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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판 사도바울을 세워내는교회가 됩시다

1. 사람들이 교회를 찾는 이유

혹시 느끼셨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교회당 입구에는 “신X지 출입금지” 경고문이 없습니다. 아마 전국적으로 조사해보면 이렇게 아무런 경고문을 붙여놓지 않은 교회가 우리 교회가 거의 유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실 신X지라는 이단 집단의 위험성에 대해서 경고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지금 당장이라도 교회당 입구에 붙여야 하지 않을까 염려가 되기도 합니다. 법적인 안전조치를 위해서, 우리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일이라고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붙이는 일에 마음이 불편합니다. “복음이 그렇게 자신 없는 것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X지가 그렇게 강한 것인가?”라는 질문이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사실 우리들에게 가장 위험한 적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다는 확신 때문입니다. 우리는 외부의 공격에 의해서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부패와 타락 때문에 무너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설사 신X지가 우리를 무너뜨리기 위해 잠입하더라도, 우리는 그들을 변화시켜 주님의 제자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어떤 목적을 가지고 교회로 들어오더라도 환영하고, 그들에게 참된 복음을 들려주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변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마 신X지에 의해서 피해를 당하신 분들은 제가 너무 순진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신X지의 교묘한 계략을 안다면,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그들의 전략을 몰라서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전략의 파괴력과 위험성을 몰라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나도 잘 압니다. 신X지에 대한 정보를 많이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제 입장에서 물러서고 싶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순수한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위한 순수한 목적으로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다른 목적이 있습니다. 정치인들은 표를 구걸하기 위해서 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을 사귀기 위해서 옵니다. 사람들과 인맥을 형성하여 사업을 하는 데 이익을 얻고자 하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인정받기 위해서 옵니다. 외로우니까 친구를 사귀기 위해서도 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연애하기 위해서 교회에 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초창기에는 신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서양 선교사들에게 잘 보여서 무엇인가 얻으려는 목적으로 교회를 찾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는 신X지 집단과 같은 사람들도 있어서, 교회를 파괴할 목적으로 들어 오기도 합니다.

2. 바나바와 사도 바울

그런데 그렇게 잘못된 목적으로 오는 사람들을 다 내어쫓아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도 모두 엉뚱한 목적이었습니다. 그들은 떡을 먹기 위해 왔고, 질병을 치료받기 위해 왔고, 이스라엘의 독립을 꿈꾸기 위해 왔으며,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금전적 이익을 추구하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사실 그런 목적이 없다면, 교회에 발을 들여놓을 이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교회는 그런 사람들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아야 할 것이 아닙니다. 마치 바리새인들처럼 행동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너는 이것이 잘못이야”. “너는 이게 글러먹었어.” 하면서 정죄의 눈으로 바라보면 안 됩니다. “넌 신X지이니까, 교회에서 나가”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제 발로 교회에 찾아왔으니, 그게 어딥니까? 이런 기회를 사용하여,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해야합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을 다 성공시킬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가룟 유다는 끝까지 변화될 수 없었으니까요. 어떤 때에는 할 수 없이 교회에서부터 쫓아내야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는 “환영과 환대”이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환영과 환대”의 마음이기보다는 “의심”의 마음이 먼저 앞섭니다. “시기와 질투”의 마음도 들기까지 합니다. 저도 늘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날마다 가다듬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의심의 행동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시절에 예루살렘 교회를 찾아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물론 그 사람은 아직 사도가 되기 전이었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교회를 핍박하기 위해서 도시락 싸들고 다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그가 예루살렘 교회에 들어왔을 때, 모두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작자가 교회를 파괴하기 위해서 마치 회심한 것처럼 위장하고 잠입했을 것이라는 의심은 합리적인 의심이었습니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가까이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 가운데에는 사도 바울에 의해 죽임을 당한 가족을 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모두가 배척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오늘날 신X지 경고문을 붙인 사람들의 마음보다 더 바짝 긴장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나바”라는 사람은 달랐습니다. 그는 바울을 환영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에 잘 정착하도록 도왔습니다. 이러한 바바나의 역할은 아주 획기적인 것이었습니다. 아마 그가 없었다고 한다면, 가장 위대한 선교사였던 사도 바울이 탄생할 수 없었을런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바나바의 역할은 정말 중요한 역할이었고, 교회를 세워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우리가 직접 나가서 전도해야 하는데, 그렇게 잘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영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 사람들을 맡기신 것입니다.

3. 우리의 모습

그런데 우리는 새로운 사람들이 보일 때, 친근하게 다가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낯을 가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손을 내밀지 않고, 따뜻하게 환영하지도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새로운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성향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친숙한 그룹 속에서는 자유롭지만,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 속에서 다가가지 못합니다. “내가 다가가면, 저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 “내가 말을 걸었는데,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면 어떻게 하지?” 거부당할까 봐 다가가지 못하고, 혹시 섣부르게 내가 다가갔다가 오히려 역효과를 낼까 봐 다가가지 못 합니다.

더 나아가 오늘날에는 새로 오는 사람들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게 됩니다. “혹시 신X지는 아닐까?” “혹시 어떤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사람들이 우리 교회에 정착하려고 오는 것일까? 아니면 그냥 왔다가 물만 흐리고 갈 사람일까?” 우리들의 마음은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열려지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새로온 사람들에게서 조금이라도 의심이 갈만한 모습이 보이면, “그럼, 그렇지.” 하면서 마음의 문을 닫아버립니다. “장사하러 왔구나.” “어차피 정착 못 하고 떠나갈 사람이구나.” “다른 교회에서 문제 많이 일으킨 사람이구나.” 하면서 말입니다.

사실 우리들의 마음 속에는 이중적인 욕구가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우리 교회가 잘 크고 부흥했으면 좋겠다는 욕구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사람이 들어와서 기존의 좋은 관계가 망가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현재가 좋은 겁니다. 아쉽기는 하지만, 괜히 다른 사람들이 우리 교회에 들어와, 기존의 좋은 관계가 망가지는 것이 두렵기도 합니다.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 우리 교회의 모습을 바꾸어버리면 어떻게 하지?” “그러다가 기존 교인들이 다치면 어떻게 하지?” “저 사람들이 우리 교회안에 들어와 어울릴만한 그룹이 없는데…” “결국 분위기만 망치다가 떠나가겠지…” 이런 복잡한 생각이 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그들을 대하려니, 그들에게 우리의 마음을 들켜버립니다. 그래서 새로 온 사람들은 겨우 찾아온 교회에 정착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자신들이 끼어들 공간이 없고, 어울릴 사람들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서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심지어 교역자들이나 교회 중직자들의 태도 속에도 따듯한 환대와 환영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이미 지금 하고 있는 일들도 많은데, 새로 들어온 사람들에게 마음을 주거나 신경을 쓸 여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떠날 것 같은 사람에게 정을 주었다가 실망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영물이기 때문에 그러한 우리들의 마음은 여지없이 발각되고 맙니다. 아무도 환영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그들은 교회를 떠납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안심합니다. 우리들의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맞아. 어차피 떠날 사람들이었어.” 어차피 떠날 사람들에게 쓸데없는 투자를 하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현대판 “사도 바울”이 될 수도 있는 사람들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그려면서 우리들은 질문을 던집니다. “왜 우리 교회는 알고 보면 정말 좋은 데, 부흥하지 않는 것일까?”

4. 우리들의 마음을 바꾸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들의 마음을 바꾸어야 합니다. 새로 온 사람들에 대한 시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의심을 내려놓고, 무한한 사랑으로 환영해주고 환대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잘못된 목적으로 교회의 문을 두드렸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참된 제자로 변화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도둑질하러 교회의 문을 열었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회개하고 주님의 제자가 되게 해야 합니다. 장발장에 나오는 미리엘 신부처럼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의심의 마음을 내려놓는 것이 먼저입니다.

가. 따뜻하게 환영해 주세요

잘 모르는 사람이 교회에서 보이면, 멀뚱멀뚱하게 쳐다보고 있지만 말아주세요. “반갑습니다. 환영합니다. 좋은 교회 잘 오셨습니다.”라고 인사해주세요.

나. 신상을 캐묻지 말아주세요. 대신 자기 자신을 소개해주세요.

저는 아무개 장로입니다. 저는 아무개 권사입니다. 저는 아무개 목사입니다. 아무개 전도사입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제게 물어주세요. 언제든지 도와드릴게요. 이렇게 만나게 되니, 너무 좋습니다. 같이 신앙생활하면 참 좋겠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면서 저는 이런 점이 좋았습니다. 아마 그걸 곧 느끼실 겁니다. 저는 이런 직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서 이런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자녀들이 어떻게 됩니다.

이분은 우리 교회 장로님입니다. 아주 믿음이 좋으신 분입니다. 소개해 주십시오.

다. 새로 온 교우들과 어울리기 위해 힘써주십시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새로 온 사람들이 우리 교회의 기존 성도들과 잘 어울려 녹아들어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목표이지 현실적인 일은 아닙니다. 우리 교인들도 서먹서먹하고, 새로 온 사람들도 서먹서먹하긴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같이 새로 온 사람들끼리는 잘 알아서 서로 대화도 되고 자기들끼리 모이게 될 수 있습니다. 그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특히 몇 명이 같이 교회를 찾을 때에는 그런 일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따로 왔다고 할지라도 비슷한 시기에 온 사람들끼리 친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 사람들이 들어와서 지들끼리만 논다”는 식으로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고 거부하려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어울려주지 못하는데, 같이 대화하고 어울릴 사람이 있어서, 그들이 잘 정착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끼리 논다면, 시기하고 질투하고 비아냥 거릴 게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같이 어울리실 신앙의 동료들이 있어서 너무 좋네요.”라고 말해주어야 합니다. “보기가 너무 좋아요” 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기존의 성도들과도 제대로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저 친한 몇몇 사람들과만 어울릴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새로 온 사람들에게 “우리들과 친하게 지낼 수 없다면 받아줄 수 없다”는 식으로 보는 것은 너무 과도한 요구입니다. 물론 전체적으로 우리 교회 안에 녹아들어야 하겠지만, 그건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나야 이루어질 과제입니다. 일단 그들끼리 어울리기만이라도 해서 잘 나올 수 있으면 좋은 것입니다. 우리 대신 어울려줄 사람이 있다는 게 감사할 일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들에게 다가가서 그들과 어울리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들로 하여금 우리의 무리 속으로 들어오라고 요구할 게 아니라, 우리가 그들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에게 오지 않으면 거부한다는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됩니다. 장례식 놀이와 결혼식 놀이를 하면서 같이 춤추지 않고 같이 울지 않는다고 비아냥 거리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라. 새로 온 교우들과 함께 사역하는 것을 기뻐해주십시오.

바울 사도는 얼마 되지 않아 교회의 지도자이자 일꾼으로 등장했습니다. 그에게 은사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를 시기하고 질투할 게 아닙니다. 다윗이 갑자기 이스라엘의 영웅으로 등장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를 시기하고 질투할 게 아닙니다. 새로 등장한 사람이 새로운 역할을 맡을 수 있다면 좋은 일이고 감사할 일입니다.

교회는 오직 주님만이 머리입니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주인 행세를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자녀들로서 똑같이 주님의 자녀답게 일할 권리가 있습니다. 먼저 온 자가 나중 되고, 나중 온 자가 먼저 되는 게 진리입니다. 예수님이 등장하면서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하자, “나는 신랑이 아니라 신랑에 기뻐하는 친구일 뿐이며, 그러한 기쁨으로 충만하다고 하면서, 그는 흥해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했던 세례 요한처럼, 더 열심히 일하는 새로운 사람들을 보면서 함께 기뻐하는 게 옳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새로운 일꾼들이 등장하는 것을 모두가 기뻐해야 합니다.

마. 새로 온 사람들은 당연히 우대받아야 합니다.

교역자들은, 직분자들은, 담임목사와 사모도, 교회의 전 구성원들도 새로 온 사람들을 환영해주어야 합니다. 환대해주어야 합니다. 새로 온 사람들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서라도 그들에게 맞추어 주어야 합니다. 그들은 마치 새로 태어난 아기와 같습니다. 잘 정착해서 정말 우리 교회의 장성한 일꾼이 되기까지는 말입니다. 집안에 새로운 아이가 태어나면, 모든 것을 새로 태어난 아기 중심으로 재정비하게 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아기가 최우선 순위에 놓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기들은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새로 온 사람들에게 모든 초점을 맞춘다면, “왜 내게는 그런 관심을 보여주지 않는가?”라고 항의할 게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어떻게 그 새로 온 사람에게 어떤 방식으로 사랑을 보여주어야 할 것인가?”를 물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 옆에 보낸 사람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외면은 그 사람을 영적으로 죽이는 살인과 같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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