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닫기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삼하 22:47-51)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사무엘하 22장의 말씀은 다윗이 모든 어려움을 다 이겨낸 후에 다윗의 마지막 때에 그동안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를 인도해 주셨는가?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와 함께 하셨는가를 회상하면서 하나님 앞에 찬양을 하는 그런 시편이 되겠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그 믿음의 고백들이 사무엘하 22장의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을 살펴보면, 거기에 아주 진하게 국물이, 진국이 우려 나오듯이 거기에 다 함축되어서 시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치 사골을 우려내듯이 다윗의 인생의 그 힘든 과정을 겪으면서 경험했던 그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께서 나와 어떻게 함께 하셨는가를 믿음으로 고백하는 정말 진국과 같은 그 고백들이 이 사무엘하 22장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사셨다.”라고 하는 고백을 하는 거죠.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나의 반석을 찬송하며, 내 구원의 반석이신 하나님을 높일지로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헨델의 메시아 가운데 있는 나와 있는 여러 곡들 가운데, 오늘 우리가 불렀던 찬송가 170장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 주는 살아계시고.” 이 그 찬양, 주님께서 안 계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과거에는 있었지만 지금에는 사라져 버리고 흔적도 없어져 버리고 죽어버린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시구나.”라고 하는 그런 믿음의 고백의 찬양이 “주는 살아계신다.”라고 하는 그런 믿음의 고백의 찬양입니다.

우리가 함께 부른 이 찬송가 170장은 원래 욥기에 기록되어 있는, 그러니까 욥의 고백으로 나와 있는 내용으로 근거한 찬양입니다. 욥기 19장 25절의 말씀에,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과정 가운데 있는 욥이 나에게 아무런 소망도 없고, 아무런 빠져나갈 구멍도 없고, 완전히 절망해 버릴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에 있었지만, 그러나 그 순간에 욥의 고백이 무엇이냐면, “내 대속자가 살아계신다. 나를 구원해 주실 분이 살아계신다.”라고 믿음의 고백을 하는 욥기 19장의 말씀으로 지은 찬송입니다.

온갖 고난을 당하고 있던 욥은 친구들이 찾아와서 하는 말 때문에 더 큰 고통을 받습니다. 한마디 한마디 하는 그 말속에 가시가 숨어 있고, 정말 아픈 곳을 푹푹 찔러버리는 그런 친구들의 말 가운데서, 고통을 겪었던 그 욥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구원자가 살아계시고, 나를 건지시고 회복시켜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그런 믿음의 고백 가운데 했던 그 고백이 바로 욥기 19장 29절에 고백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내 모습만 보면 절망스러운 일뿐이고, 주변을 살펴보면 한탄할 일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그 하나님이 나의 구원자, 나의 대속자가 된다고 하는 그 사실 때문에 믿음으로 견뎌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사무엘하 22장의 말씀에서도, 다윗은 욥이 고백했던 것 같은 그런 고백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겁니다. 다윗의 입에서 나온 고백이 무엇이냐 하면,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서, 내가 나의 반석을 찬송하겠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찬양한다고 하는 그런 고백을 다윗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다윗이 경험해 왔던 그런 삶을 통해서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하는 그 사실을 매 순간순간마다 경험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홍안의 소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그 다윗에게 하나님께서는 사무엘 선지자를 보내서 기름을 붓던 그 감격스러운 장면에서부터 시작해서, 골리앗을 무찔렀던 그 이야기, 그리고 사울의 창을 피하여 도망자의 삶을 살아야만 했었던 그런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 광야에서 산적 두목과 같은 신세로 살아가면서 언제 그 삶이 끝나게 되나? 언제 이런 산적과 같은 삶이 끝날 수 있으련가? 기약도 없는 그 삶을 살아야 했던 그 시절을 지내야만 했었고, 때로는 미치광이 행세를 하면서 겨우겨우 연명해야만 했었던 그 다윗이 결국은 하나님께서 왕으로 세우시는 그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일어난 압살롬의 반역과 세바의 반역으로 인해서, 목숨이 위협받는 그런 정말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지냈지만,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편에 계셨고, 다윗을 회복시켜주시고 그래서 결국 그 하나님과 늘 동행하는 그런 경험을 했었기 때문에, 그 순간에 다윗의 고백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내가 나의 반석이 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하는 그런 고백이 나오게 된 줄로 믿습니다.

아마도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런 모든 과정을 다 통과한 후에 스스로 자기 자신을 공치사하면서, 자신의 무용담을 자랑하고, 그러한 고난의 과정 가운데서 내가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 자랑하고 떠벌릴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참 자수성가한 사람, 무엇인가 큰 어려움을 극복해낼 수 있었던 사람들의 들려주는 그 화려한 이야기를 듣다 보면, 정말 대단한 사람처럼 느껴지게 되겠는데요. 사람들은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겪으면서 성공하게 될 때, 결국 그 모든 것들을 다 승리한 다음에는 너무나도 교만해져서 자기 자신을 자랑하게 되는 그런 경우들을 너무나도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는 그렇게 자신이 얼마나 수고했는지, 내가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내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해냈는지를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자꾸만 자기가 한 일을 떠벌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정말 열심히 일을 했지만, 그런데 결국 그 일을 한 다음에는 자기를 자랑하고, 내가 이만큼 수고하고 이만큼 헌신하고 이만큼 노력했다고 하면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얄팍한 마음이죠. 그게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얄팍한 마음입니다.

그런 교만한 사람들을 보면서, 자신이 얼마나 수고했는가를 드러내려고 하는 그런 사람들의 노력들을 보면서, 참 측은한 마음이 들 때가 많이 있습니다. 참 수고는 많이 했는데, 자기를 공치사하면서 드러내는 것으로 다 깎아 먹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나도 안타까운 마음을 가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을 가리켜서 PR의 시대라고 하는데요. 남이 알아주지 않는 것은 내가 나 자신을 선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니까, 그래서 자꾸만 나 자신을 알려야만 하고, 내가 얼마나 수고했는지 내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지 이것을 다 이야기해 주고 나의 무용담을 이야기해 주고, 내가 어떻게 골리앗을 쓰러뜨렸고, 내가 어떻게 이런 엄청난 일들을 다 극복해 올 수 있었는지, 그러한 모든 것들을 다 이야기해야만, 그래야만 사람들이 나를 존경해 줄 줄 알고, 그 앞에서 자랑을 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속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한다면, 그렇게 자랑해야만 되고, 알려주어야만 하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다고 한다면, 그리고 공의로우신 하나님, 결국에는 모든 수고와 노력들을 알아주시는 하나님, 눈물을 아시고, 우리의 수고와 헌신을 하시는 그 하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교만하거나 자신을 드러내거나 사람들로부터 박수받기 위해서 나 자신을 자꾸만 드러내는 그런 어리석은 일을 할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칭찬받기 위하여,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 그렇게 신앙생활하다가 하늘에서 아무런 상급도 없는 그런 허망한 인생을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실 것을 바라며 묵묵히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승리하는 그런 삶의 결과를 보면서, 내가 잘했다고 하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살아계셨고 그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셨다고 하는 그 사실을 고백하고 있는 겁니다. 자칫 교만해질 수 있는 그 상황 가운데서, 다윗은 오히려 겸손해졌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이러한 믿음의 시각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얼마나 많은 사랑을 베풀어 주시고 많은 것들을 베풀어주셨는데, 그러한 것들을 경험하면서, “아, 하나님이 살아계시구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발견해야 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그 하나님의 지문을 우리 주변에 많이 뿌려놓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기만 하면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가 있을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지난 주일날 설교를 하면서, 우리가 사람을 보기 때문에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고 그렇게 말씀을 드렸는데요. 사실은 그 하나님 사람을 보면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바로, 그 사람만 바라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것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이 세상의 것들만 바라보기 때문에, 하나님을 볼 수가 없는 것이 오히려 이 세상의 것들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되냐면, 이 선물을 주신 그 선물을 전해주신 주님을 바라봐야 되는, 선물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에게 선물이 주어졌다고 한다면, 그 선물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이 선물을 누가 줬지?” 선물을 주신 분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하고 얻는 그 모든 것들이 있다고 한다면, 그걸 통해서 나를 사랑하고 계시고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그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가져야 될 줄로 믿습니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 손가락을 볼 것이 아니라, 달을 보아야 한다고 하는 말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 모든 것들은 사실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그걸 통해서 하나님이 가려져 버리고 이 세상의 것들 때문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그런 결과가 나타날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만난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넘어서서 그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겸손하게 고백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치 학교에 갔다가 돌아온 아이가 집에 아무도 없지만, 그러나 엄마가 집을 나가면서 아이에게 학교 다녀오면 먹으라고 만들어 놓은 맛있는 음식을 보면, “엄마가 나를 사랑해서 이런 음식을 만들어 놓았구나.”라고 하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처럼,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베풀어주신 놀라운 사랑을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다윗은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냐면, 다윗은 여러 가지 의로운 길을 가기도 했었지만, 사실은 다윗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밧세바와의 범죄 사건일 것입니다. 밧세바와의 범죄 사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했고, 그리고 이제는 완전히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인생이었지만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선언해 주셨고, 마땅히 큰 심판을 내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솜방망이 처벌을 해하시는 그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너무나도 느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가 행한 것보다도 더 크게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은총을 더 크게 발견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 48절 49절의 말씀에 보면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보복하시고, 민족들이 내게 복종하게 하시며, 나를 원수들에게서 이끌어내시며, 나를 대적하는 자 위에 나를 높이시고, 나를 강포한 자에게서 건지시는도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어떻게 은혜를 베풀어주셨는가를 생각하면서, 노래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겁니다.

50절 말씀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므로 여호와여 내가 모든 민족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다.” 다윗의 결론이 무엇이냐면 감사와 찬양이 그의 결론이 된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는 감사하는 것이 당연해요. 왜냐하면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면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고 한다면, 감사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 오늘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을 한번 되돌아봐야 될 텐데요. 우리들의 입술에서 감사가 나오는지, 불평이 많이 나오는지 우리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돌이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만일 우리들의 입술에서 늘 불평과 불만과 원망이 나오고 있다고 한다면, “아이고 내 신세야.”라고 하는 그런 한탄이 자꾸만 나오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 이유일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한다면 감사할 수가 있는 것이죠. 특별히 우리가 해결이 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러나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거라고 생각한다고 하면, 절대로 불평과 원망이 나올 수 없고 감사와 찬송이 나오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을 돌이켜 보면서, 내가 지금 감사를 많이 하고 있는가? 아니면 신세 한탄과 원망과 불평을 많이 하고 있는가?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 보면서, 만일 불평이 많이 나온다고 한다면,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보면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주님 저의 눈을 밝게 하셔서 이 세상의 것들만 바라보다가,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갖지 말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해야 합니다.

정말 힘들고 어려운 일이 내 눈앞에 펼쳐진다고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낙망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내 눈앞에 보이는 것 때문에 낙망하지 말게 하시고, 그 뒤에서 역사하고 계시고 결국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그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가야 되는 것이에요.

불평으로 삶을 사는 것이 왜 불신앙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교회에는 나오고 예배에는 나오고 찬송도 하고 기도도 하는데, 만약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서 불평과 원망만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부인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안다면, 감사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고, 찬양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되는데요. 야고보서 3장 10절에서부터 12절의 말씀 가운데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 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가가 감남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물이 단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매 순간순간마다 그 옛날 다윗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감사와 찬송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살아계신 그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나의 반석을 찬송하고 나의 구원자 되신 그 주님을 찬양하며 나아갔듯이,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도 늘 감사와 찬송으로 하루 종일 내내 살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다윗을 구원하셨던 그 하나님의 사랑은 다윗 시절에만 있었던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다윗 시대에만 하나님이 살아계셨었고 지금은 하나님께서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류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의 역사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옛날 아담과 하와 시절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사랑을 멈춘 적이 없어요.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인이 젖 먹는 자녀에, 그 자식에 대한, 자식을 잊지 못하는 것을 예로 들면서, 그 어미가 자식을 잃는다고 할지라도 나는 너희를 잊지 아니하겠다고 말씀해 주셨던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한 번도 떠난 적이 없고, 그리고 그 사랑의 절정은 바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오셔서, 십자가 위해서 저와 여러분들을 위하여 죽으시고 피를 흘리시는, 그 엄청난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준 것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 다윗과 같은 믿음의 고백들이 늘 입술에서 펼쳐 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만약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주님 앞에 기도하면서, 주님. 믿음의 고백이 나오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살아 계심을 믿고 늘 감사와 찬송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날마다 날마다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Loading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