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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우상이 될 때

나는 대선을 앞두고 계속해서 정치가 우상이 될 위험을 경고해왔다. 우리에게 좋은 모든 것들이 우상이 될 가능성이 있는데, 특히 정치는 더더욱 그렇다. 정치는 종교보다 더 종교적이기 때문이다. 만일 정치가 우상이 된다면, 우상을 섬길 때 얻게 되는 피해를 고스란히 받을 수밖에 없다. 우상은 우리에게 화려한 것을 약속하지만 결국은 “아무것도” 우리에게 주지 않으면서 우리를 착취하는데, 정치는 언제나 그렇다. 늘 속으면서도 또 속는 게 어리석은 인생이다.

우상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고 표현했는데, 사실 이러한 표현은 과장법적 표현이다. 우상이 우리들에게 주는 게 있기는 하다. 우상은 마치 선악과와 같아서, 그것을 베어무는 순간 그 맛을 느낄 수 있다. 매력이 없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약속했던 것은 주지 않는다. 즉 아무리 선악과를 먹어도 우리는 하나님처럼 될 수 없다. 오히려 더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데,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더 나은 것을 위해 우상을 갈망하는 데 그 결과는 재앙일 뿐이다. 우상화된 정치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정치가 우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은 정치에 대해서 기계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거나, 정치와 거리를 두고 무덤덤하여지라는 뜻은 아니다. 사실 정치적 중립이란 그 자체로 모순이며 가능하지 않으며, 바람직하지도 않다. 더 나아가 기계적 중립이란 고도로 위장된 정치적 참여일 뿐이다. 악한 정치에 대하여 기계적 중립을 선택하는 것은 결국 그 악한 정치에 동조하는 셈이며, 선한 정치에 대하여서는 결국 그 선한 정치를 외면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만일 히틀러와 같은 지도자가 등장한다면 적극적으로 반대해야 하는 것이고, 미치광이가 운전대를 잡는다면 그를 운전대에서 끌어내려야 하는 것이지, 옆에서 강 건너 불구경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정치가 우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은 열정적으로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이나 후보자를 위하여 선거운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를 위해서 정당을 위해서 열정적으로 도와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와 정당을 위해 설득하는 일은 당연하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지 정치가 우상이 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복음을 전해야 하는 목회자라도 그렇게 할 수 있다. 복음의 영역은 정치 분야를 제외한 나머지 영역에만 미치는 것이 아니고, 역으로 정치의 영역도 신앙의 분야를 제외한 나머지 영역에만 미치는 것이 아니다. 침묵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러면 언제 정치가 우상이 되는가? 첫째, 내가 지지하는 정당이나 후보가 오로지 유일한 희망이라고 착각하여 무조건적 지지를 하게 되는 경우이다. 그렇지 않다. 사람은 단점이 있고 실수가 많으며, 때로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기까지 한다. 정치인에 대한 묻지마 지지는 그 정치인이 우상이 되어버렸고 우리가 그의 정신적 노예가 되었다는 증거이다. 정치인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할 게 아니라, 그가 주창하는 정책이 합리적이고 도덕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이 될 때 그 정책을 지지하여야 한다.

둘째, 내가 지지하지 않는 정당이나 후보를 향해서 증오하는 마음을 가지고 무조건적으로 미워하는 경우이다. 지지하지 않는 정당이나 후보의 주장도 귀 기울여 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진리를 다 파악할 수 없고, 항상 진리의 한쪽 면만을 보기 때문이다. 진리는 우리의 머리보다도 더 커서 다 파악할 수 없다. 나는 원통의 한쪽 면을 보고 둥글다고 말하지만, 다른 사람은 원통의 다른 면을 보고 직사각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와 다른 사람의 말을 존중하고 들으면서 차분하게 대화할 수 없다면, 증오와 분노로 상대를 제압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면, 이미 정치가 우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좋아지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만 보이고, 누군가가 싫어지면 미워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만 눈에 들어온다. 두 사람이 똑같은 행동을 해도 전자에게는 용납되지만 후자에게는 혐오스럽게 보이는 이유가 된다. 우리의 선택이 잘못되는 것은 그렇게 찾아낸 이유들이 지극히 합리적으로 보여서 스스로 의심해보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정치인을 지지하는 게 우상의 수준으로 넘어가면, 객관적인 판단은 흐려지고 무조건 미워하거나 무조건 지지하는 결과가 나타난다. 우상을 섬기다보면, 우리는 우상을 닮게 되어 있다(시 115:8). 그래서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게 된다. 아무리 진리를 이야기해도 그 진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래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날 필요가 있다. 혹시 정치가 우상이 되어버려서 내가 그 우상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늘 점검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왜 정치를 우상으로 만드는가? 정치라는 우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객관적으로 정치를 판단하고 내가 선택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정반대이다. 우리는 이미 정치의 자기장 안에 들어와 있다. 우리 주변의 모든 것들이 정치라는 자기장의 영향을 받는 것이다. 내가 매일 듣고 보는 뉴스도, 내가 만나는 사람들도 모두 다 정치의 자기장 속에 있다. 진공 상태에서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이미 운동장은 한쪽으로 유리하게 기울어져 있다. 우리는 정치적으로 태어나서 정치적으로 양육받고 정치적으로 판단하게 되어 있다. 나는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 이미 정치적인 편향성을 가지고 판단하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히브리 노예들이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았으면서도, 가나안으로 들어가 자유인으로 살기보다는 오히려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길 갈망했던 일들이 일어난다.

셋째, 내가 지지하지 않은 정치인이 당선되었을 때, 불평하고 분노하며 그 정치인이 성공할 수 없도록 방해하는 일에 나서게 되는 경우이다. 우리는 다른 정책과 다른 노선을 걷지만 한 팀이다. 내가 지지한 후보가 당선되지 않았다고 해서, 불복하거나 그 정치인의 성공을 방해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건 이미 내가 정치와 정치인을 우상화하고 그의 노예가 되었다는 증거일 뿐이다.

이 세상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 그 하나님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가장 선하신 뜻대로 움직이신다. 그 하나님은 때로는 바벨론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치기도 하셨다. 로마를 들어서 이스라엘을 통치하게 하시기도 하셨다. 그래서 성경의 가르침은 악한 정권이라 할지라도, 통상적이고 선한 통치에 대해서는 헙력할 것을 가르친다. 누가 당선되든,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때로는 안타깝고 슬프기도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기뻐해야 하고, 더 나아가 정당한 통치에 대해서는 협력해야 한다.

나는 그동안 중립을 지켰다. 중립이라는 것 자체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립적인 위치를 지킨 것은 적어도 우리 후보들 가운데 그 누구도 히틀러는 아닐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분명 선악이 있고, 누군가는 누군가보다 더 좋은 게 분명하다. 하지만 전략적 중립을 지키는 것은 정치의 우상에 빠진 사람들과 대화하기 위해서이다. 안타깝게도 우상에 빠진 사람들은 생각이 단순해서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오히려 선한 의도를 가지고 이야기를 해도 그 사람을 공격하곤 한다. 그래서 전략적 중립을 지킨다. 들리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더 나아가 복음이 오해받게 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복음은 어느 진영의 사람들에게나 필요한 데, 한쪽을 편들 때 복음은 한쪽 진영인 것으로만 오해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대선을 통해 우리나라가 좀더 발전적으로 진보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과거로 후퇴하기보다 좀 더 성숙한 사회로 발전하길 기대한다. 사회적 약자들을 보듬고,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포용하는 사회로 나아가길 기대한다. 혹시 좋지 못한 결과가 나온다고 해도, 결국에는 이런 실패가 더 나은 사회로 가게 되는 계기로 사용되길 기대한다. 우리의 소망이 결국 주님뿐임을 실감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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