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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사사기 강해

잘못된 서원 (삿 11:29-33)

2021년 5월 30일 주일설교 예배

입다의 이야기는 충격적이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다면 자기 집 문을 열고 마중 나오는 자를 하나님께 번제물로 바치겠다고 서원을 하였고, 그 결과 입다는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을 번제물로 바쳤기 때문이다. 만일 이런 일이 오늘날 발생했다면, 어떤 광신도가 어처구니 없는 황당한 일을 했다고 당장 뉴스에 보도될 것이다.

도대체 입다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무엇일까? 하나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어떤 교훈을 얻기를 원하시는가? 정통적으로는 하나님께 드린 서원은 아무리 손해가 된다 할지라도 반드시 지켜야 함을 배워야 한다고 해석한다. 화장실을 가기 전의 마음과 다녀온 후의 마음이 다른 게 사람인데, 하나님께 한 약속은 결코 어겨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이 이야기를 통해서 배울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이런 해석의 난점은 하나님은 결코 사람을 죽여서 제사를 드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하나님은 잔인하고 무자비한 폭군이 아니라, 사랑이 많으시고 긍휼이 많으신 우리들의 아버지와 같은 분이시다. 결코 하나님은 우리들을 짓밟아버리면서 좋아하실 하나님이 아니시다. 그게 참되신 하나님이 이 세상의 거짓 종교의 신과는 확연하게 다른 점이다.

입다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사용된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자였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가 행한 모든 일들이 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옳은 일이었던 것은 아니다. 사실 사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기 소견에 좋은대로 행동했던 어리석은 사람들이었다.

입다가 했던 서원은 잘못된 서원이었다. 서원이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이제는 주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다짐하며 결단하는 것이다. 마치 야곱이 벧엘에서 했던 서원처럼 말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보호해주시겠다는 약속을 들었을 때, 너무나도 감사하면서 정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신다면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서원을 하였다. 하지만 입다는 하나님과 흥정하였다.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주신다면, 번제를 드리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이러한 서원은 하나님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행위이다. 이러한 서원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리 만무하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입다에게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하셨다. 그런데 그 개선의 행령에 환영하러 나온 사람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외동딸이었다. 그때 입다는 회개하여야 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신앙적 완고함 가운데, 자신의 딸을 죽이고 말았다. 어쩌면 이런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이다. 완고함 속에서 잘못되고 불행한 일들을 반복하는 게 우리들의 잘못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수단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하셨다. 그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에브라임 신드롬 (삿 8:1-3)

2021년 5월 23일 주일예배 설교

기드온이 300명의 용사와 함께 미디안 군대를 물리치고 대승을 거두고 돌아왔을 때, 예기치 못한 사람들을 만났다. 일반적이라면 개선행렬을 환영하고 환호하는 무리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기드온이 만난 무리는 기드온을 비난하고 다투는 에브라임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일들은 우리들에게 낯설지 않다.

주님께서는 비판을 받지 않으려면,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칭찬하고 인정하기보다는 깎아내리고 비난하는 일에 더 익숙하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 앞에 간구해야 한다. 부정적인 시각보다는 긍정적인 시각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을 흠집을 내고 비난하기보다는 칭찬하고 격려하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헌신하는 모습을 보면서, 성공하는 모습을 보면서, 함께 기뻐하고 격려하기보다는 깎아내리고 흠을 찾는 것을 에브라임 신드롬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에브라임 신드롬은 우리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구약에서는 사울에게서 볼 수 있는데,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쳤을 때 함께 기뻐하고 좋아하기보다는 적이라 생각하고 죽이려 하였다. 신약에서는 가룟 유다에게서 볼 수 있는데, 예수님에게 향유를 부은 여인을 보면서 비난하였다. 자신이 그렇게 헌신적이지 못하였고 충분히 사랑을 표현하지 못했다는 것을 반성하기보다는 비난하는 데 더 빨랐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이렇게 기드온을 비난한 것은 아마도 자신들의 잘못을 감추기 위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미디안과의 전쟁에 함께 따라나서지 못하고, 나중에서야 왜 우리들을 부르지 않았느냐고 비난한 것이다. 면피용 발언일 수 있다.

그런데 이 순간에 기드온은 그들을 칭찬하고 인정하여서 그들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내가 한 일보다 너희들이 한 일이 더 크다고 추켜세운 것이다. 어떻게 기드온은 그럴 수 있었을까? 첫째, 자신이 전쟁에서 이긴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알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둘째, 기드온은 누가 적군이고 누가 아군인가를 잘 알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금 에브라임이 싸움을 걸어오고 있지만, 에브라임은 적이 아니라 같은 편이다. 미디안 민족은 자기들끼리 싸우다 망했는데, 기드온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았다.

우리도 항상 질문을 던져야 한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아군인가? 적군인가? 안타깝게도 가정에서, 교회에서, 공동체에서, 사회에서 아군을 적으로 간주하고 싸우는 일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 우리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나의 진정한 적은 누구인가? 그리고 우리 편으로 알고 감싸주어야 한다.

감사한 것은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적으로 간주하지 않으셨다는 점이다. 십자가 위에 달리신 주님을 향해서 욕하고 비난하던 무리들을 향해서 주님은 12 영이 더 되는 천사를 동원하여 멸절시키지 않으셨다. 오히려 이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았다. 그러기에,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차별 없이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백성이 아직도 많으니(삿 7:2-8)

하나님만 의지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닌 모든 것들을 다 버려야 한다는 뜻일까? 종종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약을 내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께서 병을 고쳐주실 것을 기도하면서 실제로는 약을 의지하는 것은 온전한 믿음일 수 없으며, 실제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응답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생각은 건전한 신앙적 관점이라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이 세상의 방법을 배제하거나 또는 상반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성경에 자주 나오는 표현법 가운데 하나로, 과장법적 대조(hyperbolical contrast)라는 표현법이 있다. 이것은 강조의 목적으로 수사학적으로 대조하여 부정하는 방식의 표현법인데, 이러한 표현에서 사용된 부정은 실제로 부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수사학적으로만 강조를 위해 사용되는 것일 뿐이다. 예를 들어, 사람이 떡(양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의 중요성을 말하기 위하여 떡(양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고 표현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떡(양식)을 먹지 않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 표현은 단순히 떡(양식)이란 것은 육신을 먹여 살리는 제한적인 역할만 할 뿐이요 우리의 영혼이 살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함을 말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군사들의 숫자를 줄이라고 하셨다. 이렇게 요구하시는 것은 정말 하나님만을 신뢰하는가를 물으시기 위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는 것이 이 세상의 것을 버리는 것이 아닐 수 있지만, 때에 따라서는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세상의 것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할 때가 있다. 그때 기드온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였고, 결국 그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도 물으실 때가 있다. 정말 하나님만 의지하고 정말 하나님만 사랑하는지 물으실 수 있다. 그때 우리는 온전히 하나님만 의지함을 고백해야 할 것이다. 왜 우리는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고 고백해야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들만 사랑하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 놀라운 사랑을 받았다면, 당연히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것이 옳다.

하나님을 시험해도 될까?(삿 6:36-40)

군대를 이끌고 미디안 군사들을 치라는 명령을 들었던 기드온은 과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인지를 물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그 증표를 보여달라고 했다. 한번도 아니고 두 번씩 요청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기드온의 요구를 들어주셨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는데, 이러한 기드온의 요구는 괜찮은 것일까?

그런데 성경에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말씀도 있지만(신 6:16; 마 4:7), 정반대로 하나님을 시험해보라는 말씀도 있다. 말라기 3:10의 말씀인데, 이 구절을 보면 온전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려서 하나님께서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하셨다. 한쪽에서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고 있고, 또 한쪽에서는 하나님을 시험하라고 되어 있는데 어느 장단에 맞추어야 할까?

그런데 사실 우리의 행동은 우리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의 반응을 이끌어내는 시험일 수 있다.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한편으로는 우리를 책망하시는 반응을 보이실 수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반응을 보이실 수도 있다. 마치 리트머스 시험지가 산성을 만나면 붉게 변하고, 알카리를 만나면 푸르게 변하는 것과 같다. 생명의 근원이시며 기쁨의 근원이시며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가까이하면 복된 일이 되는 것이고, 멀리하면 고통스러운 일이 되기 마련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시험할 의도가 있든 없든, 하나님의 반응은 우리의 행동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모든 행동은 하나님의 축복이나 저주의 반응을 시험하는 시험일 수 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 일으킬” 그런 시험을 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맛사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불평하고 원망했다. 그러한 시험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 일으키는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 시험이었다. 반대로 하나님을 시험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그런 긍정적인 시험을 하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고 하나님을 나의 주님으로 모시고 산다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풍성함으로 함께 하시는 반응을 보이실 것이다. 그러므로 과연 이번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실 것인가를 물었던 기드온은 하나님의 임재를 확신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아쉽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죄를 범한 것은 아니다. 

사실 그게 우리의 마음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시지만, 우리를 보거나 세상을 보면서 두려운 마음이 든다. 마치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데도 주사바늘을 보고 무서워 우는 아이들처럼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기드온에게 두 번씩이나 증표를 보여주셨다. 하나님은 “걱정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라고 하시며 안심시켜 주시는 아버지와 같다.

그런데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가 많은 우리들과 함께 하신다고 하시는가? 그것은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주님과 함께 하지 않으심을 통해서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울부짖으셨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쳤다. 하지만 우리의 손을 붙잡기 위해서 하나님은 예수님의 손을 버리셨다. 십자가에서 울부짖을 때 외면하셨다. 그래서 우리가 산다. 그 구원의 기쁨을 가지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 가운데 믿음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