다. 신문이나 방송사에서 인터뷰 요청이 들어오게 될 것이고, 아마 경찰서에서는 장한 시민상 혹은 자랑스러운 시민상을 주면서, 그 행동에 대해서 축하하고 감사하는 그런 일들을 아마 하게 될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렇게 맨손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강도를 제압하고, 그리고 인질들을 구해내는 일은 정말 위대한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강도를 제압하는 일보다도 더 위대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맡은 아이들을 믿음으로 잘 양육해서, 그 아이들이 강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만들고,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그렇게 양육하는 일이야말로 훨씬 더 위대한 일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강도를 제압한 것에 대해서는 정말 신기하게 생각하고 관심을 가지지만, 정말 매일매일 수고하면서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교사들의 헌신과 그 수고에는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우리 인생들의 연약한 면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사실 무엇이 더 중요하냐면, 매일매일 반복되는 사랑, 매일매일 반복되는 은혜가 훨씬 더 큰 것이죠.

부모님의 사랑이 왜 큽니까? 평생 우리 자녀들을 사랑하며 돌보는데, 자기 자신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우리 자녀들을 정말 눈물로 기도하면서 양육하는, 그 부모의 마음들이 정말 귀하고 복된 것이고, 선생님들의 그 사랑과 가르침이 너무나도 소중한 것인데,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는 반복되고 늘 있고 늘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는 감사를 모르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이기 때문에, 정말 감사하다고 하는 것을 늘 잊으면서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어느 날 한 번 갑자기 반짝하고 강도를 제압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늘 있는 것이 소중하고 늘 있는 것이 감사한 것이죠. 공기가 늘 우리 곁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감사한 줄 모르지만, 만일 이 공기가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숨을 쉴 수가 없을 겁니다. 늘 있는 것, 항상 있는 것, 이것은 기적이 아니라고 생각이 드는데, 사실은 그 모든 것들이 다 기적인 것이 매일 아침 동쪽에서부터 해가 떠서 서쪽으로 해가 지는 것, 봄 여름 가을이 반복되는 것, 그 모든 일상이라고 하는 것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요 축복인데, 우리는 반복되는 것 일상화되는 것은 기적이 아닌 거라고 착각해 버리는 경향들이 많이 있습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민족들이 광야 생활을 하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 모릅니다. 매일 아침에는 만나가 쏟아져 내려서, 그 만나를 먹는 기적을 매일매일 체험한 것이죠. 이스라엘 민족은 매일매일 그 앞에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하는 것을 눈으로 목격하면서 살아갈 수가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이것이 한 번 있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반복되게 되는 그 순간에 감사를 모르는 겁니다. 그리고 늘 있는 것에 대해서는 감사하지 못하고, 없는 것에만 눈길을 주면서 왜 없느냐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인데, 그날 아침에 내렸던 만나의 기적을 먹어놓고, 그날 밤 함께 했던 불기둥의 기적을 잊어버리고, 물이 없다고 불평하는 그런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 자녀들을 사랑으로 가르치는 교사들의 수고라고 하는 것은 강도를 제압한 것보다도 훨씬 더 위대한 일이고, 훨씬 더 의미 있는 일인데,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고, 감사하지도 않고, 그리고 아무런 결과가 없는 것 같아서, 우리 교사들이 수고하다가도 때로는 보람을 느끼지 못하고, 마지못해 교사의 일을 하게 되거나 때로는 기쁨을 발견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는데, 사실은 우리가 행하고 있는 그 모든 일들이 너무나도 소중한 일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사뿐만이 아니라 우리 부모들이 우리 자녀들을 사랑으로 양육하는 것,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그 모든 일들이 의미 없는 일들이 아니라, 사실은 어마어마한 일이고 이러한 조그마한 노력과 수고 때문에, 하나님의 그 사랑을 실천하는 그 모습을 통해서, 우리 자녀들이 바르게 자랄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행하는 그 모든 일들을 믿음으로 잘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든 알아주지 않든, 한 생명을 살리는 일은 너무나도 소중한 일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이죠.

미국의 저명한 철학자이자 자연과학자인 로렌 코리 에이슬리라고 하는 사람이 쓴 책에 별을 던지는 사람이라고 하는 조그마한 글이 있습니다. 아마 유명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모두가 다 들어보았을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어느 플로리다 해변가에 폭풍이 밤새도록 있었는데, 그다음 날 아침에 그 해변가를 가보니까, 그 폭풍 때문에 몰려온 불가사리들이 해변가에 많이 널려져 있었습니다. 그 불가사리들은 태양 뜨거운 태양 밑에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불가사리들 스타피시(starfish)라고 하죠. 그것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는데, 그 해변가에 어떤 한 꼬마가 나타나서 그 불가사리 한 마리씩 잡아서 바다로 되돌려 보내주는 겁니다.

아침부터 열심히 한 마리씩 한 마리씩 집어넣는 그 꼬마 아이를 보면서 어떤 사람이 다가가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야. 네가 이렇게 불가사리를 집어넣는다고 해서 이 수많은 불가사리를 어떻게 다 집어넣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네가 그렇게 해봤자, 몇 마리 못 넣을 거야.”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그 꼬마 아이가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네, 저는 이곳에 있는 모든 불가사리들을 다 바다로 집어넣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제가 집어넣은 그 불가사리는 죽을 뻔했다가 살아나게 된 것일 겁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게 된다고 한다면, 정말 절망스러운 모습을 볼 때가 많습니다. 악은 여전히 기세 등등하고 판을 치고 있는데, 선을 행하는 사람은 늘 고통을 당하고 있고, 거대한 기득권층의 암벽 앞에서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옛날의 그 부조리와 그 아픔들이 계속 반복되고 제도도 바꿨다고 말하고 법도 바꿨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부조리한 일들이 우리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바라보게 되면서, 이 골리앗과 같은 이 세상 우리가 어떻게 바꿀 수 있겠느냐고 절망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아무리 꿈쩍하지 않고 거대한 세력이 버티고 있는 것 같이 보여도, 만일 우리가 한 어린아이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려주고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칠 수만 있다고 한다면, 적어도 온 세상은 바꾸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한 영혼은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만들고, 그 아이의 삶에는 어마어마한 변화를 줄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지금 우리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우리 아이들의 상황은 어떤 상황일까요? 마치 해변가에 널브러져 있는 그런 불가사리와 같은 모습의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가만 놔두면 뜨거운 태양 밑에서 말라비틀어져 버리고, 죽어버릴 수밖에 없는 불가사리들처럼, 우리 아이들은 정말 이 세상에 해로운 영향력에 노출되어 있어서, 그 엄청난 잘못된 사상과 그런 해악들이 방치고 있는 이 세상에 그냥 쏟아져 놓아져 있어서, 그냥 내버려 둔다고 한다면 우리 아이들의 영혼은 죽어갈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에 우리 아이들이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친구들의 영향력, 인터넷의 영향력, 또 이 세상 가치관이 우리 아이들을 서서히 죽여가고 있는 이 상황 가운데서, 과연 믿음을 지키고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 너무나도 힘든 것이고, 정말 이 아이들을 정말 참되고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은 너무나도 큰 싸움이고, 우리가 이길 수 없는 싸움이고 시간의 양으로 본다고 한다면, 정말 게임이 안 될 정도로 너무나도 미약한 일을 우리가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 교사들이 하고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일주일에 한 시간도 안 되는 그 시간에 예수님을 가르치고 일주일에 1시간도 안 되는 그 시간에,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치고 있는데, 그 아이들은 교회를 떠나가면 24시간 일주일 내내 이 세상의 악한 영향력 속에서 친구들이 하는 말 가운데서, 인터넷에 그 음란하고 폭력적인 상황 가운데서 자극적인 것들을 영향을 받아가면서, 이 세상의 것들로 훈련을 받고 있는 이 어린아이들의 그 영혼에 아주 위험한 상황 가운데 처해 있습니다.

지금은 그래서 아주 위기입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어떻게 신앙을 제대로 잘 가르쳐야 될까? 위기인 거죠. 지금 세상은 굉장히 발달되어 있고, 첨단 기술이 발달되어 있고, 번쩍번쩍하는 일들이 이 세상에 널려 있는데, 교회는 아직도 옛날 방식으로 정말 고리타분한 방식으로, 그래서 정말 아이들이 재미없게 만드는 그런 방식으로 우리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게임이 안 되는 그런 전쟁을 하고 있다고 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안 그랬거든요. 예전에는 세상보다 교회가 앞서가 있어서, 세상에서 누리지 못하고 세상에서 볼 수 없는 것, 교회 가면 신기한 것들이 정말 많았어요. 여러분들은 안 그랬습니까? 제 기억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한 50년 전에, 그러니까 제가 한 3살 4살 이때 어느 교회를 다녔었냐면, 저 고산에 있는 고산읍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 고산읍교회를 다녔는데, 호롱불을 켜고 예배를 드리는 거예요. 호롱불을 켜고 드리는 그 예배당 안에서 그 당시에 무엇을 봤느냐? 환등기를 가지고 막 그림이 그림을 보여주는 거예요. 텔레비전도 없던 그 시절에 아무것도 재미있는 것이 없던 그 시절에, 교회에 가면 환등기가 있어서, 정말 교회에 가면 정말 너무나도 좋았고 신기한 것을 볼 수가 있었는데, 지금은 교회에 오면 구닥다리 옛날 모습으로 가르치고 있는 상황 가운데서, 과연 어떻게 우리 아이들을 믿음으로 잘 양육할 수 있겠는가? 정말 어마어마한 골리앗 앞에서 이길 수 없는 전쟁을 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상황에 우리가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말씀을 보면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도 사람들을 이길 수 있는 영혼을 살릴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원리가 오늘 성경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1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전하며, 전도 여행을 하러 다녔는데요. 그런데 그 전도 여행을 하며 다니는 가운데 어떻게 복음을 전했고 어떻게 신앙을 가르쳤는가? 그것을 설명하면서 오늘 데살로니가전서 2장 11절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아버지가 자녀에게 하듯 사랑으로 권면하기도 하고, 사랑으로 위로하기도 하고, 사랑으로 경계해서 믿음을 가르쳤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아무리 이 세상이 번쩍번쩍 돌아가고, 첨단 기술이 발달되고, 이 세상에 영향력이 크고, 그리고 그 시간이 아무리 많다고 할지라도, 그 최첨단 기법 이런 것들을 교회가 따라가기 어렵고, 우리 부모님들이 따라가기가 어렵지만, 그러나 한 사람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주는 것이 무엇이냐면, 사랑이에요. 사랑으로 품으면 그 모든 것들을 능히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기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주일학교 교사들이 우리 아이들을 사랑하고 믿음으로 가르친다고 한다면, 우리 부모님들이 사랑으로 우리 자녀들을 양육한다고 한다면, 아무리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휘황찬란하게 돌아가고 눈 돌아가는 것들이 많다고 할지라도, 그 사랑 앞에서는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아주 평범한 사람들을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방법은 아주 특출하고 대단한 사람들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정말 평범한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만들어주셨는데요.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서 모세와 같은 위대한 지도자를 사용하시기도 하셨지만, 사실 그 위대한 지도자 모세가 탄생하기까지는, 아주 평범하고 정말 너무나도 우리들과 똑같은 그런 사람들이 아주 지대한 역할을 감당했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십브라와 부아와 같은 그런 히브리 산파가 있었는데요. 애굽 왕 바로가 온 민족에게 이스라엘 민족에게 명령하기를 남자 아기가 태어나면, 다 나일강에 던져 죽이라고 하는 그런 지엄한 명령을 내렸을 때, 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는 바로의 명령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그 순간에 아이들을 죽이지 않고 살려 주었습니다. 그들이 그곳에서 남자아이들을 살려내는 일들을 했을 때,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은 다른 사명이 아니에요. 나가서 전쟁하라고 하는 사명이 아니고,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라고 하는 그런 사명이 아니고. 십브라와 부아에게 준 사명이 무엇이냐 하면 산모에게 가서 아이가 출산되는 것을 도와주는 그런 사명인데, 그 사명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일을 하게 될 때, 남자아이들을 죽이지 아니하고 살려내게 될 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놀라운 역사를 해낼 모세와 같은 그런 위대한 인물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일들을 하게 된 것이죠.

뿐만 아니라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과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라고 하는 사람은 모세가 태어났을 때, 모세를 사랑하고 돌보고 잘 보호해 주어서, 결국 이 아이가 위대한 인물로 자랄 수 있는 놀라운 역할을 감당해 낸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하는 사명이라고 하는 것은 가치가 없고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사실 어마어마한 사명이 우리들에게 주어져 있다고 하는 것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내게 주어진 그 사명을 잘 감당하는 것이 이 순간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그 일에 충성하는 것이 사실은 미래의 모세를 만들어내는 것이고, 위대한 지도자들을 만들어내는 것이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끄는 일에 우리가 동참하는 거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을 망각해 버린다고 한다면 모세와 같은 사람들이 살아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사명을 맡겨주셨는데요. 특별히 강도 만난 것과 같은 사람들을 살려내는 역할들이 주어져 있습니다. 교사에게만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온 성도 공동체들에게 공동체에게 생명을 살리는 역할들이 주어져 있는 것이죠.

특별히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보면 강도 만난 사람이 있는데, 그 강도 만난 사람 옆으로 사람들이 지나가는 겁니다. 그 사람이 지나가는 이유가 왜 지나갑니까?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고, 그리고 주관하시는 그 하나님께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강도 만난 사람의 옆길로 지나가게 만드신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옆을 지나가면서, 강도 만난 사람을 발견하고 도와주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일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 옆을 지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그 순간에 그 사람을 바라보고 도와주기 시작했는데요. 그러므로 말미암아 한 영혼을 살려낸 것이죠. 사마리아 사람은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여행 계획을 포기해야만 했을 겁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아무 할 일도 없고 펑펑 노는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도 계획이 있는 거예요.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고, 여행 계획이 있고, 모든 것들이 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계획이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그 계획에 그 사명에 아멘으로 반응한 것이죠.

우리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이 있는데, 그러한 사명을 내가 피곤하다고 하는 이유로, 내가 지금 준비가 안 되었다고 하는 이유로 포기하거나 도망가서는 안 될 줄로 믿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2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돼 있습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 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종종 이 말씀은 우리가 오해를 해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라고 하는 이 말씀을 오해해서, 사람들이 듣든 말든 무조건 전도를 해야 된다고 하는 식으로 그렇게 오해할 때가 많이 있는데, 사실 여기서 말하는 때는 듣는 사람의 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의 때를 말하는 거예요.

내가 지금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에요. 지금 내 코가 석자예요. 내가 지금 오늘 피곤해요. 그래서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 그런데 저 사람에게 도움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그걸 때가 아니라고 해서 도망갈 것이 아니라, 강도 만난 사람의 옆을 지나가고 있는데, 지금은 내가 바빠서 못 도와주겠다. 지금은 내가 때가 아니니까, 못 도와주겠다 할 것이 아니라, 내 여행 계획을 포기하면서까지, 하나님께서 갑작스럽게 맡겨주신 그런 사명에 우리가 반응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물을 사용했습니다. 재물을 사용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돈이 넘쳐나서? 쓸 데가 없어서? 돈이 너무 많이 흘러넘쳐서 쓸 곳을 찾고 있었는데, 그래서 쓴 것이 아니라, 이 사람에게도 그 돈을 써야 할 그런 계획과 목적이 있었겠지만, 그러나 영혼을 살려야 된다고 하는 그 목적 때문에 자신의 계획을 포기하고 이 돈을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사명이 있다고 한다면 피할 것이 아니라, 한 영혼을 살리고 그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일에 우리 모두가 함께 힘써야 될 줄로 믿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을 길러내는 일에 영적인 일들을 하는 일에 늘 지치고 늘 포기하기가 쉽습니다. 특별히 교사 선생님들이 우리 주일 학교에서 가르치다가, 때때로 나는 이제 더 이상 교사를 하지 못하겠다고 말할 때가 많이 있는데요. 그 이유가 무엇이냐면, 교사를 하면서 보람을 느낄 때가 많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이 아이들을 잘 가르치면, 그러면 이 아이가 변화가 되고, 그리고 정말 모든 것이 바뀌면서 정말 변화가 금세 금세 일어난다고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면 너무나도 재밌죠. 정말 내가 이 아이를 위해서 기도하고 이 아이를 위해서 내가 열심히 수고했는데, 이 아이가 변화가 되고, 이 아이가 훌륭한 사람이 되고, 이 아이가 정말 훌륭한 지도자가 되고 하는 그 모습을 우리가 눈으로 목격할 수만 있다고 한다면, 얼마나 보람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대부분은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 같아요. 아무리 가르쳐도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아이들은 삐뚤어져 가기만 하는 것 같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고 해도 전혀 반응이 없는 것 같은 모습을 보면서 모두가 다 지쳐 가는 겁니다.

식물을 화초를 기르는 건 그렇지 않잖아요? 화초를 기르면 얼마나 재밌는지 몰라요. 저는 잘 못 기르는데 제 아내가 기르는 것을 보면 너무나도 좋아해요. 왜냐하면 물을 줬는데, 그다음 날이면 싹대가 하나 나와요. 물을 줬는데 조금 지나니까 꽃이 피어요. 죽은 줄 알았는데, 뿌리가 쭉 나와요. 변화가 금방금방 나타나니까, 화초를 기르는 건 얼마나 재밌는지 몰라요.

그런데 아이들을 기르는 것은, 사람을 양육하는 것은 변화가 없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목회할 적에, 아주 제가 젊었을 때 목사 한 수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목회를 하고 있는데, 그 교회에서 열심히 설교하고 열심히 가르치고 했는데, 미국의 그 어느 한 조그마한 마을에 교회가 우리 교회 딱 하나만 있는 교회요. 한인들이 다른 데 갈 수 있는 게 아니고, 우리 교회만 나와야 되는 그런 하나밖에 없는 교회인데, 교회에 나와가지고 성도들이 서로 싸우는 겁니다. 같이 예배 드려놓고, 아는 척도 안 하는 거예요. 인사도 안 하고 악수도 안 하고, 밥을 먹는데 밥도 안 먹고 가버리고, 그러면서 예배는 같이 드리고 그 모습을 보면서, 예배를 드리는데 이게 한두 주가 아니고 몇 달이 가고 그래도 사람들이 바뀌지 않는 그 모습을 보면서, 하루는 제 마음 가운데 낙망이 오더라고요.

도대체 내가 설교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아무리 설교를 해도 바뀌지 않는 그 모습을 보면서, 너무나도 지쳐가지고, 제가 하루는 선배 목사님에게 전화를 드렸습니다. 목사님 아무리 설교해도 사람이 바뀌지가 않네요.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그랬더니 연세 많으신 선배 목사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원래 그런 거여.” 우리 아이들을 가르치고 부모가 우리 자녀들을 양육하는데, 아이들은 변화가 없고 정말 기쁨을 주는 것이 아니라, 계속 잘못된 길로 나가는 것처럼 보일 때 우리들은 절망하기가 쉽습니다.

그러한 우리들을 향해서 주시는 주님의 위로와 권면의 메시지가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될 것 같습니다. 씨를 뿌리는데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져서 열매 맺지 못하고 어떤 씨는 가시밭에 떨어져 열매 맺지 못하고 어떤 씨는 돌밭에 떨어져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데 확률로 보면 퍼센티지(%)로 보면 4분의 3이 실패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세요. 그런데 마태복음 13장 23절의 말씀에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우리 낙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9절의 말씀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애쓰는 것이 아무런 열매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아도, 그러나 콩나물에 물을 주면 어느새 그게 자라는 것처럼, 물이 다 빠져나오는 것 같아도, 쑥쑥 크게 되는 것처럼, 때가 이름에 거두게 될 거라고 하는 사실을 믿어야 될 줄로 압니다. 고린도전서 3장 6절에서부터 8절 말씀도 우리가 기억해야 될 말씀입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 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지금 내가 심었다고 해서, 내가 물 줬다고 해서, 내가 열매를 거두지 못할 때가 있겠지만, 그러나 다른 데서 열매를 맺을 수도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수고의 노력을 아끼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학교에서 봉사를 하든, 봉사를 하지 않다고 하든, 우리 모두는 다 교사입니다. 영적인 공동체로서 우리는 다 하나님의 가족이고, 또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됩니다. 아버지가 자녀에게 하듯 서로가 사랑을 베풀어서, 서로 영적으로 세워주고 기르게 만드는 그 역할들을 우리 모두가 다 같이 해야 되는 거예요.

목사는 성도들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여러분도 저를 기르게 해 주는 것이고, 또 서로가 서로를 향해서 선한 영향력들을 미쳐주어서 함께 같이 자랄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그게 교회의 역할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모두가 다 교사인 것이고, 모두가 다 아버지의 마음으로 사랑을 품고, 또 양육해서 함께 자라 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그게 바로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 주일학교 교사들만 교사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다 교사들인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모두가 다 아버지의 마음으로 모두에게 사랑을 베풀며 위로하고 격려하는 그런 역할들을 맡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착각하지 말아야 되는 것은 아버지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우리 한국 사람들은 아버지의 역할을 하면 혼내고, 지적하고 또 질책하는 것이 아버지의 역할인 것처럼 착각하는데요. 그게 아닙니다.

우리는 바리새인들처럼 다른 사람들을 지적하고 태도를 꾸짖고 혼내는 것이, 그것이 정답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혼내고 꾸짖고 질책한다고 한다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너나 잘하세요” 하게 될 것이고, 또 그렇게 꾸짖는 사람들의 위선적인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주님을 떠나게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꾸짖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품고,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듯이 품고, 우리 모두에게 다 예수님이 필요하다고 하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우리가 다 죄인이기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셔야만 했고, 그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가 함께 구원을 얻게 되었다고 하는 이 진리 안에서, 서로가 사랑을 베푸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 함께 성장해 나가는 아름다운 교회 아름다운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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