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가 사무엘상 2장의 말씀을 읽었는데 오늘 이 말씀은 어쩌면 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그런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이었던 홉니와 비느하스라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제사를 모욕하고 또 마음대로 죄를 짓는 그런 모습들을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우리가 함께 읽었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누구입니까? 홉니와 비느하스는 바로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이자 자신들도 제사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위해서 특별하게 하나님께서 구별하여 세우신 성직자 가정이었고, 성직자들이었습니다. 제사장의 임무가 무엇입니까? 백성들이 죄를 지으면 그 백성들의 죄를 대신해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하며 용서를 빌어 줄 것을 간구하는 그 화해와 중보의 직책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바로 제사장이라고 하는 직책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백성들이 죄를 지으면 그것을 가슴에 품고 애통해 하며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될 자들이 바로 제사장들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온 세상이 죄를 다 짓는다고 할지라도 이들만큼은 최후의 보루처럼 끝까지 남아서 믿음을 지켜야 되는, 하나님 앞에서 신실함을 지켜야 되는 자들이 바로 이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바로 그런 위치에 있었던 홉니와 비느하스라고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무시하고 누구보다도 더 악한 죄악을 저지르는 그런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을 오늘 본문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12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이들이 행실이 나빴다고 하는 사실과 그리고 여호와를 알지 못했었다고 하는 두 가지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 두 가지 사실은 아주 밀접하게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왜 행실이 나쁘게 됩니까? 그것은 여호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일 여호와가 누구신지 안다고 한다면 악행을 저지를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하는 우리 속담이 있듯이 범이 무서운 줄 안다고 하면 함부로 까불지 않을 텐데, 범이 무서운 줄 모르니까 함부로 까부는 것처럼, 하나님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존재인가라고 하는 사실을 이들이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이 여호와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행실은 악한 행실을 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이, 아니 본인들이 제사장이면서 어떻게 여호와를 모를 수가 있었겠습니까?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지식적으로 몰랐다고 하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아니, 지식으로 말하자고 한다면 어쩌면 그 누구보다도 더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알았을 것입니다.
일반 이스라엘 백성들보다도 더 확실하게 하나님에 대해서 더 많이 배웠을 것이고, 그 누구보다도 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가를 충분히 알았을 것이고, 하나님 앞에 어떻게 제사를 드려야 옳은 것인지 그 예법도 아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아주 유명한 신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러한 목회자들과 마찬가지로 이들은 당시에 하나님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고, 제사 드리는 법,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여러 가지 그 독특한 방법들을 다 알고 있는 그런 종교적인 면에 있어서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었던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지식적인 그런 내용을 알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이 정말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그 앞에서 두려워할 줄 알아야 되고 그 앞에서 겸손해야 할 것이고, 하나님과의 그 생생한 관계 가운데서 하나님과의 그 사랑을 누리고 하나님과의 그 복된 관계를 누릴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될 텐데,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그냥 지식적인 앎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고, 실제적인 그 관계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바로 이 홉니와 비느하스였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들이 어떻게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 이들은 자기 욕심에 따라서 그 재물을 마음껏 빼앗아 가 버렸는데, 17절 말씀에 보니까 이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그들은 여호와께 드릴 그 제사의 재물들을 마음대로 갈취해 가면서, 하나님 앞에 먼저 드리고 드리고 난 다음에 가져가야 되는데, 마음대로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께 드리기도 전에 자신들이 그것들을 가져가면서 착취하고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하는 행동을 이 홉니와 비느하스라고 하는 사람들이 행했다고 오늘 본문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하나님의 제사장이었고 하나님을 섬기는 직분 가운데 있었던 바로 이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멸시하고 무시하고 하나님의 제사를 이렇게 폄훼하는 그런 악한 일을 저지를 수가 있었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 인생이 너무나도 어쩔 수 없는 죄성으로 가득 차 있는 인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견물생심이라고, 죄성이 있는 우리들은 제사장이 아니라 제사장의 할아버지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죄를 지을 가능성들이 항상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인간은 죄가 많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금세 타락할 수밖에 없는 너무나도 나약한 존재가 바로 우리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간구해야 합니다. 뭐라고 간구해야 됩니까? 주여,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고 한다면 우리도 똑같이 홉니와 비느하스와 같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많이 있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에 매 순간순간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할 때마다 우리가 드려야 될 기도의 제목 가운데 가장 시급하게 기도할 제목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 우리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했던 다윗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얼마나 위대한 인물입니까?
다윗은 믿음으로 골리앗을 물리친 사람이었고, 다윗은 원수들을 용서할 수 있는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었고, 고난과 환란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지하는 그런 사람이었고, 전쟁을 할 때 자기가 마음대로 전쟁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늘 질문을 던지면서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면 그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던 사람이 바로 다윗이라고 하는 위대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바로 이 다윗 왕과 같은 위대한 사람이 밧세바라고 하는 한 여인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졌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그때 다윗은 밧세바 앞에서 무너져 버린 이후에 그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기도한 내용이 시편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서 드렸던 그 기도의 시편 가운데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시편 51편 10절서부터 12절의 말씀에 이렇게 다윗이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바로 이 기도가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드려야 될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잡아 주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마음을 붙잡아 주시고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심령 가운데 성령을 부어주셔서 정말 죄를 싫어하는 마음을 주시고, 그리고 우리들의 마음이 죄를 싫어하도록 성령께서 정직한 영을 우리들의 마음속에 주셔서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 주장하여 주셔야만 우리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매 순간순간 우리는 너무나도 죄에 쉽게 노출될 수밖에 없는 인간들이기 때문에 매 순간순간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주의 성령을 부어주셔서 우리의 마음속에 정직한 영을 부어주시고, 나를 쫓아내지 마시고, 성령을 거두지 마시고, 주의 은혜를 거두지 말아 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은혜를 간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우리는 순식간에 교만의 죄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매어 달리지 아니하면 순식간에 우리는 탐욕의 죄악에 빠지게 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매어 달리지 아니하면 우리는 순식간에 악한 자의 도구로 사용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악한 도구로 사용되는 예를 얼마나 많이 보아 왔습니까?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이제는 내가 주님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고백했던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이 아닙니까?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겠습니다. 교회를 위해서 내 평생 바치겠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다짐하며 서약하며 그렇게 세웠던 직분자들이 오히려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교회를 힘들게 하고 복음을 전하는 데 걸림돌이 되어 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는데, 그게 바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나도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지 않는다고 한다면 한순간에 교회를 훼방하는 사람으로, 은혜를 거역하는 사람으로,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람으로, 디딤돌이 아니라 걸림돌이 되는 사람으로 쉽게 변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들을 생각하면서 주 앞에 겸손하게 엎드려서 하나님, 날마다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라고 하는 이 사람들은 재물에만 손을 댄 것이 아니라 성적으로도 문란했다고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기록하고 있습니다.
22절의 말씀을 보면 회막 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동침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한 여인과 동침했다고 기록한 것이 아니라 수종 드는 여인들과, 복수의 여인들과 동침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가 어떠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가를 알 수 있는데, 죄라고 하는 것은 점점점 더 확대되는 그런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이들이 처음에 죄를 지을 때 처음부터 이 여자 저 여자 수많은 여인들과 함께 그런 간음의 죄를 지으려고 계획을 했겠는가 하면 그렇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을 해요. 이들이 재물에 대해서 욕심을 낼 때 그렇게 악하게 욕심을 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을 해요. 아마도 이들이 죄를 지을 그 첫 단계에서는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죄를 범하기 시작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고 하는 그런 말처럼 이들은 아마도 처음에 죄를 지을 때 아주 작은 죄, 정말 작은 한 죄를 지으면서 그것만 한 번만 하고 끝내겠다고 생각했을런지 모르겠지만, 죄는 한 번 짓기 시작하면 죄가 죄를 낳고 계속해서 더 큰 죄, 더 큰 죄, 더 많은 죄를 지으면서 죄를 지을수록 담대해지고 뻔뻔해지고, 죄를 지을수록 양심이 무디어져서 더 악한 죄를 짓게 되는, 그래서 어마어마한 사악한 죄악까지 저지르게 되는 모습으로 바뀌어 버리는 것이 바로 죄의 특성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우리에게 있는 아주 정말 작은 죄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엎드려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가르치실 때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28절의 말씀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니 여인을 만지는 것도 아니고 눈으로 보기만 해도 이미 간음했다고 말씀해 주시는 이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 아마 너무 심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주님, 우리가 실제적으로 범죄한 것도 아니고 그냥 눈으로만 본 것인데 그것도 죄가 됩니까? 아니 살인한 것도 아니고 그냥 화 한 번 낸 것 가지고 그게 살인죄라고 말한다고 한다면, 화 한 번 낸 걸 가지고 지옥불에 떨어질 것이라고 말한다고 하면 너무한 것 아니겠느냐고, 그래서 어떻게 우리 인간이 그 화도 안 내고 살 수 있겠느냐고 아마 주님을 향해서 항변하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아니에요. 죄는 어디서부터 시작하냐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죄입니다.
화내는 것에서부터 죄가 시작하는 것이고, 욕심을 내는 데서부터 죄가 시작하는 것이고, 조그마한 거짓말에서부터 죄가 시작하는 것이고, 조그마한 눈길 하나에서부터 죄가 시작되기 때문에 우리가 그 처음부터 긴장을 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바로 서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는다고 하면 어느새 우리가 아주 깊은 죄악 가운데 빠져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15절의 말씀에서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바로 이거야. 처음 욕심을 부리는 그 순간에는 죄가 아닌 것 같아요.
그런데 결국 사망으로 가는 겁니다. 처음 조그마한 죄를 저지를 때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요.
그런데 결국 그것이 우리들을 파멸로 이끌게 되는 죄악의 길로 인도하게 되는 것인데, 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우리들 마음 가운데 있는 조그마한 잘못들도 하나님 앞에 해결하고 지나가지 아니하면 안 되는 것이고, 담배 불씨 하나가 큰 산에 산불을 일으키게 되는 것처럼, 우리들의 조그마한 미움과 분노와 시기와 질투와 탐욕들이 결국에는 우리들로 하여금 전혀 돌이킬 수 없는 죄악으로 이끌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죄의 시초에서부터 죄의 고리를 끊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매일매일 성령 하나님의 음성을 귀 기울여 들으면서 주님께서 우리들의 양심을 향해서 문을 두드려 줄 때 그 음성을 애써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양심의 소리가 들려올 때 그 앞에서 당장 중단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믿음의 길, 의의 길로 달려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읽어보면 아주 특이한 표현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25절의 말씀입니다. 엘리 제사장은 아들들을 향해서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만일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그를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되, 그들이 자기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더라. 이 마지막 부분을 살펴보면 아주 특이한 표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은 아버지가 훈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훈계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는데, 왜 그 아들들이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죽이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사실 이 표현은 특이한 표현이라기보다는 성경에 아주 많이 등장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또 다른 예를 찾아본다고 하면 이집트의 바로 왕의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모세는 바로 왕에게 나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바로 왕이시여, 우리 민족을 하나님께서 내어 보내라고 말씀해 주세요. 우리 민족을 내어 보내 달라고 요청을 했지만 바로는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지 않습니다. 모세가 계속해서 여러 가지 재앙을 베풀면서 그 재앙을 통해서 경고하고 힘들게 하면서, 그래서 그 애굽 왕의 항복을 받아내려고 했지만 10가지 재앙이 다 지날 때까지 이 이집트의 바로 왕은 마음을 강팍하게 하고 완악하게 해서 이스라엘 민족들을 결코 보내 주지 않고 있는 그런 내용이 출애굽기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는데, 그 바로 왕의 마음이 완악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출애굽기 9장 12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과 같더라. 이 표현은 참으로 이해하기가 어려운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 민족을 건져 내라고 명령해 주셨는데 또 반대편으로 바로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완악하게 만드셨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완악하게 만드셨기 때문에 바로가 그 모세의 요구를 듣지 않았다는 겁니다. 아무리 모세가 가서 이야기를 하고 재앙을 내리고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내어 보내라고 얘기했지만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들어 버리셨기 때문에 바로는 모세의 말을 듣지 않고 이스라엘 민족을 내어 보내지 않았다고 출애굽기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그 말씀과 비슷하게 홉니와 비느하스를 향해서 엘리 제사장이 이야기를 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면 너희가 심판을 받을지 모르겠는데 그러지 말아라, 그러지 말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데도 홉니와 비느하스가 그 엘리 제사장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는데 왜 듣지 않았는가?
하나님께서 홉니와 비느하스를 죽이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그들이 듣지 않았다고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기록하고 있는 겁니다. 이러한 표현은 상당히 혼란스러운 표현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그렇게 된다고 한다면 죄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이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지 않느냐고 하는 질문이 떠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치 인형극을 할 때 그 꼭두각시 인형극을 할 때 그 꼭두각시에게 그 행동에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꼭두각시 인형을 움직이는 그 사람의 손에 의해서 꼭두각시는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결국 그 꼭두각시가 악을 행했다고 한다면 꼭두각시가 어떤 악을 행하고 싶어서 악을 행한 것이 아니라 그 꼭두각시를 움직이고 있는 그 사람의 그 행동이 그렇게 만들어서 꼭두각시가 그런 것이지, 꼭두각시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만일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드셔서 그래서 죄를 범하게 만들었다고 한다면 죄에 대한 책임을 바로에게 물을 수 있겠는가? 홉니와 비느하스에게 물을 수가 있겠는가 하는 그런 질문을 우리가 던져 볼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 전체의 교훈을 읽어보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죄에 대한 책임이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사람에게 있는 것이며, 죄를 지은 그 사람이 책임이 있는 것이지 하나님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성경 전체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지난번에 가룟 유다의 이야기를 살펴보았는데요. 가룟 유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가룟 유다는 하나님께서 계획해 놓으신 인류 구원의 그 프로그램 가운데 등장하는 등장 배우처럼 보여집니다.
하나님께서 만세 전부터 우리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계획을 세워 놓으셨는데, 그것은 그 아들을 우리 이 세상에 보내어 주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만드시고 피 흘리시고 물을 흘리시며 그 십자가 위에서 죽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해 주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계획이 있는데, 그 계획 가운데 바로 이 가룟 유다가 있어서 가룟 유다가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대제사장들이 있었고 빌라도가 있었기 때문에 결국 그들의 손길들을 통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된 것인데, 그렇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만세전부터의 예정과 계획과 섭리 가운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이 일어났다고 한다면 과연 그 책임을 가룟 유다에게 물을 수 있겠는가 하는 그런 질문들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떠오르게 됩니다. 실제로 한 번은 그 가룟 유다의 복음서라고 하는 영지주의 문서가 발견된 적이 있습니다. 몇 년 전에 그렇게 발견된 문서라고 하는데요. 아마 혹시 뉴스를 들어 보신 분들이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그 영지주의 문서인 가룟 유다 복음서에 보면 가룟 유다야말로 이 예수님의 구원의 사역을 이룬 가장 영웅이라고 그렇게, 그런 식의 묘사가 되어 있다고 하는 그런 문서가 발견이 됐습니다. 물론 그 문서는 한 2세기, 3세기경의 문서로서 이단 종파에 속한 문서이긴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들이 종종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 그 길에 가룟 유다가 그 역할들을 감당했다고 한다면 누가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런 죄를 범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 책임을 어떻게 사람에게 물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는 질문들을 우리가 던져 볼 수 있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이 질문에 대해서 답변을 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6장 24절의 말씀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오해하지 마십시오. 가룟 유다가 없으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는 게 아닙니다. 가룟 유다가 없어도 예수님께서 피 흘려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서 구원의 역할을 다 감당해 내실 수가 있어요. 내가 그 악역을 맡지 않고 내가 그런 죄를 저지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의의와 하나님의 뜻은 정확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그 길에 내가 악역으로 사용되고 죄를 짓는 자로 사용된다고 한다면 그것처럼 안타까운 일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라고 하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마다 주님, 나를 선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한 번 더 질문을 던져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왜 성경은 마치 하나님에게 죄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런 참 위험한 표현들을 성경에서 사용하고 있는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그렇게 홉니와 비느하스의 마음을 그렇게 만드셨다라고 표현하지 않았으면 더 좋을 것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드셨다고 하는 그 표현을 사용하지 않으면 훨씬 더 좋을 것 같다고 생각들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굳이 오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이 표현을 굳이 사용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그것은 아무리 악한 일이 이 세상에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그 악한 일이, 죄의 모습들이 하나님의 통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악이 하나님과 상관없이 마음대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악이 하나님과 관계없이 무소불위의 어마어마한 권력을 가지고 있어서 어마어마한 힘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통제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악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악이 사악하고 커다란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그 권세 아래 새 발의 피라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 표현을 위험해 보임에도 불구하고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악이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 악에 대해서 속수무책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간섭하시고 통제하시고 모든 것들을 조절하시는 가운데, 마치 예방주사를 놓을 때 그 예방주사, 그 약에 들어 있는 그 바이러스들의 그 세기를 조절해서 약하게 만들어서 예방주사를 놓는 것처럼, 이 악이라고 하는 것도 아무런 통제되지 아니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어마어마한 파워를 가진 것이 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악마저도 다 제어하시고, 하나님께서 그 악에 대한 통치권을 갖고 계시고 그것을 궁극적으로 물리칠 수 있는 힘과 권세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우리에게 알려 주기 위해서, 이 악에 대한 그 통치권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이 말씀을 우리들에게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나쁜 일들과 악들이 하나님이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이 전혀 손쓰지 못하는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어찌할 수 없는 사이에 그렇게 해서 우리들 사이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이 세상을 통치하고 계시고,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는 것까지 일일이 통치하시는 만왕의 왕 하나님의 통치권 아래서 제한적으로 발생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런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될 또 하나의 말씀이 있는데요. 그것은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12절에서 17절까지는 홉니와 비느하스의 악한 죄악상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가 18절에서부터 21절까지에는 사무엘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 사무엘의 이야기를 18절에서부터 21절까지 쓰는 가운데 21절에서는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21절 마지막의 말씀을 보니까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 이 표현을 한번 주목해서 보십시오.
그리고 또 22절서부터 25절까지 홉니와 비느하스의 간음에 대한 죄를 이야기하다가 26절에서 또 이런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26절 말씀,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람에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 이게 바로 하나님의 역사예요. 인생의 어두움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이 사회가 악하면 악할수록 이제는 소망이 없구나. 제사장 가문도 타락해 버리고 모두가 다 악을 행하면서 제멋대로 살아가고 있구나. 그 어느 곳에도 우리가 소망을 둘 수 없다고 생각되는 그런 어두컴컴한 세상이 지금 깊어져만 가고 있는데,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전혀 손도 쓰지 못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어둠의 심장부에서, 죄악의 심장부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구원자를 하나님께서 만들어 내고 계시다고 하는 거예요. 사무엘을 길러 내고 계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바라볼 수가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 세상을 바라볼 때 사무엘에 기록된 시대와 너무나도 비슷하다고 하는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하나님을 무시하고 모욕하고 제사를 아주 참 더럽혔던 것처럼 오늘날 크리스천들 사이에서 우리 교회의 모습들을 살펴보면, 참 좋은 소식이 들렸으면 좋겠는데, 교회에서 보여지는 여러 가지 악하고 더러운 모습들, 그 악한 모습들 사이에 누가 서 있는가. 거룩해야 될 목사가 악을 행하고 있고, 장로들이 죄악을 저지르고 있고,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악을 행하고 있는 그런 모습들,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이름을 이제는 들고 다니기가 정말 창피할 정도로 더러워진 오늘 이 시대의 한국 기독교의 모습들을 살펴보면, 음란하고 타락하고 그리고 탐욕이 가득한 오늘날 한국 교회의 모습들을 바라보게 된다면 과연 이 한국 기독교에 소망이 있겠는가 한탄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
아무리 깜깜한 세상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죽은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도 역사하고 계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기록된 이 사무엘상의 말씀은 신약에 있는 말씀과 아주 비슷한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2장 52절의 말씀을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을 받더라.
인류가 악에 빠져서 더러워졌을 때, 이 세상이 죄악에 빠지고 이젠 절망밖에 남지 않았을 때, 이스라엘 민족은 로마의 지배 가운데서 더 이상 소망이 없다고 울부짖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소망이 없는 이 세상에 참된 소망으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 세상을 바라보며 절망스러울 때, 모든 것들이 다 악을 향해서 달려갈 때, 심지어 그 악마저도 통제하고 다스리시는 우리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그 아들을 주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우리를 위해서 피 흘려 주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일한 소망을 얻으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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