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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잠 1:1-19)

2021년 6월 9일 수요예배 설교 – 잠언 강해 시리즈 1

할렐루야!

지혜의 책이라고 하는 잠언서의 말씀을 수요일 날마다 살펴볼 수 있게 돼서 너무나도 기쁘고 감사합니다. 이 잠언이라고 하는 이 책은 솔로몬의 잠언이라고 밝히고 있는데요.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이 지은 잠언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잠언서에 기록된 모든 내용이 솔로몬의 독특한 창작물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여러 가지 훌륭한 잠언들, 지혜의 말씀들 모으기도 하고, 또한 창작하기도 하고 해서 잠언 지혜의 말씀들을 한꺼번에 모아놓은 책이 바로 이 잠언의 말씀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솔로몬이 이 잠언서를 집대성하여서 기록하였는데, 솔로몬이 이렇게 잠언서를 기록한 목적이 2절에서부터 4절 말씀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지혜롭게 공의롭게 정의롭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 어리석은 자로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을 주기 위한 것이니라”라고 잠언서를 기록하고 있는 목적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그 목적을 요약한다고 하면 어떤 목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지혜를 깨닫게 해 주기 위한 목적으로 잠언서를 기록했다’ 이 말입니다. 지금 여러 가지 말들을 하고 있지만 2, 3, 4절의 목적을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그 장황한 설명을 한마디로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라고 하면, ‘읽는 이로 하여금 지혜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이 잠언서를 기록했다’고 이렇게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잠언서를 기록한 목적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그 표현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아주 특이합니다. 왜냐하면 그냥 단순히 지혜라고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혜라고 하는 말, 무엇이 지혜인가, 지혜를 깨닫게 할 것인데, 과연 무엇이 지혜인가에 대해서 여러 가지 단어를 사용해서 다양한 각도에서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좀 번역이 매끄럽지 않아서 제가 좀 원문에 가깝게 다시 한번 설명해 보았습니다.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통찰력 있는 말씀을 깨닫게 하며, 지혜로이 다루는 법을, 공의, 의롭게 행하는 법을, 정의롭게 행하는 법, 공정하게 행하는 법, 행하는 일에 대해서 훈계를 받게 하며, 단순한 자로 하여금 신중하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분별력을 주기 위한 것이니, 지혜 있는 자는 듣고 지식이 더할 것이오. 깨닫는 자는 배움이 증가할 것이니라.”라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글씨를 한번 보시고 성경책 속에다가 좀 적어놓으실 수 있으면, 적어놓으시면 좋을 것 같아요. 특별히 4절 말씀에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번역을 해 놓았는데 근신이라고 하는 말보다는 ‘분별력을 주기 위한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 원문의 더 가까운 것 같고요. ‘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하게 생각하는 자들에게 신중하게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기 위한’ 그런 말씀이고 또 ‘정직하게 행하라’고 그렇게 표현 2절에서 표현하고 있는데, 사실은 이 원문의 의미가 정직하게의 의미보다는 공정함, 공정하게 일을 다루는 그 법에 대해서 훈계를 받게 하려고 하는 그런 목적이 있다고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이 지혜가 무엇인가? 이 통찰의 말씀, 지혜롭게 다루는 법, 의롭고, 정의롭고, 그리고 공정하게 행하도록 하는 것, 그리고 신중하게 행하고, 분별력 있게 행하는 것, 이런 것들이 전부 지혜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지혜가 무엇인가? 지혜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약삭빠른 것을 가리켜서 지혜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면 아주 약삭빠른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비유에 보면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가 나오는데요. 이 불의한 청지기는 자신이 해고를 당한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약삭빠르게 행동을 해서 그래서 자기가 해고된 이후의 삶을 준비하는 정말 그 약삭빠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주인이 감탄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청지기가 약삭빠르게 행동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일까요? 물론 지혜로운 모습일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잠언에서 보여주고 있는 말씀이 무엇이냐면, 그게 지혜가 아니라는 거예요. 지혜가 무엇인가? 그냥 약삭빠른 것, 그것이 지혜가 아니라, 정의롭게 행하는 게 지혜고, 공정하게 행하는 게 지혜고, 정의롭게 행하는 게 지혜인 것이지, 이익만을 위해서 약삭빠르게, 내 얄팍한 그 이득을 위해서 움직이는 것이 그게 지혜가 아니라고 처음부터 가르쳐주고 고 있다고 하는 점에 우리가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참된 지혜는 무엇인가? 정의롭게 행하는 것, 의롭게 행하는 것, 공정하게 행하는 그 모든 것들이 지혜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러한 점이 바로 이 세상의 지혜와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지혜는 무엇인가요? 이 세상에서의 지혜, 이 세상에서의 지혜는 빨리빨리 잘 민첩하게 행동해서 그래서 손해를 전혀 안 보는 게 지혜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걸 참 잘한다고 그래요. 그 어느 한 글을 보았는데 비행기 승무원들이 제일 선호하는 노선이 있다고 합니다. 그 비행기 승무원들이 전 세계 노선 중에서 어느 노선을 제일 좋아하냐면, 한국으로 가는 노선을 제일 좋아한대요. 왜? 식사 시간이 되면 안내 방송을 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한국 사람들은 다 의자 똑바로 해놓고, 테이블 펴놓고, 다 미리 다 준비하고 있는 거예요. 승무원이 와서 ‘지금 식사할 시간이 됐으니까 준비하십시오.’ 이렇게 안내를 안 해도 이미 다 펼쳐놓고 딱 자리에 가만히 있고, 그리고 와서 ‘오늘 메뉴는 이것도 있고 a 메뉴 가 있고 b 메뉴가 있고 c 메뉴가 있는데 어느 것을 선택하겠습니까?’ 이렇게 물어봐서 대답을 들어야 될 텐데, 우리 한국 사람들은 벌써 메뉴를 다 마음속에 결정하고 있어 가지고, (승무원이) 오면 무슨 메뉴 달라고 다 얘기하고, 아주 빨리빨리, 우리나라 해외 그 저기 전화번호가 그 국가 식별 번호가 82거든요. 미국에서 한국에 전화 걸려면, +82-10 뭐 이렇게 해서 전화를 걸어야, 우리한테 전화가 되어요. 국가 식별 번호로 82라고 하는 그 번호를 가진 우리나라, 민족은 빨리빨리, 시키지도 않아도 미리미리 줄 다 서 있고, 비행기에 탑승하기 위해서 줄을, 이제 체크인하고 이렇게 들어가야 되는데, 뭐 이야기도 하기 전에 벌써 줄 쫙 서 있는 겁니다. 줄 쫙 서 있고, 이미 여권 다 꺼내놓고, 다 꺼내놓고 다 정확하게 준비를 다 해가지고, 순식간에 입장 완료. 아주 간단하게. 왜 이렇게 그렇게 빨리하는 인생이 됐는가? 늦으면 못 먹거든요. 우리의 인생에 우리의 삶 가운데 조금만 늦어버리면 내가 찾아먹을 것을 찾아먹을 수 없고, 군대에서 휴가를 조금만 늦게 가면, 내가 찾아 먹을 군대 휴가 못 찾아먹고, 그러기 때문에 빨리빨리 해서, 내 것을 손해 보지 않기 위한 거기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는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생각 가운데 누가 지혜로운 사람인가? 빨리빨리, 눈치 빠르게, 자신의 취할 것을 재빠르게 취해서, 손해 보지 않고 약삭빠르게 행동하는 것이 그게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는 그런 생각들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있습니다.

이 세상의 관점은 무엇인가? 꿩 잡는 게 매라고 하는 말이 있듯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할 수만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 정의가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그 사람이 돈을 버는 과정 가운데서 어떤 방법으로 돈을 벌었는지, 저 사람이 성공하는데, 무슨 방법을 사용해서 성공하게 되었는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스포츠 선수가 어떤 일을 하는 데 있어서 경기를 하는 데 있어, 그 사람이 정말 페어플레이를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결과로써 이야기하는 시대가 되어 버린 것이죠. 그래서 우리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게 느껴지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방법은 어떤 방법을 쓰든지 간에 돈 많이 벌고 성공하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는 그런 삶을 살 수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 지혜로운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에게 잠시 잠깐의 성공을 향해서 가게 만들고 우리로 하여금 잠시 잠깐의 만족을 주는 것이지만 결국 이 세상의 길은 우리로 하여금 망하는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참된 지혜가 무엇인가? 오늘 말씀은, 그게 아니라 가장 빨리 가장 잘 성공하는 그것이 지혜로운 것이 아니라, 의를 행하고 정의롭게 행하고 공정하게 행하는 것이, 그것이 지혜로운 것이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 7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데요. 다시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인가? 어떤 사람이 지식이 있는 사람인가라고 하는 것을 물어봤을 때, 오늘 본문의 말씀은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그 사람이 바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오. 지식이 거기서부터 시작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질문을 던져봐야 될 텐데요. 도대체 경외한다고 하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경외한다.’ 경외가 뭐죠? 우리가 평상시 생활하면서 경외라고 하는 말을 써본 적이 있습니까? 별로 안 써보는 단어예요. 그래서 경외라고 하는 말을 알지도 못하고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냥 교회 내에서 이해도 못한 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경외라고 하는 말의 뜻이 무엇이냐면,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두려워하는 것, 그러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시작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영어에서는 아주 간단한 아주 누구나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는 단어인 fear를 써서 번역을 했어요. 한국말 성경은 어른들도 잘 이해 못 하는 경외라고 하는 말을 써서 번역을 해놨어요. 그러니까 성경을 읽어도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르고 도대체 경외하는 게 뭔가 하고 오해합니다. ‘이게 뭐지? 경외가 뭐지? 그냥 경외하자고 하자.’ 그러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여호와를 경외한다고 하는 말이 무엇이냐 하면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좀 성경을 좀 쉽게 번역했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이 참 소망인데요.

무엇이 지식의 시작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시작이라는 겁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것을 알고, 그리고 그 하나님이 무서운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아는 것이 그게 지식의 시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참된 지식이 시작된다고 하는 것인데, 하나님이 두렵기 때문에 우리는 행동을 어떻게 하게 됩니까? 하나님의 뜻을 어기면서 악을 행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두렵기 때문에 무서운 그 마음 가운데 죄악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죠. 지금 잠깐 동안 악을 행하면 쾌락이 있을 수가 있겠고, 지금 잠깐 동안 눈 깜짝하고 속이면 그러면 행복이 있을 것처럼 보이고 내가 많은 물질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우리들에게 허용이 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무서운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일들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무섭기 때문에 두렵기 때문에, 그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해 본다고 하는 한다면 악한 일을 행할 수가 없는 것이고, 나쁜 길로 갈 수가 없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이 무서운 줄 아느냐? 하나님이 두려운 존재라고 하는 것을 아느냐 모르느냐가 사람의 그 길을 완전히 바꾸어 는 겁니다.

하나님이 두려운 줄 알면 죄악을 행하다가도 못 하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두려운 줄 모르면 계속해서 악을 저지르는 거죠. 우리가 주의 일을 하면서도 악을 행할 때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내 마음까지 사람들이 나를 보지 않기 때문에, 내가 악을 행하는 그런 일들을 하고 있는데, 그 악을 행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하나님이 나를 보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이 안 계시는구나.’ 하나님이 나에 대해서 전혀 쳐다보지도 아니하시고 그냥 이 세상에는 사람들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악을 계속 행하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안다면 그리고 그 하나님이 무서운 하나님이요. 두려운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안다고 한다면 내가 악을 행하다가도. 어떻게 해야 돼요? 멈춰야죠! 내가 어떤 사람을 미워하다가도, 어떻게 해야 돼요? 멈춰야죠! 하나님이 무서우니까. 내가, 나 혼자만을 위에서, 나만을 위해서 살다가도 그것을 중단해야죠. 사랑을 베풀며 살아야죠. 왜 하나님이 무섭기 때문에, 두렵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두려운 것을 안다고 한다면 우리는 죄악의 길로 갈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기도 하고 하나님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는 그런 성도라고 할지라도, 안타깝게도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항상 잊어버리고 삽니다. 하나님이 불꽃같은 눈으로 바라보고 계시고 이 모든 것들을 심판하신다고 하는 그 사실을 다 망각해 버리고, 그냥 내가 편한 대로 악을 행하면서 살아갈 때가 많이 있는데, 지식의 근본이 무엇인가? 지식의 시작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두려운 줄을 아는 것이 그것이 참된 지식의 시작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말의 반대말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시작이라고 한다면 그 반대말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어리석음의 극지겠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가, 왜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계시다고 생각하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유일한 이유가 있다고 하면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생각하게 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시편 14편 1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14편 1편은 시편 53편 1절과 내용이 거의 비슷한데요. 가로 친 것은 53편의 표현이고 가로 밖에 있는 것은 10편 14편의 표현이에요.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악을 행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하나님이 두렵지 않기 때문에 악을 행한다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욥기 28장 28절 말씀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또 사람에게 말씀하셨도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주를 두려워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 다시 말하자면 악을 떠남이 지혜고 명철이니까, 악으로 악을 행하는 것이 어리석음이고, 하나님에게서부터 떠나는 것이 어리석음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여기 앉아 계신 분들은 모두가 다 지혜로우신 분들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계시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심판하시는 그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 떨 수 있는 그런 성도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감사드립니다.

물론 하나님은 두려움만의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두려워만 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은 또 사랑과 은혜와 인자하시고,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이에요. 누구에게?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의를 행하는 자들에게, 주의 길 가운데 걸어가는 자들에게는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인 거죠.

그런데 그 사랑의 하나님이 언제 무서움의 대상이 됩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길에서부터 벗어나서 죄악의 길을 가게 될 때 두렵고 무서운 분이 되는 것이고, 우리가 순종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주님의 뜻대로 살게 되면 하나님이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아버지와 같은 하나님이 되신다고 하는 것인데요. 원하기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는 가운데 아버지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으로 느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8절 9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내 아들아, 내 아버지의 훈계를 들으며, 내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이는 내 머리에 아름다운 관이오. 내 목에 금 사 이니라.” 지금 잠언서 1장 8절에서부터 9절까지는 아버지의 명령, 아버지의 훈계, 어머니의 법을 떠나지 말라고 그렇게 가르쳐주고 있는데요. 이건 자녀들에게 주는 교훈인데 아버지의 말씀, 어머니의 말씀을 떠나지만 말고 그 말을 반드시 지키라고 하는 이 말씀을 해 주실 때, 우리는 이 성경 말씀을 어떤 식으로 이해하냐면 유교식으로 이해할 때가 많습니다. 유교적인 관점에서는 어떤 관점이 있죠. 부모님은 무엇과 같다? 하늘과 같아서 부모님은 하늘과 같아서 그 하늘과 같은 부모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된다고 하는 것이 유교적인 관점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읽으면, 이 성경을 읽으면서 어떤 개념으로 이해를 하냐면 유교적인 개념으로 이해를 해서, ‘부모님의 말씀은 무조건 자녀가 다 들어야 돼’라고 하는 그런 의미로 받아들일 때가 많습니다. 성경이 그것을 가르치느냐면 그렇지 않아요.

성경의 가르침은 그 전제가 있는데요. 지금 8절 9절에서 아버지의 명령을 따르고 어머니의 법을 반드시 따르라고 말씀하고 있을 때, 그 전제가 무엇이냐 하면 부모님의 가르침이 하나님의 말씀과 부합하다고 하는 것이 전제예요. 지금 솔로몬이 자기 자녀들을 가르치면서 솔로몬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 자녀들을 가르치고 있으니까, ‘자녀들아 내 말을 들어라.’ ‘부모의 말씀을 들어라.’ ‘자녀들아, 너희가 어머니의 말, 그 법을 떠나 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지금 무엇으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부모님의 그 말씀을 떠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오늘 이 잠언서 1장 8절 9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겁니다.

만일 부모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지 않고 잘못된 것을 가르치게 되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따를 수 있나요? 따를 수가 없는 거예요. 그냥 우리나라에서 생각하고 있는 관점은 무엇이냐 하면, ‘그냥 상관이 시키면 무조건 해.’ ‘내 주인이 시키면 무조건 해.’ ‘부모가 시키면 무조건 해야 돼.’ ‘군대에서 고참이 시키면 무조건 해.’ ‘그게 법이야’라고 하는 그런 개념으로 이 말씀을 이해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부모님들도 이 말씀을 읽으면서 ‘아, 나는 우리 자녀들에게 내 마음대로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고, 내가 말하면 우리 자녀들은 무조건 들어야 되는구나’라고 오해하시면 안 돼요.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부모님이 하나님의 뜻대로 자녀들을 양육하기 때문에, 부모님이 하나님의 뜻대로 자녀들에게 가르쳐주기 때문에, 너희 자녀들은 부모님이 가르쳐주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 벗어나지 말고, 그 하나님의 법칙에서 떠나지 말고, 그 말씀을 순종하라고 하는 의미이지, ‘아버지의 말씀은 무조건 절대 진리야.’ ‘어머니의 말씀은 무조건 절대 진리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나중에 우리 자녀들이 이제 결혼할 대상자를 데리고 와 가지고 ‘아버지, 어머니, 결혼하고 싶어요.’ 그런데 아버지 어머니가 그 배우자가 될 사람을 바라보는데 마음에 안 들어요. 좀 집안이 좀 괜찮은 집안 처자였으면 좋겠는데, 직장이 좀 좋은 직장을 잘 다니는 정말 삐까번쩍한 그런 직장을 다니는 그런 사윗감이었으면 좋겠는데, 뭔가 좀 키가 큰 번듯한 그런 배우자 감이었으면 좋겠는데, 데리고 왔는데 보니까, 별 볼품도 없고, 돈도 없고, 그 집안은 아주 뭐 별로 내놓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빈약한 그런 집안에 처자를 데리고 왔다든가, 직장도 없는 그런 아무것도 없는 아이를 데리고 와서 결혼하겠다고 이야기할 때, ‘절대 안 돼.’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까진 안 돼.’ ‘너는 내 말 무조건 믿어야 돼.’ 왜? ‘성경에 내 아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내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고 했으니까. ‘넌 반드시 들어야 돼’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거죠.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부모의 뜻대로 무조건 자녀들이 해야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아이를 양육하니, 그 하나님의 말씀에서부터 떠나지 말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10절에서부터 17절까지의 말씀은, 16절까지의 말씀은, 17절까지의 말씀은, 첫 번째 교훈이 나와 있습니다. 10절서부터 한번 보겠습니다. “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깰지라도 따르지 말라. 그들이 내게 말하기를 우리와 함께 가자. 우리가 가만히 엎드렸다가 사람의 피를 흘리자. 죄 없는 자를 까닭 없이 숨어 기다리다가 스올같이 그들을 산채로 삼키며 무덤에 내려가는 자들 같이 통으로 삼키자. 우리가 온갖 보화를 얻으며, 빼앗은 것으로 우리 집을 채우리니, 너는 우리와 함께 제비를 뽑고, 우리가 함께 전대 하나만 두자 할지라도, 내 아들아, 그들과 함께 길에 다니지 말라. 네 발을 금하여 그 길을 밟지 말라.”

16절 “대저, 그 발은 악으로 달려가며 피를 흘리는 데 빠름이니라.” 16절까지는 여기서 지금 잠언서를 기록하면서 이제 첫 번째 교훈을 하는 겁니다. 실제적인 첫 번째 교훈입니다. 처음에는 서론 격인 내용이 나왔고, 그다음에 잘 들으라고 하는 그런 내용이 나왔는데, 그런데 이제 그 수많은 교훈들 중에서 정말 실제적인 교훈을 제일 먼저 준 교훈이 있었는데, 그게 뭐냐 하면, 한마디로 요약하면 뭡니까? 땀을 흘리지 않은 채 남의 것을 강제로 탈취하여 편취하는 일에 동참하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잠언에 있는 수많은 교훈들 가운데 이 교훈을 제일 먼저 기록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들이 가장 잘 넘어지는 부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물론 사람들이 전부 강도짓을 하는 것은 아니죠. 숨어 있다가 강도처럼 빼앗아 남의 것을 우리가 탈취하자라고 하는 그런 친구들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고 그런 악한 일을 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는데 사실은 강도짓을 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살아가면서 정당한 방법으로 이득을 얻기보다는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재물을 얻으려고 하는 그런 갈망들이, 그런 죄에 우리가 쉽게 빠지기 때문에, 이 교훈의 말씀을 해주는 겁니다. 쉽게 버는 것, 쉽게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고 도둑질하고, 빼앗고 하는 그런 나쁜 짓을 통해서 재물을 얻는 것이, 사실 우리들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자주 발생하는 그런 죄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정당하게 땀을 흘리고, 내가 정당하게 일을 하고, 그래서 내가 수고한 만큼 얻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인데, 사탄의 법치 은 무엇입니까? 사탄이 우리를 어떤 식으로 유혹합니까? 내가 수고한 것 이상으로 손쉽게 남의 것을 빼앗고 탈취하고 속이기도 하고, 그리고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그런 마음들이 우리들에게, 모든 사람들에게 다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교훈을 그것으로 하는 것인데 이 교훈을 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 아들아” 우리 자녀들을 향해서 주신 첫 번째 교훈, ‘절대로 남의 것을 내가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탈취하고 빼앗아서 내 것을 만드는 그런 악한 일을 하는데 동참하지 말라’고 교훈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7절 말씀부터 이렇게 그 이유를 이야기합니다. “새가 보는 데서 그물을 치면 한 일이겠거늘, 그들이 가만히 엎드리면 자기의 피를 흘릴 뿐이오. 숨어 기다림은 자기의 생명을 해할 뿐이니, 이익을 탐하는 자의 길은 다 이러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 새가 그물을 치는 걸 보면 그 그물에 걸려듭니까? 어리석은 새는 걸려들겠지만 걸려들지 않는 겁니다. 새가 그걸 보고 피해 다니는 거죠. 그런데 이 말씀을 해 주는 이유가 뭡니까? 우리가 숨어서 남의 것을 탈취하는 그런 모습을 누가 바라보고 계시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보고 계시다. 우리가 지금 숨어 있는 그 모습을, 그것을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성공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고, 우리가 그래서 재물을 손에 얻을 수도 있겠지만, 결국은 우리의 영혼이 망하는 길이라고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상황에 적용한다고 하면 우리가 재물을 얻으려고 하는 노력 자체가 잘못됐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가 열심히 수고하고, 수고한 만큼 더 많이 얻고, 그리고 그것을 누리기도 하고, 또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기도 하는 것은 우리 크리스천들이 할 수가 있는 겁니다. 하지만 그러한 수고의 대가가 아니라 우리가 잘못된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우리가 재물을 취하는 것은 잘못인 것인데요. 이것은 바로 우상숭배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수고하고 애써서 얻는 것은 정당한 것인데, 수고하지 않은 것을 통해서 얻으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이미 재물이 우리들의 우상이 되어 버린 결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유익한 그 모든 것들이 다 우상이 될 수가 있겠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잘못된 방법을 사용하게 되는 그 순간에, 그것이 우상이 되어버리는 거죠. 그래서 골로새서 3장 5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정한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무엇이라? “우상 승배이니라.”

재물을 우리가 얻는 것은 정당한 것이지만, 그것을 탐욕적인 마음으로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방법을 사용해서 얻는 것은 그것은 탐욕에서부터 나온 것이고, 우상숭배의 제물을 우상처럼 섬기는 데서부터 나온 행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이 살아가는 가운데 욕심들이 늘 생겨납니다. 예쁜 것을 보면 좋은 것을 보면 그리고 편리한 것을 보면 가지고 싶은 마음들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자꾸만 생기는 것이죠. 그러면. 열심히 노력하면 되는데, 내가 노력해서 안 된다고 생각될 경우에, 그것을 손쉬운 방법으로 탈취하려고 하는 그런 경향들이 많은데, 그렇게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겸손하게, 하나님의 그 은혜 가운데 머물러야 될 줄로 믿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늘 넘어지는 이유는 다른 사람과 우리를 비교할 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더 많이 가진 것을 보면서, 우리들이 죄악의 길로 갈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자족하는 마음이 있어야 될 텐데, 자꾸만 비교해서, 나보다 더 나은 사람과 비교해보고, 더 많이 가진 사람과 비교하면서, 그래서 내가 그런 사람처럼 되고 싶은 욕심 때문에, 그런데 내가 노력해도 안 되니까, 결국은 나쁜 방법을 써서 더 높아지려고 하고, 더 높은 곳에 올라가려고 하는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그것은 다 어리석은 일이고 결국은 망하는 길이고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날마다 날마다 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들의 마음속에 악한 생각이 떠오를 때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그것을 다 어거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나가서, 주님께서 저희들의 마음을 씻어주시고, 변화시켜 주시고 이제는 지혜롭게 행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면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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