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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의 기도와 찬양 (삼상 2:1-11)

2017.4.12 수요예배 설교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한나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양하는 그 내용으로 오늘 본문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나가 바로 그 같은 장소에서 예전에 하나님 앞에 울부짖으며 통곡하면서 매어 달렸던 바로 그 자리에서 한나는 다시 그곳을 찾아와서 이제는 하나님 앞에 기쁨과 찬양의 가득 찬 그 노래와 기도를 드리고 있다고 하는 사실이 아주 놀랍습니다. 예전에는 고통 가운데 슬픔 가운데 울부짖었는데 이제 그가 다시 와서 기쁨과 감사와 이런 찬양의 노래를 부르게 된 그 놀라운 변화가 어디에서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한나가 사무엘을 낳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들이 없어서 브닌나에게 괴로움을 당하던 한나, 속이 문드러지고 그 아픔이 너무나도 커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데 마치 술 취한 여인처럼 정신 나간 여인처럼 그렇게 울부짖으며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도 생각지 못하고 그저 하나님 앞에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던 바로 그 한나였는데, 하나님께서 그 한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한나가 그 아들을 품에 안게 되었으니 이제는 하나님 앞에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한나가 했던 그 찬양, 한나가 했던 그 기도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1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나가 기도하여 이르되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 한나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찬양하는 이 내용을 한번 가만히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나의 이 기도의 내용, 찬양의 내용을 한번 가만히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놀라운 것은 한나가 이 순간에 노래할 때 다르게 노래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노래하지 않았습니다. 한나가 노래할 때 어떻게 노래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이렇게 노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해요. 내 마음이 기쁘다. 내가 내 새끼 사무엘을 보니 즐겁기가 한량이 없구나. 사무엘을 내가 보니 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고 자나 깨나 내 새끼만 생각하면 행복하기 그지없구나 그렇게 노래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나는 그렇게 노래한 것이 아니라 1절의 말씀처럼 노래를 하는 겁니다.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

한나가 예전에 아들이 없다고 하는 사실 때문에 힘들어하고 괴로워했는데 이제 아들을 얻게 되었을 때 기뻐서 너무나도 하나님 앞에 감사하게 되는 것인데, 그 한나가 기뻐하는 이유, 감사하는 그 이유가 무엇인가. 내가 꿈에도 그리던 아들을 얻게 되었으니 내 마음이 기쁘다, 꿈에도 원하던 그 아들을 내가 얻게 되었으니 그것 때문에 기쁘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한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무엘이라고 하는 아들을 허락하시고 그 아들을 얻는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되고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면서 한나의 기쁨은 아들을 만난 그 기쁨이 아니라 그 아들을 가능하게 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기뻐하고 하나님을 만난 기쁨 때문에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만일 한나가 아들을 낳았다고 하는 그 사실 때문에 기뻐했다고 한다면 그 기쁨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기쁨은 얼마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들을 품에 안았지만 그러나 그 아들 때문에 기뻐했다고 한다면 한나의 기쁨은 얼마 가지 못해서 이내 실망하고 절망하고 또 괴로워하는 사람으로 바뀌게 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생을 살면서 우리들에게 고통과 슬픔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존재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복락을 누리며 저 하늘의 영광을 누리게 되기 그 전까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가게 되는 한에 있어서는 늘 슬픔과 고통과 아픔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문제가 해결이 되는가 했더니 또 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고 그 문제가 해결되는 것 같으니 또 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고 우리의 인생이 계속해서 슬픔과 아픔과 고통의 연속이 되는 것인데, 만일 아들을 주신 그것 때문에 기뻐하게 된다고 한다면 머지않아서 한나는 그 아들 때문에 가슴을 치며 속앓이를 하며 그 기쁨을 주었던 그 하나님의 은혜를 금방 잊어버리고 근심하며 걱정하게 되는 그런 모습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새옹지마라고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한나는 아들을 얻게 되는 그 순간에 그 아들 때문에 기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뻐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한다고 노래하면서 하나님 앞에 영광을 올려 드리고 있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그 선물을 바라보면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선물을 가능하게 해 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면서 즐거워하고 찬양한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기뻐해야 될 이유가 있고 감사해야 될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오로지 하나님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나가 어떻게 자기가 정말 정말 기적적으로 낳게 된 그 아들을 어떻게 해서 하나님 앞에 과감하게 드릴 수 있었겠습니까? 서원한 그대로 하나님 앞에 과감하게 바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냐면, 그 한나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가득 채워 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나의 마음을 무엇으로 가득 채울 수가 있겠습니까? 만일 당장 그 한나에게 아들이 없다고 하는 그것 때문에 정말 괴로워하고 슬펐는데, 그래서 그 빈 마음에 사무엘이라고 하는 그 아들로 그 한나의 마음을 채웠다고 한다면 그 한나의 마음이 온전히 채워질 수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경험해 봤지 않아요. 월세 살다가 전세 살면 기쁠 것 같지만 이내 또 실망하게 되는 것이고, 집을 소유하게 돼도 또 이내 실망하게 되고 더 큰 집, 더 큰 집을 향해서 갈망하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마음일 거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 이 세상의 것들은 그 어떤 것이 우리들에게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의 마음은 채워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돈이 우리들의 마음을 채울 수가 없고, 건강이 우리들의 마음을 채울 수가 없고, 사랑이나 자식이나 성공이나 그 어느 것도 우리들의 마음을 채울 수가 없기 때문에 이 세상의 것들로 우리들의 마음을 채운다고 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만족스럽지 못하게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들에게 주입하고 있는 논리가 있다고 한다면 ‘억울하면 성공하라’라고 하는 그런 이 세상의 가르침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이렇게 힘든가, 왜 우리가 이렇게 힘들고 억울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니까 억울하면 성공해라, 이게 이 세상이 우리를 향해서 강요하고 있는 사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가 다 억울한 것을 풀어내기 위해서, 우리가 정말 이 힘들고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해 내기 위해서 모두가 다 성공을 향해서 달려 나갑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박수를 쳐 줄 수 있고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할 수 있는 그 성공의 자리에까지 올라가기 위해서 모두가 다 부단히 노력을 하는데, 심지어 가정도 포기하고 모든 것들을 희생해 가면서 성공이라고 하는 신기루를 찾아다니고 있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단순히 이 세상에서만의 일이 아니라 사실 우리 성도들의 마음 가운데도 이러한 성공이라고 하는 신기루를 향해서 쫓아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심지어 목회자들도 목회의 성공이라고 하는 거룩한 목적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목회의 성공이라고 하는 신기루를 쫓아다니면서 그걸 통해서 내 자신의 정당성을 인정받고 싶어하고 사람들로부터 박수받기를 원하고 있고, 그러한 것들을 향해서 쫓아가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성공이라고 하는 신기루는 아무리 쫓아다녀도 아무나 쉽게 이룰 수 없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이 사용했던 바로 그 방법을 그대로 따라 해도 성공이 나한테는 이루어지지 않아요. 저 사람이 성공한 방법을 벤치마킹하고 그대로 따라 한다고 해도 이상하게도 나는 성공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그게 문제인 것이고, 더 나아가서 아무리 성공한다고 해도 우리의 마음을 완전히 채울 수 있을 만큼 채울 수 있는 것이 이 세상에 없다고 하는 것이 문제일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이 아니면 채울 수가 없는 커다란 빈 공간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 채워져야만 우리의 심령이 채워질 수 있는 것인데,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그 빈 공간에 이 세상의 것들을 아무리 갖다 채워 넣는다고 할지라도 그 마음을 채울 수가 없을 것인데, 한나는 아들이 없어서 괴로운 줄 알았습니다. 아들이 없어서 힘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을 달라고 기도했고, 그래서 아들을 얻었지만, 그러나 그 아들이 그 한나의 마음을 채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한나의 마음을 꽉 채워 주니까 한나가 이제는 더 이상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들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들어주시고 인정해 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며 하나님 앞에 찬양을 올리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의 기쁨의 이유가 무엇이 되어야 합니까? 오늘 우리들의 삶 가운데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쁨의 근원이 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2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여호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우리가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해야 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으로만 인하여 감사하고 하나님 때문에 즐거워해야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호와 같은 이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바로 반석과 같은 하나님이시다. 반석과 같다고 하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요? 그것은 변함도 없으시고 든든하게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 되신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이 세상의 것들이라고 하는 것은 다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무너지는 것이고, 호흡이 끊어지면 중단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이 세상의 영화도 잠깐이고 권력도 잠깐이고, 부귀도 잠깐이고, 건강도 잠깐이고,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잠시 있는 것 같으나 쉬 없어져 버리는 아침 안개와 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반석과 같이 든든하여 항상 그곳에 계신 하나님. 그래서 우리의 기쁨의 대상은, 즐거움의 이유는 하나님이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 세상에 다른 모든 것들은 다 변하고 맙니다. 절대 권력을 누렸던 수많은 통치자들이 이제는 다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한 세기를 주름잡았던 칭기스칸이나 나폴레옹이나 알렉산더 대왕이나, 그리고 후세인 정권도 무너졌고, 마르코스 정권도 무너졌고, 소련 공산당도 무너졌고, 아무리 튼튼해 보이는 그런 권력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다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요. 한때 콘크리트 지지율을 자랑하던 박근혜 정권도 한순간에 무너져 버리는 그 모습을 우리가 보면서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오직 하나님만이 반석과 같은 하나님, 우리가 영원히 의지할 수 있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으로만 기뻐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5절서부터 8절 말씀까지 보면 이 한나는 하나님을 향해서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은 풍족하던 자들을 양식을 위해 품을 팔게 하기도 하시고, 줄이던 자들을 줄이지 않게 만드시기도 하시고, 임신하지 못하던 자들에게 임신하게 하시고, 일곱을 낳게도 하시고, 많은 자녀를 둔 사람을 쇠약하게도 만드시고,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시기도 하시고, 가난하게 하시기도 하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시기도 하시고 높이시기도 하시고,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의 다른 것들을 의지할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할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3장 17절 18절 말씀에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의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오늘 우리들의 삶 가운데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신 분들이 계십니까?

지금 내 모습을 살펴볼 때 재정적으로 너무나도 어려운 상태여서 힘들고 그런 상황 가운데 있으십니까? 아니면 모든 관계가 깨어져 버리고 힘들게, 지금 나약하게 너무나도 괴로운 상태 가운데 살아가고 계신 분들이 계십습니까?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아서 괴로운 마음 가운데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한때 내가 젊었을 때는 정말 좋았는데 이제는 다 늙어버려서 이제는 내가 스스로 제대로 무엇 하나 할 수 없고 연약한 이 육신 덩어리, 정말 힘들게 힘들게, 안 아픈 곳이 없이 너무나도 힘들게 살아가고 계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은 다 없어질 수밖에 없고 언젠가는 다 끝장 날 수밖에 없지만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는 그 주님이 우리의 주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다시 한 번 기뻐하며 감사하며 일어설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한나는 지금 하나님 앞에 찬양하고 노래하고 있는데 그 시점이 어느 시점인가 한번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로 이 시점은 놀랍게도 한나가 사무엘을 엘리 제사장에게 맡겨 놓고 그리고 이제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불렀던 노래, 찬양의 노래입니다. 이제 사무엘이라고 하는 그 조그마한 아이를 세 살짜리 아이를 대제사장에게 맡기고 이제는 그 아들을 맡겨 놓고 돌아가는 그 순간에, 여러분 같으면 어떤 마음을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군대에 보낸 아들을 놓고 여러분들은 기뻐할 수가 있겠습니까? 자식을 멀리 떠나보내면서 기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보통 사람들 같으면 이 순간에 찬양이 나올 수 없을 것 같아요. 이별의 순간에는 찬양보다 눈물이 더 어울리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한나는 이 순간에 하나님 앞에 찬양을 드릴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발견했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는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감사의 찬양을 올릴 수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감사한 것은 우리 하나님께서도 그 아들 독생자를 우리 위해 내어주실 때에, 저 높고 높은 보좌 위에서 그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실 때 하나님께서도 그런 기쁨의 찬양을 부르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저 높고 높은 보좌 위에서 이 세상으로 오신 때가 바로 성탄절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 성탄절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동원하면서 불렀던 찬양을 여러분들이 기억하십니까? 누가복음 2장 14절의 말씀을 보면 천사들이 이렇게 찬양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탄생하시는 그때 천사들이 동원돼서 그들이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올리면서 불렀던 노래 가사, 노랫말이 무엇이냐면,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노래했는데 이 가사를 가만히 보면 그 뒷부분은 이해가 잘될 것 같아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순종의 삶을 사시고,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피 흘려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류가 구원을 받게 되고 하나님과의 화해가 이루어지고 죄악 가운데 있던 사람들이 이제 죄 용서함을 받게 되는 그 구원의 사건을 생각해 본다고 하면 이 땅 위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 중에 평화라고 하는 말이 그 말이 맞는 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반부의 노래 가사는 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무엇입니까?

곧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기 위해서 그 아들이 저 높고 높은 보좌 위에서 이 낮고 천한 이 땅까지 오게 되는 것이고, 그리고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시는 것이 예수님의 탄생인데, 그 탄생을 하나님께는 영광이라, 자식을 십자가에 내어주어 보내는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하는 이 고백이 이해가 되십니까?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베풀어 주시는 그 사랑을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으로 우리 주님께서 받으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의 가는 길 가운데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어떠한 순간에도 어떠한 어려움 가운데도 주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승리해 나가는,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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