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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오리 바람 (잠 10:22-32)

오늘 본문의 말씀도 한 가지 주제가 아니라, 여러 가지의 주제들이 섞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말씀을 한 주제씩 한 주제씩 분석해 가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22절의 말씀을 살펴보려고 하는데요.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은 사람을 부하게 하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아주 매혹적인 말씀입니다. 부하게 되는 것만 해도 매혹적인 말씀인데, 부하게 되는 것이, 부가 따라오는 것이 아무런 근심이 없는, 그런 부가 오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니까, 정말 매력적인 것이죠.

항상 좋은 게 있으면, 나쁜 것도 같이 따라오게 되고, 항상 모든 게 다 완벽하게 100% 다 좋은 게 아니라, 어느 정도 좋고 또 그 가운데는 나쁜 것까지 같이 따라오는 그런 일들을 우리가 경험을 많이 하게 되는데, 오늘 22절 말씀에서 하시는 말씀이 무슨 말씀을 하시냐 하면,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부하게 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근심이 겸하여 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어떤 복입니까? 완벽한 복이죠. 80점짜리 복이 아니라, 100점짜리 복이다. 이 말입니다. 그런 것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가졌으면 좋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온전히 좋을 수만 있다고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100점짜리 복, 80점은 좋지만 20점이 안 좋은, 70점은 좋지만 30점이 안 좋은, 그런 불완전한 복이 아니라, 그런 나쁜 것이 하나도 없는 그야말로 완전 무결한, 정말 아무런 흠도 없는, 그런 완벽한 복이 우리들에게 주어진다고 한다면, 너무나도 좋을 것인데, 오늘 22절 말씀에서 해 주시는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그런 복은 어떻게 받을 수 있겠는가? 그 복은 누가 주신다고요?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은 그런 복이다라고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자, 그러면,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이라고 하는 게, 도대체 어떤 복을 가리켜서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이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도대체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이라고 하는 게, 도대체 무슨 복을 가리켜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만일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이 있다고 한다면, 여호와께서 주시지 않는 그런 복도 있습니까? 여호와께서 주시지 않는 그런 복도 있다는 말입니까?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은 완전한데, 여호와께서 주시지 않는 다른 복들은 불완전하다고 하는 그런 말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우리가 받는 복이 하나님에게서 받는 복도 있는 반면에, 하나님이 아닌 다른 존재로부터 받는 그런 복, 예를 들면 사탄에게서 받는 그런 복도 있다고 하는 말입니까? 도대체 여호와께 받는 복이 무엇이고, 여호와께로부터 받지 않는 복이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그냥 지나치고 넘어갈 게 아니고, 도대체 이 말씀이 무엇을 가르키고 있는지,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 질문을 한번 던져보아야 하는 것이죠. 도대체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이라고 하는 게, 도대체 어떤 복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이 무엇입니까? 사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받는 모든 것이 그냥 저절로 우리들에게 굴러 들어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뜻과 섭리 가운데서 우리들에게 오는 것입니까?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통해서 본다고 한다면, 어느 것이 우리에게 오든, 그 무엇이 우리에게 오든 그 모든 것들이 다 누구로부터 온다고 고백할 수가 있나요? 하나님께로부터 올 수 있다고, 온다고 그렇게 고백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하나님께서 허용하시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셔야, 그래야 우리들의 이 삶 가운데서 모든 것들이 일어난다고 한다면, 사실은 우리가 가지는 그 모든 것들이 다 누가 주신 거예요? 하나님이 주신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들에게서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다 누가 주신 거예요? 다 하나님께서 주신 거예요.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는 말씀이 무슨 말씀을 하냐면,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음 부를 주시고, 부하게 하시고, 그리고 근심을 겸하여 주시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니까, 이 말씀이 조금 어려운 것입니다.

이 세상에 좋아 보이는 것이든, 나빠 보이는 것이든,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 가운데,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도대체 여기서 그렇다고 한다면 왜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이라고 하는 이런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도대체 여기서 말하는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이라고 하는 이 표현이 단순히 출처를 의미하는 표현이 아닐 수 있겠구나 라고 하는 사실을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은, 그 출처가 다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허용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얻게 된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 우리가 가지는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여호와께로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이라고 하는 이 표현이 복의 출처를 의미하는 표현이라기보다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서 얻게 되는 복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습니다. 한 가지 방법은 의로운 방법이고, 또 하나의 방법은 악한 방법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의로운 방법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가운데 얻게 되는 것, 그러한 것을 가리켜서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죠. 우리가 지금 복을 구하는데, 우리가 정말 좋은 것을 구하고 있는데, 우리가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대로 따라가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삶을 살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구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라고 표현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방법이 아니라, 의롭지 않은 악한 방법을 통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악한 방법을 쓰는 것이죠. 예를 들자면 도둑질하거나 속여 빼앗거나 여러 가지 악한 방법으로, 그래서 그것을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복을 베풀어주실 것을 의지하면서 얻는 복이 아니라,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내가 내 힘으로 내 악날한 방법을 통해서 나의 사악한 방법을 통해서 내가 원하고자 하는 그것을 얻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여호와께서 오시는 복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이 아니라, 내가 내 마음대로 얻는 복, 내가 악한 방법으로 얻는 복이라고 표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이라고 하는 것은 출처를 의미한다기보다는, 무슨 방법을 사용해서 복을 얻느냐의 차이점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악한 방법으로 얻는 복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겠습니까? 지금 당장은 좋아 보이지만 결국은 파멸로 결국은 근심으로 갈 수밖에 없는 소득이 되는 것이죠. 의로운 방법,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칙대로 순종하며 땀을 흘리며 노력하고 신실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규정하신 대로 열심히 노력해서 우리가 부를 얻는다고 한다면, 그 부는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이고, 그 여호와께서 주시는 부에는, 근심과 걱정이 따라오지 않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방법으로 속이고 빼고 악한 방법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법칙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가면서, 내가 내 능력으로, 내가 마음대로 갈취하는 그런 사악한 재물들은 지금 당장은 힘이 있어 보이고, 지금 당장은 좋아 보이게 되겠지만, 결국에는 그 물질로 인해서 우리가 파멸로 나아갈 수밖에 없고, 결국 그 물질 때문에 우리가 더욱더 근심하는 결과로 갈 수밖에 없다고 하는 점을, 오늘 이 22절의 말씀 가운데서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론은 무엇입니까? 버킹검이죠. 결론이 뭐예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면서 부를 축적하라라고 하는 것이, 결론의 말씀인 거죠. 정직하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가운데, 신실한 방법으로 얻을 모든 부를 축적해 나가고 재물을 축적해 나갈 수 있다고 한다면, 근심이 없을 것이지만 정직하지 못한 방법, 불의한 방법으로 많은 것을 얻게 된다고 한다면, 그것이 결국은 근심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 성도들이 깊이 기 기억하고, 매 순간순간마다 우리들에게 결단의 순간들이 오게 될 텐데, 그 결단의 순간에서 믿음의 결단들을 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22절의 말씀이, 오늘 읽은 성경 다른 구절들과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구절의 말씀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23절부터 계속해서 의인과 악인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는데요. 23절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미련한 자는 행악으로 낙을 삼는 것 같이, 명철한 자는 지혜로 낙을 삶느니라.” 24절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그의 두려워하는 것이 임하거니와, 의인은 그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느니라.” 25절의 말씀에, “회오리 바람이 지나가면 악인은 없어져도 의인은 영원한 기초 같으니라.” 28절의 말씀에, “의인의 소망은 즐거움을 이루어도, 악인의 소망은 끊어지느니라.” 29절의 말씀에, “여호와의 도가 정직한 자에게는 산성이요. 행악자 행악하는 자에게는 멸망이니라.” 30절 말씀에, “의인은 영영히 이동되지 아니하여도, 악인은 땅에 거하지 못하게 되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 지혜로운 자입니까? 지혜로운 자는, 어떤 기발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낼 수 있는 사람이 지혜로운 자가 아니고,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가 지혜로운 자인 겁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이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자는, 의로운 사람이고, 의롭게 행하는 자인 것이고, 그렇게 의롭게 행동한다고 하면, 그런 사람에게는 두려울 일이 없을 것이고, 그 의로운 자에게는 자신들이 원하는 것들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고 소망이 이루어진다라고 하는 것이 금방 읽은 말씀의 그런 의미입니다.

반대로 누가 어리석은 자인가? 누가 미련한 자인가?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미련한 자요. 어리석은 자이고, 따라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악을 행하는 것이며, 악을 따라 행하다 보면,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두려워하는 그것이 임하게 될 것이고, 결국은 멸망의 길로 가게 될 것이다.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이 있는데, 그 길이 완전히 다르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고, 지금은 의인의 길이나, 지금은 악인의 길이나, 별반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여요. 이것이 우리들을 늘 유혹하는 것이죠. 의롭게 살아보았자 별거 없네. 악하게 살아도 괜찮네. 라고 하는 것이 우리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겁니다. 의롭게 살아도 별 볼 일 없는 것 같이 보이고, 악하게 살아도 괜찮은 것처럼 보이는, 이 세상 가운데서, 우리는 의의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악인의 길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길로 미련한 길로 가게 될 터인데,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말씀해 주신 말씀이 무엇이냐면, 지금 당장 괜찮아 보인다고 해서 괜찮은 게 아니라, 결국 무엇이 다가올 수 있습니까? 회오리 바람이 다가오면, 어떻게 돼요? 악인은 어떻게 된다? 없어져 버린다 이거예요.

회오리 바람이 불지 않으니까, 괜찮은 것 같은데, 회오리 바람이 불어닥치면, 결국 산성이 아닌, 그 산성이 아닌 그 집은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는 거예요. 기초가 튼실하지 못하면, 결국 무너져 버릴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인데, 바로 이 잠언서의 말씀을 읽다 보니까, 예수님께서 해 주신 말씀이 기억이 납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7장 24절에서부터 27절의 말씀에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주를 반석 위에 지어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리라.” 예수님께서도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겁니다.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집을 지었는데, 그 두 집이 똑같아요. 겉으로 보기에는 괜찮아요. 지혜로운 사람이 지은 집이나, 어리석은 사람이 지은 집이나 괜찮아요. 때로는 때로는 이 어리석은 사람이 지은 집이 훨씬 더 크고 훨씬 더 아름답고 훨씬 더 매력적으로 보일 수가 있어요.

그런데 언제 문제가 되는 겁니까? 우기가 되어 창수가 나기 시작하면, 비가 내려서 물길이 쫙 다가오게 되면, 모래 위에 세운 집은 무너져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악인의 길은 곧 쓰러질 수밖에 없으니까, 결론은 뭡니까? 결론은 악인의 길을 걸어갈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의의 길로 걸어가야 한다는 것이 결론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믿습니까?

오늘 이 말씀들을 살펴보는 가운데 우리가 하나 좀 깊이 생각해 보아야 될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27절의 말씀입니다. 27절의 말씀에 뭐라고 표현하고 있냐면 여호와를 경외하면 어떻게 된다고요? 장수하느니라. 그러나 악인의 수명은 어떻게 된다고요? 짧아지느니라. 정말 그렇습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은 정말 오랫동안 장수하는 것 맞습니까? 악인의 수명이 짧은 것 맞습니까? 정말 그래요? 안 그래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시는데, 안 그런 것 같아요. 우리 주변에 보면, 정말 믿음의 사람인데, 하나님이 일찍 데려가시는 그런 안타까운 그런 경우를 보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 보면 어떤 사람도 있어요? 귀신은 저 사람 안 잡아가고 뭐 하나 싶을 정도의 사람이 있단 말이에요. 성경 말씀이 틀린 겁니까? 어떻게 된 겁니까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장수할 것이다. 이야기하고 있고, 악인은 단명할 것이라고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데, 우리가 만나는 현실에서는 그런 것 같이 보이지 않아 보이는 일들이 너무나도 많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제가 물어보니까, 고개를 다들 절레절레 흔드셨는데, 성경이 틀렸습니까? 우리가 잘못 보고 있는 건가요? 악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생명과의 관계가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건가요? 아예 없는 것인가요? 도대체 무엇일까요?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장수하는 것이 의인이냐 여부와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어 보인다고 하는 것이 오늘 우리의 문제입니다.

정말 단명한 사람들은 악인들이어서 단명했을까요? 정말 지금도 오래 살고 있는 사람들은 선한 사람이기 때문에 오래 살고 있는 것일까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런 것 같지 않고, 그렇다고 한다면 성경 말씀이 잘못된 것일까요? 성경이 오류가 있는 것일까요? 왜 성경은 이런 별로 납득이 안 되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것일까요? 그런데 이 말씀에만 여기에 이렇게 써 있는 것이 아니라, 십계명 가운데 제5계명에도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부모를 공경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이 땅에서 너희의 생명이 길리라라고 말씀해 주셨고, 그 말씀을 신약 성경인 에베소서 6장에서도 반복해서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부모를 공경하면 장수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외갓집 식구들은 다 90세, 100세 막 이렇게 사시는데, 부모를 공경해서 그런 건가요? 왜 그렇죠? 실제로 우리가 느끼는 것은 부모를 공경하는 것과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과 생명의 길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이 틀렸나요? 그럼 어떻게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저는 이 말씀이 저는 담배와 같다고 생각이 듭니다. 담배가 뭐냐? 담배라고 하는 것은 건강에 좋지 않은 겁니다. 그래서 담배를 피면 건강이 나빠지게 돼 있고, 담배를 피면 암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심각한 질병을 걸릴 수가 있겠고, 더 나아가서 수명이 단축될 수 있습니다. 담배가 그런 좋지 않은 역할을 한다는 것 다 동의하십니까? 동의하지 않습니까? 다 동의할 거라고 생각이 들어요. 과학적인 사실이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실제적으로 우리 주변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보면, 예외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예외가 많아요. 골초들이 장수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골초들이 건강한 사람들이 많아요. 희한하단 말이에요. 담배 하나도 안 피운 사람들이 암에 걸리고, 질병에 걸리고 그러는데, 담배 핀 사람들은 건강한 사람들이 주변에 많이 있어요. 그런 예외들이 엄청나게 많아요. 그런데 그러니까 담배와 건강은 상관이 없다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 옳을까요? 옳지 않을까요? 옳지 않은 겁니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담배곽에다가 심각한 경고 문구를 적어놓는 겁니다. 흡연을 하게 되면 이런 이런 질병에 걸릴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경고 문구를 적어놓기도 하고, 환자의 그 아주 끔찍한 사진을 그 담배곽에다가 사진을 붙여놓기도 하고, 그래서 피우지 말라고 경고를 하는 겁니다. 담배 피우지 않는 게 좋으니까요. 담배 피우는 분 계시면 끊으십시오.

하지만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내 주변에 장수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내 주변에 담배 피워도 괜찮은 사람들이 있으니까, 괜찮겠지 괜찮겠지 하면서 피우는 겁니다. 천편일률적으로 담배와 담배를 피우느냐 피우지 않느냐가 사람의 수명을 완벽하게 결정하는 요인일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배는 건강에 좋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피우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옳은 것인 것처럼, 오늘 성경 말씀은 어쩌면 우리들에게 실감이 되지 않는 말씀처럼 느껴질 거예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과 장수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으며, 부모를 공경하는 것과 장수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우리 주변에 보면 반대되는 얘를 얼마든지 만나볼 수 있습니다. 이건 아무 상관이 없는 거라고 그렇게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그렇게 설득시키면서 하나님 안 믿어도 괜찮아, 의롭게 살지 않아도 괜찮아, 부모를 공경하지 않아도 괜찮아, 아무 문제가 없어. 괜찮아, 오래 살 수 있어. 그렇게 해봤자 소용 없어라고 우리 자신을 설득시키려고 하는 그런 악한 마음들이 우리들에게 있지만,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개인의 생명이 길고 짧은 것은 개인의 여러 가지 복잡한 요인에 따라서 달라질 겁니다. 사람의 생명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단순히 이 사람이 부모를 공격했느냐의 한 요인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이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느냐, 이 한 요인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생명에 미치는 그 영향이라고 하는 것은 다양한, 정말 천차만별의 이유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단명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장수할 수도 있고, 다양하게 나타나고, 아무튼 그 요인들이 많기 때문에 무엇이 이것이 정답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이 하나님의 말씀, 우리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경외하지 않는 것보다, 그것이 훨씬 더 바른 길이고, 생명의 길이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그런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믿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담배가 우리의 건강을 해치는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말씀이 우리의 인생 가운데 이렇게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야 되겠구나. 뿐만 아니라 우리가 부모를 공경하며 사는 것이 옳은 것이고, 그것이 장수의 그런 약속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믿으며 믿음으로 살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잠언서 10장 31절과 3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의인의 입은 지혜를 내어도, 패역한 혀는 배임을 당할 것이니라. 의인의 입술은 기쁘게 할 것을 알거늘, 악인의 입은 배역을 말하느니라.” 의인의 입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지혜 있는 자인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는 그 입술도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말들을 하게 될 것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지혜가 없는 자들은, 패역한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결국은 패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입술에도 주님께서 파수꾼을 세워주셔서, 정말 지혜로운 말을 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스스로 제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의인의 혀를 가지고 있는 것이 생명의 길이고, 또한 악인의 혀를 가지고 함부로 말하는 것이 그것이 망하는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믿음으로 우리들의 입술 가운데서 선하고 의로운 말들이 나올 수 있도록, 우리가 주님께 기도하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 늘 넘어지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살 수 있다고 한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나 이런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늘 넘어지고 또 넘어지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넘어질 때마다, 주님 앞에 다시 회개하고 나아가야 될 것이고, 또한 주님의 성령을 의지하고 간구하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의 길을 걸어가게 해달라고 날마다 날마다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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