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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목 마르다 (요 19:28-30)

우리가 살펴볼 가상 7언 가운데 다섯 번째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외치셨던 “내가 목마르다”라고 하는 절규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극심한 고통 가운데 자신의 몸에 있던 피가 쏟아져 나오고, 물이 다 쏟아져 나오면서, 신체에 수분이 부족하고 입이 마르고 엄청난 갈증을 느끼는 가운데, 너무나도 큰 고통 가운데서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던 표현 중에 하나가 “내가 목마르다”라고 하신 말씀이라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이 얼마나 크고 정말 고통스러웠던 것인지를 알 수 있는 표현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구약의 말씀들 그리고 신약의 말씀들이 생각이 많이 나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은 신약에 있었던 한 말씀들과 말씀과 구약에서 있었던 한 장면을 살펴볼 수가 보고 싶습니다. 먼저 신약의 장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구절이 하나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해주신 그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의 한 장면을 보면, 부자는 죽어서 지옥에 가게 되었는데 그 부자가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 아브라함을 향해서 간청했던 이야기가 누가복음 16장 24절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 하나이다.” 라고 하는 그런 절규였습니다. 지옥의 고통 가운데서 너무나도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 울부짖을 수 있는 그런 수많은 고통의 표현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부자는 그 지옥 가운데서 목말라 하면서, 제발 물 한 방울만이라도 내 혀에 떨어뜨려 주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간절한 간청을 하게 되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요. 그런데 그 부자가 했던 지옥의 형벌 가운데서 했던 부자의 절규를 지금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하고 계시다고 하는 점을 우리가 주목해 볼 수가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당하셨던 그 고통이 그냥 아무런 고통이 아니라 정말 죽음을 맛보는 고통이었고, 지옥의 형벌을 맛보는 것과 같은 그런 고통이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이라고 하는 그 신앙 고백문을 예배 가운데 종종 하게 되는데요. 그 사도신경을 보게 되면, 우리나라 한글 번역본에는 빠져 있지만, 사도신경의 원문을 보면, 라틴어 원문을 보게 된다고 하면, 거기에 들어있는 특이한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음부에 내려가셨다”라고 하는 표현입니다.

사도신경에 대해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이름과는 달리 이 사도신경의 고백이 사도들이 만든 것은 아닙니다. 전설에 의하면 12 사도가 한 문장씩 한 문장씩 이야기를 해서, 그 12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사도들이 만든 신앙고백서라고 하는 그런 내려오는 전설이 있기는 하지만, 사도들이 만들었다고 하는 그런 증거는 전혀 없습니다. 그냥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신앙 고백문 중에 하나가, 오랫동안 써왔던 신앙 고백문 중에 하나가 바로 사도 신경이라고 하는 것인데요. 이 사도신경이라고 하는 것이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여러 교회에서 역사상 수많은 성도들이 자신들의 신앙의 형편에 따라서 그때그때마다 신앙 고백문들을 만들어서 자신의 신앙 고백을 새롭게 늘 신앙을 고백해 오던 일이 있었고, 지금도 우리들도 우리가 믿는 바를 우리들의 말로 표현해서 신앙 고백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이 되는데요. 아무튼 오래전부터 교회가 써왔던 신앙 고백문 중에 하나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도신경이라고 하는 그런 신앙 고백문입니다.

이것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는 그 말씀은 성경만이 우리들의 신앙과 행동에 있어서 최고의 권위를 가지는 것이고, 성경 이외에 다른 모든 것들은 설교든 신앙 서적이든 신앙 고백이든 그 어떤 교리든 그 모든 것들이 다 성경에 의해서 판단을 받아야 하는 부차적인 것이라고 하는 의미에서 사도신경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겠습니다. 따라서 이 사도신경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모두가 다 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아주 쓸모가 없거나 우리가 교회 내에서 배척해야만 하는 것이 아닌, 유용한 신앙 고백 중에 하나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특별히 교파들마다 신앙 고백이 조금씩 다 다릅니다. 갑리 교회의 신앙 고백이 다르고 장로교의 신 고백이 다르고 침례 교회 신앙 고백이 다르고, 다 교파마다 다양한 신앙의 전통 가운데 서 있기 때문에 그 신앙 고백의 그 내용들이 조금씩 다르고 성경을 이해하고 있는 것들이 조금씩 다르지만, 그러나 그런 모든 교회들이 그래도 공통적으로 할 수 있는 신앙 고백은 사도신경이라고 하는 신앙 고백이기 때문에, 그나마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사도신경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 사도신경에 보면, 우리 한국말 성경에는 한국말 신앙 고백에는 그 번역이 빠져 있지만, 원문에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당하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다음에 “예수님께서 음부에 내려가셨다”라고 하는 표현이 라틴어로 되어 있습니다. 영어 번역에서도 들어 있기 때문에, 영어로 신앙 고백을 하는 신앙 고백문을 살펴보다 보면, 이 부분이 한국말에 빠져 있네라고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음부에 내려가셨다라고 하는 이 표현이 여러 가지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다음에 정말로 지옥에 가셨나? 지옥에 가지 아니하셨는가라고 하는 논란이 교회사적으로 자꾸만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번 우리 톡투유 시간에 질문이 하나 나왔었는데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다음에 예수님의 영혼은 어디로 갔습니까?”라고 하는 질문이 나오는 것은 아마도 이런 배경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나오는 질문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 된 다음에 지옥에 내려가셨을까라고 하는 것인데요.

제가 이해하기로는 우리 주님께서는 운명하신 후에 아버지의 품에 안기신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강도에게 주셨던 말씀이 “오늘날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하는 가운데 “내 영혼을 아버지의 품에 맡긴다”고 하는, “아버지의 손에 맡긴다”고 하는 그런 기도의 제목을 하신 것으로 보아서 뿐만 아니라, “지옥에 내려갔다”라고 하는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확실한 성경적인 근거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음부에 내려가셨다. 지옥에 내려가셨다라고 하는 것은 실제적으로 예수님께서 그렇게 지옥에 내려가신 것을 표현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칼빈이 해석한 것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해서 정말 지옥의 고통과 같은 음부의 고통과 같은, 심각한 아주 고통을 당하셨다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사도신경이 그런 표현을 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이 아침에 그 모든 사도신경에 관련된 모든 논란들을 정리해서 다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당하신 그 고난이 정말로 정말로 생생하게 아프신 고통이었기 때문에 내가 목마르다라고 그렇게 울부짖은 것이었고, 그 십자가의 고통이야말로 지옥의 고통을 맛보는 것과 같은 그런 고통이었다고 이해하실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내가 목마르다라고 표현하신 울부짖으신 그것을 생각해 볼 때, 예수님이 어떠한 분인가를 생각해 보면 그 표현이 더욱더 생생해집니다. 요한복음 4장 13절에서부터 14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생명의 물을 공급해 주시는 그분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다시금 갈증이 나지 않게 다시는 목마르지 않게 해 주시겠다고 했던 분이 바로 예수님인데, 예수님께서 친히 이렇게 목마를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것은 어쩌면 아이러니처럼 보이게 되는 것이죠.

예수님께서는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하는 사탄의 유혹 앞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40일을 금식하셨으나 그러나 그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그 유혹 앞에서도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하면서 의연하게 물리치셨던 예수님이신데, 그 예수님께서 친히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면서 목마름을 느끼시고 갈증을 느끼셨다고 하는 것이 아주 놀라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바로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갈증을 다시는 느끼지 않을,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않을 영원한 생명 영원한 생수를 얻게 되는 것이 우리가 그냥 얻게 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예수님께서 목마르심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목마르지 않게 만드셨다고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은 그냥 남아도는 생명이 있으니까, 우리들에게 하나 가지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다시는 목마르지 않겠다고 하시는 이야기는 물이 남아도니까 그냥 주어서 우리들에게 목마르지 않겠다고 해 주신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이사야서 53장에서 말씀해 주신 것처럼 우리 주님께서 채찍에 맞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나음을 입는 것이고, 우리 주님께서 생명을 잃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목말라 하셨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목마르지 않는 영원한 생수를 얻게 만드셨다고 하는 것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구약에 있어서도 여러 장면들이 생각이 날 수가 있겠지만 그중에 한 장면을 생각해 본다고 한다면, 그 옛날 다윗이 베들레헴 근처에서 울부 짖었을 때에 다윗의 새 용사들이 다윗을 향해서 물을 떠다 준 장면이 생각이 납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서 도망다니고 또한 여러 가지 일들을 하는 가운데 베들레헴 근처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윗이 베들레헴을 먼 발치에서 바라보면서 울부짖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나로 하여금, 저 베들레헴의 우물물을 마실 수 있게 해줄 것인가?”라고 울부짖었죠. 베들레헴이라고 하는 곳이 어디입니까? 다윗의 고향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자라왔던 베들레헴 고향에서부터 멀리 떠나 자신이 알지도 못한 낯선 땅에서 광야에서, 그리고 동굴에서, 마치 산적도묵척처럼 그렇게 방황하고 유리하며 살아가는 가운데, 도대체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갈 수 있는 그런 소망마저 완전히 잃어버렸던 다윗의 마음 가운데 베들레헴을 보면서 갈망이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언제 내 이 지긋지긋한 삶은 끝나고, 다시 베들레으로 돌아가 그 베들레헴에서 시원한 그 우물물을 마시며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는 약속해 주시기를 내가 너로 하여금 이스라엘에 두 번째 왕이 되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는데, 그 약속과는 달리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그런 유리하고 방황하는 삶을 살고 있었던 그 다윗의 마음 가운데 갈망이 생겨서, 언제 이런 고난이 끝나고 언제 이러한 아픔이 끝나고 이제 다시 베들레으로 돌아가서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누리며 이 베들레헴의 우물물을 마시며 쉴 수 있을까를 노래 그렇게 갈망했던 것입니다.

그때 그 이야기를 들었던 세 명의 용사들은 다윗이 그렇게 물을 애타게 베들레헴을 소망하는 갈망하고 있는 그 모습을 보면서, 그냥 남의 집 구경 불이 난 것을 구경하듯이 “거참 안 됐네” 하면서 그냥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그렇게 슬퍼하는 모습을 보면서 애타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런 물이나 타령하고, “무슨 지도자가 저 모양 저꼴이냐?” 하면서 비아냥거리면서 옆에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그 3명의 용사들은 그 순간에 3명이 의기 투합을 해서 베들레헴 진영으로 들어가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 베들레헴 진영은 안전한 곳이 아니라, 바로 적군인 블레셋 사람들이 지키고 있고 점령하고 있었던 곳이었기 때문에, 베들레헴으로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일이고, 가다가 잘못해서 어떻게 되면 죽을 수도 있는 그 상황 가운데서 이 3명의 용사들은 베들레헴을 향해서 쳐들어가는 가운데, 칼로 싸우면서 죽음을 무릅쓰고 목숨을 내놓고 그 베들레헴의 물을 떠와서 베들레헴의 우물물을 다윗에게 드리는 그런 충성스러운 3명의 용사들이 있었던, 다윗의 갈증을 풀어주는 것은 그냥 차고 넘치는 물 가운데서 남아도는 물 가운데서 하나 떠서 준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내 목숨을 내놓더라도 다윗에게 물을 바친 그 모습을 보면서 다윗은 거기서 너무나도 큰 감동을 받고 그 물을 하나님께 부어 드리고, 하나님께서 결국 나의 인생을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끄실 거라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전투에 나섰던 것을 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를 향해서 주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우리에게 다시는 목마르지 아니할 영원한 생명을 주시며 우리로 하여금 살아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것은 그것은, 그냥 남아 돌아가는 것 주신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지옥의 고통을 당하시며 그리고 엄청난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 짜낸 생명의 영생수를 우리들에게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고 우리 주님께서 목마라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갈증을 해소할 수 있으며 주님께서 지옥의 고통을 맛봄으로 인하여 우리가 천국의 즐거움을 얻게 된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할 때 오늘 우리는 감사하며 살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이러다가 망하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인생은 이렇게 살다가 정말 아무런 의미 없이 없어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연단하시고 달련하신 후에는

정금과 같이 나아오게 할 것이며, 저 천국의 축복으로 인도해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바라보며 늘 감사와 찬송으로 살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헛된 것으로 갈증을 채우려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생의 말씀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사랑하는 가운데, 주께서 주시는 참된 은혜로 우리들의 마음을 가득 채울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 세상의 쾌락이나 재물은 잠시 잠깐 우리들을 만족시켜 줄 수 있지만, 그러나 마시면 마실수록 더 갈증이 날 수밖에 없는 바닷물처럼 마시면 마실수록 오히려 더 우리를 더 힘들게 만드는 그런 바닷물처럼 이 세상의 쾌락 이 세상의 명예 이 세상의 재물 이 세상에 박수 이 세상에 헛된 것들은 결국 우리를 갈증 나게 만들 뿐 만족함을 줄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주님의 은혜의 샘물에 나아가 주께서 주시는 값없이 돈 없이 와서 살 수 있는 영생의 생수를 마시는 가운데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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