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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마구간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을 여행하던 중 출산을 앞두고 머물 곳을 찾았으나, 그 어느 여관도 빈 방이 없어서 하는 수 없이 마구간에 들어가게 되었고 예수님은 그 마구간에서 태어나게 되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마구간에 들어가서 유숙했던 것이 아니라 어느 정상적인 가정에 들어가 머물다가 아기 예수님을 낳았기 때문이다. 다만 그 아기 예수님을 뉘인 곳은 짐승들이 여물을 먹는 구유(여물통)였다.

이스라엘을 비롯한 중동의 문화는 나그네를 환대하는 문화였다. 따라서 여행을 하던 나그네가 하룻밤을 지내기 위해 낯선 집의 문을 두드린다면 거의 100% 영접하고 맞이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따라서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왔을 때, 머무를 집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현대 서구적인 관점이지 고대 중동지방의 관점일 수 없다.

그러면 어디서부터 이런 오해가 출발했을까? 그것은 킹제임스 성경(KJV)이 헬라어 “카탈루마”를 여관(inn)으로 오역한데서부터 출발한다. 헬라어 “카탈루마”는 여관이 아니라 “사랑방” 또는 “객실”로 번역해야 옳다. 같은 단어를 누가복음 22:11에서는 “객실”이라고 잘 번역해 놓았다. 그런데 킹제임스 번역의 직간접적 영향 아래 “카탈루마”를 누가복음 2:7에서는 사관 또는 여관으로 번역해버리고 말았고, 따라서 요셉과 마리아가 빈 여관 또는 빈 방을 찾아 헤매다가 결국 마구간에 들어가서 머물게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낳은 것이다. 그러한 오해에 근거하여 크리스마스 연극의 극적인 장면이 만들어진 것이다.

가장 사실에 가까운 추측은 이렇다.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에 머물 곳을 찾았을 것이다. 이러한 일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친척집에 들어가서 머물게 되었을 것이고, 친척집이 없었다 하더라도 그 동네 아무 집이든지 머물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이들을 맞이한 집 주인은 그들이 나그네라는 사실에 환대하며 영접했을 것이고, 특히 임신 중이라는 사실 때문에 극진히 모셨을 것이다. 그런데 그 집의 “객실” 또는 “사랑방”에 아기를 뉠만한 장소적인 여유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사람들이 자는 구역과 짐승들이 있는 구역 사이에 놓여 있는 구유(여물통)에 아기를 뉘였을 것이다. 아마도 짐승은 다른 곳으로 옮겼을 것이다. 또는 접근하지 못하게 막았을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의 집 구조는 한 지붕 아래에 짐승과 사람들이 같이 머물 수 있는 구조였다. 약간 높게 솟아있는 부분에서는 사람들이 머물고, 그 옆에 낮은 부분에서는 짐승들을 매어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있는 구역과 짐승들이 있는 구역 사이에는 여물통을 놓았다고 한다.

크리스마스 연극을 하다가 빈방이 없다고 집주인이 말할 때, 그 모습을 보던 한 어린이가 “내 방을 드릴게요” 하면서 연극을 망친 이야기는 감동적이기는 하지만, 아쉽게도 사실과는 거리가 먼 것에 근거한 것이다. 물론 마구간에서 태어나지 않으셨다 하더라도 예수님께서 가장 낮고 천한 곳으로 오신 것은 변함이 없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종의 형체를 지니고 이 땅에 내려오신 주님을 생각하며 이번 성탄 시즌도 맞이해본다. 

2017.12.23

이 글 링크: http://www.jjvision.org/?p=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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