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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 나무의 비유 (마 24:32-34)

얼마 전에 저는 한 우편물을 받았습니다. 그 우편물 안에는 아주 고급진 인쇄 책자가 들어 있었는데요. 칼라로 인쇄된 이 책자는 그 가격이 굉장히 비싸 보이는 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책을 두 권씩이나 제게 보내주어서, 도대체 누가 보냈을까 하고 봤더니, 전혀 모르는 사람이 저에게 보냈습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 보내서, 그래서 이렇게 이런 분이 있구나 하면서 그 책을 받아 펴서 보았는데, 놀랍게도 그 책은 이 세상의 종말이 언제 올 것인가를 계산한 책이었습니다.

잘못된 책이죠.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고 오직 하나님만 아신다고 그렇게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수많은 잘못된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날짜를 예언해왔고, 그리고 이 세상이 종말이 언제 올 것인가를 예언하는 그런 일들이 지금까지 정말 많이 있었습니다. 그 내용을 이 시간 여기 다 소개할 수는 없고, 딱 이 그림 하나만 보면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것은 BC 8년 9월 18일 날 탄생했었는데, 예수님의 재림하는 날짜는 2027년 9월 7일이랍니다. 기분이 좋으신가요? 순 엉터리 예언입니다.

아. 빨리 이건 치워주시는 게 좋겠죠. 잘못된 예언입니다. 예전에도 1992년 10월 언제 예수님께서 재림한다고 하는 그런 다미선교회의 주장이 있어서 우리나라를 한참 떠들썩하게 만들었지만. 예수님께서 오신다고 하는 그 예언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이런 일들이 우리나라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미국에서도 있었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어떤 해롤드 캠핑(Harold Camping)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요. 그 헤럴드 캠핑이라고 하는 사람은 미국 전역에 라디오 방송을 운영하는 운영자였는데, 그분이 점점점점 맛이 가고 이상하게 되더니만 매년 매월 며칟날, 예수님께서 재림하신다고 하는 그 주장을 라디오를 통해서 열심히 해댔습니다. 열심히 해 대니까, 참 제가 진리를 말하면 귀 기울이는 사람이 별로 없는데, 이렇게 엉터리 이야기를 하면, 귀 그리는 사람이 얼마나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 잘못된 주장을 듣고, 아 이제 예수님께서 오신다고 한다면, 우리가 갖고 있는 재물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돈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재산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다 팔아버리고 그 헤럴드 캠핑을 위해서 다 헌금해버린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맨해튼 한가운데 자신의 은퇴 자금을 전부 헌금하고, 정말 그날 예수님께서 오신다고 하는 그날 영광스러운 재림을 맞이하기 위해서, 어떤 노년의 한 신사가 주님께서 오실 날을 기다리면서 맨해튼 한복판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자 기자들이 와서 물었습니다. 정말 예수님께서 제림 하실 거라고 믿습니까? 그랬더니, “네 믿습니다” 하면서 쫙 서 있는데, 시간이 점점점점 다가오는데, 아직 안 오시는 거예요. 그러다가 시간이 됐는데도 예수님께서 안 나타나시는 겁니다. 그래도 기자들이 와서 계속 묻습니다. 아직도 예수님께서 올 거라고 믿습니까? 그 사람은 계속 믿습니다 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결국 예수님이 안 오셨고, 지금까지도 안 오고 있습니다. 결국 그 사람이 그 이후가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잘못된 주장들이 교회 역사 가운데 지금까지 수없이 많이 반복되어 왔는데, 또 놀랍게도 2027년에 예수님께서 재림한다고 하는 그런 엉터리 주장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퍼지는 것 같은데, 그런 엉터리 주장에 속아 넘어가지 않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대답이 좀 작아요. 속아 넘어가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그날 재림한다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창세기 1장 14절 15절 말씀에 기초해서 상상의 나래를 펼쳐 나갔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 14절 15절 말씀에 보니까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누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런 창세기 말씀에 근거해서, 하나님께서 해와 달과 별들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가? 그냥 계절만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징조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해 달 별을 만들어 놓으셨고, 그래서 그 해와 달과 별들이 서로 아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렇게 위치하게 되는 그때, 계시록에서 보여주고 있는 그 영광의 면류관과 같은 형상으로 조금 전에 아까 그 그림에 보면 뭐 왕관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별들이 모여지게 될 때, 예수님께서 재림하신다고 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런 주장을 펴고 있는데요. 한마디로 엉터리 주장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해와 달과 별을 통해서 어 징조를 이루고 또 계절을 보게 하라고 하는 그 말씀은, 그러니까 미래의 징조를 알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니라, 우리가 해의 움직임 달의 움직임 등 이런 것들을 봐서 봄 여름 가을이 어떻게 되는가를 알 수 있고, 농사짓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말씀해 주시는 것이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짜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데, 그 정말 실낱과 같은 그런 조그마한 말씀 위에 커다란 상상의 누각, 사상누각이라고 하죠. 그런 것을 지어서 이렇게 예언하고 있는, 그런 잘못된 현혹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의 속아 넘어가지 않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 말씀에서는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죠. 마태복음 24장 36절의 말씀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는데, 아무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 하나님에게만 그 날짜가 알려져 있을 뿐,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알 수 없다”라고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는데, “나는 안다”라고 말하는 그런 사람들에게 현혹되어서 속아 넘어가고, 여러분들의 재산을 허비하는 그런 엉터리 일들이 그렇게 생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도 그런 면에 있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활용해 왔던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마태복음 24장 32절 3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무슨 말인가요? 무화과 나무 잎이 연해지면, 예수님이 오신다는 이야기인가요? 한번 대답을 해주시죠. 이 말씀은 무화과나무의 잎이 연해지면, 예수님이 오신다는 이야기입니까? 무슨 이야기입니까? 한번 다시 한번 천천히 읽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32절 33절 말씀 천천히 제가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무엇이 가까운 줄 알라고 했습니까?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예수님이 온다는 얘기입니까? 여름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까? 여름이 가까이 왔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는 이야기죠.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것을 보거든,” 여기서 말하는 모든 일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마태복음 24장 앞부분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사랑이 식어지고, 전쟁이 일어나고, 기근이 있고, 전쟁과 난리가의 소문이 있고, 적 그리스도가 나타나고, 그런 모든 일들이 발생하는 것을 보거든, 그런 일들이 일어날 때 어떻게 된다고요?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비유의 말씀은 어떤 의미냐 하면, 징조들을 보면, 징조들을 보면 무엇이 나타나겠구나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는 그런 비유의 말씀이죠. 겨우 내내 죽어있었던 것 같은 나무에 움이 트기 시작합니다. 겨우 내내 이건 죽었나 싶을 정도로 거무죽죽했던 그 나무에서 움이 하나씩 둘씩 트기 시작하는 겁니다. 잎사귀가 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연한 가지가 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아, 봄이 왔구나. “여름이 다가오겠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죠. 그 가지를 보며, 이 온 세상을 바라보면 그런 모습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아, 여름이 가까이 왔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처럼, 예수님의 재림이 언제 온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마태복음 24장에 있는 여러 가지 징조들이 생겨나는 것들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가 머지않았구나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적 그리스도가 나타나고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듣고 민족이 민족이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는 일들이 일어나겠고, 또한 사람들이 너희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죽이게 될 것이고 사랑이 식어지고 거짓 선지자가 일어나고 하는 그런 이런 수많은 징조들이 일어나는 것들을 보면, 그러면 주님께서 오실 때가 가까이 왔구나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따라서 오늘 이 비유의 말씀은 무화과 나무의 비유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할 수 있는 비유입니다. 어떤 비유들을 할 수 있을까요? 이런 비유를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들의 배 속에서 꼬르륵꼬르륵 소리가 난다고 한다면, 밥 먹을 때가 가까이 온 줄을 아나니 할 수 있어요? 없어요? 있습니다. 지금 졸리기 시작하고 하품이 나기 시작하고, 그러면 이제 잠잘 때가 됐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우리는 이 세상에 나타나는 징조를 보면서, 그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하는 걸 아는 겁니다. 그러니까 굳이 무화과 나무에 비유를 하지 않아도 이 비유는 성립하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무화과 나무를 보면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왔고 이제 곧 여름이 오는 것을 아는 것처럼 싹을 보면 잎사귀를 보면 여름이 다가왔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처럼, 이런 칭조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종말이 가까웠다고 하는 것을 알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는 이러한 예들을 많이 들을 수가 있는 겁니다. 우리는 하늘이 꾸물꾸물 거리면, 아 이제 비가 오겠구나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이런 징조들을 보면서 이제 그 뒤에 무엇이 일어나게 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이냐면, 마지막 때에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예수님이 다가올 때가 다 됐구나라고 하는 것을 깨달으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으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본문의 말씀을 어떻게 오해했냐면, 오해했을 뿐만 아니라 곡해했냐면, 무화과 나무의 잎이 연해진다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독립이라고 오해하고 곡해해 왔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스라엘이 독립하게 된다면, 이스라엘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보게 된다면, 이제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가 가까이 온 것이라고 그렇게 해석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런 식으로 해석을 할까요? 왜냐하면 무화과 나무라고 하는 것은 성경에서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비유로 사용된 적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해주신 비유 가운데 우리 주님께서 포도 비유의 말씀을 해주신 것 가운데, 어떤 농부가 포도원에 무화과 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그 무화과 나무를 심으면서 열매가 맺히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1년을 기다리고 2년을 기다리고 3년을 기다려도 그 무화과 나무에서 열매가 맺히지 않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인이 종을 불러서 이야기합니다. 저 무화과 나무를 심은 것은 내가 열매를 먹으려고 했는데 열매가 안 맺히니, 어찌 땅만 버리겠는가? 그 무화과 나무를 찍어내 버려라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자 종이 와서 주인에게 이야기합니다. 주인님 1년만 더 참아주세요. 1년만 더 참아주세요. 그래서 제가 기름도 주고 여러 가지 노력을 많이 할 테니까, 그러니까 그 1년만 더 기다리게 된다면, 열매를 맺히게 될 거 아닙니까? 그러면 좋을 것이지만, “그때도 열매가 안 맺히면 그때 찍어내 버리세요”라고 하신 그 비유의 말씀을 해주셨는데, 이 비유에서 무화과 나무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이겠습니까? 바로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성령의 열매를 맺는지 맺지 않는지, 하나님께서 기대하신 그런 열매들이 나타나는지를 기다리고 있는데, 이스라엘 민족은 전혀 의의 열매를 맺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기대한 그 열매를 맺지 못하는 모습 그런 모습을 보여주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심판하셔야 되겠다고 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심판하셔야 되겠다고 했는데, 그런데 주님께서 아니라고 조금만 더 참아주세요. 조금만 더 참아주세요 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이 아직 연기되었다고 하는 것을 해 주시는 비유의 말씀이 바로 그 비유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그 비유에서는 무화과 나무란 바로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 번은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무화과 나무를 보셨습니다. 그런데 그 무화과 나무에서 열매가 있는가 하고 그 무화과 나무를 살펴보셨습니다. 그런데 그 무화과 나무에 열매가 하나도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저주하셨어요. 다시는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라고 저주를 하셨는데, 놀랍게도 그다음 날 보니까 그 무화과 나무가 말라 비틀어 죽어 있는 모습을 봅니다. 우리 성도들이 이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마음속에 불편함이 있어요. 왜 예수님께서 저렇게 성질을 부리셨을까? 예수님께서 왜 저렇게 화를 내셔서 정말 그런 무화과 나무에게 저주를 내려서 무화과 나무를 죽게 했을까 마음이 좀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무화과 나무에게 저주하신 것은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는 게 아니고, 사실은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경고의 퍼포먼스죠.

구약시대 때부터 선지자들은 늘 퍼포먼스를 하면서 예언을 했습니다. 그게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의 예언 방식인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저처럼 어리숙한 설교자처럼 그냥 말로만 설교한 게 아니라, 구약 시대 때 선지자들은 퍼포먼스를 버리면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한 거죠.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이 정말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시고 인자하신 하나님이시고 길이 참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고멜이라고 하는 여인과 결혼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고멜이라고 하는 여인이 배신하고 나갔을 때 또 데리고 와서, 아내로 삼고, 창기가 되어도 그 돈을 내고 그 창기가 된 아내를 데리고 와서 또 데리고 오고 그런 한 일들을 하는데, 왜 그렇게 하냐면 그런 퍼포먼스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너무나도 사랑하신다. 배반한 이스라엘 민족을 끝까지 사랑하신다고 하는 것을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그런 퍼포먼스를 하는 것이죠.

바울 사도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 끈을 묶어서 이 끈의 주인이 예루살렘에 가게 되면 결박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그렇게 예언을 했는데 그런 식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지금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런 저주의 퍼포먼스를 통해서 지금 열매를 맺지 않고 있는 행동의 삶의 열매가 전혀 없는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경고의 메시지를 전해주시는 것이죠. 그런 걸 통해서 이 무화과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비유에서도 예수님의 행동에서도 그리고 구약시대 때 그 성경 말씀 가운데서도 이 무화과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용어처럼 그렇게 정착이 되어 있는 표현이 바로 무화과 나무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한 곳에서 무화과 나무가 이스라엘을 가리킨 적이 있으면, 무화과 나무가 나올 때마다 이스라엘로 해석하면 되나요? 안 되나요? 안됩니다. 그걸 우리가 종종 실수하는 겁니다. 수많은 많은 성도님들이 목회자들이 그렇게 천편일률적인 해석을 하면서 실수하는 겁니다. 그 단어의 뜻은 그 문장의 뜻은 그 문맥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질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목자로 비유가 되기도 하고 하나님은 반석과 같은 분이라고 비유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하나님은 사자와 같은 분이라고 비유가 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하지만 어느 한 곳에서 비유가 그렇게 사용됐다고 해서, 천편일률적으로 그대로 대입해서 씨가 나오면 무조건 말씀으로 번역을 해석하면 안 되는 것이고요 목자가 나오면 무조건 하나님이라고 대입해서도 안 되고 무화과 나무가 나오면 무조건 이스라엘이라고 그렇게 대입해서 해석해도 안 되는 것이죠.

오늘 마태복음 24장 32절 말씀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인 겁니다. 무화과 나무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워진 줄 안다는 얘기는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독립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독립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이스라엘의 독립과 예수님의 재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천편일률적으로 무식하게 성경을 대입해서 해석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어 무화과 나무는 이스라엘이지? 이스라엘이 연해진다고 가지를 낸다고 어 그러면 이스라엘이 독립하는 걸 의미하나? 이스라엘이 언제 독립했죠? 1948년에 독립을 했으니까, 이스라엘은 수천 년 동안 나라 없이 헤매고 있던 그 나라가 1948년이 되어서 독립하게 되는 그것은 정말 역사적인 사건이 되었거든요. 그러니까 1948년에 이스라엘이 독립했으니까, 이제 그 뒤로 몇 년 있으면 예수님께서 재림하겠구나라고 그렇게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순 엉터리 해석이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릅니다. 어느 날 제가 해까닥 해서 예수님이 몇 년 몇 월 며칟날 온다고 이야기하거들랑, 제가 이야기하면 아 그런가 보다 하고 들어야 합니까? 아닙니다. 아이고 목사님 이제 더 이상 안 되겠구나 해야 됩니다.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몰라요.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이 무화과나무가 연해진다고 하는 것은 이 무화과 나무 이스라엘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무화과 나무가 언젠가는 이스라엘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되긴 했지만, 이 문맥에서는 이스라엘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해가 뜨면 더워지겠구나라고 하는 것을 알 듯이, 꽃이 피면 곧 열매가 맺히겠구나라고 하는 것을 알 듯이, 구름이 끼면 비가 내리는 것을 알게 되듯이, 무화과 나무 잎이 연해지면 여름이 되게 되는 것을 알 듯이, 마태복음 24장에 기록된 여러 가지 징조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가 가까이 온 줄 알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입니다.

정말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은 언제 오시는 것일까요? 모릅니다. 하지만 언제 오는지 모르는데 도적과 같이 온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 말은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예수님께서 갑작스럽게 오신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갑작스럽게 오시는 그 예수님에게 그런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마태복음 24장 42절의 말씀에서는 이렇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라?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깨어 있으라고 했는데, 깨어 있으라고 하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잠자지 말라는 이야기일까요. 아닙니다. 언제 올 줄 모르는데, 어떻게 안 자고 깨어 있겠습니까? 그 말이 아니죠.

깨어 있는다고 하는 이야기는 주님께서 언제 우리에게 온다고 할지라도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장난치다가 엄마가 아빠가 돌아온 시간에 시간이 되면 공부하는 척합니다. 언제 오는지를 알기 때문에, 아 엄마가 오나, 아빠가 오나 하면서 실컷 놀다가 그때 공부하는 척을 막 하는 거죠. 그렇게 준비하라고 하는 의미가 아니에요. 우리는 어떻게 준비할 수 있는가? 항상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며 살면, 그게 준비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지금 주님께서 오시더라도 주님 환영하며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을 정도로 우리가 늘 우리 자신을 준비하는 것이 깨어 있는 것이고 그것이 우리가 지금 가져야 될 자세일 것이라고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재림은 주님 이 세상의 마지막 날은 언제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지금까지 여기에 나와 있는 모든 징조들은 지금 다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지금 당장 오셔도 되고, 아니면 성경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주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시기 위하여 또 참으시고 또 참으시고 또 참으시는데 어떻게 참으셔요? 천년이 하루같이 하루가 천 년 같이 주님께서 그렇게 길이 참으신다고 했어요. 그 말이 무엇이냐면 주님께서 천 년을 기다리신 다음에 아이고 지긋지긋하구나 너무나도 많이 기다렸으니까, 이제는 끝내버리겠다가 아니라, 천 년을 기다리고서도, 아니야 아직 하루밖에 안 지난 것 같아, 더 기다려야 돼 라고 하시며,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그러나 우리의 삶 가운데 늘 믿음으로 살아가는 가운데 주님께서 지금 당장 오시더라도 할렐루야 환영하며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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