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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만은 욕을 부릅니다 (잠 11:2)

교만과 겸손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고 오늘 잠언서 11장 2절 말씀 가운데서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이 한국말로 번역된 잠언서 11장 2절의 말씀을 보면, 그냥 밋밋하게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어 원어로 보면, 좀 더, 참 멋있게 이 표현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 공부를 한번 해볼까요? 한번 보겠습니다. 어떻게 읽느냐 하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 나가는 것이 히브리어입니다. 그래서 지금 가운데에 있는 것이 히브리어인데요. 어떻게 읽냐면 “바 자돈 봐야보 칼롬”이라고 하는 히브리어입니다. “바”라고 하는 것은 온다는 얘기고, “자돈”이라고 하는 것은 교만이라고 하는 말이고, “봐야보”라고 하는 것은 그리고 온다라고 하는 말이고, “칼론”이라고 하는 것은 수치, 욕, 이런 의미입니다. 교만이 오면 수치가 온다라고 하는 말인데요. 제가 핑크빛으로 표현을 했습니다마는, 교만이라고 나타내는, 교만이라고 하는 말을 나타내는 “자돈”이라고 하는 히브리어 단어와 수치를 의미하는 “칼론”이라고 하는 단어가 공통점이 있습니다. 무슨 공통점이 있죠? 운이 같아요. 운이. 우리 한시 공부하다 보면, 한시는 뒤에 운율이 같은 운으로 해서, 이렇게 한시를 만들어 가듯이, 이 히브리어 언어에서도 시를 표현할 때, 어떤 문장을 표현할 때 운율을 맞추어서 표현하는 겁니다. 그래서 “바 자돈 봐야보 칼론”이라고 얘기해서, “자돈” “칼론”이라고 하는 교만과 수치를 같은 운율로 해가지고, 기억에 팍팍 남도록, “자돈” “칼론” “자돈”하면 “칼론”이 생각나도록. 교만하면 수치라고 하는 말이 생각나도록 이렇게 연결시켜 놓은 것이 히브리어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치워줘도 괜찮겠습니다. 그러니까, 교만이 오면 욕도 온다고 하는 우리 한국말 번역보다는 히브리어 표현이 훨씬 더 운율이 있어서, “아, 그렇구나” “자돈” 교만이 생기면, “칼론” 수치가 오는구나라고 하는 것이 생생하게 우리들의 마음에 박히도록 표현되어 있는 것이 바로 잠언서 11장 2절의 말씀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교만한 자는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지만, 겸손한 자에게는 그런 수치를 당하지 않게 되는 것이고, 겸손한 자야말로 정말 지혜로운 자라고 하는 것이 오늘 성경에서 가르쳐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들은 교만하지 아니하고 겸손한 모습을 가지는 것이 정말 중요한데요. 도대체 그러면 이 교만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무엇을 가리켜서 교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 교만을 우리가 가지게 된다고 한다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교만이 찾아오면, 그것이 우리에게 좋은 것이 아니라, 수치를 당하게 되는 것이고, 정말 욕을 당하게 되는 것이 교만인데, 우리가 그러므로 경계해야 할 것이 교만이라고 하는 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싹트지 아니하도록 조심해야 될 것인데, 도대체 교만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교만이 무엇일까요?

교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선을 행한 다음에, 뭔가 열심히 수고한 다음에, 무엇인가 좋은 일을 한 다음에,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서 생겨나게 되는 자연스러운 만족감, 혹은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생겨나게 되는 기쁨, 그런 것을 가리켜서 교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구분해야 될 거라고 생각이 되는데요. 우리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 사람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품성이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있는데요. 그래서 하나님의 그 특성들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도 그대로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선을 행하면 기쁘고, 악을 행하면 정말 고통스럽고 슬픈 그런 마음이 우리들에게 자연스럽게 있게 되는 것이죠. 우리가 무엇을 행할 것인가? 선을 행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긍휼을 베풀어주고, 용서를 베풀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될 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어떠한 것이 나타나냐면, 기쁨이 생겨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할 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만족감이 생겨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수고하고 애쓴 다음에, 그 수고의 대가로 어떤 열매를 가지게 된다고 한다면, 기쁨과 만족감이 생겨나게 되어 있는데요. 이런 것들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기쁨이 생겨나는 것, 아, 정말 대단한 자부심이 생겨나고, 그리고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만족감이 생겨나고, 자부심이 생겨나는 것은 교만한 것과는 다른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사실 이러한 것은 나쁜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속에 생겨나는 기쁨이야말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생겨나는 그런 만족감 자부심 이런 거야말로 우리가 선을 행하도록 만들어주는 아주 중요한 동력이 되는 것이고, 그것은 건전한 감정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불교에서는, 불교나 유교적인 관점에서는, 특히 불교에서는 우리들의 마음을 자꾸만 비워야 한다고 하는 것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그래서 우리들의 기쁨도 슬픔도 만족함도 궁핍함도 그 어떤 종류의 감정이라도 다 나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아예 그런 것 자체를 다 없애버려서, 그냥 아무런 느낌도, 아무런 생각도 없는, 그런 평온함, 어떤 거 하나에 따라서 기쁘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고 만족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고, 그냥 이 세상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그냥 내 마음 가운데 잔잔한 고요함, 흔들리지 않는 고요함을 추구하는 것이 그게 불교적 영성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불교적인 관점에서는 기쁨도 별로 좋은 게 아니에요. 별로 그게 바람직한 게 아니에요. 만족함도 바람직한 게 아니에요. 아마 유교적인 관점에서도 어떤 그런 관점들이 조금씩 들어가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늘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면서도 성경적인 관점으로 성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까지 지내왔던 유교적인 배경에서 성경을 읽기도 하고, 불교적인 배경을 가지고 성경을 읽기도 하기 때문에, 성경을 오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요. 성경 전체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시는 교훈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선을 행하고 그 선을 행할 가운데 마음 가운데 기쁨이 넘쳐나고 선을 행하는 것에 대해서 내가 만족함을 느끼고 자부심을 느끼는 것 자체를 성경은 금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기쁨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거예요. 선을 행할 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정말 즐거움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 그것을 정죄시 해야 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애쓴 다음에,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린 다음에 수많은 수확을 거두게 될 때, 기쁨이 넘치게 되고 즐거움을 얻게 되고 성취감을 누리게 되는 것이야말로 그것은 건전한 감정이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오늘 잠언서 11장 2절에서 가르쳐주고 있는 것처럼, 교만이 오면 수치가 따라올 것이라고 했을 때, 그러므로 이것은 별로 우리에게 유익하지 않은 그런 교만이 무엇일까? 도대체 이 교만이 무엇이고, 교만이 아닌 만족 교만이 아닌 기쁨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좋지 못한 교만, 결국은 수치를 당할 수밖에 없는 교만이라고 하는 것은 정당한 자부심이나 정당한 기쁨 정당한 행복한 마음을 넘어서서, 그래서 잘못된 방향으로 가게 되는 왜곡된 기쁨, 왜곡된 만족, 왜곡된 성취감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정당한 기쁨 괜찮은데요. 정당한 성취감 정당한 자부심 이런 것들은 괜찮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조금 잘못되어서 왜곡되어 나타나는 기쁨 왜곡되어 나타나는 만족감 왜곡되어 나타나는 성취감들은 그것은 바로 교만으로 연결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무엇이냐면, 그 교만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마음이 동반된 감정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교만은 단순한 기쁨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서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뛰어나고,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은 수준에 있고 더 낫다고 하는 그 사실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한 과도한 평가를 내리고, 뿐만 아니라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경멸하고 무시하는 그런 악한 마음이 수반되는 것이 교만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러한 교만은 단순한 정당한 기쁨을 넘어서서 다른 사람들을 향한 무시와 모독, 멸시가 수반되는 것으로서, 이것은 아주 사악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만일 어떤 학생이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합시다. 공부를 열심히 해가지고, 정말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많이 수고하고, 더 열심히 공부하고 정말 성실하게 살아서 그리고 정말 시험 공부를 잘해가지고 그래서 전교에서 1등하는 그런 결과를 얻게 되었을 때, 그래서 자기가 지금까지 수고한 것에 대한 보상을 받았기 때문에, 그 결과가 나타났기 때문에 기뻐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까지는 괜찮아요. 그것은 정당한 거고 괜찮은 생각입니다. 기뻐하고 만족해하고 행복해하는 것은 괜찮은 일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순식간에 어떤 마음으로 변하게 되냐면, 다른 사람을 향한 경멸과 무시, 그리고 다른 사람을 아주 깔보는 그런 마음의 태도가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나타날 수가 있는 것이죠. “저 공부도 지지리도 못하는 놈들” 그러면서 비난하고, 무시하고, 깔보는 그런 악한 마음들이 우리들에게로 나타날 수가 있겠는데요. 이러한 모습, 그러니까 기쁨이 정당한 기쁨이 아니라, 그 경계선이라고 하는 것이 굉장히 깻잎 한 장 차이와 같아서, 김 한 장 차이와 같아서, 순식간에 그런 정당한 기쁨에서부터 교만으로 쉽게 변해버릴 수가 있겠는데요. 아무튼 그러나 차이는 분명하게 나타나는 겁니다. 정당한 기쁨이 있는가 하면, 그 정당한 기쁨을 넘어서서, 내 마음에 대한 그런 교만한 마음이 들어오게 될 때,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고 무시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되는 그런 단계로 나가게 되는 것이죠. 대표적인 케이스를 성경에서 찾는다고 하면 누가 있죠? 바리새인들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신앙생활을 참 열심히 했어요. 여러분 신앙생활 잘한다고 하는 것은 좋은 겁니다. 여러분 신앙생활할 때 기쁘지 않습니까? 내가 주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 마음 가운데 기쁨이 넘치지 않습니까? 정말 좋은 것이고, 내가 신앙생활 잘한다고 하는 것이 행복해지게 되는 그런 요소가 되는 것이죠. 그런데 어느 순간에 그것이 다른 사람들을 비교하고, 나와 견주기 시작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는 태도로 쉽게 나타나는 겁니다. 아니, 목사라고 하면 이 정도는 돼야 되는 거 아니야? 아니 장로라면 이 정도는 해야 되지 않아? 권사라면 이 정도는 해야 되고, 집사면 이 정도는 해야 되고, 앞에서 찬양 인도를 하는 사람이면, 이 정도는 해야 되고, 그렇게 기준을 세워놓고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기 시작하는 것이죠.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바리새인들이었는데요. 누가복음 18장 11절에서 12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바리새인들이 기도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요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에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바리새인이 행한 것은 다 잘한 거예요. 못한 게 없어요. 십일조 드려야죠. 금식해야죠. 정말 하나님의 말씀대로 거룩하게 살아야죠. 다 해야 될 일들이에요. 그런데 그 일들을 하는 가운데, 나와 다른 사람을 비교하면서 경멸하는 마음이 나타나는 것이죠. 가장 사악한 형태의 교만함이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겠습니다.

다른 사람을 경멸하고 무시하는 태도가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만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 예들이 성경에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헤롯 왕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헤롯왕은 연설을 하는데, 사람들이 환호하면서 박수를 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마음속에 교만함이 솟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안아무인이고, 그리고 자기가 마치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된 것이냥, 마치 자기가 신이라도 된 것인냥, 자신의 마음 가운데 교만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치셨다고 사도행전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느브갓네살 왕이 있는데요. 그 느브갓네살은 전 세계를 통일한 통일왕국의 군주였습니다. 어느 날 왕궁 위에 올라가서 자기가 이루어 놓은 업적을 보면서 마음 가운데 교만한 마음이 들기 시작하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내 밑에 굴복해버렸고,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이 세상을 얻어냈다고 하는 그런 교만한 마음이 들기 시작하면서, 결국 하나님께서 그 느브갓네살을 치셨다고 하는 이야기가 다니엘서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 왕도 역시 예외가 아니었는데요. 다윗 왕은 하나님 앞에 참 겸손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왕 위에 오르고 난 다음에, 자기가 이룬 업적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래서 인구 조사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악한 동기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모세도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모세는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가운데 반석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화를 내면서 분노하면서 말을 내기 시작했는데요. 교만한 마음이 들 때는 분노가 자연스럽게 나오는 겁니다. 왜냐하면 교만한 마음이 있으면 상대방을 깔보게 되는 것이고, 무시하게 되는 것이고, 결국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서 분노가 솟아오르게 되어 있는 것이죠. 민수기 20장 10절 말씀에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모세와 아론은 더 이상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는 하나님의 판결을 받게 되는데요. 도대체 모세가 잘못한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가 있겠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아니하였다 등등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가 있겠는데, 가만히 살펴보면 모세의 말이 달라졌습니다. 모세가 처음 사역할 때에는 늘 했던 말이 무엇이냐면, “하나님께서 너희를 향해서 하시는 일을 보라”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출애굽기 14장 13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못하리라고”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라 여호와의 구원을 보라고 이야기했던 사람이 모세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사용된 그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다니면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기적이 나타나게 하고, 모세를 통해서 여러 가지 일들이 나타나게 되는 가운데, 모세의 마음 가운데 어떤 마음이 들었냐면 자기가 기적을 베푸는 것인냥 착각하고, 그리고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화를 내는 것이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모세와 아론이 물을 내는 게 아니잖아요? 하나님께서 내시는 것인데, 마치 자기들이 내는 것처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고, 교만해져 버린 모습이 민수기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는 것이죠.

사무엘하 6장에 보면 웃사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웃사는 법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그 길 가운데 그 법궤가 흔들리는 그 순간에 달려가서 그 법궤를 만지고 그 법궤를 보존하려고 하는 노력을 했는데요. 어쩌면 거룩한 동기처럼 보이고, 법궤를 보존하려고 하는 선한 동기처럼 보였는데, 하나님께서 그 웃사를 쳐 죽이셨습니다. 그 사건을 해석하면서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이 웃사의 마음 가운데 들어있는 교만한 마음을 이야기했어요. 웃사는 지금까지 이 법궤를 지키고 관리하면서, 내가 이 법궤를 관리하는 사람이다. 가 이 법궤를 보존하는 사람이다. 라고 하는 그런 교만한 마음으로 법궤를 대했고, 그 위기의 순간 가운데 마치 자기가 무슨 신이나 된 것처럼 교만한 마음으로 돼서, 결국 그렇게 되었다고 평가를 내렸는데, 아마 의미 있는 해석이 될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에게 질문이 생깁니다. 정당한 기쁨과 수치를 당할 수밖에 없는 교만과의 차이는 무엇일까? 도대체 어떤 점에서 차이점이 있을까? 정당한 자부심은 무엇이고, 그 정당한 자부심을 넘어선 나쁜 교만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 차이가 무엇일까라고 하는 질문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솟아오릅니다.

이것은 바른 해석이라기보다는 그냥 어떤 분이 써놓은 글인데, 그나마 참 많은 울림이 있는 글이어서 여러분들에게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김영자라고 하시는 분이 쓴 <자부심과 교만>이라고 하는 그런 글입니다. 들꽃은 김형자 씨의 아마 호 같아요.

“자부심과 교만”

그대는 자부심과 교만의 차이를 아시는지요?

내가 하나님의 소중한 자녀라는 생각은 자부심이요

하나님은 나 만의 하나님이라는 생각은 교만입니다

겸손히 낮추어 남을 섬길 수 있는 사람은 자부심이 있는 사람이요

결코 남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자부심이 있는 사람은 안정감이 있어 누구든 기댈 수 있지만

교만한 사람은 갈대와 같아서 아무도 그에게 기대지 않습니다

저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받는 딸이라는 자부심은 갖지만

하나님이 누구보다 나를 더 사랑하신다는 교만한 사람은 아니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교회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무척 사랑하신다는 자부심은 있지만

우리교회 만큼 좋은 교회가 어디 있느냐는 교만한 교회는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자부심은 있어도 교만하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언제나 하나님 의식속에서 살고 자기 도취 속에서 살지않는 것입니다

아 정확한 신학적인 논설의 글은 아니고, 시적인 글이기 때문에 우리가 참조할 수 있는, 그리고 깊이 묵상할 수 있는 그런 시가 될 거라고 생각이 되는데요. 도대체 자부심과 교만 사이의 그 경계가 무엇일까? 이걸 깊이 좀 생각해 봤어요. 무엇보다도 큰 차이가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계산에 넣었느냐? 넣지 않았느냐의 차이가 될 것 같습니다. 자부심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가운데, 기뻐하는 것이 자부심이라고 한다면, 교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루셨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 교만일 수 있겠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인정하지 못하고, 내가 모든 것을 했다고 하는 그런 나의 공로를 강조하는 것이 교만일 수 있겠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 번째로 자부심과 교만의 차이가 있다고 한다면, 자부심이 있는 사람은 감사가 나타나는 반면에, 교만한 사람은 불평만 나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자부심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에 감사하면서, 그리고 그런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내가 이것을 이루어냈다고 하는 그런 감사의 마음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교만한 사람은 내가 이것을 이루는 데 있어서 아무도 돕지 않고, 내가 자수성가했고 아무런 상황이 없는 아무런 도움이 없는 가운데 내가 이것을 해냈다고 하는 불평이 나오는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세 번째로 자부심과 교만의 차이가 있다고 한다면, 자부심을 가진 사람은 그것이 나의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그리고 자신보다 못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긍휼의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는 반면에, 교만의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향한 사명감을 잃어버리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을 보면, 무시하고 멸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 어, 자부심과 교만의 차이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교만이라고 하는 것을 불교적 개념이나 혹은 유교적 개념으로 생각하는 경향들이 많이 있어서, 그래서 교만하지 않으려면 무조건 다 드러내지 않아야만 한다고 하는 그런 고정관념이라고 할까요. 자꾸만 숨겨야만, 그게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관점들이 우리나라 성도들에게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유교적인 관점이거든요. 유교적인 관점은 드러내지 않고, 아닌 척하고, 숨기고 그냥 조용히 있고 드러내지 않는, 그것이 마치 가장 겸손한 모습이라고 생각하게 되는데요. 그런데 제가 미국에 가서 미국 교회 성도님들을 보니까, 그 미국 교회 성도님들은 정말 겸손하신 분들이에요. 정말 이분들을 볼 때, 참 신앙의 연륜이 있구나! 정말 영적인 훈련이 참 잘 되어 있구나라고 하는 것을 제가 미국 교회 성도님들을 만나면서 많은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미국 교회 장로님들이나 집사님들이나 이런 분들을 만나게 될 때, 이분들이 정말 자기를 교만한 마음을 드러내면서 막 사역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겸손하게 성실하게 사역을 잘하는 모습을 봤는데요. 그런데 우리 한국 교회 성도님들하고 다른 점이 하나 있는데, 이분들은 자신의 이름을 당당하게 드러내놓으면서도 겸손할 수가 있었다고 하는 거죠.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다 무명으로만 해야 되잖아요? 뭘 해도 교회에 무슨 비품 하나 바쳐도, 목사님 무명으로 해주세요. 제가 한 걸로 밝혀주지 말아주세요. 자꾸만 그렇게 많이 하는데, 대부분 다 이게 다 유교적인 관점에서 나온 겁니다. 자꾸 제가 미국 교회 얘기해서 좀 죄송합니다마는, 제가 갔던 미국 교회를 가보니까요. 교회 모든 것에 헌금자의 이름이 다 적혀 있어요. 교회에 비치해 놓은 성경책에도 누가 누구를 기념해서 교회 성경책 한권 비치용 성경책 한권 바칩니다. 적어놨어요. 의자에도 이 의자는 누가 누구를 기념해서 바친 의자입니다. 다 의자마다 다 적혀져 있습니다. 방마다 이 방은 아무개가 헌금을 한 돈으로 만든 방입니다. 다 이름이 다 붙여져 있어요. 다 이름을 다 써놨어요. 무명으로 하는 걸 거의 찾아보질 못했어요. 그러면서 기념하고, 정말 우리 어머니를 기억해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기억해서, 기념해서, 어머니 기일 날, 내가 교회에 이거 조그마한 비품 하나 선물하고 싶습니다 하면, 어머니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 적어서 그렇게 해서 기념으로 이렇게 드리고 하는데, 그런데 보면 겸손해요. 내가 이걸 했다고 그래가지고 막 자랑하고, 막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겸손하고 하지 못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깔보고, 저런 것들은 헌금도 안 하는 사람들 저거 십일조도 제대로 안 하는 사람들 하면서, 신앙이 연약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멸시하고 그런 태도는 하나도 안 보이는데, 그런데 하는 일들을 다 이름을 적어놓으면서, 하는 걸 보면서 참 많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교회에서 장학금을 줄 때도, 우리는 그냥 아무렇게, 그냥 두지만, 아무개 장학금, 누가 누구를 기념한 장학금, 그 사람 이름으로 장학금을 주기도 하고, 모든 걸 할 때 이름을 다 밝혀서, 그렇게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그분들을 보면서 교만한 느낌을 받았냐면, 교만한 느낌을 하나도 받지 않았어요. 이분들이 정말 겸손하게 주님을 섬기려고 하고 있구나. 정말 주님을 사랑하고 있구나라고 하는 것을 제가 엄청나게 많이 느꼈습니다.

근데 우리나라 성도님들은 무명은 하는데, 안 하는 사람들 깔보기도 하고, 그럴 경우가 종종 생길 수가 있어요. 우리 교회는 없어요. 그럴 수가 있단 말이에요. 성경적 관점은 자부심은 강화하되,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주신 힘으로 하는 것처럼 겸손하게 낮아진 자세로 하면서, 나보다 연약한 사람들을 미워하거나 경멸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인격을 존중해주는 그런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교만이 싹 트는 가장 위험한 지점이 어디냐면 사람을 바라볼 때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데 우리는 늘 내 옆에 사람을 신경 씁니다. 저 사람이 어떻게 했나? 저 사람은 어떻게 했나? 그래서 저 사람보다 적게 할 수도 없고, 저 사람보다 더 많이 할 수도 없고, 비슷하게 하려고 하는 그런 마음들이 우리들에게 있어요. 그런데 다른 사람 신경 쓰지 마세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각각 다르게 창조하셨어요. 어떤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주었고, 어떤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만 줬어요. 그런데 어떤 과부에게는 옆전 두닢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 두닢밖에 없던 그 과부가 드렸던, 그 작은 예물을 주님께서는 보시고서 정말 기뻐하시고 칭찬하셨어요. 액수를 보신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을 보신 것이고, 그 상황 가운데서 드릴 수 있는 그 여인의 마음을 주님께서 보셨기 때문이죠. 그래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저 사람보다는 내가 많이 했기 때문에 네 그래서 교만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나쁜 교만함일 것이고, 내가 저 사람과 늘 하나님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정말 나에게 베풀어주신 것을 기억하면서, 감사의 마음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비교를 통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결국 교만의 길로 나아가게 되는 것일 겁니다.

갈라디아서 6장 4절에서부터 5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각각 자기의 일를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않겠다고 하는 말이 무슨 말이냐면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않아도, 내가 나 자신이 행한 그 일로 인하여 내가 자부심을 갖게 될 것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은 아주 간단합니다. 신앙생활은 무엇입니까? 사람을 보는 게 아니고 하나님을 보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보지 않고, 사람을 보기 때문에 교만해지는 것이죠. 마태복음 6장 1절 말씀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면,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사람들을 보고서 선한 일을 행하면, 자부심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교만함이 생길 뿐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바라보며, 사역한다고 하면, 자부심이 생기게 될 겁니다.

교만에는 수치가 따른다고 오늘 성경 말씀에서는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왜 수치가 따르나요? 거품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거품이 우리들에게 있는데, 그 거품은 마지막 심판날 앞에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우리의 벌거벗은 몸이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교만할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늘 넘어지는 게 우리들의 모습이에요. 겸손하게 신앙생활해야 되겠다고 하면서도, 늘 자꾸만 솟아오르는 것이 교만의 마음들입니다. 따라서 그 순간순간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가서 다시 한 번 회개하고 주님의 은혜를 힘입어 다시 한 번 일어서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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