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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믿음의 사람들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사람 (히 11:32-40) – 믿음의 사람들 16

2020.10.18 주일예배 설교

믿음은 언제 빛을 발휘하는가? 그것은 바로 위기의 순간에서이다. 마치 밝은 낮에는 촛불을 켜도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둠 속에서는 촛불이 빛을 발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반석 위에 지은 집이나 모래 위에 지은 집이나 평상시에는 다 괜찮은 집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기가 되어 폭우가 내리치면 모래 위의 집은 산산조각이 나는 반면, 반석 위에 지은 집은 끄떡없는 것과 같다. 평상시에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나 믿음이 없는 사람이나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지만, 위기의 순간이 되면 그 차이가 드러난다.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믿음의 영웅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데, 32-34절에서는 믿음의 사람들이 아주 위대한 일을 이루어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나라를 구하기도 하고, 의를 행하기도 하고, 약속을 받기도 하고,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고,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고, 칼날을 피하기도하고, 연악한 가운데 강하게 되기도 하고, 전쟁에서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했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게 되면 담대해질 수 있기 때문에, 위대한 일을 이룰 수 있다. 하나님이 아닌 것들을 믿으면, 우리는 쉽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닌 것들은 영원하지 않으며 쉽게 무너지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다윗은 골리앗을 물리칠 수 있었는데, 다윗은 눈에 보이는 것만 바라본 것이 아니라 만군의 주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골리앗과 맞서 싸울 수 있었다.

그런데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다 사자들의 입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다 다윗처럼 골리앗을 무찌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35-38절에서는 믿음의 사람들이 고난과 시련을 견디어 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믿음을 가지고 살다가 박해나 고난을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능히 견딜 수 있다. 그 이유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이다.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우연히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나는 일이라면, 지금 우리들에게 닥치는 일들도 다 계획이 있기 때문임을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심을 믿기 때문이다.

아무리 우리들의 눈앞에 벌어지는 일이 황당하고 공포스럽고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능히 그 시련들을 견디어 낼 수 있다. 따라서 결론은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라합의 믿음 (히 11:31) – 믿음의 사람들 15

2020.10.11 주일오전예배 설교

라합은 다윗 왕의 고조할머니며, 예수님 조상의 명단 가운데 있는 여인이다. 그런데 이 여인의 출신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깜짝 놀라게 된다. 먼저 라합은 가나안 사람이었다. 이방 사람이라는 게 지금은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당시에는 하나님의 회중에 들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아래 있는 사람으로 간주되는 그런 사람이었다. 더 나아가 라합은 기생이었다. 물론 이 여인의 실제 직업이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알 방법이 없다. 아마 몸을 파는 여인이었을 수도 있지만, 그냥 주막 여주인 정도로만 이해하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 출신 성분 자체는 그리 떳떳하지 못한 여인이었다. 그런데 그런 라합이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 다윗의 고조할머니였고, 예수님의 조상 가운데 있다는 것이 놀랍다. 더구나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라합의 믿음을 하나의 예시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 도대체 어떻게 이 여인이 믿음의 모범으로 제시될 수 있었을까?

라합은 하나님에 대해 설명을 들은 것도 없고, 하나님을 믿으라고 권유를 받은 적도 없다. 그가 들은 것은 소문뿐이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원하셨고 애굽과 아모리를 물리친 이야기를 들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오직 참되신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 앞으로 가는 것밖에는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초대는 모든 사람들에게 들려진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동으로 하나님을 찾게 되어 있다. 또한 우리에게 양심이 주어져 있고, 온 세상에 하나님의 지문이 찍혀 있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모른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초대가 들려질 때, 사람들은 세 가지 방법으로 반응한다. 첫째는 스스로를 세뇌시키며 하나님은 없다고 믿는다. 둘째는, 하나님을 모방한 가짜 신을 만들고 그 앞에 절한다. 오직 자신들에게 복을 주는 용도만 가지고 있는 우리 입맛에 맞는 가짜 신을 섬긴다. 하지만 이런 반응은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반응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초대에 순종하며 마음을 여는 반응이다. 이것이 바로 라합이 보인 반응이었다. 그 결과 라합은 다른 여리고 성 사람들이 망할 때, 함께 망하지 않았다. 믿음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초대에 응하는 것이고, 그리고 그 믿음이 실제적으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라합의 경우,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숨겨주는 것으로 그의 믿음이 나타났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다. 그때 우리는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살길이다.

무너진 여리고 성(히 11:30) – 믿음의 사람들 14

여리고 성은 난공불락의 성이었던 것에 비하여 이스라엘 민족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객관적으로 따지면, 이스라엘 민족이 여리고 성을 함락시켜서 점령할 가능성은 없었다. 하지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따랐더니, 여리고 성이 무너졌고, 이스라엘 민족은 쉽게 그 성을 점령했다.

이렇게 우리 앞에 놓인 장벽들을 무너뜨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여리고 성을 돌 듯이 원하는 곳에 가서 돌기도 한다. 그 마음이 참 귀하기는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게 되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다. 하나님은 왜 여리고 성을 돌라고 하셨을까? 그것은 도는 것이 어떤 특별한 효과가 있어서가 아니다. 사실 굳이 돌아야만 했던 것도 아니다. 유황불을 내려 멸망시킬 수도 있었고, 천사들을 동원해서 멸절하실 수도 있었다. 그런데 왜 돌라고 하셨을까?

그 이유는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관심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것에 관심이 있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에게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가에 관심이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 어떻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지난 40년 동안 광야에서 생활하면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는 훈련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깨달았다. 하나님을 믿으면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물론 맹목적인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안타깝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맹인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다가 함께 망하곤 한다. 맹목적인 신앙이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따져보아야 하고, 계산해보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비웃음거리만 될 것이다.

그러면 불가능한 것도 믿고 따라가야 하는가? 아니면 계산하고 생각해보아서 합리적일 때만 움직여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과연 그게 하나님의 뜻인가에 달려있다. 만일 하나님의 뜻이 확실하다면, 믿고 따라가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맹목적으로 따라갔다간 망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질문을 던져야 한다. 과연 이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일까?

안타깝게도 우리의 본성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기 때문에, 대부분의 우리들이 하는 생각은 하나님의 뜻이 아닐 가능성이 많다. 특히 분쟁과 갈등 가운데 나온 생각들은 대부분 사탄이 우리를 미혹하는 생각들일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우리는 묵상하면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이 맞는지 고민해보아야 한다. 선하고 신앙적인 목적을 내세운다고 해서 자동으로 하나님의 뜻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윗이 성전을 지으려고 했던 것은 정말 좋아 보였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부부싸움 중에, 또는 신앙생활하다가 마음이 불편하거나 갈등 가운데 떠오르는 생각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뜻과 상반된다. 우리의 본성은 주님의 뜻을 거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하나님의 뜻이 확실하다면 머뭇거릴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따라야 한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던 것처럼.

상 주심을 바라보자(히 11:24-29) – 믿음의 사람들 13

히브리서 11장에서 모세는 믿음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냈다고 기록한다. 모세는 바로의 궁전에서 살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을 선택했는데, 그것은 바로 믿음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바로 왕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은 것도 믿음에서 나온 행동이었고, 유월절 예식을 제정한 것도 홍해를 건넌 것도 모두 믿음에서 나온 행동이었다고 히브리서는 설명한다.

믿음은 보이지 않지만 믿는 것을 의미한다. 보이고 확실한 것을 믿음을 요구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믿음이 요구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것은 바로 왕이고, 애굽의 군대이고, 바로의 궁전이었다. 하지만 모세는 보이는 것만 보고 산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살았다. 그래서 그는 왕궁에서 편하게 사는 것보다 주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을 선택할 수 있었다.

모세는 어느 날 왕궁 밖으로 나왔다가 동포가 억울하게 착취를 당하고 고통을 당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때 모세는 모른 척 하고 지나치지 않았다. 그는 동포를 억압하는 애굽 사람을 향해 다가가 항의했고, 결국 때려 죽였다. 그런데 그 일을 기록하면서 히브리서는 이 일이 믿음에서 나온 일이었다고 기록하였다. 물론 살인을 정당화하는 말씀은 아니다. 성경 전체에서 가르쳐주는 말씀은 살인을 죄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믿음의 행위였다는 것은 모세가 가진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모세는 고난을 당하는 동족을 보면서 모른 체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이 순간에 모른 척하고 지나가기 쉽다. 괜히 참견했다가 피해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모세는 눈앞에 보이는 것만 보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을 더 좋아했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더 큰 재물로 여겼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에 대한 믿음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히브리서의 기록과 출애굽기의 내용이 서로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히브리서에서는 모세가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실제로 출애굽기에서는 일이 탄로가 난 것을 알고 두려워하였다고 기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묘사는 모두 다 맞다. 실제로 모세는 무서웠을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무서운 일을 만나면 무서움을 느끼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 무서워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거대한 권력 앞에서 두려움이 없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좌절했던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일어설 수 있었다.

지금 이 시대는 코로나19로 인해 고통을 받는 시기이다. 일상은 무너져버렸고, 재정적인 손해가 발생하고 있으며, 함께 모여 예배하는 것조차 힘든 상황이 되어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보이는 것만 바라보며 두려워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모세가 고통받은 동족을 외면하지 않았던 것처럼,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셨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피를 흘려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