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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마음을 지키라 (잠 4:20-27)

예수님께서 해 주신 말씀을 보면 참 감동적인 말씀들 참 은혜로운 말씀들을 예수님께서 많이 말씀해 주셨는데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는 무시무시한 것 같은 그런 말씀들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29절과 30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일 내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내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에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내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내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무시무시한 말씀이죠. 죄를 짓게 한다고 하면 그 죄를 짓게 만드는 눈을 빼어 버리는 게 낫다. 만일 내 오른손이 죄를 짓게 만든다고 한다면 내 오른손을 잘라버리는 게 낫다라고 말씀해 주시는데 그렇게 말씀해 주시는 그 말씀이 일리가 있습니다. 온전한 몸을 가지고 성한 몸을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차라리 눈 하나 없더라도 차라리 손 하나 없더라도 신체 일부가 없더라도 천국에 가는 것이 훨씬 낫지 않느냐? 그 말씀이거든요. 논리적으로 이론적으로 아주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무시무시한 말씀이죠. 눈을 뽑아야 하고 오른손을 절단해야 하고 뿐만 아니라 다른 신체의 장기들을 절단해야만 한다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정말 어떻게 보면 끔찍하고도 무시무시한 말씀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혹시 이 자리에 앉아 계신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 예수님의 이 말씀을 진지하게 묵상하면서 오른손을 내가 잘라버릴까 생각하신 성도님 혹시 계십니까? 내가 지금 자꾸만 눈으로 죄를 짓는데 내 눈을 좀 빼버렸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신 성도님 혹시 계십니까? 그러면 그냥 성경 말씀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그냥 흘려버리고 계십니까? 예수님 말씀. 예수님 말씀하시는 건 그냥 말씀하시는 거고 그냥 귀로 흘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고 계십니까? 이 말씀을 아주 진지하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뭐라고 대답해야 될지 모르시겠죠?

그런데 교회 역사를 보면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말씀을 좋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런데 이 말씀까지는 순종하기가 어렵다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요. 그런데 역사상 이 말씀을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인 성도님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그리고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자꾸만 내 속에서부터 죄를. 짓게 하는 그런 악한 생각들이 떠오르고 그리고 내가 실제로 그렇게 죄를 반복하는 것을 정말 괴로워하면서 하나님 내가 이 죄를 더 이상 짓고 싶지 않습니다. 이 죄를 끊어버리고 싶습니다 라고 하는 그런 간절한 마음에 실제로 자신의 신체 일부를 절단해 버린 그런 성도들이 역사상 몇 명 있습니다. 스스로 고자가 된 그런 성도들도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질문 한번 던져볼 필요가 있겠는데요. 정말 우리도 예수님 말씀처럼 진지하게 이 말씀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우리도 지옥에 가는 것보다는 눈이라도 빼버리는 게 낫겠고 손이라도 잘라버리는 게 낫겠고 아니면 내 신체 일부를 절단해서라도 내가 신앙생활을 바르게 해야 하는 것이 옳을까라고 하는 그런 진지한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런 신체 일부를 절단해서 완전히 죄를 범하지 않을 수만 있다고 한다면 아마 그렇게 하는 것이 맞을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체를 절단한다고 해서 죄를 안 짓는 게 아니라고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손가락을 잘라버리면 더 이상 그 옛날의 습성들을 더 이상 안 했으면 좋겠는데 손가락을 잘라버리니까 어떻게 합니까? 발가락으로 화투를 친단 말이에요. 손가락을 잘라서 해결될 문제가 아닌 거예요. 죄의 문제가 죄의 문제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겁니다. 내가 이것을 눈을 빼버리면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을까? 오른손을 잘라버리면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을까? 그렇게 결단하는 그 마음은 정말 진지한 마음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겠지만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그런 결단을 한다고 해서 그래서 이제는 죄를 전혀 짓지 않은 완벽한 사람으로 바뀌게 될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방법이 있는데요. 예수님의 말씀은 일종의 조건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만일 만일 무엇무엇 한다면 무엇 무엇을 해야 한다라고 하는 식의 조건문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헬라어 원문에서 보면 이 조건문이 참일 때 귀결절도 참이라고 하는 형식의 문장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눈이 너로 하여금 죄를 짓는 것이 참이라고 한다면 그렇다고 한다면 반드시 눈을 빼어버려야 한다고 하는 것이고 만일 오른손이 너로 하여금 죄를 쉽게 만들 는 것이 참이라고 한다면 그렇다고 한다면 너희들의 오른손을 잘라버려야 한다고 하는 형식의 문장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문장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는 게 무엇이냐면 눈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드는 게 아닌 거예요. 오른손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드는 것이 아닌 건 거죠. 오른손을 사용해서 눈을 통해서 우리가 죄를 범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우리가 죄를 짓게 만드는 그 원인이 눈에 있느냐? 아니에요. 오른손에 있느냐? 아니에요. 그래서 눈을 빼내도 오른손을 잘라내도 계속해서 죄를 짓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눈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들고 오른손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만일 그게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한다면 잘라내버려야 하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드는 것은 눈이 죄를 짓게 만드는 것도 아니고 오른손이 죄를 짓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짓게 만드는 게.

무엇이 죄를 짓게 만드는 것이죠? 마음이 죄를 짓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자문서 4장의 말씀을 보면. 특별히 23절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내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나느니라.” 생명이 어디에서부터 나오느냐? 사람의 마음에서부터 나온다는 겁니다. 생명이 나온다는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일까요? 우리가 죄를 짓고 망하게 되는 것도 어디서부터 비롯되는가? 우리가 사느냐? 죽느냐? 우리가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되느냐? 거룩한 지 되지 못하게 되느냐? 이 모든 것들이 어디에 달려 있다고 하는 말입니까? 우리의 마음에 달려 있다고 오늘 잠언서 4장 23절 가운데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이 범죄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손이 범죄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결국 우리들의 모든 행동이 어디에서부터 나오는가? 사람의 마음에서부터 나온 것이다는 것이 오늘 잠언서 4장 23절에서 들려주시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아직 행동으로 구체화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미 마음속에서부터 악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이미 죄를 지은 것입니다. 밖으로 구체적으로 실행화되고 구체적으로 모든 결과물들이 나타나지 않은 채 그저 마음 속에서만 생각을 하고 있고 마음 속에서 그렇게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그 단계만 가지고 있어도 이미 그 죄가 배태되어 있는 것이고 이미 그 상태가 벌써 죄를 지은 상태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에서부터 모든 것이 나오는 것이고 마음에서부터 생명이 나오고 마음에서부터 모든 것이 나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의 말씀을 하시면서 마태복음 5장 28절의 말씀에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력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가늠하였느니라.” 실제적으로 내가 성범죄를 저지르는 그런 실제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구체적으로 그런 행동들로 결과되어지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마음속에서 이미 음욕을 품고 있다고 한다면 벌써 범죄를 저지른 것과 같다고 주님께서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내가 실제로 칼로 찔러서 죽이지 않고 살인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이미 내 마음 가운데서 어떤 사람을 향해서 분노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정말 그 사람에 대한 아주 사람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내 마음 가운데 이미 있다고 한다면 실제로 죽이지 않았어도 이미 살인죄를 범한 것과 같다고 습니까 께서 말씀해 주셨는데요.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가? 바로 잠언서 4장 23절의 말씀 모든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서부터 비롯된다고 하는 말씀 가운데서 나오신 나온 말씀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범한 죄와 마음으로만 지은 죄가 다 똑같다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죄가 경중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죄가 더 큰 죄가 있고 작은 죄가 있을까요? 모든 죄가 다 똑같은 죄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죄의 경중이 있습니까? 경중이 없습니까? 모든 죄가 다 똑같습니까? 어떤 죄는 더 큰 죄가 있고 어떤 죄는 좀 작은 죄가 있습니까? 한번 질문을 던져봐야 되나요? 오래 간만에? 죄의 경중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모든 죄가 다 똑같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에 대한 대답은 yes and no입니다. 경중이 있기도 하고 경중이 없기도 하다는 것이 정답입니다.

우선 교회 경중 자체가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데요. 다시 말하자면 실제로 사람을 찔러서 죽인 살인죄나 마음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그 미워하는 그 마음이나 그 죄가 살인죄가 더 크고 마음으로만 미워한 것은 그것은 뭐 별거 아니야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죄가 다 똑같은 죄고 모든 죄가 다 무서운 죄라고 이야기 똑같은 그 크기가 있는 것이지 실제로 살인을 범하면 더 큰 죄고 마음으로만 미워하는 것은 그건 괜찮은 죄다. 그 문제 안 된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느냐? 라고 하는 그런 질문에 대해서는 아니요. 성경의 가르침은 무엇이냐 하면 마음으로 짓는 죄이든 실제로 사람을 죽이는 죄이든 다 똑같은 죄라고 성경에서는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 똑같나요? 어떤 점에서? “어떤 점에서”는 항상 우리가 질문을 던져야 되는데요. 모든 죄가 다 똑같다고 하는 의미는 어떤 점에서 똑같다고 하는 말입니까?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 다 똑같은 죄입니다. 살인죄도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아야 될 큰 죄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마음속으로 미워한 죄도 그것도 그냥 죄가 아니라 아주 심각한 하나님의 관점으로 본다고 한다면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을 그런 아주 무서운 죄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마음으로 이미 음욕을 품었다고 한다면 이미 간음죄다. 이미 그것은 이미 간음죄를 범한 거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셨어요. 똑같다는 거죠. 너희가 미워하고 “라가”라고 말하고 욕하기만 해도 이미 살인죄를 저지른 거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셨어요. 그렇게 한 것은 별거 아무것도 아니다가 아니라 살인죄와 똑같은 죄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셨어요. 그런 의미에서 모든 죄는 다 똑같다고 이야기할 수가 있겠습니다.

야고보서 2장 8절에서부터 11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돼 있는 기록된 대로 내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뭐 하는 것이니?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뭐로 정죄하리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내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간음하지도 않고 살인하지도 않았지만 사람을 차별 대우하면 율법을 어긴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만한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겁니다.

모든 죄가 다 똑같다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멸망받을 그런 아주 심각한 죄라고 하는 점에 있어서 모든 죄가 다 똑같은 죄요. 마음으로 미워하는 죄도 이미 살인죄요. 마음으로 이미 음료를 품은 것도 이미 간음죄요 모든 죄가 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아주 무서운 죄라고 하는 점에 있어서는 모든 죄가 다 똑같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만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성경은 항상 한쪽에서는 이 측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다른 측면에서는 정반대의 측면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그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다 살펴보지 않으면 어느 한 면만 본다고 한다면 잘못될 수가 있겠는데요. 죄의 경중의 문제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조금 전에 제가 모든 죄가 다 똑같은 죄요 죄의 크기가 차이가 없이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 될 그런 마땅한 아주 무서운 죄라고 하는 점에 있어서 모두가 다 똑같은 죄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죄는 다른 죄보다 더 무거운 죄가 있고 어떤 죄는 다른 죄보다는 좀 더 가벼운 죄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요. 그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그 사람이 속으로만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나마 그 죄가 작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속으로만 가지고 있던 그 미움이 점점점점 발전하여서 다른 사람을 향해서 분노하고 화를 내는 것으로 표출된다고 한다면 더 큰 죄를 저지르는 거 마음으로만 미워하는 것에서부터 한 단계 더 깊은 대로 나아간 거죠. 화를 내고 분노하면서 신경질 낸다고 한다면 더 큰 죄를 짓는 것이고 뿐만 아니라 이 단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화가 더 지나쳐서 폭력을 쓰기 시작한다고 한다면 더 큰 죄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고 폭력이 더 커져서 결국 그 사람을 죽이는 데까지 가게 된다하면 엄청난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따라서 죄가 다 똑같은 죄 하나님 앞에서 다 심판을 받아야 될 그런 모든 죄가 다 똑같다고 하는 면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의 경중이 있는 거예요. 큰 죄가 있고 작은 죄가 있는 거에요.

그래서 실제적으로 우리가 자녀들을 가르칠 때 자녀들이 어느 선까지 죄를 범했느냐에 따라 훈육의 방법들도 조금씩 조금씩 달라질 겁니다. 뿐만 아니라 이 사회에서 죄를 벌할 때에도 어떻게 벌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 조금씩 조금씩 그 죄의 크기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교회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예요. 교회에서도 누군가가 죄를 짓는다고 한다면 모든 죄가 다 똑같은 것이 아니라 어떤 죄는 어떤 죄보다 훨씬 더 큰 죄가 있는 겁니다. 물론 내가 미워하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 큰 죄겠지만 미워하는 죄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을 불러다가 당회에 앉혀다 놓고 당신 왜 미워하는 죄를 짓느냐고 징계할 수가 없어요. 그런 그런 정도의 죄 가지고는 그냥 권면만 할 수 있는 것이죠.

하지만 어떤 사람이 그런 정도의 마음으로 짓는 죄 정도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어떤 폭력을 쓴다든지 아니면 교회 내에서 어떤 성범죄를 저질렀다든지 그런 실제적으로 어떤 행동들이 나타나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 죄는 가벼운 죄가 아니라 그것은 반드시 문제를 다루어야 할 그런 엄청난 큰 죄가 되는 것이고 그럴 경우에는 교회가 그냥 모든 죄가 다 똑같은 것이니까 너도 죄인이고 나도 죄인이고. 우리 모두가 다 죄인이니까 죄인이 죄인에게 무슨 얘기할 수 있겠는가? 다 똑같은 죄인들이 아무 말 할 수 없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죄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다루어야 되는 것이죠.

만일 누군가가 재정적인 사고를 치고 재정을 운용하는 과정 가운데서 착복을 했다고 한다면 그것을 아주 심각하게 다루어야 되는 겁니다. 만일 성적인 문제가 발생했다고 한 그런 문제들은 아주 심각하게 다루어야 되는 겁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 다 죄인인데 그런 도둑질을 한 사람이든 아니면 폭력을 쓴 사람이든 성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든 우리도 다 똑같은 죄인 우리는 아무 말할 수 없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죄는 어떤 죄보다 훨씬 더 커서 그래서 반드시 그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흔히 교회 안에서 목회자의 케이스의 경우가 많은데요. 목회자가 부도덕하고 성범죄를 저지른다고 한다면 우리 많은 성도님들이 부당하게 감싸고 돌면서 온정주의로 감싸고 돌 때가 많이 있고 그때 늘 나오는 말이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지겠는가?” “우리가 우리 다 같은 죄인인데 누가 누구를 향해서 비난할 수 있겠는가?” 하면서 그냥 온정주의로 가려고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가르쳐주고 있지 않습니다. 고린도 전서 5장의 말씀에 보면 만일 교회 가운데 그러한 범죄가 있다고 한다면 너희들이 판단해서 그래서 교회 밖으로 출교시키라고 권고하고 있는 겁니다.

마음속으로 미워하는 정도 가지고는 그렇게 할 수 없겠지만 그러나 아주 심각한 죄 정말 더 큰 죄를 짓는다고 한다면 그런 문제들은 사퇴를 시켜야 되기도 하고 더 나아가서는 면직 시켜야 될 만한 그런 중범죄도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데 종종 우리 교인들 가운데는 죄에 대한 관점이 혼란스러워서 그래서 꼭 이런 상황이 되면 “모든 죄가 다 똑같은 죄다 우리도 다 죄를 짓는다. 우리도 다 마음속으로 이미 간음했고 우리도 마음속으로 이미 다 살인했고 그런 죄인이고 다 똑같은 죄를 지었는데 누가 누구에게 무슨 말 하겠느냐?” 하면서 유야무야하려고 하는 그러한 경향들이 있는데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죄가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아야 될 무서운 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 교회 내에서 그리고 우리 가정에서 자녀들을 양육할 때 그리고 사회에 그 문제들을 치리하고 형벌을 줄 때에는 죄의 경중에 따라 가벼운 죄는 가볍게 무거운 죄는 무겁게 처리해야만 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죄가 어디에서부터 나오는가? 모든 문제가 어디서부터 나오는가? 어디서부터 나온다는 이야기입니까? 마음에서부터 나온다. 죄가 나오든 의가 나오든 그 출발점이 어디에 있는가? 마음에서부터 나온다는 거에요. 살인도 도둑질도 폭력도 그 어떤 것도 다 그 출발점이 어디에서부터 나오는가? 마음에서부터 나오기 때문에 그래서 잠언서 4장 23절의 말씀은 너희들의 마음을 잘 지켜야 된다. 우리가 지켜야 될 것들이 많은데 도둑으로부터 지키고 또 돈을 지키고 건강을 우리가 지켜야 될 것들이 많이 있는데 그 가운데서 제일 중요하게 지켜야 될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들의 마음을 지키는 것이 최고로 중요한데 왜냐하면 이 마음에서부터 모든 것들이 다 나온다.

생명이 나오고 모든 것들이 다 나오기 때문이라고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불교의 가르침과 유사한 면이 여기에 있는 것이죠. 불교에서도 말하기를 일체유심조라해서 모든 것들이 다 마음에 달려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약간 비슷하고. 아무튼 많은 차이점이 있긴 하지만 약간의 비슷한 점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모든 것이 생명이 마음에서부터 나온다.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 달려 있다라고 한다면 결국 우리가 그 마음을 지켜야 한다고 오늘 말씀에서 권고하고 있는데, 자 마음을 지켜야 한다고 하는 말은 그럼 무슨 의미일까요? 마음을 지켜서 어떻게 하라는 얘기입니까?

24절부터 27절의 말씀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부러진 말을 내 입에서 버리며 비뚤어진 말을 내 입에서 멀리하라. 내 눈은 바로 보며. 내 눈꺼풀은 내 앞을 곱게 살펴 내 발이 행할 길을 평탄하게 하며 내 모든 길을 든든히 하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내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 그러니까 우리들의 마음을 잘 지켜서 말을 할 때도 잘못된 말을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우리가 보는 것도 마음을 잘 지켜서 제대로 잘 봐야 된다고 하는 거예요. 걸어가는 것도 마음을 잘 지켜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쳐서 잘못된 길로 갈 게 아니라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길로 걸어가야 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좌파가 되거나 우파가 되거나 하지 말라고 하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좌파 우파는 현대적인 개념이고 이 당시에는 그런 개념이 없었습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하는 이야기.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해야 되는 것이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길로 가면 안 된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바른 길로 갈 수 있는가? 우리의 마음을 지켜야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마음을 지킬 수 있을까요? 마음을 지켜라 결국 모든 것이 생명이 모든 게 이 마음에 달려 있다고 하는데 그 마음을 어떻게 지켜야 된다고 하는 말인가? 마음을 여러분 지킬 수가 있습니까?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참 신기한 거죠. 왜냐? 마음이 누구 겁니까? 내 거예요. 그런데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어요. 내 마음이, 마음은 내 마음인데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게 내 마음이에요. 슬퍼하지 말아야 되겠다 하면 안 슬퍼지던가요? 걱정하지 말아야 되겠다 하면 걱정이 없어지던가요? 두려워하지 않아야 되겠다 하면 두려움이 없어지던가요? 아니요. 문제는 우리가 마음을 컨트롤할 수 없다는데, 거기에 문제가 있어요.

내가 두려워하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무서운 걸 어떡하겠어요? 두려운데 어떡하겠어요? 슬퍼하고 싶지 않아요. 기뻐하고 싶어요. 그런데 자꾸만 눈물이 나오고 슬픈데 어떡하겠어요? 내 마음속에 의심을 없애버리고 싶어요 의심이 없이 담대하게 살고 싶어요 그런데 자꾸만 마음속에서 의심이 떠오르는 그것을 우리가 어떤 무슨 재주로 의심을 없앨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마음을 우리가 할 수 컨트롤할 수 없는 것인데 왜? 오늘 잠언서 4장 23절에서는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내 마음을 지키라”라고 명령하고 있는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리가 정말 지킬 수가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을 하는 것일까요?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할 재간이 없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우리들의 의지와 전혀 동떨어져 있고 써서 우리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마음대로 노는 것도 아닙니다. 이걸 우리가 잘 알아야 됩니다. 마음이란 무엇인가? 마음은 우리가 완전히 컨트롤 할 수 없는 게 마음이에요. 그래서 무서운 거 슬픈 거 의심이 생기는 거 두려운 거 이거 내가 안 하고 싶다고 해서 안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생기는 거예요. 그냥 생기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다고 하면 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완전히 100% 자율적인 기관이냐 마음이 나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이 100% 자율적인 기관이냐라고 물었을 때 그렇지도 않아요. 우리의 의지에 따라서 강화될 수도 있고 우리의 의지에 따라서 약화될 수도 있는 그런 것이라 하는 겁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들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우리가 컨트롤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전에 어떤 대학에서 어떤 대학 교수가 학생들에게 숙제를 내줬습니다. “여러분 이번 한 주간 동안 숙제를 해 와야 되는데 이번 한 주간 동안에 여러분들은 코끼리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말고 오십시오.” 그랬어요. “코끼리에 대해서 절대로 생각하지 말고 오십시오”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학생들이 일주일을 있는 동안 코끼리 생각을 했을까요? 안 했을까요? 코끼리 생각을 하는 거예요. 교수님이 숙제를 내주기를 “코끼리 생각하지 마” 그랬는데 코끼리 생각이 나요. 왜? 우리들의 마음은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컨트롤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코끼리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안 나는 것이 아니라 자꾸 생각이 나는 거야. 생각이 나. 그런 의미에서 마음은 우리가 컨트롤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는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것을 보면 갖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거죠. 견물생심이라고 해서 물건을 보면 갖고 싶은 욕심이 생기는 겁니다. 아, 이걸 남 몰래 내가 훔쳐도 되겠다 싶으면 훔치고 싶은 마음이 자동적으로 생기는 겁니다. 나에게 어떤 권한이 주어졌을 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이것을 확인하지 못할 것 같다고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이것을 내 마음대로 악하게 쓰고 싶은 마음들이 자동적으로 생겨나게 되어 있는 겁니다. 성적인 자극이 주어지면 음욕이 자동적으로 생겨나게 되어 있는 겁니다. 누군가 우리들의 성질을 건들면 화가 돋아나게 되어 있는 겁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되면 분노가 치밀어 솟아 오르게 돼 있고 원수를 갚고 싶은 생각들이 자꾸만 떠오르게 되어 있는 겁니다. 자동 반사로 나오게 되어 있는 겁니다. 그건 우리가 컨트롤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떠올랐을 때 그 생각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느냐? 아니면 “아하, 이게 아니지 하나님께서 이것을 원하지 않으시지” 그러면서 그 생각을 소멸시키느냐는 우리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믿습니까? 그래서 마틴 루터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마틴 루터가 한 말인지 아닌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마틴 루터가 한 말이라고 알려진 말 가운데 이런 말이 있는데요. “새가 공중의 새가 우리의 머리 위로 스쳐 지나가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다. 그런데 그 새가 내 머리 위에 둥지를 트는 것은 막을 수 있다.” 이건 정말 멋있는 표현이에요.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서 생각이 떠오르는 것 막을 수 있나요? 못 막아요. 물건을 보면 욕심이 생기고 성적인 자극을 받으면 음욕이 생기고 누군가 나를 건들면 분노가 치밀어 솟아오르고 하는 그런 1차적인 반응들을 막을 방법이 있는가 없어요. 슬픈 일을 당하면 슬프고 무서운 일을 만나면 무섭고 두려운 일을 만나면 두려운 것이고 그리고 확실한 상황 가운데서는 의심이 생기게 마련인 것이 그게 우리들의 마음의 일차적인 반응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거까지는 우리가 컨트롤할 수 없는데 과연 그 생각을 지속시켜서 발전시키고 또 발전시켜 그 죄를 계속 짓느냐? 아니면 ‘아니지. 이것은 주님께서 원하지 않는 것이지’ 하면서 내 마음을 억눌러서 그것이 현실화되지 않도록 아니 내가 악한 죄를 범하려고 했다가도 ‘아, 이건 아니지’ 하면서 그 자리에서 중단하고 뒤로 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내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하시는 이 말씀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우리 그들의 마음 가운데 이러한 생각들이 솟아올랐을 때 그냥 우리 자신을 이 생각에 편승시켜서 ‘될 대로 되라’ 그 생각에 끌려다니면서 결국 망하는 길로 갈 게 아니라 그 순간에 스톱 해야 된다는 겁니다. 스탑.

죄를 범하려고 했지만 욕심이 생겼지만 그 마음속에 그런 욕심이 생길 수가 있어요. 그것은 우리가 어쩔 수가 없어요. 욕심이 생기는 것은 좋은 걸 보면 욕심이 생겨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되면 이래서는 안 되지 하고 그 자리에서 스톱해야 되는 겁니다. 음욕이 들어요. 그런데 그 음욕을 발전시켜서 “저기 있는 저 아녀자가 네 집 여자인지 알아보라”고 물어보게 만들고 데려오게 만들고 생각을 발전시켜서 음란한 죄를 저지른 데까지 나가면 안 되는 거예요. 그 순간에 ‘아, 이래서는 안 되는구나’ 하고 스탑을 시켜야 되는 거에요. 그건 할 수 있는 거에요.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우리에게 잘못한 그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서 분노가 왜 안 생기겠어요? 내 옆에 지나가는 차가 나를 향해서 빵빵거리면서 욕을 한마디 해나고 하면서 갈 때 “저, 저” 하면서 가서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왜 안 생기겠어요? 그 순간에 생기죠. 그런데 그걸 실천할 것이 아니라 ‘아 ,이러면 안 된다고 그랬지.’ 우리 그 순간에 멈추는 결단을 해야 된다는 거. 우리의 마음을 지켜야 된다는 거예요. 우리의 마음이 그쪽으로 발전하지 않도록. 우리를 힘들게 한 사람들이 있고 우리에게 고통을 준 사람들이 있는 것에 대해서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싶은 것이 우리들의 자연스러운 마음입니다. 근데 그 마음을 계속 끝까지 갖고 있으면서 상종을 하지 않고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고 차갑게 대하면서. 끝까지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고 싶지 않기도 하고 그 순간에 우리의 마음을 지키려고 하기보다는 그냥 내버려 둘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나가야 합니다. 주님 이 더러운 죄악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희들의 죄를 제거해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씻어주셔서 내 그 옹절한 마음 때문에 우리들의 죄악으로 인해서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죽으셨는데 그 보혈의 은혜가 오늘 우리들에게 임하게 하셔서 그래서 변화되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주의 성령께서 저희들의 심령 가운데 임재하시고 주님께서 저희들의 눈에 파수꾼을 세워주시고 저희들의 입에 파수꾼을 세워주시고 마음의 파수꾼을 세워 주시옵소서 주님의 뜻에 순종하며 나아가는 하나님의 귀한 백성들 되게 해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고 그래서 마음을 지킬 수 있는 흔들릴 때 잡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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