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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고 맛있는 떡 (잠 9:13-18)

오늘 본문의 말씀에는 미련한 여인이 등장을 합니다. 미련한 여인이 있는데, 그 미련한 여인이 크게 떠들어댑니다. 알고서 떠들어대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사람들에게 떠들면서 사람들을 부추기고 있는 모습이,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미련한 여인이 떠드는 그 말의 내용이 무엇일까요? 17절의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도둑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 하는도다.” 이 미련한 여인이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수많은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무슨 물이 맛있는가? 몰래 도둑질한 물이 맛있는 것이고, 어떤 떡이 맛있는가? 훔쳐 먹은 몰래 먹은 떡이 맛이 있다고 그렇게 자꾸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도둑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있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여기서 몰래 먹는 떡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몰래 먹는 떡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1번. 나에게 어쩌다가 떡이 하나 생겼는데,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 떡을 먹게 되면 사람들에게 나누어 줘야 되니까, 나 혼자 다 먹고 싶어서, 그래서 숨어서 혼자 먹는 떡이 몰래 먹는 떡입니까? 2번.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그 떡을 훔쳐서, 그래서 그 훔친 떡을 몰래 가지고 와서 먹는 떡을 가리켜서, 몰래 먹는 떡이라고 할까요? 1번이겠습니까? 2번이겠습니까? 1번처럼 느껴지죠? 정답은 2번입니다.

제가 몇 번에 걸쳐서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마는, 히브리 평행법이라고 하는 그 관점으로 본문의 말씀을 읽으면, 도둑질한 물, 몰래 먹는 떡이 각각 다른 두 개의 대상이 아니라,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도둑질해서 먹는 물, 몰래 먹는 떡, 크게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도둑질에서 몰래 먹는 물과 떡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 미련한 여인이 막 소리를 지르면서 사람들을 설득하고 사람들에게 부추기면서 하는 말이, “훔쳐 먹어라” “다른 사람 것을 뺏어 먹어라” “도둑질해서 가져가라. 그러면 그게 얼마나 기분 좋은지 모른다.” 남의 것을 훔쳐 먹으면, 그것이 훨씬 더 맛있고, 남의 것을 훔쳐서, 나 혼자 몰래 먹으면, 그게 훨씬 더 짜릿하다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는 성실하게 일을 해야 합니다. 땀을 흘리고 노력을 하고 성실하게 일을 해야, 그래야 결과를 얻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그렇게 수고하고 애써서 결과를 얻게 된다고 하면, 기쁨이 정말 많이 생기게 됩니다. 농부가 1년 내내 뜨거운 뙤약볕 밑에서 땀을 흘리면서, 농사를 짓고 정말 고생을 많이 했는데, 추수할 때가 되어서 수많은 열매들을 맺는 그것을 보게 된다고 한다면, 그동안 했던 모든 고생들, 모든 수고들 다 보상을 받는 것이죠. “아, 내가 수고했는데, 그 수고가 헛되지 않았구나” 하면서 즐거움과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장사를 한다고 한다면, 내가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또한 이런 궁리를 하고 저런 궁리를 하면서 열심히 장사를 했는데, 그래서 좋은 결과를 얻게 된다고 한다면, 수고한 그 수고에 대해서 보상을 받는 것 같아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결과를 얻기 위해서 수고하는 것이 쉽습니까? 쉽지 않습니까? 쉽지 않아요. 쉽지 않아요. 제가 금년 여름에 이 우리 교회 옥상에 그 조그만 텃밭에서 무엇인가를 한번 길러 보려고, 거기다가 주일학교 학생들의 심은 방울토마토도 한번 길러보려고 했고, 오이도 한번 길러보려고 했는데요. 잘 되지를 않아요. 잘 되지를 않아요. 왜냐하면 농사에 대한 지식이 없단 말이죠. 농사에 대한 지식도 없을 뿐만 아니라, 언제 어떻게 잘 대응해서 그것을 잘 기를 수 있는지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없기 때문에, 제대로 잘 관리를 못하니까,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오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금년 여름 그렇게 길러보고 제 마음속에 든 생각이 무엇이냐면, “그냥 사 먹자”라고 하는 결론을 내리게 됐습니다. 농사짓는 건 그게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요.

이와 마찬가지로 좋은 결과를 얻는 것은 누가 얻게 되는가? 아무나 얻는 게 아니에요. 누구나 다 열심히 일해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런데 누구나 다 그렇게 열심히 일할 수 있는 게 아닌 거죠. 공부를 다 열심히 잘해가지고, 다 좋은 성적 받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공부를 못하는 겁니다. 어느 한순간에는, 연초에는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해보겠다고 결심을 하지만, 작심 3일이 돼서 그렇게 하지 못하는 거예요. 그렇게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못합니다. 그러니까 좋은 성적이 나올 수가 없는 것이죠. 장사를 하는데, 모든 사람들이 장사를 제대로 잘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못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좋은 결과가 안 나오는 것이죠. 모든 사람이 좋은 열매를 다 얻는 것이 아니라, 수고한 사람들은 좋은 열매를 얻게 되겠지만, 수고를 많이 하지 못한 사람들은 열매를 잘 얻지 못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고를 잘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좋은 결과는 아무나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인데, 그런데 그 좋은 결과를 얻고 싶은 그 욕심, 그 마음 때문에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내가 수고하지 않고 얻는 것입니다. 도둑질하는 것이죠. 훔치는 것이죠. 그것처럼 간단한 방법이 없습니다. 학생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성적을 받았으면 좋겠는데, 공부를 열심히 할 수가 없는 겁니다. 놀아야 되고, 또 딴짓해야 되고 그래서 열심히 공부를 못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성적을 갖고 싶고, 좋은 대학을 가고 싶고, 그리고 좋은 직장을 가고 싶은 겁니다. 그러니까 하는 방법이 무엇이냐 하면, 커닝을 하는 것이죠. 자신의 실력이 아닌 커닝으로 좋은 점수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고, 그리고 가짜 경력을 내세워서 좋은 대학에 가려고 하고, 가짜 경력을 내세워서 어떤 강사 자리라도 얻으려고 하는 것이 이 세상 사람들이 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돈을 버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돈을 버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성실하게 일하고 최선을 다해서 해야 하는데, 그게 안 되기 때문에 결국 사람들이 선택하는 방법은 속임수와 거짓으로 도둑질로 재물을 얻는 것인데, 그것이 좋아 보인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미련한 여인이 하고 있는 말이 무엇이냐면, 열심히 수고할 수 없는 사람들을 향해서, 그렇게 고생하지 말고, 훔쳐 먹으면 그 물이 달고 몰래 먹으면 그 떡이 맛있다 하면서, 그러니까 쉬운 방법을 쓰라고 이야기하고 있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한번 질문을 던져보고 싶습니다. 도대체 이렇게 도둑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있다고 말하는 이 여인, 이 미련한 여인이 도대체 누구일까요? 왜 미련한 “여인” 이 잠언서에서, 하필이면 왜 미련한 여인이 그런 말을 한다고 표현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이 “미련함”이라고 하는 말 자체가 문법적으로 여성 명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나라 말에는 남녀가 인격체에게만 남자 여자가 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아들 딸, 이렇게 인격체에만 성을 부여하는 것이 우리나라 말입니다. 하지만 서양 말들, 특별히 독일어나 헬라어나 히브리어 같은 경우에는 문법적인 성이 있습니다. 문법적인 성이 있습니다. 독일어에는 어떤 성이 있습니까? 남성 여성 중성이라고 하는 문법적인 성이 있습니다. der, des, dem, den, die, der, der, die 그런 거 있잖아요? 헬라어도 히브리어도 문법적인 성이 있는데, 그러니까 이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명사,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이 명사가 문법적으로 여성명사입니다. “지혜”라고 하는 말도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한번 지혜라고 하는 말과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말을 히브리어로 한번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지혜라고 하는 말은 “하크마”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위에 있는 단어인데, 위에 있는 네모나게 생긴 단어가 히브리어 단어인데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나가는 그런 언어입니다. 그래서 “하크마”하게 되면 지혜라고 하는 의미의 단어이고, “카슬로트” 하면은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단어인데, “아”하고 끝나는 단어나 “오트”라고 끝나는 단어들은, 다 문법적으로 여성형 명사입니다. 그러니까 추상명사인데 이 추상명사인 지혜, 추상명사인 어리석음을 문법적 성으로 보면, 여성 명사이기 때문에, 잠언서에서 지혜를 말할 때 혹은 어리석음을 말할 때 여인인 것처럼 의인화해서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치워도 괜찮겠습니다.

그러니까 “어리석음”이, 어리석음이 우리들을 향해서 말하고 있다는 겁니다. 어리석음이 우리를 향해서 말하고 있는데,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히브리어 명사가 추상명사가 여성형이기 때문에, 잠언서에서는 어리석은 “여인”이 말을 하고 있다라고 의인화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종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성경을 억지로 해석해서 문제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요. 잠언서 9장 13절의 말씀에 보면, 어리석은 여인이라고 하는 표현이 나오는 그것을 보면서, 여인이라고 하는 것은 미련한 것이고, 그런 미련한 여인들이 떠든다고 한다면 망할 징조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유교적인 그런 영향을 많이 받아서, 그런 유교적이고 남존여비적인 생각을 가지고 성경을 읽다 보니까, 여기에 등장하는 표현이 미련한 여인이 이런 말을 한다라고 하는 그런 표현을 보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런 잘못된 관점을 가지고 성경을 읽으면서, 여인이라고 하는 것은 미련한 것이다. 그러니까 여인들은 잠잠해야 된다라고 말하는 그런 순 엉터리 해석을 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인으로 표현한 것은 이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단어가 히브리어에서 여성형 명사이기 때문에, 의인화해서 어리석은 여인이 말하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 어리석은 여인이 무슨 말을 합니까? 소리를 지르면서 우리를 유혹한다는 겁니다. 어리석음이 우리를 유혹하고 있는데, 그런데 어 어리석은 석은 어리석음이 우리를 향해서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고 떠들면서 사람을 유혹하고 있다라고있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어디서 그렇게 우리를 유혹하고 있느냐면, “자기 집 문 앞”에서, “성읍 높은 곳”에서, 이곳저곳에서 우리를 향해서 그렇게 유혹하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어리석음이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다. 이곳저곳에서 유혹하고 있다고 하는 이 표현을 보면서, 여러분들 뭐가 생각나는 게 혹시 없으십니까? 생각이 좀 났으면 좋겠는데요. 뭐가 생각나는 게 없습니까? 뭐가 있냐면, 이와 비슷한 설명이 잠언서 8장에 또 있었다고 하는 것이 아마 생각이 날 겁니다. 잠언서 8장에 보면 무슨 내용이 있냐 하면 지혜가 떠든다고 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잠언서 8장 1절에서부터 3절까지 말씀입니다.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 명철이 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느냐? 그가 길 가의 높은 곳과 네거리에 서며, 성문 곁과 문 어귀와 여러 출입하는 문에서 불러 이르되” 잠언서 8장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냐면, 지혜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지혜라고 하는 것이 계속 우리를 향해서 소리 지르고 있다. 그 지혜가 우리를 향해서 계속 소리 지르고 있다고 하는 표현이 잠언서 8장에 있었는데, 오늘 9장 13절 14절 15절 말씀에서도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냐면, 이제는 어리석음이 소리 지르고 있다는 겁니다. 어리석음이 외치고 있다는 겁니다. 어리석음이 우리들을 향해서 소리를 지르면서, 우리를 유혹하고 있다고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들을 향해서 지금 외치고 있는 것이 지혜만 외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음도 같이 외치고 있는 겁니다. 우리를 향해서 지금 두 가지 소리가 들리는 겁니다. 하나는 지혜의 소리가 들리는 것이고, 하나는 어리석음의 소리가 들리는 것이 신약의 표현으로 보자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두 가지 법이 싸운다. 하나는 주의 양심의 선한 법이 우리를 향해서 선한 일을 하라고 우리를 향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반대편으로 악한 법이 우리를 하여금 나쁜 짓을 하도록 그렇게 부추기고 있는, 그 두 가지 법 사이에서 우리들의 마음이 싸우고 있다고 하는 그런 표현을 하고 있는데, 이 잠언서의 표현이 바로 그런 표현의 의미입니다.

한편으로는 지혜가 우리를 향해서 말을 하고 있는 반면에, 오늘 9장 13, 14, 15절의 말씀에서는, 어리석음이 우리를 향해서 계속 유혹하고 말을 하고 있다라고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지혜만 외치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음도 우리를 향해서 계속해서 유혹하고 외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서 외치고 있습니까? 잠언서 9장 14절 15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표현합니다. “자기 집 문에 앉으며 성읍 높은 곳에 있는 자리에 앉아서, 자기 길을 바로 가는 행인들을 불러 이르되” 어리석은 어리석음이 자기 집 문에 앉으며, 성읍 높은 곳에 있는 자리에 앉아서 자기 길을 바로 가는 행인들을 불러 이르되, 어리석음이 어디서 부르고 있냐면, 자기 집 문 앞에서 부른다는 겁니다. 또 하나는 성읍 높은 곳에서 부른다는 얘기입니다. 이 표현을 볼 때 우리는 어떤 결론을 내려야 됩니까? “아, 그러니까, 자기 집 문 앞과 성읍 높은 곳만 조심하면 되겠구나”라고 결론을 내리시면 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사용한 “자기 집 문”과 “성읍 높은 곳”이라고 하는 것은 제유법적 표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유법이라고 하는 것은요, 대유법의 일종인데 영어로는 synecdoche라고 합니다. synecdoche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일부를 사용하여 전체를 표현하는 방법이죠. 예를 들자면 요람에서 무덤까지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 요람이라고 하는 것은 탄생과 관련된 여러 부품 중에서, 물품 중에서 하나를 사용해서, 탄생이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고, 무덤이라고 하는 죽음과 관련된 어떤 한 부분을 사용해서, 죽음 전체를 나타내는 그런 표현법을 가리켜서 제유법이라고 말할 수 있겠고요. 펜이 “칼보다 강하다”라고 하는 말은 펜이라고 하는 그 작은 물건을 사용해서, 문학 혹은 언론이라고 하는 그 전체를 표현하고, 칼이라고 하는 작은 도구를 이용해서 무력 혹은 전쟁이라고 하는 그런 큰 개념을 설명하는 그런 표현법을 가리켜서 제유법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잠언서 9장 14절 15절 말씀에 어리석음이 자기 집 문 앞에 앉아 있다. 그리고 성음 높은 곳에 앉아 있다라고 표현한 것은 그 두 곳만 조심하면 된다라고 하는 의미에서 이런 말씀을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제유법적인 표현인 거예요. 그러니까 이 두 개를 표현하면서, 뭘 얘기하고 있습니까? 이 어리석음이 어디에 있다? 온 세상천지에 다 깔려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집에 가면, 집에도 어리석음이 있고, 직장에 가면, 직장에도 어리석음이 있고, 시장에 가면, 시장에도 어리석음이 있고, 심지어 교회에 와도, 교회 안에도 어리석음이 있고, 우리가 가는 그 모든 곳에 다 어리석음이 있어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계속해서 유혹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우리는 지혜에 대해서 배우면서, 지혜가 소리를 지른다고 하는 것을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지혜가 우리를 향해서 교훈하고 있고, 지혜가 우리를 향해서 그 교훈을 받으라고 그렇게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고 있는데, 지혜가 어디 있다고 그랬습니까? 지혜가 길가에 있다. 높은 곳에 있다. 네 거리에 있다. 성문 곁에 있다. 문 어귀에 있다. 출입하는 문에 있다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그러니까 그런 곳을 찾아가야만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것도 역시 제유법적인 표현으로서, 지혜가 어디에 있는가? 지혜는 우리가 정말 삼고초려해가면서 그래서 모시고 와야만 하는, 그런 정말 알기 어려운 것이 지혜가 아니라, 우리가 어디에 가든지 지혜가 널려져 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살펴본 적이 있는데, 지혜만 널려 있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음도 곳곳에 우리가 가는 곳에는 지혜도 있고, 어리석음도 있고 지혜와 어리석음이 항상 우리 주변에 맴돌고 있고, 우리가 늘 지혜도 만나고 어리석음도 만나게 된다. 그렇게 오늘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이 전해주는 말씀이 무엇이냐면, 그러니까 우리는 그렇게 쉽게 어리석음에 빠지기 쉽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균실에 들어와 있어서, 바이러스가 우리를 터치할 수 없는 정말 안전한 곳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그곳은 어리석음으로 가득 차 있는 세상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 종교는 말하기를 그러한 어리석음으로부터, 그러한 고통으로부터 피하려면 어디로 가라? 속세를 버리고, 산속에 들어가라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죠. 하지만 산속에 들어가면 어리석음이 없느냐? 아니요. 거기도 어리석음이 있는, 성경 말씀 오늘 성경 말씀이 그 말씀이에요. 어리석음이 없는 것이 이 세상에 없다. 어딜 가든지 어리석음이 항상 존재한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이렇게 말씀해 주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러한 어리석음의 유혹에 이끌려 타락하지 말고, 그 어리석은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우리를 조심해서 경계해서 늘 조심하면서 잘 지내야 된다라고 하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오늘 이 말씀을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코로나 시대를 살면서, 코로나라고 하는 것이 참 쉽게 그런 바이러스에 걸릴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실감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편지를 하나 받았는데요. 안타깝게도 우리 노회에 속한 어떤 젊은 목사님이 코로나로 인해서 이송 도중에 소천했다고 하는 그런 안타까운 소식을 알려주는 그 편지를 받고 깜짝 놀랐습니다. 코로나가 지금 우리 교회에서는 잘 발생이 안 됐기 때문에, 2년 동안 그래도 안전하게 지금 지내오고 있는데, 그러니까 그냥 무시해도 될 만한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 발생할지 모르는 것이 코로나구나. 그래서 늘 마스크도 써야 되고, 늘 조심해야만 하고, 정말 우리가 경계하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언제 어디서 코로나에 감염될지 모르는 그런 아주 힘든 세상에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데요. 그런데 바로 이게, 우리가 어리석음에 전염될 수 있는 가능성이 바로 이 코로나와 같습니다.

오늘 잠언서 9장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 어리석음이 어디에 있는가? 마치 코로나처럼 우리 주변에 전부 깔려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잠시 잠깐만 정신을 차리지 아니하면, 이런 어리석음에 전염될 수 있기 때문에, 지혜와 어리석은 모두가 다 우리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까이 있고, 매 순간순간 우리가 그 지혜를 선택할 수도 있고, 어리석음을 선택할 수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순간순간마다 아주 조심을 하면서 선택을 잘해야 된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의 말씀이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민족 누구에게나 결단할 때가 있는데, 참과 진리가 서로 부딪힐 때에, 우리는 진리를 선택하는 그런 지혜로운 선택을 해야 되는 것이고, 어리석은 선택을 해서는 안 된다 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특별히 오늘 본문의 말씀은, 어리석음 중에서 어떤 어리석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도둑질에 관한 교훈입니다. 17절 말씀이죠. “도둑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 하는도다.” 하는 데, 여기서 말하는 “물,” 여기서 말하는 “떡”은 제유법적인 표현으로서, 훔친 것 전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떡과 물뿐만이 아니라, 모든 훔칠 수 있는 것을 다 말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을 우리가 훔치게 되면 좋은 것 같아요. 정말 괜찮은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어리석음에 속아 넘어갈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 남의 것을 내 것으로 부당하게 취득하고, 우리가 일하는 직장 속에서, 심지어 교회에서 사역을 하면서조차도, 내 것이 아닌 것을 부당하게 내 것으로 가져가 버리는 일들이 너무나도 서슴없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게 견물생심이라고, 사람이 괜찮아 보이는 사람인데도, 그런데 정작 내 눈앞에 어떠한 탐스러운 것이 놓이게 되면, 그리고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생각이 들고, 그리고 이것을 내가 가져가도 탄로가 날 것 같지 않다고 생각이 들면, 그걸 훔쳐가고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을 얼마나 자연스럽게, 얼마나 자주,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나타나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양심에 가책이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들의 마음을 정당화하려는 마음을 가집니다. 나는 이것을 가져갈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죠. 내가 회사에서 정당한 대우를 잘 받지 못하기 때문에, 이 정도는 내가 가져가도 정당할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하고 정당화시키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가져가는데, 나만 안 가져갈 수가 없다고 하면서 내가 하는 것은 특별한 죄가 아니라 모두가 다 하는 죄라고 하면서, 나 자신을 정당화합니다. 우리가 없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어리석음에 속아서, 지혜롭지 못하게, 그런 일들을 너무나도 자주 행하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그렇게 가져오면 좋아 보여요. 획득하면 기쁜 것 같아요. 이 어리석음이 우리들에게 말한 것처럼, 하지만 오늘 성경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18절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18절의 말씀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오직 그 어리석은 자는 죽은 자들이 거기 있는 것과 그의 객들이 스올 깊은 곳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무슨 뜻이죠? 결국 그 길이 사망의 길이라는 겁니다. 몰래몰래 먹는 떡 훔쳐 먹은 물 그 맛이 꿀물 같고, 그 맛이 정말 좋은 것 같고, 이득을 가졌기 때문에 만족스러울 수 있겠지만, 잠시 잠깐 좋아 보일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결국은 망하는 길이라고, 성경 말씀이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리석음이 외치는 이 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울여야 되는 것이고,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로운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만일 우리들 가운데 그런 습성이 있는 분이 계시다고 한다면, 있어요. 없는 게 아니고 있어요. 발각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척, 모른다고 생각되는 것 같아서, 안심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도 몰라도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불꽃 같은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런 잘못을 행해왔다고 한다면, 오늘 우리는 주님 앞에 나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만 합니다. 마음속에 우리가 탐심을 모셔놓고 있는 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탐욕이라고 하는 우상을 섬기고 있는 한, 주님이 우리의 마음 가운데 들어올 수가 없고, 주님을 영접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계속해서 남의 것 내 것이 아닌 것을 내가 취하는 죄악을 저지르고 있다고 한다면,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이스라엘 민족들이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입으로 이야기했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그들은 종교 생활을 한 것 같았지만, 사실은 실제로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런 죄악들을 계속해서 저지르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 아니라, 탐심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망하는 길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는 잘 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선택적으로 어떤 사람들은 기소하고, 선택적으로 어떤 사람들에 대해서는 눈감아 버리기 때문에, 우리들이 눈감아 버리는 그 대상에 들어가서, 우리가 걸리지 않고 발각되지 않았다고 하는 사실 때문에, 그래서 아무 문제없이 잘 살고 있다고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그것은 망하는 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며 엎드려야 합니다. “주님, 제 마음을 바꾸어 주옵소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지혜가 우리를 향해서 소리 지르고, “그렇게 하면 안 돼.” “그렇게 잘못된 생각을 하면 안 돼,” “하나님의 말씀대로 거룩하게 살아야지”라고 우리를 향해서 말씀해 주시는 말씀이 있고, 또 한 편의 말씀은 어리석음은 우리를 향해서 “괜찮아. 이거 가져가면 좋을 거야.” “정말 기분 째질 거야.” “행복할 거야.” “이것이 없는 것보다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 우리를 향해서 유혹하는 두 가지 소리가 우리들에게 계속해서 들려옵니다. 계속해서 들려오는데, 우리가 자꾸만 듣는 쪽에, 더 잘 들리게 돼 있어요. 우리가 지혜를 들으면 지혜가 더 잘 들릴 겁니다. 그런데 어리석음을 듣기 시작하면, 어리석음을 듣는데 잘 들리기 시작하면서 지혜의 말씀은 들리지 않을 겁니다.

지혜는 아주 현명하고 약삭 빠르게 모든 일을 아주 완벽하고 쌈빡하게 잘 해내는 게 지혜가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한 일들을 해내는 게 지혜가 아니고, 지혜는 그 어떤 비상한 머리를 가진 것이 지혜가 아니고, 지혜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게 지혜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게 지혜입니다. 어리석음은 어떤 것이 어리석음인가? 하나님의 그 음성에 대해서 그것을 막아버리는 것이 어리석음이고, 그 어리석음은 결국 망하는 길이에요. 지금 괜찮은 것처럼 보이고 있지만, 바리새인들처럼 나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러나 망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처럼,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었다고 한다면,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하며 나와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기도하고 도움을 요청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 저의 죄를 씻어주시고, 그리고 이제 그런 더러운 것에서부터 떠날 수 있게, 저희들의 마음을 씻겨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비로 깨끗이 씻어주시고, 새롭게 변화시켜 주옵소서.” 기도하며 주님 앞에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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