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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의 무기 (롬 6:12-14)

지난 금요일 날 뉴스 속보가 하나 뜬 게 있는데요. 아베 신조라고 하는 전 일본의 총리가 자민당 선거 유세를 하는 도중에 총격을 받아서 사망하게 되었다고 하는 안타까운 속보였습니다. 전직 해상자위대 장교 출신인 야마가미 데쓰야라고 하는 사람이 쓴 총알을 맞고, 죽게 되었던 일이죠. 아베 신조라고 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그리 달가운 이름은 아니지만, 이렇게 비참하게 총격을 받아서 죽게 된다고 하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할 수 있고, 참 슬픈 일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확실한 정보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 범인이 사용한 그 무기는 3D 프린터로 자체 제작한 무기라고 합니다. 일본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총기 사용이 엄격하게 규제되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총기를 소유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인데요. 3D 프린터라고 하는 최첨단 기술을 사용해서 총을 만들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마 이 3D 프린터를 최초로 개발한 사람은 자신이 개발한 3D 프린터가 이런 일에 사용될 거라고 예상이나 했을까요? 아마도 그 프린터를 개발한 사람은 인류의 행복과 발전을 위해서 이것을 만들었는데, 사악한 사람은 그것을 사람을 죽이는 살상 무기를 만드는 일에 악용하고 만 것이죠.

3D 프린터가 아니라, 그냥 자체 제작했다고 할지라도 역시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재능들이 있었을 텐데, 그 재능을 선한 일 좋은 일에 사용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해하는 그런 악한 일에 사용했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창조하신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를 만드신 것은 무슨 뜻을 가지고 만드셨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선하고 의롭게 살라고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 세상을 다스리라고 만들어주신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타락했기 때문에 선한 일을 하기보다는 악한 일을 하게 되어 있는데요. 그래서 만일 우리들의 몸이 선한 일이 아니라, 악한 일에 사용된다고 하면 그것처럼 안타까운 일이 없을 것입니다.

총격범이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서, 이제는 법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만일 우리들도 우리들의 몸이 선한 일이 아니라, 악한 일에 사용된다면, 우리들의 몸이 의의 병기가 아니라, 죄악의 병기로 사용된다고 하면, 결국에는 우리들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로마서 6장의 말씀을 읽었는데요. 로마서 6장 12절 13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우리들을 향해서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을 요약하면 뭐라고 요약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들의 몸을 불의의 무기로 사용하지 말고, 어떤 무기로 사용해라? “의의 무기로 사용해라.”라고 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우리들의 몸을 불의의 무기가 아니라, 의의 무기로 사용하라고 이렇게 권고하시는 것은, 그 권고의 전제가 있습니다. 그 전제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몸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불의의 무기로 사용될 수도 있고, 의의 무기로 사용될 수 있다고 하는 전제입니다. 우리들의 지체, 우리들의 몸, 우리들의 지체를 구성하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손과 발과 눈과 귀와 코와 입과 우리들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요소들이 지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이 모든 것들이 불의를 이루는 데 사용될 수도 있고, 똑같은 지체지만 의를 이루는 데 사용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전제하면서, 두 가지 방법으로 다 사용될 수가 있겠는데, 기왕이면 무엇을 위해서 써라? 의를 위해서 써라. 선한 일을 위해서 써라. 하나님을 위해서 쓰라고 권고해 주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라. “나쁜 용도로 사용하지 말라.”라고 말씀하고 있는데요.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 몸을 나쁜 용도로 사용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어떻게 하면 나쁜 용도로 사용하는 겁니까? 어떻게 하면 불의의 무기로 내어주는 것이 되는 것일까요? 6장 12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무엇에 순종하지 말고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라.” 그렇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 몸에 “사욕”이 있는데요. 사욕이라고 번역된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정욕, 욕망, 욕구, 이런 걸로, 다른 말로 표현할 수가 있겠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몸을 욕망에 따라 살지 말라. 우리의 욕구에 따라 살지 말라. 욕망에 내주어서, 갈망에 내주어서, 우리가 정욕에, 우리들의 몸을 내주어서, 그렇게 정욕이 이끄는 대로, 우리들의 욕구가 이끄는 대로 살아가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게 된다고 하면, 우리가 불의의 무기로 사용하는 것이 되는 것이라고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번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우리가 욕망을 따라 산다. 욕구를 따라 산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내게 있는 그런 욕구가 있고, 그런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사는 것은 악하다고 하는 뜻일까요? 내게 있는 그런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아주 불의한 것이라고 오늘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생각을 합니다. 특별히 종교들 불교를 비롯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종교들에서 가르치고 있는 바가 무엇이냐 하면, “욕구” 자체가 나쁘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욕구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그 욕구, 욕망, 욕심, 나의 정욕, 나의 갈망, 이런 것들이 있는데, 그러한 욕망에 따라 우리가 살게 되면, 결국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내가 어떤 욕구가 있어서, 그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산다고 한다면, 결국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고, 욕구를 따라 사는 것은 나쁜 것이기 때문에, 그런 종교들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욕구 자체를 없애버려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욕구를 없애버려라. 욕심 자체를 지워버려라. 내 마음 가운데 어떤 갈망이나, 욕심이나, 욕구 이런 것들을 다 내어버려야 되는 것이고, 욕심 없이 살아가는 것이 가장 고상한 것이다.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아무런 욕심 없는 삶,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삶, 아무것도 갈망하지 않고, 그냥 초연하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고상한 것이라고 이 세상의 모든 종교들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특히 불교에서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아무런 욕심이 없이 살아가기 위해서 무엇을 선택합니까? 산속으로 들어가는 거죠. 가족들과 함께 살면 자꾸만 욕심이 생기니까, 갈망이 생기니까, 그러니까 그런 욕심이 나의 욕구가 나를 힘들게 하기 때문에, 그런 욕구를 내어버리기 위해서, 가족을 내버리고, 산속에 들어가 버리는 겁니다. 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돈을 벌려고 하고, 내가 높아지려고 하고, 그런 생활을 하다 보면, 자꾸만 내가 힘들어지니까, 내 마음의 편안함을 위해서, 내 마음이 안정감을 누리기 위해서, 이 사회생활을 다 포기해버리고 어디로 가요? 산속에 들어가는 것이죠. 산속에 들어가서, 그저 소식(小食)을 하면서, 욕심부리지 않으면서, 자연을 벗 삼아 그저 여유 있는 삶을 살면서, 나긋나긋하게, 그저 자연을 즐기면서 그렇게 사는 것이, 그렇게 욕심 없이 살아가는 것이 가장 고상한 일이라고 가르쳐주는 것이 그게 불교식 영성이고, 다른 모든 종교들의 영성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일반인들이 그렇게 불교식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보면 고개가 숙여져요. 왜냐하면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 좀 더 많이 갖기 위해서 아웅다웅거리고 있고, 우리는 좀 더 명예를 얻기 위해서,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그렇게 싸우고 있고, 내가 더 많이 가지기 위해서 분투하고 있는데, 그런데 이런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저 산속에 들어가서 다 욕심을 내버리는 삶을 살고 있는 겁니다. 까짓것 명예 다 내버리고,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고 하네.” 그냥 자연을 벗 삼아서, 욕심 없이, 아무런 그런 욕망이 없이, 욕구 없이 그렇게 살아가는 그런 수도승들을 보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하게 되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어떤 수도승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재물을 다 버리고, 재물을 다 버리고, 오로지 가진 것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옷 한 벌과, 바랑과 그리고 조금 안에 먹을 것만 있으면 만족해하면서, 무소유의 삶을 산다고 하면, 모두가 다 그 앞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고, “아, 정말 대단한 분이다.”라고 하면서 존경하는 그런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그런데 거기까지예요. “아, 정말 저분은 대단한 분이구나.” “아 저분은 위대한 스승님이시구나.” “저분은 정말 대단한 분인데…” 하면서, 거기까지 얘기하고, 그 정도 감동을 받았으면, 어떻게 해야 돼요? 나도 그렇게 살아야지가 돼야 되는데, 그냥 “아, 대단한 분이네.” 하고, 끝나는 게 보통 사람들의 생활이죠. 그런 분들을 보면서 정말 존경스럽다고 말을 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내가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은 것입니다. 그게 보통 사람들의 마음인 것이죠.

예전에 제가 미국에서 목회할 때였습니다. 우리 교인의 집을 신방을 한번 했었는데요. 그 남편은 교회를 다니지 않은 분이었고, 오히려 불교에 심취한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집에 가서 심방도 하고 그분과 대화도 하는데, 그 집에 책꽂이에 책이 한 권 꽂혀 있었습니다. 무슨 책인가 했더니, 법정 스님의 <무소유>라고 하는 책이었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눈길이 가서, 이 책을 읽어보셨냐고 물어보고, 내용에 대해서 물어봤더니, 그 남편분께서 책에 대해서 침이 마르도록 그 책을 칭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법정 스님이라고 하는 분이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 모른다고 하면서, 무소유로 살아가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하고, 그렇게 입이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는 그 모습을 보았는데요.

그분이 어떤 분이냐 하면 필라델피아에서 아주 큰 사업을 이룬 분이었어요. 그리고 들리는 소문이 그렇게 꼭 덕스럽지 못한 방식으로 사업을 해서 좀 비난도 받고 하던 분이었는데, 그분은 전혀 자신의 생활을 포기할 마음이 없으면서, 계속 그 책에 대해서 칭찬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이거 좀 미스터리다. 도대체 이 책을 왜 칭찬하고 있을까?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가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소수의 사람들이 그 길을 가기는 가지만 성공하지 못하는 거죠. 무소유의 길을 가겠다고 말하고, 욕심을 버리겠다고 하는 그 길로 가고, 그래서 열심히 수련하고 있는데, 그렇게 해서 욕심을 버릴 수 있느냐 하면, 버리지도 못하는 것이 우리들의 문제인 것이죠. 오히려 더 많은 것을 가져야만 무소유가 가능하다고 하는 그런 궤변을 늘어놓기도 하거나, 때로는 그런 사람들끼리 모인 곳에서, 여러 가지 권리, 여러 가지 그 권력 문제로 서로 싸우는 이야기들이 뉴스에 나오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서 우리가 불의의 병기로 사용되는 것, 불의의 무기로 사용되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의 욕심을 따라 사는 것, 우리의 욕구를 따라 사는 것이, 그것이 바로 불의의 병기로, 불의의 무기로 사용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러니까 우리 크리스천들도 불교도나 다른 종교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욕심을 완전히 버리는 수련을 하는 것이 옳다고 말씀드리는 것일까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에게는 욕구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그 욕구는 나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자연스러운 것이죠. 배가 고프면 무엇인가를 먹고 싶고, 그리고 졸리면 자고 싶고, 힘들면 쉬고 싶고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욕구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욕구 이론” 하면, 아마 들어보셨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매슬로우라고 하는 그런 학자가 쓴 욕구의 5대 욕구 이론이 있습니다. 한번 도표를 한번 봤으면 좋겠는데요.

사람들에게는 여러 가지 욕구가 있는데, 생리적인 욕구부터 시작해서, 안전 욕구, 소속과 애정의 욕구, 존중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까지 다양한 단계의 욕구들이 있다고 하는 겁니다. 식욕이라든가, 배설과 성욕의 욕구로부터 시작해서, 더 나은 인간이 되고자 하는 그런 욕구에 이르기까지, 하위 욕구에서부터 상위 욕구까지 있는 것인데, 생리적인 욕구가 채워지면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안전에 대한 욕구가 생기게 되고, 안전이 보장되면 그다음에는 소속과 애정의 욕구,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 싶은 욕구들이 있고, 더 나아가서 존중받고 싶은 욕구, 인정받고 존경받고 싶은 그런 욕구, 더 나아가서는 자기 자신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그런 욕구가 있다고 하는, 그런 이론이 메슬로우의 5대 욕구 이론이라고 합니다.

아마 잘 들어보셨을 겁니다. 이게 전통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저는 이 부분에서 연구한 학자는 아니기 때문에 잘 모르지만, 개인적인 생각은 그래요. 이 인간에게 이런 이런 여러 가지 욕구들이 하위와 상위로 나누는 것은 그건 별로 다른 관점은 아니겠다 싶어요. 왜냐하면, 사람에게 이 모든 욕구가 동시에 한꺼번에 존재하는 것이지, 하위 욕구 따로 있고 상위 욕구 따로 있고, 이것이 채워져야 그다음에 요구되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위 욕구도 필요한 반면에, 이 생리적인 욕구도 필요한 반면에,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도 있고, 다양한 욕구들이 우리 사람의 마음 가운데 자연스럽게 있는 것이 정상인 것이고, 그 욕구가 있는 것을 채우기 위해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정상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죠.

그런데 이 욕구를 채우는 것이 문제가 될 때가 있습니다. 언제가 문제가 되나요? 그것은 잘못된 방법으로, 하나님의 법칙에서 벗어난 방법으로, 욕구를 채우려고 할 때 잘못되는 것입니다. 나쁘게 되는 것이죠. 예를 들자면, 우리가 배고픔을 느끼고, 허기를 느껴서, 그래서 무엇인가를 먹고 싶은 욕구가 생기고, 그래서 점심을 먹는다고 하면, 그게 나쁜 일인가요? 아니요. 그건 자연스러운 일일 겁니다.

하지만 그 허기진 그것 때문에 무엇인가를 먹고 싶은 욕구가 잘못되는 때는 언제입니까? 그것은 잘못된 방법으로 그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할 때인 것이죠. 예를 들자면, 너무 많이 먹으려고 하거나, 내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것을 먹으려고 하거나, 부당하게 탈취하려고 하거나, 내가 먹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못 먹게 만드는 그런 잘못된 일을 한다고 하면, 그 욕구를 잘못 발산시키는 것이 되는 것이죠.

성욕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께서 정하신 가정의 테두리 안에서,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정상적인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이고, 복된 일입니다.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 옳은 일이죠. 성경은 절대 금욕을 가르쳐주고 있지 않습니다. 독신으로 살아야 하거나, 평생 수절을 하면서 사는 것이 그것이 바람직한 것이라고 성경은 절대로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말씀해 주신 것이죠. 하지만 어디서 문제가 됩니까? 나의 이런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돈으로 매수하거나, 부부간의 테두리를 벗어나거나, 잘못된 정욕을 이렇게 발산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되는 것이죠.

명예와 인정과 자아실현의 욕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서, 우리의 만족함을 위해서, 인정받기 위해서, 땀을 흘리며 노력하고, 그래서 많은 것을 거두고, 업적을 이루고,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박수를 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정상스러운 것이지 나쁜 일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서 잘못되는 것입니까?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착취하면서, 갑질하면서, 그래서 부당한 방법으로 내가 더 많은 것을 성취하고, 그래서 인정받으려고 노력한다고 하면, 그것은 불의의 병기로 사용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 말씀은 우리 자신을 그런 잘못된 방식의 욕구를 위해서 따라 살지 말고, 어떻게 살라? 의의 무기로 우리 자신을 드리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는 말씀은 무슨 말씀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라고 하는 것이죠. 선한 일을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일을 하기 전에 우리 자신에게 물어봐야 되는 것이죠. 과연 이 일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 예수님이라고 한다면 이 순간에 어떻게 하실까? 이 일을 주님께서 기뻐하실까? 질문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나아가 엎드려야 되는 것이죠.

영적인 훈련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항상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입니다. 다윗은 전쟁을 하러 가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하나님 전쟁하러 가야 됩니까? 하지 말아야 됩니까? 자신이 지금 전쟁을 해야만 될 것 같은 상황 가운데서도, 다윗은 먼저 하나님의 뜻을 물었어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가라 하면 갖고 가지 말라고 하면, stop 하고 말았던 겁니다. 성전을 세우려고 하는 그런 욕심이 있었는데, 그 성전을 세울까요? 물어봤을 때 하나님께서 세우지 말라고 했을 때, 멈춰버린 거예요. 왜?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그것이 바로 믿음의 길이오. 의의 무기로 사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몸이 의의 무기나 불의의 무기로 사용될 수 있다고 하는 이야기는 그 중간지대가 없다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내가 의의 무기로 사용되지 않으면, 그냥 아무 데도 사용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이 있는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의 왕좌에 누가 앉느냐? 우리들의 마음의 왕좌에는 누군가는 앉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을 나의 마음에 모시면, 사탄이 앉지 못하는 것이고, 사탄이 우리들의 마음에 앉아버리면, 주님이 앉을 수가 없는 것이며, 우리들의 마음이 빈 마음으로 비어 있는 상태가 될 수가 없는 것이죠.

마치 컵에 물을 채우면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물이 들어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 물을 비우면 어떻게 되나요? 아무것도 안 들어있는 것인가요? 물을 비우는 그 순간에 무엇이 들어옵니까? 공기가 들어와 차지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주님이 떠나버리면, 우리들의 마음에 주님을 모시지 않으면,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탄이 우리들의 마음을 장악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불의의 무기로 사용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는 늘 주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는, 그런 의의 무기로 사용될 수 있기를 위해서, 기도하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될까요? 주님 우리들의 눈에 파수꾼을 세워 주옵소서! 우리가 보는 눈이 불의의 무기가 아니라, 의의 무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내가 바라보는 것이 부정적인 거, 바라보지 않게 해 주시고, 남의 잘못을 바라보지 않게 해 주시고, 나쁜 거 바라보지 않게 해 주시고, 사람을 볼 때, 이 눈이 선한 것을 보게 해 주옵소서. 장점을 보게 해 주시고, 긍정적인 것을 보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손을 위해서 기도한다고 한다면, 주님 파수꾼을 우리들의 손에 세워주셔서, 이 손으로 탐욕적이고 악한 일을 하는 데 사용되지 않게 하시고, 선한 일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일, 연약한 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일, 주님께서 원하시는 선하고 좋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주님 저희들의 손을 사용하여 주옵소서 기도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들의 발을 위해서 기도한다고 한다면, 우리들의 발이 죄악의 길로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선하고 의로운 길로 달려가게 해 주옵소서. 우리들의 귀가 불평의 소리, 나쁜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정말 선하고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들의 입이 사용될 때, 어떻게 사용돼야 돼요? 불평하고 비난하고 욕하는 데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칭찬하고 격려하고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매 순간순간마다 우리가 행동할 때마다, 한 번 멈추어 서서, 이것을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 생각하셔야 돼요. 내가 이 말을 하면, 주님께서 기뻐하실까를 생각하셔야 돼요. 이것이 감사의 말인가? 불평의 말인가? 원망의 말인가? 격려하는 말인가? 사람들을 무너뜨리는 말인가? 세우는 말인가? 우리들의 입술에 파수꾼을 세워달라고 기도하면서, 주님 앞에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왜 우리는 그렇게 해야 됩니까?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로마서 6장 14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 우리들은 어디에 있어요? 은혜 아래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고, 그 십자가의 보혈의 피로 인해서, 우리들의 죄를 다 씻겨주심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주님의 그 은혜 가운데, 그 은혜 아래 있는 자가 되었고,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예수님을 우리의 왕으로 모셨기 때문에, 우리는 악한 길이 아니라, 이제는 선하고 의로운, 의의 무기로 사용될 수 있기 위해서 날마다 날마다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전에 제가 미국에서 있었던 일인데요. 운전을 하고 가다가, 제가 운전을 잘 못한 것은 아닌데, 제 운전이 좀 거슬렸던 사람이 있었나 봐요. 그래서 제가 우체국 앞에 차를 세워놓고, 우체국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다른 차가 제 뒤에 딱 쓰더니만, 내려서 제 차를 어떤 백인 그 젊은 아이가 하나 내리더니만, 제 차를 발로 뻥 차고, 그리고 가버리는 거예요. 그 모습을 보고, 제가 기분이 좋았을까요? 나빴을까요? 기분이 되게 나빴어요. 그래서 그 순간에 제가 뭘 한 줄 압니까? 차 번호판이 뭔가 하고, 번호판을 외기 시작했어요. 왜 외기 시작했을까요? 복수를 언제 해야 되겠다! “저 번호판, 분명히 우리 동네 차량일 텐데, 저 번호판을 보면, 밤중에 가서 타이어 펑크를 내버려야지!”하는 그런 마음이 쏙쏙 솟아올라서, 번호판을 열심히 외다가, 그러다가 멈추었어요.

그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 아니더라고요.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고, 누군가 너의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편 뺨을 갖다 대라 하셨고, 아니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원수가 되었을 때, 주님께서 우리를 심판해 버리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우리 위에 내어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면, 이제는 불의의 병기로 우리의 몸이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악한 방법으로 우리들의 머리가 사용되고, 손이 사용되고 발이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역사하시는 대로,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대로 순종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그런데 그렇게 하기가 너무나도 힘들어요. 예배 시간에는 설교 들을 때에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 같다가도, 조금만 지나면 언제 들었냐는 듯이 우리는 늘 잊어버리고, 나에게 조금만 서운하게 해도, 나에게 조금만 나쁘게 해도, 내 마음을 확 닫아버리고 절대로 아는 척하지 않고 원수처럼 지내버리고, 악을 행하는, 불의의 무기로 내 마음과 내 손과 내 발을 사용할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님의 뜻에 따라, 우리의 몸이 의의 무기로 사용되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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