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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라했던 왕, 왕 같았던 신하

사울은 하나님이 부리시는 악령에 사로잡혀 다윗을 죽이려고 창을 던졌다. 성경은 사울을 지배한 그 악령을 표현할 때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한데, 이 말은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만한 표현이다.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죄와 악의 궁극적인 책임이 하나님에게 있을 것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위험한 표현을 성경에서 사용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아무리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악한 일들이 하나님의 통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여서, 결국 그 모든 악을 잠재하시고 결국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점을 확신시켜주기 위한 것이다. 다윗은 사울이 악령에 사로잡혀 다윗을 향해 창을 던질 때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무한정 그의 파워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제한된 범위 내에서만 움직이게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다윗이 수금을 탈 때 사울의 악령이 떠난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소용이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다윗의 수금의 능력이 예전과는 달라서였을까? 그렇지 않다. 사실은 똑같았다. 하지만 사울의 마음이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혀 있는 한, 아무리 좋은 음악도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마치 농부가 뿌린 씨가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지만, 길가에 떨어진 씨는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한 것과 같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읽어도 설교를 들어도 아무런 감동이 없다면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보며 하나님께 울부짖어야 할 것이다. 들을 수 있는 귀를 허락해주시고, 깨달을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사울은 다윗을 두려워했다. 그는 왕의 위치에 있었지만 너무나도 초라했다. 반면 다윗은 신하였지만 담대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어느 지위에 있는가가 아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않는다면 그 인생은 초라할 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가이다. 아무리 교회를 화려하게 짓는다 해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쓸모없는 건물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무리 초라한 곳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보배로운 것이다(고후 4:7).

다윗은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 할 때 악한 감정을 품고 사울을 대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종이 되어 사울과 이스라엘을 섬겼다. 그는 충분히 쿠데타를 일으킬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었고 골리앗을 죽일만한 능력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다윗은 자신의 직책에 충실했고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했다. 이런 다윗의 모습을 볼 때 이 시대에도 다윗과 같은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간정한 소망이 생긴다. 특히 시기와 반목이 판을 치고 이기적인 삶이 팽배한 이 시대에 더욱 그렇다. 그런데 그런 분이 계시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주님은 자신을 향해 침을 뱉고 욕을 해댈 때 그 자리에서 십자가의 길을 포기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 우리가 의지할 분은 오직 주님뿐이시다. 

연관 설교: http://www.jjvision.org/?p=4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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