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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마 (신 6:4-9)

교회 안에 아주 널리 알려진 것이지만, 사실은 잘못 알려졌거나, 과장됐거나, 혹은 잘못된 내용들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과연 이것이 맞는지, 잘못된 것인지, 늘 영적으로 분별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바람직할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오늘 어린이 주일을 맞이해서, 우리가 교회 안에서 아주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잘못된 정보를 한번 말씀을 드려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바로 유대인들에 대한 과장된 평가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동영상을 하나 보았는데요. 이 동영상은 유태인들이 어떻게 신앙 교육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설명하는 동영상이었습니다. 그 동영상에서 하는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냐면, 유태인들은 세계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들은 온 세상을 이 세상을 리드하고 있는 그런 민족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유태인들이 이렇게 두각을 나타내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유대인들의 신앙 교육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는 내용의 동영상이었습니다.

그게 정말 사실이라고 한다면, 참 여러 가지로 우리들에게 많은 도전을 줄 수 있는 영상일 텐데요. 그런데 가만히 내용을 들어보니까, 사실과는 거리가 멀고, 조그마한 내용을 확대 과장했고, 그리고 부정확한 내용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 동영상이었습니다. 그 동영상에서는 오늘 우리가 읽은 신명기 6장 4절에서부터 9절 말씀, 이것을 “쉐마”라고 부르는데, 유대인들은 이 쉐마라고 불리는 이 구절의 말씀들을 늘 암송하고 묵상할 뿐만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철저하게 신앙 교육을 잘 받고 있으며, 그래서 유태인들은 성인식을 치르기 전에, 12살이나 13살 정도의 성인식을 치르게 될 텐데요. 그렇게 성인식을 치르기 전에 유태인들 어린이들은 모세 오경을 다 암송하게 된다고 그렇게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내용을 다 암송할 뿐만 아니라, 철저하게 잘 지키고 있고, 유대인들은 아침 저녁으로 쉐마라고 하는 이 신명기의 말씀을 암송할 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쉐마를 들으면서 태어나고, 그리고 죽을 때에도 이 구절을 암송하면서 죽는다고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은 이마에 성구함을 매달고 팔목에 성구함을 매달고, 집에는 “메주자”(mezuzah)를 붙이면서 정말 신앙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이들이 전 세계를 지배하는, 세계에 우뚝 서 있는 그런 위대한 민족이 되었다고 하는 그런 영상이었습니다.

하지만 대체로 이런 내용은 거짓 정보이거나, 조그마한 것을 확대 과장한 내용이어서, 별로 믿을 만한 내용은 아닙니다. 먼저 유대인들이 세계적인 두각을 많이 나타내고 있는 것은 사실이고, 그런 사람들 가운데 유태인들이 많이 들어 있기는 하지만, 그 사람들이 모두가 다 신앙적인 교육을 잘 받아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유대인들이 무신론자들도 많이 있고, 신앙이 없는 사람들, 그리고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기 때문에, 신앙이 그들의 성공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 중에는 늘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 중에서도 극히 일부분 극히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런 위치에 달성했을 뿐이고,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우리와 똑같이 평범하게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고 유대인들 중에서도 아주 힘들고 어려운 극빈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아주 많이 있어서, 유태인들이나 우리나라 사람들이나 별반 다를 게 없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세계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사람들은, 유태인들만 세계적인 두각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민족들이 다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영국인들도 프랑스인들도 독일인들도 미국인들도 그리고 중국인들도 인도인들도 일본인들도 전 세계 방방 곡곡에서 여러 분야에서 엄청난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것인데, 마치 유대인들만 두각을 나타내는 것이냥 말하고, 그리고 그것이 신앙 교육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과도한 단순화(oversimplification)의 오류에 해당하는 것이고 뿐만 아니라, 일반화(generalization)의 오류에 빠지는 것이어서,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은 별로 우리가 믿을 만한 그런 정보가 될 수가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더 나아가서 유대인들의 신앙 교육이 있다고 하더라도, “유대인들의 신앙 교육이 제대로 된 신 교육인가?”라고 질문을 던진다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이 구약 성경을 가지고 있고, 구약성경을 배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우리 크리스천들 사이에는 유태인들에 대한 막연한 호감, 막연한 같은 편 같은 의식들이 우리들 사이에 종종 일어나고 있지만, 그러나 유태인들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제대로 된 신앙이 아니라, 순 엉터리 신앙입니다.

유대인들이 물론 종교적인 면에서, 열정적인 종교인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주 극히 일부분의 열정적인 신앙인들이 있는 것이고요. 그리고 아주 철저한 신앙인들이 있기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열정적이고, 그리고 철저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 것이 그들이 제대로 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도 얼마나 열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했는지 몰라요. 성경 말씀을 철저히 지키려고, 노력을 했지만, 그런 바리새인들의 신앙이 괜찮은 것이었느냐면, 하나님 앞에서 빵점짜리 신앙생활이었던 것뿐이고, 유대인들이 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이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느냐 하면 바른 신앙이 아니에요.

구약 성경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이 구약성경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있는 거에요. 구약 성경에서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는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고, 피를 흘려주셨고, 우리의 소망이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을 성경에서 발견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런 구약 성경을 읽는 것은 엉터리일 뿐인 것이고, 이단들도 그런 식으로 열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했던 그야말로 성경의 핵심을 놓쳐버린 그런 불쌍한 영혼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찬들 가운데 종종 유태인들에 대해서 자꾸만 좋은 소리를 하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들의 신앙을 정말 본받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사실 그 근저에 깔려 있는 동기가 “성공하고 싶다.” “우리도 좀 잘 살아보고 싶다.” “우리도 좀 부자가 되었으면 좋겠고 우리도 좀 재물을 많이 얻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이 세상적인 탐욕이 동기가 되어서, 그러한 유태인들을 바라보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성공했는데, 왜 성공했는가? 신앙을 통해서 성공했다고 한다면, 우리도 한번 그런 식으로 신앙을 이용해서 성공해 볼 수 있지 않을까라고 하는, 그런 동기가 지극히 세속적이고, 지극히 탐욕적인,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닌, 돈을 우상으로 섬기고, 성공을 우상으로 섬기는, 그런 잘못된 동기에서 나온 것일 가능성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교육을 가리켜서 흔히 쉐마 교육이라고 말하고, 그래서 쉐마 교육을 본받아야 된다고 하는 그런 운동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한국에서 쉐마 교육을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쉐마 교육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어요. 쉐마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신들만의 교육 체계를 가지고서, 이것이 유태인들의 교육이고, 이것이 쉐마 교육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사실 오늘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쉐마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다른 것을 내놓고, 쉐마 교육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을 뿐입니다.

물론 그러한 교육적인 방법들이 잘못됐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배울 점이 있고, 거기에는 우리가 받아들여야 될 수 있는 훌륭한 교육 철학 같은 것들도 들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성경적인 교육이다. 쉐마 교육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목적 자체가 성경적인 가르침과 멀 뿐만 아니라, 유태인들이 신앙 교육을 잘해서 성공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확인되지 아니한 일반화의 오류, 단순하게 과도한 단순화의 오류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어떤 본문이냐면 쉐마라고 알려진 본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본문을 살펴볼 때, 그러한 우리들의 탐욕적인 관점에서 이 성경 말씀을 살펴볼 것이 아니라, 복음적인 관점에서 이 성경 말씀을 살펴보고 배워야 할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신명기 6장 4절 말씀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오른쪽에서부터 왼쪽으로 읽어 나가는 글이 히브리어인데요. “쉐마 이스라엘 아도나이 엘로헤이누 아도나이 에하드”라고 하는 말이 신명기 6장 4절입니다. 번역을 하자면, “들으라. 이스라엘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뿐인 하나님이시다.” “하나뿐인 여호와시다”라고 하는 말이 신명기 6장 4절의 말씀입니다.

이 신명기 6장 4절에서부터 9절까지의 말씀이 “들으라” “쉐마”라고 하는 히브리어로 시작한다고 해서, 이 구절을 “쉐마”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을 우리가 한마디로 요약한다고 하면, 이 본문의 말씀에서 우리를 향해서 알려주시고 있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은 몇 분이시다? 한 분이시다.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다.”라고 하는 것이 쉐마 구절이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이 한 분밖에 없으니, 바로 그 한 분이신 하나님을 우리가 사랑하고, 그 한 분이신 하나님을 예배해야 된다고 하는 내용이 오늘 쉐마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이 세상에 그 어느 것도 우리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는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몇 분이라고요? 한 분이에요. 그렇다고 한다면,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입니까? 하나님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아닌 거죠.

돈이 우리의 하나님이 아니에요. 우리의 자녀가 하나님이 아니에요. 우리들의 목회자가 하나님이 아니에요. 성공이 하나님이 아니고, 정치인이 하나님이 아니고, 사랑이 하나님이 아니고, 행복이 하나님이 아니고,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이 아닌 거예요. 이 세상의 그 모든 것들 이 세상에 좋아 보이는, 그 모든 것들이 우리의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은 한 분뿐이신데, 누구시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의 진짜 하나님 참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오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해야 하는데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한 분뿐이시니까, 그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사랑해야 되는 것이고, 그 외의 모든 것들은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 될 수가 없고, 우리의 진정한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이 말씀을 보면서 깨달아야 합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 한 분만을 예배해야 됩니까? 그것은 참되신 하나님을 예배할 때, 진짜 하나님을 예배할 때 우리의 삶이 복된 삶이 되기 때문입니다. 참되신 하나님이 아닌, 가짜 하나님을 따르게 되면, 결국 우리는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하나님을 섬기면 부자가 될 수 있고, 성공할 수 있고, 하나님을 섬기면 이 세상에서 떵떵거리며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복되다고 하는 이야기는 관계적인 의미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가 거할 때 만족감을 누리고, 하나님 안에 거할 때 우리가 복된 삶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의미인데요. 그걸 어디에 비유할 수 있냐면, 우리 부모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어린 아이들이 부모님의 사랑 안에 머물면 안전하고 행복하고 보호받고, 정말 행복할 수가 있는 거죠. 부모가 모든 것을 다 해주지는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 어느 곳에 있는 것보다 부모님과 함께 하는 것이 행복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부모님이 아닌 유괴범을 따라가게 되면 어떤 일이 발생합니까? 엄청난 험한 꼴을 당하게 되는 것이죠. 부모님이 아닌 조폭을 따라가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가난한 부모님은 나에게 많은 것을 해줄 수 없지만, 조폭은 많은 것을 해줄 수 있는 것 같아서, 따라가면 괜찮은 것이 아니라, 정말 불행의 길로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엄청난 약속들을 합니다. 돈을 많이 모으면 행복할 것처럼 이야기하고, 성공하면 우리의 인생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처럼 이야기하고, 이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을 우리가 획득하기만 하면, 그러면 괜찮을 것처럼 우리들을 유혹하면서, 그 탐욕의 길로 가라고 우리을 유혹하고 있는데, 결국은 그 길로 나아가는 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결국 망하게 되고, 비패하게 되고, 우리가 완전히 털리게 되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고 하는 것이고요. 참된 하나님을 예배할 때, 우리를 정말로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랑할 때, 그 인생이야말로 복된 인생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것이 신명기 6장 4절에서부터 9절까지 우리를 향해서 가르쳐주시는 말씀 첫 번째 말씀입니다. 참되신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니까, 하나뿐인 하나님이니까, 그 하나님만 사랑하라. 이게 첫 번째 메시지고요. 두 번째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 두 번째 메시지가 뭐냐면, 바로 그 메시지를 1번의 메시지를 자녀들에게 하는 것이 오늘 말씀의 두 번째 메시지입니다. “자녀들에게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라”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인데요. 왜 우리들은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야 할까요?

그것은 똑같은 의미죠. 우리 자녀들도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복된 인생이 될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부모님은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기를 원하는데요. 이 가운데 자녀들에게, 나쁜 거 주기 원하시는 부모님 계십니까? 없잖아요. 가장 좋은 걸 해주고 싶잖아요? 그런데 가장 좋은 게 뭐예요? 돈이 가장 좋은 게 아니고, 좋은 대학 가는 게 가장 좋은 게 아니고, 이 세상에 그 어떤 것을 취득하는 게 가장 좋은 게 아니고, 믿음을 심어주는 게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그런 마음들이 있습니다. 제가 우리 교우들을 심방하면서 기도 제목을 물어보면, 꼭 빠지지 않고 나오는 기도의 제목이 있습니다. “목사님, 우리 자녀들이 예수님을 잘 믿었으면 좋겠어요.” “우리 자녀들이 신앙을 제대로 가졌으면 좋겠어요.”라고 하는 기도의 제목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는데요. 왜냐하면 가장 좋은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복된 것이기 때문에, 그 믿음을 우리 자녀들에게 주고 싶은 마음이 우리 부모님들에게 다 있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들은 자녀들에게 가르칠 수 있을까요? 오늘 성경 말씀은 몇 가지 지혜를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방법, 어떻게 하면 우리 자녀들에게 신앙을 물려줄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하면 우리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 수 있겠는가? 첫 번째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내 자신이 하나님을 믿어야. 신명기 6장 6절 말씀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늘 내가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어디에 새기고? “마음에 새기고.”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먼저 가르쳐주는 게 뭐냐 하면, 너희 자녀들에게 가르치기 전에, 무엇을 먼저 하라고요? 우리들의 마음에 먼저 새겨라. 이렇게 가르쳐주고 있어요.

우리가 자녀들에게 신앙을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주기 전에, 우리가 먼저 해야 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마음에 새겨야만 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먼저 하나님을 정말로 사랑하지 않으면서,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하면, 자녀들이 그 부모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믿음을 심어주는 것이 왜 실패하곤 합니까? 그것은 부모님들이 말로는 신앙생활을 잘 하라고 이야기를 해요. 하나님을 믿어야 된다고 이야기를 해요.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런데 그것이, 말로만 그래요. 우리들의 행동에서는 우리 자녀들을 향해서 “하나님이 아니라, 돈이 최고야” “좋은 대학 가는 게, 최고야.”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을 짓밟아버리고, 최고가 되는 게, 그게 너를 행복하게 만들 거야.” 우리의 모든 행동과 우리들의 모든 바디 랭기지(body language)를 통해서, 우리 자녀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하나님은 쓸 데가 없고,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건, “대학 가는 게 중요한 거야.”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돈이 최고야.”라고 하는 이야기들을 우리들의 행동으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 자녀들은 눈치가 아주 빨라요. 우리 부모가 무엇을 제일 좋아하는지, 우리 부모가 무엇을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부모가 이야기를 하면, 부모가 말하기를 “너 교회 가야지.”라고 이야기를 하고, “신앙생활 해야지.”라고 이야기하면, 그것이 나를 향해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귀한 말씀으로 정말 말해주는 거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행동을 유심히 바라보면서, 실제로는 그게 아닌데, “지금 입으로 딴 얘기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에요, “너, 교회 가야지.”라고 윽박지르면, 우리 자녀들이 그 부모를 보면서 교회를 가는 게 중요하다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엄마 아빠에게 제일 소중한 것은, “체면이 제일 중요하구나.” 사람들로부터 창피 안 당하는 것을 제일 소중하게 여기는구나. 아빠가 목사인데, 그래서 목사 자녀가 안 나온다고 하면, 목사 체면이 말이 안 되니까, 그래서 나오라고 하는구나. 아이들이 그것을 보고 있는 거예요.

우리 부모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보고 있는 거에요.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성공해야 인정받는구나.” “내가 돈을 많이 벌어야 인정받는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알려주고 있기 때문에, 늘 실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 말씀은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네 마음에 새겨라.” 하나님의 사랑하는 것을 먼저 “우리가 먼저 해라.”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들의 마음에 새겨야 되는데, 우리들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돌이 아니고 바위가 아니고 나무가 아니어서, 바위라고 한다면 정을 찍어서 새길 수 있을 것이고, 나무라고 한다면 목각을 해서 새길 수 있겠지만, 우리들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또 잊혀지고, 또 망각해 버리고, 망각의 병을 앓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마음이기 때문에, 어떻게 우리들의 마음에 새길 수가 있겠습니까?

그 순간순간마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회개하고, 또 묵상하고 또 묵상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 자신들이 매 순간순간마다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또 한 번 확인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어떤 방법을 해야 됩니까? 우리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다. 신명기 6장 7절에서부터 9절까지의 말씀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메어, 기호를 삼으며, 내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내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읽으면서 이 말씀대로 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물론 항상 그러는 것이 아니라, 예배드릴 때, 기도할 때 하는 것인데요.

한번 그림을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손목에 메어 기호를 삼고 내 미간에 붙여 표로 삼으라고 하는 그 말씀에 따라서, 유태인들은 테필린(tefillin)이라고 하는 성구함을, 우리 개정 개혁 성경에서는 “경문”이라고 번역을 했는데요. “경문”이라고 번역하면 무슨 뜻인지 아무도 모를 텐데, 아무튼 성구함을 가죽으로 만든, 네모난 성구함에 오늘 읽은 이 신명기의 말씀을 넣어두어서, 그래서 이마에 붙였습니다. 성경 말씀에 그렇게 하라고 하니까.

뿐만 아니라, 팔뚝에도 그렇게 테필린(tefillin)을 메어 달아서, 이 말씀대로 지키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집 문설주에도 메주자(mezuzah)를 달았습니다. 그림 한번 다시 한 번 보여주면 좋겠는데요. 메주자(mezuzah)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하냐면, 히브리어로 “문설주”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정확한 표현이 아닌데요. 메주자(mezuzah)라고 하는 저 조그마한 나무통 속에, 성경 구절을 적어서 그 안에 넣어놓고 그것을 문에 붙여둔 겁니다. 신명기 6장 9절의 말씀에서, 네 집 문설주에 기록하라고 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붙여 놓은 것이죠.

제가 미국에 살 때 보면 유태인들이 많이 있었는데요. 그래서 유태인들의 집 앞에 가보면 문에 이런 메주자(mezuzah)들이 많이 붙여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고요. 이사 갈 때는 띠어가지 않고 그냥 놔두고 가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많이 붙여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유태인들은 이 신명기의 말씀을 아주 잘 지킨 것일까요? 어떤 것일까요? 잘 지켰나요? 잘 지켰다고 생각이 들어서, “유대인들은 이렇게 신앙생활을 잘한다”라고 설명하는 경우가 많이 있지만, 사실은 이거 잘 지킨 거 아닙니다. 성경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안 되는 겁니다. 신명기 6장 7절에서부터 9절까지에서 우리를 향해서 들려주시는 메시지가 뭐예요? 너는 이마에, 그리고 손목에 문설주에 이런 걸 달고 매달으라고 했으면 그렇게 하면 되는 건가요? 그건 어리석은 성경 읽기죠. 바보 같은 성경 읽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 말씀을 하셨는가를 봐야죠. 무슨 의도로 이 말씀을 하셨는가를 우리가 읽어야죠.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언제 어디서든지, 어떤 상황에 있든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지키라고 하는 의미에서 이 말씀을 해주시는 겁니다. 문설주에 달으랬으니까, 문설주에 달면 되는 건가요? 아니요. 이마에 붙이라고 했으니까, 이마에 붙이기만 하면 되는 건가요? 아니요. 그런 식으로 성경을 읽으면 망해요. 엉터리예요.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예요. 이것은, 유대인들의 행동 방식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잘 지키는 예로 제시될 것이 아니라, 잘못 지키는 대표적인 방법, 바리새인들처럼 그렇게 엉터리로 신앙생활하는 대표적인 케이스로 제시돼야 될 모습인 것이죠. 마치 군대에서 병사들에게 “식판 가지고 집합”했더니, 식판만 가지고 왔어요. 숟가락은 안 가져오고. 왜 안 가져왔냐 하면 “식판 들고 집합이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식판하고 숟가락하고 가지고 집합”이라고 말하지 않았으니까, “식판만 가지고 왔습니다”라고 말하는, 그런 어리석은 모습이, 이런 식의 성경읽기에요.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해주시는 것은 무엇이냐면, 앉았을 때든지, 일어섰을 때든지, 그 어느 곳에든지, 어떠한 상황에 있든지, 모든 케이스에 다 하나님이 우리의 진짜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가르쳐야 되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우리 자녀들에게 매 순간순간마다 가르쳐야 된다고 하는 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의 영역 가운데 단 어느 한 점도 우리의 신앙과 연관이 없는 부분이 없습니다. 우리의 삶의 영역 가운데 반경 가운데 1제곱센티미터도 하나님과 관련이 없는 부분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밥을 먹는 것, 잠을 자는 것, 학교를 가는 것, 직장생활을 하는 것, 우리가 친구 관계를 맺고, 부모와의 관계를 맺고, 이웃과의 관계를 맺고, 우리가 행동하는 그 모든 것들이 다 신앙과 관련이 있는 것이고, 그런 모든 분야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되는 것이죠.

안타까운 것은 우리 부모님들이 자녀들을 교회 학교에 데려다 놓기만 하면, “전도사님이 알아서 신앙 교육을 해주겠지”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지 아니하면, 우리는 늘 반성경적이고, 반 신앙적인 세뇌에 시달리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의 것을 사랑하며 살라.” “이 세상의 힘과 권력을 의지하며 살라.” “다른 사람을 짓밟아버리고, 눌러버리고, 내가 성공해야, 그래야 내가 성공할 수 있다.” “내가 행복할 수 있다.”라고 하는 이 세상의 거짓 가르침에 우리가 완전히 노출되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매 순간순간마다 모든 경우에,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하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된다고 하는 것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죠.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잘 따랐느냐? 잘 믿었느냐? 아니오. 그들은 돈의 우상을 섬기고 있는 거에요. 자신들의 이득이라고 하는 탐욕의 우상을 섬기고 있는 거에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해야 되고, 너희들이 나그네 되었던 적을 기억하면서, 내 주변의 이방인들에게 사랑을 베풀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있는 것이고, 성공과 그리고 이 세상에 그 파워(power)를 위해서, 그런 것들을 추구하며 살아가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러나 그것은 참된 믿음의 길이 아닌, 죄악의 길을 따라가고 있는 것이고, 참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닌, 물질을 우상으로 섬기며, 이 세상의 탐욕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는 잘못된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그런 믿음의 결단들이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왜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됩니까? 왜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됩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참되신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까지도 우리 위해 내어주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하나님에게로 갈 때, 우리는 그 안에서 만족을 누리고 행복을 누리고 복된 인생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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