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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고리

뉴질랜드 집회를 위해 가는 항공편은 중간에 중국 광저우를 거치는 길이기에 인천공항에서 오클랜드 공항 도착까지 20시간 25분이 걸리는 긴 여정이었다. 인천공항으로 가기 위해 전주에서 채비하고 나간 시점부터 계산해서 오클랜드에서 머물 숙소에 들어간 시간까지를 계산하면 25시간이 훨씬 넘는 대 장정이었다. 게다가 중국 광저우에서 뉴질랜드의 오클랜드까지 가는 비행기는 소위 레드아이(red eye)로 자야하는 시간에 타는 비행기여서 이번 여행이 쉽지 않을 것이라 처음부터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었다. 

이럴 때 제일 좋은 방법이 있다면 과정을 최대한 즐기는 것이었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라고 현재를 누리는 것이다. 오클랜드에 도착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라 비행기 안에서의 시간과 중간에 광저우에서 다른 비행기를 기다리는 시간 등 모든 순간을 즐기자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정책은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다. 광저우 공항 여기저기를 둘러보면서 눈요기도 하고 한 음식점에 들어가 완탕국수 하나 시켜 먹기도 했다. 비행기 안에서 제공해주는 음식도 맛있게 먹었다. 감사한 것은 어떤 음식이 나와도 맛있게 먹을 수 있다는 점이다. 객관적으로 비교하면 중국 비행기의 기내식은 국내 비행사들에 비해 현저히 떨어졌지만 내게는 그 어떤 음식도 꿀맛처럼 느껴지니 말이다. 

하지만 체력적인 한계는 분명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지칠대로 지친 상태에서 오클랜드 행 항공기를 탑승하게 되었다. 이 비행기 안에서 잠이라도 푹 잘 수 있다면 좋겠다는 소망이 생겼다. 그래야 뉴질랜드에서의 집회를 잘 마칠 수 있을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우리 자리가 맨 뒷좌석이었다. 앞보다는 더 진동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도 받아들이고 들어가는데 우리 바로 앞 좌석에 한 살도 안 되는 어린아이를 데리고 온 뉴질랜드인 부부가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앞이 깜깜해졌다. 이 아이가 칭얼대면셔 비행하는 내내 힘들게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아이는 단 한번도 칭얼대지 않았다. 생글생글 웃으며 있었고 잠이 들 때에도 잠투정하지 않고 잠드는 것이 아닌가? 나는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이 아이는 왜 칭얼거리거나 보채지 않을까? 가만히 보니 이 아이의 부모는 아이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세심하게 살폈고 그 아이가 원하는대로 반응해주는 것이었다. 사전에 불만이 없게 만드니 칭얼거리지 않는게 당연한 것 같았다. 

이 아이를 보면서 우리 아이들을 생각해보았다. 왜 우리 아이들은 칭얼대고 보챌까? 물론 일반화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겠지만, 대체로 우리 아이들의 울고 보채고 떼쓰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그건 아마도 그 만큼 아이에게 만족스럽지 못한 게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부모들은 아이의 요구가 무엇인지 민감하게 들으려고 하기보다는 그저 부모의 입장에서 아이에게 요구하고 그것을 아이가 따라줄 것을 강요하는 때문이 아닐까? 아이는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니까 계속 자신만의 방법으로 표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들은 그렇게 자라왔다. 어른들의 기준에 아이들이 맞추어 행동하도록 훈련받아왔다. 장유유서라고 항상 어른들이 먼저였고 어른들이 기준이었다. 그래서 갖난 아이들에게조차 어른들의 기준으로 왜 우느냐고 윽박지르는 경우를 만난다, 왜그럴까? 그것은 어른들 중심으로 체계화된 우리 문화가 빚어낸 것이다. 이에 반하여 서양의 부모들은 아이들 중심이다. 과도하게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대체로 이들은 아이의 요구에 어른이 맞추어준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아이들이 보채거나 떼쓰지 않는다. 

이런 육아방식 때문인지 우리 아이들은 생존력이 강해보인다. 어디에 내어 놓아도 끈질기게 살아남는 특성이 우리 민족에게 있다. 반면 서양의 아이들은 뭔지모를 끈질김이 부족하다. 그래서 한국식 육아방법은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는 것 같다. 마치 독수리가 새끼를 매몰차게 훈련시키듯 우리 한국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생존경쟁을 몸으로 익히는 것 같다. 떼를 써서라도 자신들의 욕구를 관철시키면서 녹록지 않은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어려서부터 체득하는 것이다. 

이런 문화에서 아쉬운 것은 양보와 배려, 그리고 약자에 대한 긍휼의 마음이다. 아주 중요한 미덕인데 우리 문화 속에서는 종종 실패와 패배의 동의어로 인식되어 결여되는 것이다. 반면 우리는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것에 익숙해져있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약자 앞에서는 한 없이 강해지고 강자 앞에서는 한 없이 약해진다. 그래야 내 권리를 주장할 수 있고 또한 빼앗기지 않을테니까 말이다. 우리에게 자주 나타나는 빨리빨리 문화는 그러한 구도 속에서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최근 부산 여중생 폭행 사건으로 인해 우리는 충격에 빠졌다. 어린 학생들에게서 그런 잔인함이 있을 수 있다니? 그러면서 우리는 애써 그 학생들은 예외적인 불량학생들이었다고 정의해버린다. 대부분의 학생들이나 대부분의 선량한 시민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돌연변이일 뿐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내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그 아이들은 한국적인 문화가 만들어낸 열매인 것이고, 우리 모두는 기회와 여건이 맞아떨어지면 충분히 그들 이상으로 악마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지금 그런대로 괜찮은 사람인 것처럼 살아가는 것은 그와 비슷한 상황이 아닌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흔히 듣는 갑질 사건들이 결국 똑같은 것이 아니던가? 장애인들을 위한 학교를 결코 세울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도 결코 부끄럼을 모르는 자들의 모습은 부산 여중생 폭행 가해자들과 다를게 없다. 그 양상은 조금 다르겠지만, 우리에게 권력이 주어지고 충분히 화풀이할 만한 대상과 상황이 만들어지면 우리는 순식간에 악마로 변할 수 있다. 

나는 그러한 문화가 이미 육아방식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믿는다. 아이들이 자신들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떼를 써야하는 방식으로 훈련되는 한, 그리고 생존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가야 함을 주입받는 한 우리 속에 내재되어 있는 악마성은 사라질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악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어른의 입장에서 아이를 통제하기보다는 아이들의 요구가 무엇인지 들어야 한다. 강자의 입장에서 약자를 억압하고 약탈하기보다는 양보와 배려, 그리고 긍휼의 마음으로 다가가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그리고 완전히 망가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셨다. 뉴질랜드에서의 집회를 시작하기 전, 피곤한 몸이지만 주님의 긍휼을 생각하며 다시 감사의 마음을 가져본다.

2017.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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