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닫기

마지막 남은 카드 (왕하 7:3-8)

2021년 6월 6일 주일예배 설교

한자 말에 보면 진퇴양난(進退兩難)이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앞으로 나아가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뒤로 물러서기도 어려운 것을 가리켜서 진퇴양난이라고 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가운데 진퇴의 양난의 경험들을 우리는 반드시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일들을 단 한 번도 만나지 않는 사람은 아마도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정말 모든 것이 꽉 막혀 버린 것 같은 그런 상황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 것인데요. 그런 스트레스를 견디다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도 종종 나타납니다.

우리나라의 문제가 지금 많은 높은 자살률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그들이 그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아무런 소망이 없다고 판단되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이렇게 해도 안 되고, 저렇게 해도 안 되고, 그 어떤 곳에도 해결책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그 순간에 더 이상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을 때, 소망이 발견될 수 없을 때, 그들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진퇴양난이라고 하는 것은 해당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꽉 막힌다고 할지라도, 사방이 다 막힌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고, 환난 날에 만날 큰 도움이 되시기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떠한 어려움을 만난다고 할지라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만나면 좌절해 버릴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정말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그 하나님 앞에 나아가 엎드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 옳은 줄로 믿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 땅에서 해방되어 가나안을 향해서 나아갈 때, 그때 진퇴양난의 어려움 가운데 처하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들의 앞에 홍해 바다가 놓여 있다고 하는 것을 발견한 때였습니다. 앞에 홍해 바다가 가로막고 있어서 더 이상 앞으로 갈 수도 없는데, 마침 바로 왕의 애굽 군대가 군사를 이끌고 추격해 오고 있다고 하는 소식을 듣게 된 겁니다. 앞으로 더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그 막다른 골목 앞에서, 뒤에는 지금 애굽의 군사들이 쳐들어오고 있는 그런 긴박한 상황이 되었을 때, 이스라엘 민족은 공포에 떨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죽었구나. 이제는 죽었구나.” 생각하는 그 순간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모세를 향해서 원망하는 일이었습니다.

출애굽기 14장 11절 12절의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의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라고 말을 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민족의 애굽 땅에서부터 해방되어 나올 때는, 그들이 엄청난 기쁨과 감격 가운데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이제는 애굽의 종살이에서부터 풀려나게 됐구나. 이제는 더 이상 지긋지긋한 그 삶을 살지 않아도 되는구나. 이제는 자유함을 얻었구나 하면서 너무나도 기뻐하고 너무나도 좋아했던 그 이스라엘 민족이 불과 얼마 되지 않아서, 앞에 홍해 바다가 놓여 있는 그 모습을 보고, 그리고 애굽 군대가 쫓아오는 그 모습을 보고, 그 기쁨이 한순간에 변해서 불평과 원망으로 바뀌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에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겠습니까? 지금 이 진퇴의 양난의 어려움 가운데서, 서로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하면 이 위기를 극복해 나갈 것인가,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함께 머리를 싸매어서 연구해도 부족한 이 판에, 이스라엘 민족이 선택한 일이 있는데, 그것은 놀랍게도 자신들의 지도자였던 모세를 원망하고 비난하는 일이었습니다. 모세를 향해서 원망하는 겁니다. 비난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욕을 해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를 그냥 가만히 내두라고 했었는데, 왜 우리를 데리고 나와서 죽게 만드느냐? 왜 이런 어려움 가운데 빠지게 만드느냐 하면서 분풀이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분풀이를 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나요? 해결되는 게 없죠. 아무런 해결책도 되지 않지만, 사람들은 죄성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이 순간에 아무런 해결책도 되지는 않지만, 무조건 화를 낼 대상을 찾는 것이고, 분풀이할 희생양을 찾아서, 그래서 그 사람을 향해서 욕을 해대고 비난해 버리는 것이 어쩌면 우리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죄성을 가지고 있는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런 일들이 어디에서 발생하느냐? 이것이 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에게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알고 보면 우리 가정에서 자꾸만 발생하는 일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발생하는 일이고, 이 사회에서 자주자주 목격하는 현상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죄성으로 가득한 우리 인생은 지금 이 순간에 정말 바람직한 반응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무조건 화를 내고 풀이하고 원망하는 것이죠.

우리가 가정을 이루며 살아가다가, 어려운 일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재정적으로 힘든 일을 만나게 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위기를 만나게 되기도 하고 힘든 일들을 만나게 될 때가 있는데, 그때 우리 가정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반응이 무엇이냐 하면, 서로를 향해서 원망하기 시작한 남편은 아내를 원망하고, 아내는 남편을 비난하면서, 왜 그렇게 했느냐고 욕을 해대기 시작하면서, 마음의 문이 닫혀버리고, 더 이상 함께할 수 없는 그런 안타까운 그런 결과를 빚어낼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남편과 아내로 짝 지어주신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힘들고 어려울 때 서로 사랑해주고 위로하고 격려해서, 그 힘든 순간에 같이 손 붙들고 일어서서, 함께 그 위기를 극복해 나가라고 가정으로 만들어 주셨는데, 오히려 그 순간에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함께 손 붙들고 일어서기보다는, 서로를 향해서 누구의 책임인가? 당신 책임이오. 그때 그 잘못이라고 하면서, 서로 욕하고 비난하는 그런 모습들이 죄성을 가진 우리 인생들에게서 너무나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고 하는 것이 안타까운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이 교회에서도 나타나는데요. 교회에서도 여러 가지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그 책임이 누구냐? 누가 잘못했느냐를 놓고서, 서로 싸우면서, 서로 아귀다툼을 하게 되는 경우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고, 이 사회에서도 그런 현상들이 너무나도 자주 발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될 기도의 제목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 저의 마음 가운데 있는 더러운 죄성을 제거하여 주셔서, 오히려 이런 순간에 서로 비난하고 원망하기보다는, 이 순간에 사랑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시옵소서. 어려운 일을 만날수록 함께 손을 잡게 하여 주시고 감싸게 해 주시고, 그래서 위기를 함께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홍해 바다와 애굽 군대 사이에서 이젠 죽었구나 생각될 때,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를 향해서 원망했지만, 그런데 완전히 길이 막혀버린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또 다른 길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홍해가 갈라지게 만들어 주셨고, 그래서 그 홍해 바다 사이로 이스라엘 민족이 걸어가서 결국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을 우리가 출애굽기에서 볼 수가 있는데요. 성경에 보면 이런 놀라운 이야기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기억해야 될 진리가 있다고 한다면, 이 세상 사람들은 앞뒤가 막히고 전후 저유가 다 막혀버리면 절망하겠지만, 그러나 우리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고 힘이 되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께 소망을 두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열왕기하의 말씀을 읽었는데요. 오래간만에 읽었는데요. 이 말씀을 보게 되면, 사마리아 성 밖에 살던 네 사람의 나병 환자도 이런 진퇴양난의 어려운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지금 아람 군대가 사마리아 성을 포위해서, 그리고 아무런 물자가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아버렸습니다. 완전히 포위되어버린 겁니다. 그러니까 그 사마리아 성 내에서 모든 물자가 바닥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먹을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자기 자식을 잡아먹기도 하는, 그런 끔찍한 일들이 이 사마리아 섬 가운데서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마리아 성 바깥에 누가 있었냐면 네 명의 나병 환자들이 있었습니다. 나병 환자들은 그 마을 안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성 밖에 있어야만 했던 사람들인데요. 이 사람들은 어떻게 살 수 있었는가? 성 안에서 가져다주는 음식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겁니다. 자신들이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에서 주는 음식을 받아먹으며,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나병 환자들인데, 그런데 성 안에 기근이 있고, 성 안에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으니까, 당연히 이 네 사람의 나병 환자도, 더 이상 먹을 것이 없는 그런 상황 가운데 이르게 됐습니다. 성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성 안에 들어간다고 한들 먹을 것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 안에 들어간다고 해도 죽을 것이고,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다고 해도 죽을 것이라고 하는 그런 진퇴양난의 위기 가운데 있을 때, 놀라운 것은 이 사람들이 아주 위대한 결정을 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어떤 결정을 했을까요? 첫 번째 위대한 결정이 무엇이냐 하면, 이들은 이스라엘 민족처럼, 모세를 향해서 원망했던 이스라엘 민족처럼, 누구에게 분풀이를 하는 것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들도 나병 환자들도, 지금 이런 굶주림의 상황 이제는 죽게 된 그 상황 가운데서, 누군가 희생양을 만들고, 그 사람을 향해서 원망하고 불평하려면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은 놀랍게도 누군가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원망할 수 없었기 때문에 원망을 안 한 게 아니죠. 이유를 찾아내려면 충분히 찾아낼 수 있습니다.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면서 서로 욕할 수 있어요. “이 돼지야, 왜 이렇게 많이 먹어가지고, 좀 양식을 좀 남겨놔야지, 네가 많이 먹어서 양식이 다 떨어져 버렸다”라고 어떤 한 동료를 향해서 손가락질하고 비난하면서 그 사람을 욕할 수가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사람들은 자기 동료들을 향해서 비난하고 욕하고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서로 이야기하면서 비난할 거리를 찾으려면 충분히 찾을 수 있었을 겁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던 그 양식 가운데 일부를 남겨두었어야 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우리가 여기 있을 것이 아니라 진작에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것이 좋았다고, 서로 싸우면서 왜 그때 그런 일을 하지 않았느냐고 서로 싸우면서 비난할 수도 있었지만, 놀라운 것은 이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향해서 비난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위대한 모습입니다.

더 나가서 이 사람들은 어떻게 했는가? 이들은 지금의 상황이 절망적이라고 하는 사실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지금 이 사람들이 마주한 상황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절망적인 상황이거든요. 성 안에 들어가도 죽고, 그 자리에 있어도 죽고, 무엇을 해도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진퇴의 양난의 상황 가운데서, 아무런 소망을 발견할 수 없을 그때에, 이제는 모든 게 끝났구나 하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면 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사람들은 그런 선택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아람 군대에 항복하자. 지금 그들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살 수 있는 길이 무엇이냐면, 아람 군대에 항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아람 군대에 항복하는 것도 살 가능성이 있느냐면, 그렇지 않아요. 99.999퍼센트는 죽어요. 성 안에 들어가면 100% 죽는 것이고, 그리고 이곳에 남아 있어도 100% 죽는 것이고, 그런데 저 아람 군대로 가면 99.999%는 죽게 돼 있어요. 그런데 아주 미세한 가능성, 혹시 저들이 우리를 살려준다고 한다면,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정말 적은 그 가능성을 보고, 아람 군대를 향해서 나아가기로 결단한 겁니다. 물론 이 나병 환자들의 결단이 신앙적인 결단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하고는 관계가 없는 결단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지혜가 여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마리아 성문 어귀에 살던 4명의 나병 환자들에게 우리가 배울 것이 있는데요. 첫 번째 그 지혜가 있다고 한다면, 이들은 자신들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판단하고, 정확하게 알았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의 상황이 무엇인가? 가만히 있어도 죽고, 사마리아 성 안으로 들어가도 죽고, 그 어떤 일을 해도 죽을 거라고 하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았습니다.

그리고 문제 해결을 추구했는데요. 그 문제 해결이 무엇인가? 지금 우리들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가능성이 무엇이냐 하면, 아람 군대에게 투항하는 것이 우리들에게는 조금 만의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것을 실행했다고 하는 것이 그들의 지혜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보면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누가복음 16장의 말씀을 통해서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해주시면서, 너희는 이 불의한 청지기들에게서 배우라고 교훈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의 말씀을 하실 때는 언제나 모범적인 비유만 하신 것이 아니라, 나쁜 사람들을 빗대어서 그래서 비유하시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요. 도둑의 빗대어서 하나님 나라가 언제 오는가? 우리 주님께서 언제, 인자가 언제 오는가에 대해서, 비유의 말씀을 해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도둑이 모르는 시간에 갑작스럽게 들이닥치는 것처럼, 인자가 오는 것도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급작스럽게 올 것이라고, 그렇게 비유를 해 주셨고요. 뿐만 아니라 이 불의한 청지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의한 청지기가 좋은 사람이냐면,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나쁜 사람입니다. 주인의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해버린 그런 사악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사악한 사람에게서도 배울 것이 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시는데, 그 사악한 사람은 자기가 해고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알았고, 해고되었지만 이 짧은 순간에라도 지금 무엇인가 대책을 세워놓으면, 해고 이후에 살 길이 있다고 하는 것을 알고, 그 대비책을 세웠다고 하는 것이 이 불의한 청지기에서 배울 교훈인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는 저 불의한 청지기를 좀 배워라. 저 불의한 청지기는 자기 살길을 위해서,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자기의 미래를 준비하는 그런 기회가 있었는데, 우리 믿는 사람들은 그 미래를 준비하는 지혜가 없지 않느냐고 말씀하시면서 미래를 준비하는 그 지혜에 대해서 배우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오늘 4명의 나병 환자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4명의 나병 환자들은 지금 자신들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정확하게 알았고, 그리고 그 정확하게 안 지식에 근거해서, 그래서 그들의 미래를 결정하는 결단을 했다고 하는 것이죠. 안타까운 것은 우리 성도들은 상황 인식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적인 종말을 맞이하든, 우주적인 종말을 맞이하든, 언젠가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고, 그리고 지금 그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고 한다면, 지금 아직 내게 기회가 있을 때, 아직 숨 쉬고 있을 때 지금 회개하고 지금 사랑하고, 지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는 그런 교훈을 받아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미래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여전히 죄를 짓는 그 방식을 그대로 행하면서 사는 경우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를 살펴보면 놀랍게도 이들이 아람 군대를 향해서 나아가게 되었을 때, 놀라운 기적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 위해서 아람 군대를 쫓아내 버리신 거죠. 아람 군대의 귀에 환청이 들리게 하셨는데, 병거 소리가 들리게 만들고, 수많은 군대 소리의 소리가 들리게 만들고, 말소리가 들리게 만들어서 이 아람 군대 진영의 두려움이 임했습니다. 저 사마리아 사람들이 외국 군대를 불러들이다가 연합군을 형성해서 지금 우리를 공격해 오는구나라고 깨닫게 만들어서, 그래서 아람 군대가 허겁지겁 도망해 버렸는데, 아무것도 남겨놓지 않고 그냥 도망가 버린 겁니다. 놀랍게도 아람 군대의 진영에 도달하게 됐을 때, 수많은 먹을 것들이 있는 것을 보고, 이 환자 네 명의 나병 환자들은 마음껏 먹고 마음껏 마시고, 그 모든 것을 다 취했다고 오늘 성경 말씀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병 환자들은 어떤 의미에서 도박을 한 셈이죠. 자신들의 인생을 거는 도박을 했습니다. 나병 환자들에게 있는 세 가지 옵션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마리아 성에 들어가는 선택이고, 또 하나의 선택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는 선택이고, 또 하나의 선택은 아람 군대에게 투항하는 선택이었습니다. 이 세 가지 선택 가운데서 어느 선택을 할 것인가? 그 선택을 할 때 이 나병 환자들은 생각을 했습니다. 사마리아 성에 들어가면 100% 죽는다. 이 자리에 있어도 100프로 죽는다. 아람 군대로 가면 어떻게 되는가 99.999% 죽는다. 그런데 만에 하나 1만 가지 경우 가운데 딱 하나 0.0001%의 가능성이 있는데, 만일 그 아람 군대가 우리를 불쌍히 여겨서 우리를 살려둔다면, 우리가 살 수도 있다고 하는 그 조그마한 가능성을 바라보고, 이 자신들의 인생을 아람 군대에게 도박을 걸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현명한 도박입니까? 어리석은 도박입니까? 현명한 도박이죠.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카는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어디에다가 걸 것인가? 하나님이 계시고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하는 것을 믿는 것에 우리의 인생을 걸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계시지 않고 천국과 지옥이 없다고 하는 것을 믿는데, 우리의 인생을 걸 것인가? 이 두 가지 선택 가운데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해서 질문을 던졌습니다. 하나님이 계십니까? 안 계십니까? 어떻게 알아요? 천국과 지옥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어떻게 알아요? 천국에 안 가봤으니까, 죽어보지 않았으니까, 우리가 죽고 난 다음에는 확실하게 알 수 있지만, 죽기 전에는 둘 중에 하나를 믿어야만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고,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믿든지, 하나님이 계시지 않고 천국과 지옥이 없다고 하는 것을 믿든지, 둘 중에 어느 하나를 믿어야만 하는 것인데, 과연 어디에다가 우리의 인생을 걸 것인가라고 파스칼이라고 하는 철학자가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그 파스칼이라고 하는 철학자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계시고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하는 것에 우리들의 인생을 거는 것이 그것이 훨씬 더 현명하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왜? 하나님이 안 계신다고 하는 것에 천국과 지옥이 없다고 하는 것에 내 인생을 걸고, 그렇게 내 평생의 인생을 살았는데, 죽어보니까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되죠? 유야무야 되지만, 죽어봤는데 하나님이 계셔요. 천국과 지옥이 있어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 사람 망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것에, 그리고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하는 것에 내 인생을 걸었는데, 죽어보니까, 아무것도 없어요. 그럼 어떻게 되죠. 유야무야 되는 거예요. 하지만 정말 하나님이 계시고 정말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 어떻게 된 거예요? 수지맞은 거예요. 그러면서 파스칼이라고 하는 사람은 그 유명한 도박론을 제기하면서, 내 인생을 하나님이 계시고,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하는 것을 믿는 것에 거는 것이 그것을 믿지 않는 것에 거는 것보다 훨씬 더 현명하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늘 아람 군대 진영에 들어간 이 나병 환자들은 그 죽음 안의 가능성을 보고서 들어갔는데, 놀랍게도 거기에는 엄청난 음식들이 있었고, 그들을 살릴 수 있는 것들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쩌면 우리들은 나병 환자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지금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 영적으로 보면 위기 가운데 있다고 이야기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잘 압니다. 이 순간에 이 세상에 거짓 종교에서는 말하기를 뭐라고 이야기하면, 열심히 노력해라. 열심히 수련을 하게 되면, 언젠가는 당신들 또 도의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마음을 비우는 훈련을 하게 되면 언젠가는 당신이 변화될 거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가능성이 제로(zero) 퍼센트일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된다고 한다면, 거기에는 영적인 풍성함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에게로 가면 엄청난 은혜와 축복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믿고 나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복된 삶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시록 3장 20절 말씀 가운데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주님께서 풍성한 양식을 마련해 놓고, 저 천국의 보화를 마련해 놓고 저와 여러분들을 초청하고 계시는데, 마음 문 닫아버리고 영원히 멸망할 수 있는 그 길로 가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서 주님 앞에 가기만 하면, 그 옛날 나병 환자들이 아람 군대로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갔는데, 놀랍게 거기서 죽음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엄청난 음식을 발견하게 된 것처럼, 우리가 주님 앞에 가게 되면 거기에는 영적인 보화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의 약속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이 놀라운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내가 목마르다 말씀하시며, 자신이 스스로 헐벗고 굶주림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에게 풍성하게 먹이시고 입히시는, 그런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셨는데,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날마다 날마다 주님의 은혜를 바라보며, 주님의 풍성함을 기대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둘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Loading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